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경 내가 열 살 무렵부터 우리 아버지께서는 동네 이장을 맡아하셨다.
동네 안에는 읽을 만한 책을 가진 집도 시계도 라디오도 몇 집 없었다.
날씨가 바깥 마당에 있어도 춥지 않을 만해 지면 라디오가 있는 집에서는 어두워지기 전 쯤 마당에 멍석을 몇 개 깔아놓는다.
저녁을 먹은 집에서 할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한두명씩 여기 모여들어 멍석위에 앉는다.
얼마 후 사람들이 꽤 모였다 싶으면 축대 위의 사랑방 마루위에 라디오를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게 틀어 놓았다!
얼마 뒤에는 정부에서 시골에도 널리 문화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유선방송을 장려하였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자세한 내용을 물어볼 어른들도 안 계시니 자세히는 알 수 없고, 어렸던 나의 기억에 의존하여 회상을 해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전국의 면 단위로 사업자를 선정하여 한 곳에 방송시설을 한다.
방송시설이라야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간단한 수준이다.
비교적 출력이 큰 라디오의 출력선을 빼 내어 다른 곳으로 소리를 송출할 수 있도록 만든 소형 캐비넷에 동력은 자동차 배터리
몇 개를 구입하여 동네마다 있는 방앗간 발동기 돌아가는 힘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소형 발전기에 연결하여 번갈아 충전을 시켜
사용하였다.
소위 ‘삐삐(PP)선’이라고 하는 군 야전통신선을 사방으로 늘여 각 동네로 보내고 각 동네에서는 또 각 가정으로 보내는 선을
연결하고 각 가정에서는 마루 기둥이나 안방 앞에 가로 세로 30cm정도의 사각 나무상자에 부착한 스피커를 단다.
스피커에는 소리를 크고 작게 돌리는 볼륨조절기 하나만 있고 채널을 선택하는 조절기는 없다.
방송을 내 보내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인데 그 구체적 시간은 기억을 못 한다.(06시~23시일 것으로 추측)
각 가정에서는 돈은 어차피 매달 정해진 양을 내는 것이므로 키고 끄고 할 필요가 없어서 사람이 집에 있건 없건 항상 틀어
놓는 집이 많다.
(사용료를 내는 방식은 평상 시 대부분 가정에 돈이 귀하기 때문에 가을에 곡식으로 내는 것이 보통이다.)
한곳에 방송 시설을 하고 선만 연결하고 여분의 배터리를 두고 충전하여 방송이 끊기지 않도록 교체만 해 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면 단위 사업자가 없어지고 각 마을 단위로 방송시설을 운영하여 가정의 부담도 더 낮추었다.
우리집은 아버지가 이장인데다가 마을조합 방앗간 바로 옆집이었기 때문에 우리집 건넌방에 이 방송 캐비넷을 갖다놓고
아버지께서 관리를 하셨다. 방앗간 일을 돕고 있던 사촌형이 가끔 와서 기기 손질을 하기도 했다.
가끔 방송에 출연하고 싶은 동네 재주꾼들이 우리 아버지께 얘기를 하면 아주 드물게 선별을 하여 별 들을 만한 방송 내용이
없는 시간을 골라 사촌형을 시켜 출연을 시켜 주기도 하였다.
공연 내용은 주로 퉁소, 하모니카, 시조창 같은 것이었다. 방송 후에는 즉시 여론이 형성되어 동네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출연자는 재출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번은 사촌형님이 나의 손위 누님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였다.
방송 송출이 끝나는 늦은 밤 친구들 몇 명을 모아오면 방송캐비넷 마이크에 노래를 할 때 캐비넷 옆에 있는 내부 스피커로만
소리가 나오도록 해 준다는 것이었다.
누님은 신나라 하고 친구들을 모아왔다.
우리집 방송시설이 있는 작은방에 빼곡하니 문화생활에 목타는 동네 방년의 아가씨들이 모였다가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던 육촌형의 사회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한시간 정도 돌려가며 마이크에 대고 웃고 떠들며 노래하고 즐겼다.
이것은 정말 시골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험으로 모두 즐거운 마음을 한 가슴 안고 돌아갔다.
다음 날, 그날 출연했던 임시 연예인들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푸짐하게 받았다.
무슨 소리냐 하면 방송 연출자이자 기기조작 등을 책임진 취프 스탭인 사촌형님의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 나가는 방송선을 뽑아 시험용으로 쓰는 내부 스피커선에만 연결해야 할 것을 잘못하여 내부 외부로 모두 방송이 나갔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해보라고 은근히 요청을 했지만 출연자들이 모두 부끄럼을 많이 타서 불발되었다.
반면 그 연예인 중 일원이었던 사촌누님은 머리 다 큰 계집애가 조신하지 못하고 나댄다고 큰어머니께 뒤지게 혼났다는 뒷 소식!
요즘은 TV 드라마 시청자가 주로 아줌마 부대가 많지만, 그 당시 채널 선택이 불가한 유선방송인 스피커는 별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이므로 남녀노소가 거의 모두 애청자 였다.
나는 아직 어려서 사랑타령 일색의 연속극은 별로 흥미가 없어서 별 기억에 없고, 연속극 시작과 끝에 나오는 주제가는 많이
들었다.
그 중에 제일 좋아해서 기억에 남는 연속극 주제가엔 두 개가 있는데, 제일 좋아했던 주제가는 ‘은하수 사랑’이었고
그 다음이 ‘먼데서 왔수다예’라는 노래였다.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나는 이 노래들을 여러 번 찾아보려고 시도를 했으나 찾지 못했다.
유튜브가 나오고서도 한동안은 그 생각을 못하다가 최근 유튜브에서 혹시나 하고 검색을 해봤다!
세상에! 내가 그렇게 찾고 싶어했던 그 두 노래는 누군가가 이미 4년 전에 올려 놓은 것이 있었다. 참 좋은 세상!
♠ 연속극 은하수 사랑
1960년대 중반 KBS 방송국의 밤 연속극이었다. 왜 KBS 방송국이라고 단언할 수 있느냐하면 당시는 국가시책을 무시할 수
없는 시골에서 유선방송으로 송출하는 방송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KBS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연속극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일제강점기 한 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있었는데, 그만 남자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고
만다. 일본에 탄광으로 가서 노역을 하는 동안 이 남자는 오직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서 몇 번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시
잡혀 고초를 겪으며 여러 해의 세월을 견뎠다.
중간에는 착하고 인물 좋은 이 남성을 일본여성이 좋아하여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고향에 두고온 약혼녀 때문에 다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병을 얻고 난 후 탈출에 성공하여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잡힐까봐 낮에는 외진 마을에서 일을 해 주고
밤에만 이동을 하여 항구에 도착하여 밀항을 한다.
부산까지 도착하는 것 까지는 어렵게 성공을 했지만 돈 한푼도 없는 이 남자는 병든 몸을 이끌고 먼 거리를 힘겹게 걸어간다.
고향 마을에 밤에 도착하여 자기 집 불빛을 바라보며 문턱을 넘지 못하고 쓰러져 숨을 거둔다.
한편 약혼녀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남자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기다렸으나 끝내는 남편이 될 남자의 시체만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연속극의 줄거리도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이 노래를 찾다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이 스토리는 노르웨이의 가곡 ‘솔베이지의 노래’와 각 시대에 맞는 상황만 다를 뿐 전체적인 구성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솔베이지는 기다리던 연인 페르귄트가 집안에 들어와 솔베이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숨을 거뒀다.
두 노래를 같이 한번 들어 보시길!
* 은하수 사랑 -이길남-
https://www.youtube.com/watch?v=4RmJSPxL0hk
* 솔베이지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P-6BIkAXWeo
가사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고 한다.
그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고
그 여름 또한 시들고 세월은 가네
그대 돌아와요 나의 그대여 나 기다려요
우리 약속했잖아요 그대 돌아와요 그대를 지켜 주세요...
마음을 다해 드리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리고 위에 소개한 다른 연속극 주제가 ‘먼데서 왔수다예’를 소개하는데 이 연속극의 자세한 이야기도 쓰면 너무 길어져
노래만 올린다!
두 노래 모두 지금 들어도 상당히 잘 만들어진 곡인데 어찌 두 가수의 이름은 낯이 설은지?
아마 크게 히트한 노래는 많지 않은 듯 싶다!
* 먼데서 왔수다예 -이상열-
https://www.youtube.com/watch?v=1cf-65JO8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