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와 마네의 우정과 갈등
마네와 에드가 드가가 처음 만난 건 1863년이었습니다. 드가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벨라스케스의 <마르그리트 공주>를 직접 구리판에 에칭으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마네는 자기보다 두 살 어린 그의 대담함에 적이 놀랐습니다. 드가가 처음 구상한 대로 모사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자 마네가 용기를 내어 조언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그 무렵에 만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경쟁심을 갖고 있었고 드가 쪽에서 마네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드가는 마네의 부르주아적 경향, 출세제일주의, 낙선전 덕분에 누리게 된 명성 등을 두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0217B3F4D15B4160C)
에드가 드가가 마네 부부의 한가로운 모습을 유화로 그린 것입니다. 마네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오른쪽 부분을 잘라버렸습니다. 드가는 그 부분에 캔버스 천을 부착하고 다시 그리려고 했지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잘려나간 부분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수잔의 옆모습이라서 마네가 아내에 대한 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잘라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 사람의 갈등이 비롯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868-69년에 드가가 마네와 수잔의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했습니다. 수잔은 거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마네는 소파에 몸을 길게 누이고 아내의 연주를 듣는 장면이었습니다. 드가의 선물에 대한 답례로 마네는 <자두 La Prune>를 선사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2E2D3E4D15B43706)
마네의 <자두 La Prune>, 1877, 유화, 74-49cm.
1870년대 마네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고, 1877년부터 다시금 파리의 시민생활에서 모티프를 구했습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naturalism 주제의 작품입니다. 사실주의에서 진전된 자연주의의 창시자는 소설가 에밀 졸라였습니다. 자연주의의 기본 정신은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는 사고방식입니다. 문인과 화가는 과학자처럼 인간의 생태를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자연현상으로 보는 인간은 당연히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강력하게 지배되는 것으로 모사됩니다. 자연주의는 주관주의subjectivism나 상상적 초월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에 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모두 대상을 보다 정확하고 완전하며 진지한 묘사를 그 기본 의의로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회화에서 자연주의는 쿠르베로 대표되는 사실주의에 상응하는 말로 마네의 작품을 사실주의로 규정할 수 없어 자연주의로 분류되었습니다. 드가가 술집에 앉아 있는 매춘부를 <압생트>란 제목으로 그린 그림에서 마네가 영향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09CA444D15B4642A)
에드가 드가의 <압생트 Absinthe> 부분, 1876, 유화, 93.35-67.95cm.
<자두>의 배경은 카페처럼 보이지만 마네의 화실로서 그가 연출한 것입니다. 모델은 엘렌 앙드레로 2년 전 드가의 <압생트>에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금발의 여배우 앙드레는 화가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마네는 그녀에게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약간 술기가 오른 여인의 역할을 부탁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자두>인 이유는 작품의 구성상 자두술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델은 전혀 술꾼처럼 보이지 않으며 마네가 강조한 부분은 오히려 모델의 장밋빛 피부와 드레스였습니다.
마네가 드가로부터 받은 초상화를 훼손했을 때 화상 볼라르가 놀라서 드가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이 그림을 망쳐놓았습니까?”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마네가 그랬습니다! 자기 마누라 그림이 실물만 못하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마네의 화실에서 저 그림꼴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 당장 그것을 집어 들고 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집에 와서 마네가 준 그림을 당장 벽에서 내려 꼬리표를 달아 돌려보냈습니다. ‘선생, 당신이 그린 <자두>는 돌려주겠소.’”
“그 후 마네와 화해하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네와 불편한 관계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헌데 <자두>는 이미 다른 데다 팔았더군요.”
내성적이며 지적이고 고고한 데가 있는 드가에 비하면 마네는 평론가의 칭찬에 민감하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저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재능과 명성에 자부심이 대단한 마네를 비꼰 드가의 말처럼 마네는 이미 파리에 널리 알려진 화가였습니다. 여류화가 베르테 모리소Berthe Morisot(1841-95)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갈라놓을 수 없는 한 쌍이었습니다. 드가는 마네에게 직접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마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마네가 사망한 후 드가가 그의 작품을 많이 사들인 데서 이런 점을 알 수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2383454D15B48F0E)
사진: 에두아르 마네
당시 유명했던 사진작가 나다르Nadar(1820-1910)가 찍은 것입니다. 나다르는 보들레르, 바그너 등 유명인사들의 초상사진을 찍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858년에 ‘재앙’으로 명명된 열기구를 타고 세계 최초의 공중촬영을 한 사람이기도 하며, 1860년에 휴대용 발광장치로 사진 촬영에 전기 조명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렉스 투르나숑Gaspard Félix Tournachon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1A41444D15B4B015)
사진: 에두아르 마네
당시 유명했던 사진작가 나다르Nadar(1820-1910)가 찍은 것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A42464D15B59F39)
에드가 드가의 <마네의 초상 Portrait of Manet>, 1867, 종이에 드로잉
![](https://t1.daumcdn.net/cfile/blog/130521464D15B4CF03)
에드가 드가의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을 위한 습작 Study for a Portrait of Edouard Manet>, 1865-70, 드로잉, 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