요한1,35-42 와서 보아라 새해 정초부터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지만, 전쟁과 이념 갈등이 커지고 우리 정치판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인의 피습사건은 증오와 양극화가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잘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의 해결은 보이지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니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쇄신을 부르짖으면서도 밥그릇 싸움이 여전한 것을 보면 희망이 절벽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믿는 이들은 더 좋은 세상을 희망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세상을 희망하면서 자기 몫을 다해야 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따르는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는 것이 요한의 진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 자기의 자리를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저의 삶이 이러니 여러분도 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2,15).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셨습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