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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심판의 날
습 1:7-18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습 1:7-18 / [여호와의 날이 온다] 너희는 잠잠하여라! 여호와께서 오신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날이 가까이 왔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모조리 살육할 큰 희생제사를 준비하셨고, 이 일을 집행할 유다의 적들을 이미 손님으로 초대하셨다. 8) `유다 백성을 희생의 제물로 살육하는 여호와의 날이 오면, 내가 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왕가의 후손들을 징벌하고, 이방의 풍속에 빠져서 남의 나라에서 유행하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들을 모조리 처벌하겠다. 9) 또 그날이 오면, 문턱을 밟지 말라는 이방 풍속을 지키느라고 지극히 정성스럽게 문턱들을 넘어 다니면서도, 상전들의 집 문턱이 달도록 드나들면서 폭력과 사기로 탈취한 재물을 쌓아주는 자들을 내가 모조리 처치하겠다.' 10)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날이 오면 물고기문에서 전쟁의 함성이, 성안의 신설 구역에서는 슬피 울부짖는 소리가, 시내의 모든 언덕에서는 비명 소리가 드높게 울려날 것이다. 11) ㄷ) 성안 낮은 곳에 살면서 장사하는 자들아, 너희는 슬피 울고 탄식하여라! 장사하는 무리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항상 돈을 주무르며 탐욕을 부리던 자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ㄷ. 또는 `막데스 거민들아') 12)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그때가 되면 내가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을 구석구석 뒤져서, 걱정 없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사람들, 자기들의 온갖 죄악에 인이 박혀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선한 일도 하지 않고 악한 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처치하겠다. 13) 그때에 그들의 재산은 약탈을 당하고 그들의 집은 모두 잿더미가 될 것이다. 그들이 새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새 포도원을 만들어도 거기서 나는 포도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할 것이다.' 14) [여호와의 날] 그 무서운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 가까이 오고 또 매우 빠르게 다가온다. ㄱ) 여호와의 날은 경주자보다도 더 빠르게 오고, 어떤 용사보다도 더 신속하게 온다. (ㄱ. 또는 `여호와의 날에 용사마저도 그 살육을 당하는 곳에서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소리를 들어 보라') 15) 그날은 여호와의 분노가 폭발하여 넘치는 날이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날이요, 부서지고 무너지는 날이요, 어둡고 어두워 칠흑같이 캄캄한 날이요, 짙고 짙은 먹구름이 뒤덮인 날이요, 16) 절벽 위에 앉은 성읍들과 드높은 방어탑들을 향해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전쟁의 아우성이 가득 찬 날이다. 17)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어 모두 소경처럼 더듬거릴 것이다. 그들이 적의를 품고 여호와께 반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피가 흙탕물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들의 내장이 노폐물처럼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18) 여호와의 분노가 폭발하여 넘치는 날에는 그들의 은도 그들을 살릴 수가 없고 그들의 금도 그들의 목숨을 건질 수가 없다. 그때에는 온 땅이 그분의 질투하시는 분노의 불꽃 속에서 사그러질 것이다. 그분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순식간에 멸망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종교영역에만 제한되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공의와 정의의 법에 근거합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죄가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7-13) 율법에서 설명하는 제사제도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물은 사람이 준비해서 자신의 죄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제물을 준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스바냐는 제물이 되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들의 악행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선포합니다. 권력자들은 선민으로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버리고 이방인의 옷을 입고 이방인의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방인의 풍습이 가득 차게 했습니다. 또한 이들과 함께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집에 채운 자들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 전역에서 나타나는 '부르짖는 소리', '울음소리', '무너지는 소리'라고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혹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자들은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등불로 두루 다니며 숨은 자들을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잠잠할 수밖에 없는 것은 유다의 불의가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14-18)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날이 갖는 성격이 다양한 이미지로 설명됩니다. 그 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백성들이 만나게 되는 비참한 운명을 선포합니다. 그날은 용사마저도 심히 슬피 울 정도의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16). 이 날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바냐의 예언처럼 유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해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심판의 혹독함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은혜를 저버린 유다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줍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드려지고 있습니까?
"달걀을 깨지 않으면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라는 말은 원래 프랑스어의 "On ne saurait faire une omelette sans casser des oeufs"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혹은 응당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어떠한 소원도 달성할 수 없다는 교훈으로, 노력 없이 대가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금언입니다(살후 3:8; 전 3:10).
< 설 교 >
희생시키기보다 희생하라
스바냐 1장 7-9절 / 이한규 목사
< 거룩한 희생양이 되라 >
왜 하나님은 심판을 목전에 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희생을 준비하고 희생양이 될 사람들을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심판의 날’은 ‘희생양이 드려지는 날’이다(8절). 그날에 하나님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강압과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집과 권력자의 집과 하나님의 집을 채운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벌하겠다고 하셨다(9절).
요새도 악한 종교 리더들은 미혹과 거짓으로 양떼를 헐벗게 하고 자기재산과 교회재산을 불리지만 선한 리더들은 스스로 희생하면서 자기 것을 나누려고 최선을 다한다. 남을 희생시키면 성공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대개 그 성공이 잠깐의 성공으로 끝난다. 그러나 스스로 희생양이 되면 오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바른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물은 ‘자기 자신’이다.
요새 우리 경제가 큰 위기다. 그래도 왠지 한국인의 저력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크게 쓰실 것이란 믿음은 변함없다. 그런 쓰임 받는 나라가 되도록 희생시키는 문화를 청산하고 희생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리더와 권력자가 희생을 선도하면 그 공동체가 매우 복된 공동체가 된다. 지나친 이상주의 같지만 우리 민족은 이미 그런 전통이 있다.
< 희생하는 문화를 만들라 >
전 세계에서 거의 유례없이 오래 지속된 왕조가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이씨 왕조’다. ‘이씨 왕조’는 1392년 개국 이래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9년간 세계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다. 한 국가가 그 이상 지속된 경우는 있어도 한 왕조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예는 거의 없다. 그 기간에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났지만 그때 신하들이 새 왕으로 내세운 사람은 쿠데타를 주도한 ‘다른 성씨’나 ‘다른 이씨’가 아니라 왕족 혈통의 ‘이씨’였기에 ‘이씨 왕조’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이씨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씨 왕조’가 집안 단속을 잘하고 ‘왕도정치’의 규범에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이씨 왕조’는 왕자와 왕손과 왕의 증손까지 벼슬길을 막았기에 왕손이나 왕의 증손들은 왕가란 명예만 있을 뿐 초가집에 살며 끼니를 걱정할 때도 많았다. 그 왕손들 중에는 학문이 탁월한 사람도 많았지만 왕손이란 이유로 과거도 보지 못했다. 왕의 주도로 왕손들의 벼슬길을 철저히 막은 이유는 왕가가 희생해야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손들은 선왕들이 내세운 ‘왕도정치’의 규범에 충실히 따랐기에 그들의 희생은 큰 희생으로 미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전통이 확립되었다. 그런 희생정신으로 집안 단속을 철저히 했기에 ‘이씨 왕조’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반면에 지구촌의 많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 친인척 비리가 밝혀지면 그 비리의 범위가 구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기가 힘들다.
지금 경제는 어렵지만 앞으로 ‘한국의 때’를 예상하는 미래학자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현대사 최고의 이념 격전지로서 6.25전쟁의 고난을 통해 최고의 삶의 노하우를 배양한 나라다. 또한 정보화시대에 다양한 정보를 보유하기에 빠르고 편한 세계 최대의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고 고학력의 인력도 많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찬란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세계를 품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한 점이다. 지금 여러 종류의 갈등이 곳곳에서 표출되는데 그 갈등들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희생시키려는 태도’는 크고 ‘희생하려는 태도’는 작은 것이다. 진정으로 세계 주역국가가 되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반전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희생정신’이다.
< 거룩한 희생양이 되라 >
왜 하나님은 심판을 목전에 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희생을 준비하고 희생양이 될 사람들을 구별하셨기 때문이다. ‘심판의 날’은 ‘희생양이 드려지는 날’이다(8절). 그날에 하나님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강압과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집과 권력자의 집과 하나님의 집을 채운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벌하겠다고 하셨다(9절).
요새도 악한 종교 리더들은 미혹과 거짓으로 양떼를 헐벗게 하고 자기재산과 교회재산을 불리지만 선한 리더들은 스스로 희생하면서 자기 것을 나누려고 최선을 다한다. 남을 희생시키면 성공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대개 그 성공이 잠깐의 성공으로 끝난다. 그러나 스스로 희생양이 되면 오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바른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물은 ‘자기 자신’이다.
요새 우리 경제가 큰 위기다. 그래도 왠지 한국인의 저력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크게 쓰실 것이란 믿음은 변함없다. 그런 쓰임 받는 나라가 되도록 희생시키는 문화를 청산하고 희생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리더와 권력자가 희생을 선도하면 그 공동체가 매우 복된 공동체가 된다. 지나친 이상주의 같지만 우리 민족은 이미 그런 전통이 있다.
< 희생하는 문화를 만들라 >
전 세계에서 거의 유례없이 오래 지속된 왕조가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이씨 왕조’다. ‘이씨 왕조’는 1392년 개국 이래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9년간 세계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다. 한 국가가 그 이상 지속된 경우는 있어도 한 왕조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예는 거의 없다. 그 기간에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났지만 그때 신하들이 새 왕으로 내세운 사람은 쿠데타를 주도한 ‘다른 성씨’나 ‘다른 이씨’가 아니라 왕족 혈통의 ‘이씨’였기에 ‘이씨 왕조’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이씨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씨 왕조’가 집안 단속을 잘하고 ‘왕도정치’의 규범에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이씨 왕조’는 왕자와 왕손과 왕의 증손까지 벼슬길을 막았기에 왕손이나 왕의 증손들은 왕가란 명예만 있을 뿐 초가집에 살며 끼니를 걱정할 때도 많았다. 그 왕손들 중에는 학문이 탁월한 사람도 많았지만 왕손이란 이유로 과거도 보지 못했다. 왕의 주도로 왕손들의 벼슬길을 철저히 막은 이유는 왕가가 희생해야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손들은 선왕들이 내세운 ‘왕도정치’의 규범에 충실히 따랐기에 그들의 희생은 큰 희생으로 미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전통이 확립되었다. 그런 희생정신으로 집안 단속을 철저히 했기에 ‘이씨 왕조’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반면에 지구촌의 많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 친인척 비리가 밝혀지면 그 비리의 범위가 구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기가 힘들다.
지금 경제는 어렵지만 앞으로 ‘한국의 때’를 예상하는 미래학자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현대사 최고의 이념 격전지로서 6.25전쟁의 고난을 통해 최고의 삶의 노하우를 배양한 나라다. 또한 정보화시대에 다양한 정보를 보유하기에 빠르고 편한 세계 최대의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고 고학력의 인력도 많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찬란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세계를 품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한 점이다. 지금 여러 종류의 갈등이 곳곳에서 표출되는데 그 갈등들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희생시키려는 태도’는 크고 ‘희생하려는 태도’는 작은 것이다. 진정으로 세계 주역국가가 되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반전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희생정신’이다.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스바냐 1장 7-9절 / 이한규 목사
<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
예전에 한 초대형 교회 목사를 그 밑에서 섬기던 몇 백 명의 장로들이 고소했다. 외형적인 숫자 및 힘이 허무해지는 모습이다. 힘이 있을 때 휘두른 칼이 나중에 되돌아와 자신을 찌를 때 회한이 많을 것이다. 소수의 길을 갔던 프랜시스가 대 권력을 가진 교황보다 더 행복하고 더 이름을 떨치고 더 선한 영향력을 후세에 남기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 희생시키는 카리스마 리더십은 유한하지만 희생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은 무한하다.
요즘도 외적인 성장을 무리하게 추구하는 초대형 교회들이 있다. 작은 교회가 바르게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 및 생존과 관련해서 필요한 일이지만 초대형 교회의 무리한 교회 성장 추구는 복된 일이 되기보다는 수많은 불행의 예고편이 될 때가 많다. 교계에 외적인 성장을 위한 수많은 세미나와 프로그램들이 성행하는 것이 복된 모습만은 아니다.
교회 내의 셀 체계도 교회의 공룡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가 많다. 교회가 커지면 셀이란 조직을 무수히 만들어서 거대한 공동체를 유지시키려고 하기보다 깨끗하게 분립교회들을 개척해 내보내는 것이 더 낫다. 교회를 분립시키면 교회의 외형과 지경이 축소되니까 셀 체계를 만들어서 약간의 독립적은 활동은 보장하되 그 셀들을 전체로 묶어 큰 공동체를 유지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셀 체계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거대한 유형 교회를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활용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교회가 너무 공룡화되어도 안 되고 그런 공룡화의 방편으로 만들어진 세미나나 프로그램을 너무 무분별하게 추종해도 안 된다. 교회가 적절하게 커지면 기쁘게 분립 교회를 많이 개척해 내보내서 한 명의 인간 리더에게 너무 큰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대형교회들은 자발적인 슬림화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 왜 그런 사례가 많지 않은가? 큰 건물을 짓고 흩어지기를 면하자는 오래 전의 바벨탑 근성이 그만큼 뿌리 깊고 사람이 명예욕과 권력욕과 물질욕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다.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은 ‘희생하는 리더십’이지 ‘희생시키는 리더십’이 아니다. 평생을 따를 리더를 찾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희생하는 리더십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희생하는 리더십을 가지기 힘들기에 완벽한 인간 리더를 찾을 수는 없다. 다만 전체적인 리더십 스타일이 어떤 스타일인지 정도는 대략 파악하고 리더를 선택해야 나중에 눈물짓는 일이 없다.
리더의 카리스마를 너무 좋아하지 말라. 그런 카리스마에 휘둘리다가 누군가의 이용도구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그때 그런 희생시키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에게 반발해보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많이 늦다. 그래서 나중에 회한에 빠진 성도가 많다. 요즘 부쩍 그런 성도들의 하소연이 많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외형주의와 군중 속에 함몰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교회가 교회 밖의 공격과 더불어 교회 내부 문제로도 많이 진통하고 있다. 그 외적인 공격과 내적인 진통을 자세히 보면 거의 대부분이 교회 외형주의의 후유증들이다.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비판은 교회가 희생을 모른다는 비판이다. 그 비판에 대해 성도들은 깊은 찔림을 느껴야 한다.
요새 선교 사역의 현실이 매우 힘든 상황이다. 나눔은 선교 사역에 임하는 사역자의 생존 문제까지 좌우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소중한 선교 사역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빠듯하게 시작했기에 사역을 진행시킬 때 계속 긴급한 필요들이 생겨난다. 그런 기도 제목이 생겨도 선교 후원이 약해지면서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현실이다. 그런 문제의 안정적 해결을 위해 누군가의 큰 후원도 필요하지만 나 한 사람의 작은 희생적인 나눔도 매우 요긴하다.
‘희생시키는 카리스마 리더십’을 추구하는 사회와 영혼은 미래가 없지만 ‘희생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추구하는 사회와 영혼은 미래가 있다. 한국교회에 희생하는 리더가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무엇보다 나부터 남의 희생만 바라지 말고 먼저 희생하는 희생양이 되기를 힘쓰라. 그러면 심판이 목전에 있고 고난 중에 있어도 그 희생을 보고 하나님이 극적인 상황 반전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이다. 늘 성경적인 복된 리더십을 추구하고 그런 희생적인 삶을 나부터 힘써 실천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라.
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
스바냐 1:7-13 / 피영민 목사
서 론
스바냐 선지자는 그 기원이 왕족입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습 1:1). 손자가 여러 명 있는데 현손은 몇 대손입니까? 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증손자이고 증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고손자이고 고손자가 아들 낳으면 현손자입니다. 즉, 현손은 4대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4대손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는데 족보가 두 종류로 갈라집니다. 히스기야의 후손 가운데 왕이 된 사람과 왕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되는데 왕이 된 사람들의 족보는 악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아몬 그리고 선한 왕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왕이 되지 않은 족보는 아마랴, 그다랴, 구시, 스바냐인 것입니다. 스바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숨겨 놓으신 자’입니다. 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스바냐 1장 10절에 보면 그는 어문, 제이구역, 작은 산 등 정확한 지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스바냐 1장 8절을 보니까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고 귀족들과 양반들과 관리들의 의복 규정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대의 왕은 스바냐 1장 1절에 정확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유다 역사 최후의 종교 개혁가였고 구약시대의 칼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8살에 왕이 되어서 31년을 통치하다가 39살에 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20살에 시작하여 6년 동안 우상을 타파했습니다. 그리고 26살에 성전을 수리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명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시야 왕은 신명기를 읽다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어려움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베옷을 입고 온 백성들과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후 요시야 왕은 유다 역사상 가장 크고 성대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타파 둘째, 성전 수리 셋째, 언약갱신 넷째, 유월절 준수입니다. 이 네 가지가 요시야 왕 31년 통치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스바냐 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유다 백성들은 스바냐가 예언할 당시 세 가지 종류의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습 1:4-5). 첫째, 그들은 바알을 숭배하였는데 바알은 아세라 목상과 함께 음란한 제사를 드림으로 농업의 번성을 추구하던 종교였습니다. 둘째, 스바냐 1장 5절 전반부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겼다고 나와있습니다. 해, 달, 별 등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신명기 4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체를 숭배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신 4:1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셋째, 스바냐 1장 5절 후반부에 보면 말감이라고도 하고 밀곰이라고도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솔로몬 왕 시대에 암몬에서 들어온 첩들이 말감이라는 신을 갖고 들어와 유다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이 우상숭배를 위해 그마림이라고 불리는 돌팔이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원래 유다의 제사장들은 레위지파 가운데 아론의 후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마림은 그런 합법성이 없는 불법적인 제사장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20살 되던 해부터 우상타파를 시작했기 때문에 스바냐 선지자는 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로 인해 요시야 왕은 자극을 받고 종교개혁과 우상타파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단어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하실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4-15).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사람들에게 환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그가 예언한지 불과 40여년 만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이같이 역사적인 실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날이 옛날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것만 의미한다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항상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차적인 의미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이뤄질 온 인류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공의로 심판할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시고 심판주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할 때 예수님께서 공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심판은 가끔 공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권력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누구의 죄가 크냐는 것보다 누구의 변호사가 더 실력이 좋으냐가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재판이 그렇지는 않지만 이처럼 공의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은 완전한 공의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지나간 유다 역사에 실현된 여호와의 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실현될 여호와의 날은 모든 사람에게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Ⅰ.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이다
스바냐 1장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징역 10년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면 10년 동안 감옥에 있다 나오면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이렇게 형량을 채우고 나면 똑같은 죄목으로 다시 감옥에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10년 징역 선고를 받아야 할 자가 판사에게 뇌물을 줘서 무죄로 나왔거나 형량이 줄어들었다면 그것은 공의가 100% 만족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국가가 그 사람을 공의롭게 재판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결국 개인적인 복수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이가 100% 만족될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입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습 1:7-8). 희생이라는 단어가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된 유일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희생제사가 시작됩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사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모세가 레위기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다섯 가지로 법제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희생제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특징입니다. 옛날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것이 마귀에게 죗값을 갚으려고 한 것이라는 엉터리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희생제사는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열납된다는 특징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결국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그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실현됩니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희생제사는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고 죽으시는 것이 실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만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을 위해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성령님께서는 택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사 죄 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희생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데 그날은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말이냐? 그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70년 포로생활을 해야 공의가 만족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지만 최후 심판의 날 하나님을 거역한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스바냐 1장 14절에 70년 포로생활에도 용사가 심히 애곡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절망으로 애곡합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 1:7). 요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개’자를 붙여 욕합니다. 만약 옆집 아저씨에게 ‘개’자를 붙여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해보십시오. 아마도 몇 대는 틀림없이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욕하고 대적하면 몇 대 얻어터지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48-49). 지옥에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형벌이 10~20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됩니다. 영원히 타는 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Ⅱ.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요엘 등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그들의 경고를 거부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다고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B.C. 587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최후 심판의 날에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습 1:12).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다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찌끼같이 가라앉아있고 바퀴벌레같이 숨어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아무도 숨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습 1:18). 여호와의 날에는 불신자들이 멸절됩니다. 완전히 멸절시키는 도구가 베드로후서에 불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다시는 물로 망하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물보다 더 무서운 불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불로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하나님의 질투는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울 때 질투하는 것과 같은 분노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반드시 피해자가 요구하는 공의가 만족되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Ⅲ.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스바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1-3). 스바냐 2장 1~3절은 중요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2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전’이입니다. 시행되기 전, 지나가기 전, 임하기 전, 이르기 전.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세 가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공의를 찾으라. 히브리어로 ‘쩨다카’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서 받아주실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 교만은 하나님이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둬가시면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 론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찾고 겸손을 찾으면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거나 연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면 죄가 아무리 많아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덮어 심판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죄가 많은 죄인입니다.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왜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느냐? 그것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다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의로운 척하면 안되겠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담배를 피다가 부흥회에 참석하여 방언 받고 성령의 불을 받아 담배를 끊게 되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갑자기 담배 피는 사람들과는 신앙생활을 함께 못하겠다고 하면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정죄했다고 합니다. 은혜 받고 의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지만 그것으로 인해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는 의롭고 남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제사로 100% 만족되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십시오.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렸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숨겨주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자’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작은 스바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다 덮어주시고 우리를 피난처에 숨겨주시며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같이 놀라운 복을 받았으므로 우리 가족들 중에 영원한 형벌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까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전도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께 숨김 받은 사람이 된 것을 평생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도 지게미에 앉아”(Sitting on the Lees)
스바냐 1:12-18 / 김영봉 목사
얼마 전,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Muammar Gaddafi)가 반군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그가 살해당하는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인터넷에 올라 있습니다. 1969년부터 무려 42년 동안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사람의 종말로는 너무도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비디오를 보았습니다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절대 권력이 얼마나 초라하게 종말을 맞는지를 목격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 동안 가다피가 저지른 잔인무도한 일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 끝난 것도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짐승을 잡듯 가다피를 에워싸고 그의 몸을 치고 차고 찢는 군중들의 모습은 결코 ‘정의’의 얼굴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 같은 사건을 보고 우리는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로잡히게 되어 있다)이라고도 하고 ‘인과응보’(因果應報, 어떤 일이든 결국 마땅한 보응을 받게 되어 있다)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정의는 살아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우주 질서에 무엇인가 있어서 잘못된 일은 결국 바로잡히고, 악은 징벌을 받고 선은 보상을 받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자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있지만, 정반대 증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당장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백주 대낮에 활개를 치며 다니는 것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가다피가 결국 정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동안 그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잔인무도함에 떨며 숨죽여 살던 사람들에게 42년은 너무도 긴 시간입니다. 아마도, ‘과연 정의는 살아있는가?’ 혹은 ‘과연 신은 살아 계신가?’라는 의문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천복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할 줄 모르고, 모든 것을 다 자신의 짐을 받아 안으며, 주장하고 싸우기보다는 양보하고 희생하는 편을 택하고, 자신의 본분을 찾아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큰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가끔, ‘이 각박한 세상에서 저렇게 선한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 반대가 더 많습니다. 당연히 정의의 보상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동일한 혼란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번영 설교자들’(prosperity preachers)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믿음 좋은 사람들은 모두 건강해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하며 만사형통해야 합니다. 시험공부 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얻을 것이며, 누구와 경쟁을 하든 이길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디 실상이 그렇습니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이 그 믿음 때문에 만사형통하며 살고 있습니까? 믿음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렵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희생하며 배신당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살아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일상사에 과연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과연 필요할 때마다 개입하실 뜻과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 왕국 유다의 운명이 점차 기울어가고 있을 때, 스바냐라는 예언자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내리십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 (4절)
그 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 (12절)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일상생활 중에는 온갖 악하고 부정한 일을 행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를 드리고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으면서도, 성전 바깥에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성전에 십일조는 바쳤지만, 나머지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사치를 부렸습니다. 거룩한 몸짓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어두운 뒷방에서는 음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중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모든 죄악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
현실에서 목격하게 되는 두 가지 증거, 즉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정의는 살아있다는 증거와 하나님은 계시지 않거나 계신다 해도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 이 두 증거를 보고 유다 백성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만 이 세상일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시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누구든지, 처음에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시다가 잘 못하면 회초리를 내려치시고 잘 하면 상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번번이 확인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꽤 큰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을 줄로 생각했는데, 아무런 벌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생각으로는 꽤 큰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기 쉽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실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이라고 부릅니다. ‘무신론’(atheism)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반면, ‘실제적 무신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일에 관심도 없고 개입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바냐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습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는 그냥 무신론자보다 더 위험하고 또한 더 위선적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는 온갖 탐욕을 불태우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을 합니다. 그 위선은 보는 사람을 역겹게 만듭니다. 무신론자는 회심하면 진실한 신자로 변화될 희망이 있습니다. 반면, 실제적 무신론자는 회심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신론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실제적 무신론자들을 가리켜 12절은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번역은 원문의 의미에서 약간 벗어나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포도 지게미(lees)에 오래 앉아 있는 인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 빗댄 비유입니다. 포도를 으깨어 통에 넣고 이스트를 첨가하여 발효를 시킵니다. 그런 다음, 약 20여일이 지나서 액체를 쏟으면 그것이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를 쏟아내고 남겨진 것을 ‘지게미’라고 합니다. 그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립니다. 쏟아낸 포도주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일 주일마다 한 번씩 침전물을 걸러 주어야 합니다. 만일 포도 지게미에 포도주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곰팡이가 생겨서 다 망쳐 버립니다.
절묘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간사에 관심도 없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치 포도 지게미에 오랫동안 방치해둔 포도주처럼 죄악에 눌러앉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있으며, 언제라도 필요하다면 손을 뻗어 징벌도 하시고 보상도 하신다고 믿는다면, 죄악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스바냐 시절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되 그분을 사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삶이 죄악에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삼위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을 초월하여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그분은 나를 아시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머리카락의 수까지 헤아리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나의 모든 삶이 하늘의 CC TV를 통해 기록되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마침내 그분 앞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해 낱낱이 결산할 날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스바냐 시절의 유다 백성처럼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처럼 우리도 혹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요즈음의 교인들을 가리켜 ‘종교 소비자’(religious consumer)라고 부릅니다. 쇼핑하듯이 교회 다닌다는 것입니다. ‘쇼핑하듯 교회 다니는 것’과 '교회 쇼핑'(church shopping)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이 중요한 만큼 어떤 교회를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교회를 다녀 보고 자신에게 가장 맞는 교회를 찾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를 정한 다음에도 여전히 쇼핑하듯 교회에 다니면 ‘종교 소비자’가 됩니다. 월마트나 타겟에서 값싸고 좋은 물건 고르듯, 교회에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취하려는 사람들이 종교 소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좋은 상품을 찾기 위해서 늘 옮겨 다닙니다. 월마트에서 케마트로, 케마트에서 지마트로, 지마트에서 이마트로, 이마트에서 저마트로!
종교 소비자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찾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 삶에 관여하신다고 믿는다면, 교회에 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몸을 위해서 내가 드릴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내가 희생할 일은 무엇인지를 찾을 것입니다. ‘종교 소비자’에서 ‘종교 생산자’(religious producer)로 혹은 ‘종교 유통자’(religious distributor)로 변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교회 바깥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어떻게 행동 하느냐도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교회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이 부정한 이득을 보려고 손님을 속인다면, 그는 속으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한다고 하면서 연약한 아내 혹은 자녀에게 폭행을 가한다면, 그 사람도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시 돋친 말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질식시킨다면, 그 사람도 역시 하나님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배우자를 속이는 부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때로 목회자들의 숨겨진 부정이 드러납니다. 거룩한 외양을 쓰고 돈이나 섹스로 부정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그 같은 부정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 우리는 경악합니다. 어떻게 그토록 부정한 일을 행하면서 주일마다 거룩한 강단에서 예배를 이끌고 설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처음 부정을 저질렀을 때는, 설교하다가 강단에서 벼락 맞아 죽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아하, 내가 믿는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구나!”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서 유다 백성의 실제적 무신론이 만들어낸 타락하고 부패하고 오염된 삶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종이호랑이처럼 생각하고 죄악에 뭉개고 앉아 살던 그들에게 경고합니다. 병풍에 그려져 있는 호랑이가 어느 날 진짜 호랑이가 되어 ‘어흥!’하고 튀어 나오는 것처럼, 그들이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하나님께서 어느 날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포도 지게미에 너무 오래 내버려 둔 포도주를 쓸 수 없어서 통째 내다 버리는 것처럼, 죄악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던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회개하고 죄악에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빈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서기에 너무도 누리는 것이 많았고, 너무도 지은 죄가 많았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기에는 죄악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 달콤한 죄악의 맛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두려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만,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고, 스바냐가 예언을 했던 시대로부터 약 50년 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 안타까운 역사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실제적 무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저와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지 유다 백성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는 실제적 무신론자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좋은 신자의 허울을 쓰고 실제로는 죄악을 일삼는 자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마주할 운명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포도 지게미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발효된 포도주를 쏟아내듯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래 전, 아삽이라는 이름의 히브리 시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실제적 무신론에 빠질 뻔 했던 경험을 시로 적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시 73:1-2)
아삽에 의하면,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는커녕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4절) 흐릅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고통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을 비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7절)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8절) 즐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들에게 물들어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11절)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독하며 악을 일삼는데도, 그들은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12절) 갑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아삽도 역시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13절은 아삽의 마음을 흔들고 있던 생각을 잘 묘사해 줍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그렇게,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뻔했던 위기를 아삽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그 해답은 17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삽이 영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성소에 들어가 잠시 현실에서 눈을 떼었을 때입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떴습니다. 우리에게 예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물질을 만지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하루만 방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눈에 비늘이 덮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에 귀지가 낍니다. 예배는 아삽처럼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발걸음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주일 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매일같이 하나님과 독대하는 영적 생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속회로 모여 영적 사귐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보다 계시지 않다는 증거가 더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도, 무심하다는 증거도, 혹은 무력하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복을 주시고 악행에 대해 벌을 내리시기를, ‘즉각즉각’ 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요? 우리 마음에 자유 의지가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마치 가다피 아래에서 백성들이 살얼음판을 걷듯 혹은 지뢰밭을 걷듯 살았던 것처럼, 언제든지 실수하여 불 심판을 받을 가능성 때문에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살 것입니다. 죄악을 범하는 회수는 줄어들겠지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자유 의지를 제거한다면, 우리는 로봇이나 절대 복종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자유 의지를 제거하여 로봇이나 노예로 만들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즉시즉시 벌을 내려 공포에 질리게 하기를 원치도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선과 악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스스로 선을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을 제공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 자원을 잘 활용하여 선을 선택하면서도 기쁘고 즐겁게 사는 존재로 자라가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와 성장을 기다리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자원을 거부하고 제 욕심대로 악을 택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부드러운 음성과 손길로 그가 죄악으로부터 돌아서도록 부르시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사람의 악행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예언자 요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 (2:13)
이 대목에서 이렇게 묻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들이 돌아서기까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악행과 파괴와 살해는 어떻게 합니까? 그것으로 인해 선한 사람들이 받는 피해는 또 어찌합니까? 영영 돌아서지 않는 악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적어도 두 가지의 대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과 함께 당신의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들입니다. 교회로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깊어져만 가는 죄악의 현실을 보고 “왜?”라고 묻기를 멈추고 “어떻게?”를 물어야 합니다. 이 땅에 선을 북돋우고 악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를 묻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을 그분의 신비로운 손길로 바로잡으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바울 사도가 한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니다. 인간의 악행으로 인해 깨어진 유리조각을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만들어 내십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옷감을 사용하여 멋진 퀼트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사필귀정’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인과응보’도 진리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결국 갚아 주십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스스로 깨닫고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도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만들어진 폐허도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소를 찾기에 더욱 열심을 내십시다. 전심으로 예배에 참여하여 영혼의 눈이 말갛게 씻기고 영혼의 귀가 예민해지도록 만드십시다. 매일 주님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일을 충실히 하십시다. 믿음의 식구들끼리 함께 모여 영적인 사귐을 나누는 일에 마음을 다하십시다. 그렇게 꾸준히 성소를 찾으면, 현실이 우리를 속이려 할지라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실제적 무신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 할 때, 성소에서 보고 들은 것이 우리를 잡아 줄 것입니다. 포도 지게미에 오래 눌러앉아 쏟아버림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 영혼의 눈을 뜨고 영혼의 귀가 열릴 때, 비로소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감사가 우리 안에서 우러나옵니다. 현실에 현혹되어 무신론자가 되거나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면, 잘 될 때는 교만해지고 잘 되지 않을 때는 불평불만으로 살게 됩니다. 잘 될 때는 교만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잘 못 될 때는 불평불만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불평불만의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감기 바이러스보다 더 큰 해를 끼칩니다.
진실로 감사할 수 있을 때는 성소에 들어가 영혼의 눈이 뜨일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남들 다 누리는 호사를 하나도 누리지 못한대 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그분 안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복을 내리기도 하시며 벌을 내리기도 하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로 갚으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비록 현실에 감사의 조건이 없을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시인 아삽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28절)
감사절을 한 주 앞 둔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같은 고백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에 있는 이들은 이 고백으로써 그 곤핍함을 초월할 영적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물리적인 환경을 초월하고 나면, 실제로 물리적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반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이들은 이 고백으로써 물질에 탐닉하지 않고 그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용할 영적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축복이 이 아름다운 계절에 ‘실제적 무신론’이 아니라 ‘실제적 유신론’을 믿고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에 코를 박고 사는 바람에
주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며
주님 없는 듯
주님 죽은 듯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포도 지게미에 내버려둔 포도주처럼
못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소에 들어가기를 더욱 힘쓰게 하시어
저희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붙드소서.
주님을 뵙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할 참된 믿음을 주소서. 아멘.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
습 1:14-16 / 이성희 목사
한국 최초의 우주선인 나로호가 지난 8월 25일 7전8기만에 발사되었습니다. 일곱 번이나 발사가 연장된 끝에 발사 되었지만 발사는 성공했는데 궤도 진입에는 실패했습니다. 위성발사체를 보호하는 한 쌍의 덮개인 페어링의 분리 실패로 지구로 추락하였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발사 215초 후 한 쌍이 동시에 벗겨져야 합니다. 그런데 한쪽만 벗겨지고 한쪽이 벗겨지지 않아 궤도를 이탈하고 결국 추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미국은 많은 위성을 쏘아 올렸지만 8번이나 페어링 분리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더구나 1986년에는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에 폭발하여 우주인들이 모두 죽은 참사가 있었고, 2003년에는 컬럼비아호가 우주 비행을 마치고 대기권에 들어오다가 공중 분해되었습니다. 유럽의 아리안이나 브라질, 일본, 중국 등 우주 강국들이 모두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동차 한 대는 부속품이 15,000개가량 된다고 합니다. 보잉 747기는 약 300만 개의 부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왕복선은 약 500만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하늘에 올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나로호도 한 번 발사하기 위하여 약 2억 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돈으로도 하늘에 올라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분을 손을 잡고 가면 하늘에 문제 없이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가기 쉽습니다. 모두에게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먼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누가 더 가까운지 아무도 모릅니다. 일순간에 주님이 오시면 어린 아이나 연세 드신 어른이나 다 함께 갑니다. 야스퍼스의 말대로 누구나 죽음과의 거리는 똑 같습니다. 모두에게 가까운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종말론의 이론 가운데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란 설이 있습니다. 여러 종말론 이론 가운데 가장 인정받고 있는 이론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종말이란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종말을 살고 있습니다. 종말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살면서 가까운 것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3에는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오늘의 날씨로 내일의 날씨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를 보면서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시대의 변화를 보면서도 내 존재의 미래를 알 수 없다면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플라톤은 지도자라는 말의 희랍어 ‘큐베르나오’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것은 배를 모는 것과 같다. 계절, 시간, 하늘, 별, 바람이 지나고 있는 의미를 판단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큐베르나오’이다.” 지도자는 계절을 통하여 의미를 판단하고 이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시대의 지도자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시대의 변화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옴을 알리는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계절의 변화를 보면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압니다.
31절에는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합니다. 올 여름은 많이 더웠습니다. 이 더위가 언제 지나겠나 싶지만 벌써 제법 시원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옵니다. 아마 곧 또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 할 것입니다. 여름이 덥다고 해도 금방 지납니다. 이런 여름이 10번만 지나면 10년이 지납니다. 아마 10년이 지나고 나면 우리 가운데도 많은 분들 안 보일 것입니다. 저도 이 자리에 없고 은퇴하게 되겠지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이것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늘 여름 같은 나라가 있습니다. 흔히 상춘(常春)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늘 이렇게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것은 좋아 보이지만 좋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 살면 시간개념이나 계절 감각이 없어집니다. 사람이 느슨해지고, 게을러지고, 생각 없이 살다가 금방 연말을 닥치고, 인생의 종말을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보세요. 멸망이 눈앞에 닥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롯의 사위들도 장인의 경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멸망이 자기들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를 보세요.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밤에 네 영혼을 취하리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이 사람은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경고의 나팔을 불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馬耳讀經).
지금도 계절의 변화, 시대의 변화, 환경의 변화를 보면서도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요원한 줄만 알고 먹고 마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항상 같습니다. 어느 신문에서는 ‘100년 후 한국에 겨울이 사라진다’라고 났습니다. 이런 얘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립니까? 지구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서울 지역의 계절변화를 보면 봄여름이 길어지고, 가을 겨울이 짧아진다고 합니다. 가을과 겨울은 지난 70년 새 31일이나 짧아졌습니다. 바다의 어종이 변화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잡히던 돔도 이제는 북쪽으로 올라와 잡힙니다. 사과도 대구보다 조금 북쪽에서 재배됩니다. 여름에는 열대성 호우가 내려 갑자기 쏟나 붙듯 비가 내립니다. 이런 기후의 변화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면 너무 시대변화에 둔한 것입니다.
구름의 모양, 바람의 방향, 온도 등으로 기후를 예측합니다. 그런데 기상청은 요즘 계속 매를 맞습니다. 비가 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장대비가 내립니다. 호우주의보를 내렸는데 비가 안 옵니다. 예고 없이 눈이 오고, 폭설이라고 했는데 눈 구경도 못합니다. 비싼 기계 가지고도 예측이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기상청의 잘못이 아니라 날씨가 널뛰기하는 것 같아 예측이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천지에 널려 있는 게 경고의 나팔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깨어라”, “알라”, “보라”, “들으라”등 얼마나 많은 경고의 말씀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을 보세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모습과 다른 게 무엇이 있습니까? 이미 성경에는 경고의 말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듣지 않고 살아갑니다.
영국 시인 셸리는 “겨울이 왔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느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이 세대가 가기 전에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32절에는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고 합니다. 우리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는 이런 마음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긴급성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 모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사도행전 1:11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부활하신 주님은 세계를 정복할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출세할 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심하게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허탈한 마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천사들을 보내 위로하시고 권면하시고 확신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세대에 재림 성취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날마다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선교의 긴급성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들 세대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조급함과 긴급함이 열심히 전도하게 한 것입니다. 긴급함은 믿음의 열정과 용기와 확신을 줍니다.
“요즘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몰라도 세상의 끝이 가까워진 것은 인정합니다. 아무리 세상을 잘 보려고 해도 세상의 끝이 다 되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말한다고 이단이겠습니까? 이단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이용했습니다. 이단들은 재림을 이용하여 극도의 공포감과 불안감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바치게 하고, 교주에게 무조건 복종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자신의 욕망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에 보면 가까워진 재림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도 나옵니다. 바울의 서신에도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4:5에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합니다. 야고보도 야고보서 5:8에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합니다. 사도들과 성경의 기자들이 한 결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시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7에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합니다. 22:20에는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고 합니다. 재림의 신앙은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재림신앙은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신앙과 더불어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핵심을 이룹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재림신앙이라기 보다 재림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림을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은 곧 신앙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은 흔히 ‘마라나타’라고 합니다. 아람어로 ‘마라나타’란 말은 아주 소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디다케’라는 12사도의 교훈집이 있습니다. 이 책의 성찬식 기도문의 마지막은 “누구든지 거룩하지 않거든 회개할지어다. 마라나타 아멘”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재림신앙입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인사였습니다.
1992년 10월 28일을 기억하십니까? 이장림씨가 이끄는 다미선교회가 이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한국교회를 아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베라 선교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금도 안상홍이 이끄는 하나님의 교회가 마지막 재앙을 강조하고 새 언약 유월절을 강조하면서 재림을 그들의 이단 사설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라는 사람이 10년 내에 종말이 오는 지를 두고 내기를 걸자고 공개 제의했습니다. 그는 “1844년 10월 22일 ‘예수 재림의 날’을 선언한 윌리엄 밀러에서 한때 베스트 셀러였던 ‘1988년이 환희인 88가지 이유’에 이르기까지 빗나간 종말의 예언은 무수히 많았다”고 말하면서 “잘못된 예측으로 이렇게 돈을 많이 번 사례를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내기를 걸 사람은 없습니다. 10년 내에 종말이 온다고 할 수도 없지만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언제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시한부종말론 이단처럼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는 매일 예수님이 오신다는 종말신앙, 재림신앙을 가지고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살기 좋으니까 까마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 천당”을 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윤리적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간 곳 없고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여기가 좋사오니 주 예수여, 더디 오시옵소서”라고 하고 삽니다. 지나친 재림사상은 현실도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각한 재림신앙은 현실안주입니다. 이 둘 다 재림신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재림신앙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우리의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고대하는 설렘입니다. 결혼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신부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재림 신앙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참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결 론
지진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준비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해운대’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쓰나미 공포에 쌓여 있답니다. 그런데 쓰나미가 올 때도 동물들은 미리 알고 도망을 합니다. 갈매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진이 나기 전에 동물들은 피신합니다. 땅 속의 두더지도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고 당합니다. 이 세상의 종말도 일반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압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삽니다. 그래서 종말이 온다고 해도 그렇데 두려워할 일은 아닙니다.
전도서 12:1에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라고 합니다. 금방 가까워질 나의 종말입니다. 우리 눈앞에 다가온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머지않아 가야할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까워진 우리의 종말, 예수님의 재림,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기쁨으로 기대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소용없는 은과 금
스바냐 1:14-18 / 이근호 목사
“하나님은 사랑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화내는 것도 없을 것이고, 분내는 것도 없을 더더구나 없을 것이고, 그런 하나님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예상 밖의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그 하나님이 장차 오실 이 땅에 인간 속에 나타날 하나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생각되는 것은 다 내놔봐라 이 말이죠. 다 끄집어내놓고, 바로 그것과 다른 분으로 오시는 겁니다.
아무도 제 정신으로 도저히 알아보지 못한 그러한 몰골로, 그러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나타났다. 혹은 하나님이 안 오셨다. 또는 아예 하나님이 없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분명히 다녀갔습니다. 못 알아먹었을 뿐이지, 분명히 다녀갔습니다. 다녀가면서 남긴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폐기처분돼야 될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오늘 본문 이야기는 전쟁 이야긴데 이 세상 전체적으로 전쟁으로 전부 다 망한다. 라는 이야기를 오늘 분문에서 했습니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관심 두는 게 뭐냐 하면 전체가 어떻게 멸망하느냐에 관심 없고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될까요? 내가 궁금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게 됩니다. 점집이 서울의 미아리나 대구에도 많습니다만 점집에 찾아가서 ‘도사님, 앞으로 세계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그거 물으러 오는 사람 없어요. 세계 평화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될까, 올해 한 해 신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거 물으러 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출발점이 ‘니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속해 있는 세상은 이렇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누구 개인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다 나빠서 그래요. 모두가 다 나빠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 안에 모으셔요. ‘너도 와, 전부 다 와. 한꺼번에 다 와.’ 다 모으시고 난 뒤에 ‘다 너희들은 멸망돼야 된다.‘라고 하시면서 그걸 일단 수용해야 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그 다음에 선별작업에 들어갑니다.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양에 속한 사람, 염소에 속한 사람, 오른 쪽에 구원받을 사람과 지옥 갈사람, 일단 전부 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하는 식으로 전부 다 주님의 말씀 앞에 모아놓고 분류작업은 그때부터 주님의 일방적인 자기 권한으로 분류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논산 훈련소나 이렇게 51사단 지방의 훈련소에 가게 되면, 처음에 들어갈 때는 집이 그립다. 보고 싶다. 밥맛이 없다. 그리고 사흘 동안 밥을 못 먹어요. 저도 하루 동안은 밥을 못 먹었습니다. 훈련 받고 힘든데 사람이 처음엔 훈련 하는 게 힘들어요. 잔소리도 안 듣다가 말 시키는 대로 똑바로 좌로 돌아가, 우로 돌아가, 그게 짜증스럽고 인격 모멸도 느끼고 인간성이 붕괴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렇게 되지만 훈련소 생활 몇 주만 지나면 서서히 자기들끼리 ‘니 나중에 자대 어디로 가는데?’ 서서히 장래문제에 대해서 서로 비교하면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는 친척이 보안사에 있는데 훈련 끝나면 후방으로 빼준대.’ ‘좋겠다. 니 아저씨한테 나도 부탁해라. 우리 짝꿍이잖아.’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하고 해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 삼촌은 보안사 빽으로 여기 후방에 빠지고 내 동생도 대구 방공포 가서 가까운 데서 했죠. 저만 전방에 갔죠. 전방에 가서 예수 믿었다니까요. 그때 처음 교회 나갔죠. 참 주님께서 순적하게….
사람이 어떤 지금 속해 있는 단체, 이 세상이 질이 어쩌니 나쁘니 하지만 대학교 때는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어야 돼, 북한을 저렇게 놔두면 안 돼, 북한과 교류하는 입장에서 북한 말을 들어줘야 돼, 종 북 세력인지, 하여튼 뭔가 거창하고 범지구적인 활동을 하려고 우리나라에서 봉사활동 하는 게 있어요. 아프리카나 도미니카 그런데 가서 군대생활 대신 가는 것도 있지만 막상 대학교 졸업하고 이력서 100군데 내서 면접 오라는 데 한 군데 없으면 그 다음부터 인류 평화고 국제 정치고 관심 없습니다. ‘뭐 시켜만 주이소, 계약직이라도 좋습니다. 직장의 신이 되겠습니다. 미스 김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간장 공장에 내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세계 평화 이런 거 안 하고 만약에 들어가게 되면 진급 언제 하고 언제 잘리지는 않을까, 그거 생각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추적해 보면 이런 겁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이름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악마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을 숨깁니다. 루시퍼라는 이름을 기독교 교회에서는 그 루시퍼 이름을 사용했어요. 루시퍼가 악마 이름 아닙니다. 악마의 종들이 일부러 만들어 낸, 악마를 감추기 위한, 자기 오야봉을 감추기 위해서 사용한 이름이 루시퍼에요. 하늘에 있는 계명성아 떨어져라. 하는데 그거 악마 아닙니다.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말은 인간은 악마를 다룰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연구하고 철학과 경제학, 과학 아무리 연구해도 니가 살고 있는, 니가 소속돼 있는 그 세계를 성경에서 해석하는 짐승으로 해석할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좋은 세상에 좋은 나라에 가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지, 라는 식은 인간에겐 해당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이렇게 질문했어요. 교회가 문제 있다 하니까 그 사람 취지가 물론 나쁜 교회도 있지만 좋은 교회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질문했는데, 여러분, 교회마다 모두 다 좋은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진짜 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머리가 그리스도고 지체가 몸이고 하는 그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우기는 그 교회한테 핍박받는 형식으로만 이게 도출되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메시아는 여전히 우리가 못 알아보는 식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에 제가 설교 뭐라고 했던가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사람들이 하나님이 오심을 모르기 때문에 그걸 대신해서 건전하고 고상해 보이고 굉장히 경건해 보이는 교회를 만들어서 그 진짜 메시아 안 믿는 것을 마치 믿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에서 나라가 짐승이라 했잖아요. 짐승이라 하면 ‘짐승 같은 나라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이 나라는 짐승이 아니고 짐승나라 아닐 거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생각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진짜 나라가 그 나라 의, 이 땅의 천국입니다.
그래서 바로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를 옹호한다고 나대면서 우리는 어느새 짐승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루시퍼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이사야에서 말하는 바벨론 그런 큰 나라 떨어지는 걸 말하는 것이지, 악마에는 그런 이름이 없어요. 천사는 이름이 있어요. 미가엘, 가브리엘.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가엘도 가브리엘도 누구는 터치를 못하느냐 하면 사탄은 터치를 못합니다.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시체 가지고 논쟁할 때 천사도 그냥 경고로만 이야기했죠. “주께서 너를 꾸짖기를 원한다.” 이렇게 했지, 나대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름 없는 악의 최종적인 본분은 이름 없는 분에 의해서 전쟁으로 처리돼야 되는데 그걸 영적 전쟁이라는 겁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것은 실존하지만 이름이 없는 두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 쪽에서 이름을 붙을 수 없다는 말이고, 우리 쪽에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있는 선에서 차근차근 파악해 나가면 언제나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신학을 아무리 연구하고 아무리 해도 악마는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주님의 하는 일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사도가 주의 일을 했잖아요. 사도가 한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사도가 주님을 알아서 주의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 순간순간마다 사도에게 일을 하도록 배당을 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한 겁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그들의 은과 금이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한다”고 돼 있습니다. 스바냐에 나오는 1장 17장 말씀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많이 들었다시피 사도행전 3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냥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지 않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한 거예요.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우리 사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 배후에 있는 이름 없는 세력에 붙잡힌바 되어서 그 세력의 사주를 받고 우리한테 그걸 요구한 겁니다.‘ 이런 뜻 이예요.
지금 우리가 주의 종으로 오니까 ‘금과 은을 주시면 그 덕분으로 우리가 살겠습니다.’라고 그런 의도로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그런 동냥을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고 당신 배후의 이름 없는 세력이 당신한테 그걸 사주하고 그걸 시키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베드로와 요한은 당신을 구원해주는 게 목적이 아니고 당신을 매개로 하여 영적 전쟁을 이 자리에서 실현시키겠습니다. 저쪽에서 이름을 감추고 은과 금을 내세운다면 우리 쪽에서 내세우는 것은 당신들이 내세우는 무기, 은과 금은 내게 없습니다.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되게 어렵죠?
요 어려운 것을 매듭을 푸는 방법이 이겁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어떤 직업을 갖게 되거나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내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어느새 그 일이 나로 하여금 그 일에 적합한 인간으로 조작해 내고 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학교 가서 목사가 돼 버리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목사 질을 한다고요. 자기가 종사하는 그 일에 적합하도록 변화가 돼 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제가 울산 가서 그런 강의했는데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은 자기가 죽음을 지연시키고 더 살고자 하는 일인데 자기가 돈이 있어야 살거든요. 사람마다 돈이 없으면 죽으니까. 돈이 안 드는 게 없잖아요. 돈이 있어야 병원에 가니까. 돈이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그 일이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되고 말아요.
여러분, apple, 사과압니까? 그 apple사 주식회사 회장이 암으로 죽었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천재라는 사람이. 컴퓨터 애플사가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청바지 입고 나오다가 너무 연구를 많이 하고 고민을 많이 해서 죽어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거기에 종사합니까? 이 컴퓨터 해서 인류공영에 기여하기 위해서 했잖아요. 인류평화에 기여하겠다는 그 자세가 이름 없는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일으킨 일이다. 그 사람은 성경 스바냐를 안 보니까 봐도 모르지만 알 수가 있어야지. 그저 신학교 가서 목사 하는 그 일이 자기의 저주와 자기의 지옥 가는 일을 재촉하는 일이라는 것을 목사가 그걸 몰라요. 그저 남 가르치는데 바빠서 자기 본인 신앙생활 자체가 안 된다니까.
차근차근 나가봅시다. 제가 방금 이름 없는 세력인 악마는 이름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주님한테는 주님 이름이 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 주님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의 이름이라고 하느냐? 그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주님의 이름 이예요. 제발 니 이름은 여기서 낄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니가 아무리 행하고 노력해도 주의 이름을 대체할 만하고 주의 이름에 섞일 수 있는 요소는 여기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순전하게 100% 주의 이름 이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적 전쟁은 우리 인간하고 의논하고 상의해서 한 것이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관계 나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갔어요. 우리가 보통 죽으면 천국 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사람들이 천국 간다고 천국 보내달라고 요청하니까 예수님은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께로 가니까 베드로 같은 사람은 못가죠. 왜, 베드로는 죽어도 못 가요. 아버지는 예수님 아버지이지, 베드로 지 아버지 아니거든요.
악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악마를 더듬어서 찾아갈 수 없고, 더듬어서 찾아가지 못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사주 받고 간섭받는 식으로 꼬이는 겁니다. 인간이 어떤 뭘 해도, 보험을 하든지, 교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 간에 인간이 이렇게 하는 일 그것이 배후에 보이지 않는데서 재촉 받고 쫓기듯이 일을 하게 돼 있어요. 모든 인간은. 이거해서 밥 먹고 살겠나, 이거 해서 은과 금은 생기겠는가, 항상 어떤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나한테 알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두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지금 더 살아야 되기 위해서는 그게 있어야 돼요. 요양병원에 가도 돈이 저금이 돼 있어야 됩니다. 우리 어른 이런 세대에서는 보험 같은 게 없었어요. 그러니 자식들 돈 좀 분빠이 해서 내도 처음엔 내다가 나중에는 삐져서 안 내고 누구 핑계나 대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도 아들한테 맡겼다가 아들이 사업해서 홀랑 다 까먹고 그런다고 아들이 엄마를 패고 노인을 학대하는 죄를 아들이 제일 잘 팬다는 겁니다. 그 다음이 딸이고 그 다음이 며느리고.
문제는 돈 이예요. 돈! 돈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락교회서 공부하면서 쉬는 시간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딸이 직장에서 일이 힘들어서 자꾸 집에 와서 엄마한테 화풀이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책이 난감하죠. 자꾸 힘들어서 엄마가 애 봐주고 생활비를 딸이 전적으로 감당하고 사는데 너무 힘이 드니까. 사람이 뽑지를 않아요. 기업이 어려우니까. 너무 일거리가 많으니까 그 화풀이를 할 때, 어떤 대책 같은 게 있을까 할 때 저한테 이야기할 때 이러면 됩니다. 그 권사님이죠. 김 권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딸보고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마. 딸아, 딸아 직장 그만둬. 내가 니 키워줄게. 내가 집에 돈 100억 있다. 그러니까 니 직장 가지 말고 그걸로 살면 된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거예요. 돈!
그런데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데 여기 18절에 보면 은과 금은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소용없는 거예요. 잠언서 11장 4절에 보면, 잠언서 볼 때마다 제가 대 심방 하던 게 생각나는데 이건 왜 이런 대목은 대 심방할 때 이야기를 안 하나 몰라. 11장 4절에 보면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돈? 진노하시는 날에 아무짝도 소용없다. 대 심방에 써먹기는 써먹겠다. 돈 벌어서 교회 바쳐라. 하면 되죠.
10장 2절에 보면 “불의한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돼 있어요. 불의한 재물!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의하지 않은 재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의하지 않은 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몰라서 그래요. 뭐 깨끗하게 물건 팔아서 깨끗하게 산다. 이 세상에 깨끗한 게 어디 있습니까? 한번 조사해 볼까요? 농산물 깨끗한지 농약 얼마나 탔는지 조사해 볼까요? 깨끗한 게 있는지. 유기농? 유기농이 어디 있어요? 날씨 안 좋으면 유기농 없어요. 전부 다 몰래 약 쳐놓고 유기농이라고 속이고 있는데. 이런 입장에서 깨끗하게 유기농해서 얼마나 나온다고, 상품이 되지도 않고.
깨끗한 게 없어요. 불의한 재물이 아닌 게 없어요. 이 세상에 불의한 재물이 없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영생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도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모르는 입장에서 우리 쪽에서 하나님한테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산다? 이건 진노의 날에 소용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진노의 날이라 하는 것은 니가 그렇게 의지하고 그렇게 의존하고 ‘나는 이거 아니면 죽어. 이거 아니면 못 살아.’ 하는 그 덩어리, 그 덩치가 사실은 이름 없는 누구 손에 의해서 전부 다 지배당하고 억압당하는 우리는 악마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보면 여기 심판의 날 내용이 죽 나오거든요. 고통의 날이고 깜깜한 날이고, 딱 이 본문 본 인상이 뭡니까? ‘하나님 너무 과하십니다. 심해도 너무 하다. 잘못한 사람 뽑아서 벌주는 건 괜찮은데 이건 집단화 시켜서 이렇게 한꺼번에 벌준다면, 그럼 착한 사람은 고통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 우리가 은근히 반발심 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는 대목 이예요.
“분노의 날에 능히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땅은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이건 봐주는 것 없이 조지는 겁니다. 그럼 해답은 뭐냐,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 중간에 나옵니다. “질투의 불에 삼키운다.” 질투하는 것. 사랑이라는 것이 동전 100원짜리 뒤를 보면 다보탑이 있습니까? 하여튼 동전의 양면이 색깔이 다르잖아요. 도안이 다르잖아요. 주님의 사랑 뒷면을 살짝 보시기 바랍니다. 질투가 나와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내가 준 사랑을 어떻게 저런 허접한 더러운 사랑과 맞먹으려고 하느냐, 내가 준 이 십자가의 피라는 희생을 어떻게 세상의 은과 금 같은 유로 같이 취급하느냐, 그러니까 내 사랑은 돈 주고 못산다 이 말입니다. 내가 니한테 주는 용서와 자비가 주어진 주님의 사랑은 이 땅의 어떤 값을 쳐도 줄 수가 없을 정도로 질투가 일어날 수밖에 그런 엄청난 사랑입니다. 그 정도로 내가 준 사랑은, 내가 준 사랑의 값을 내가 반드시 되찾아야겠다. 니가 이 사랑 버리고 딴 데 가면 내가 질투심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 이거 지독한 사랑 이예요. 지독한 사랑인데 아가 서에서는 죽음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라 하거든요.
니가 죽어서 지옥의 입구에 있더라도 나는 입구에서 메가지 쥐고 난 천국으로 이끌고 말겠다는 그런 야심과 고집과 오기가 주님의 사랑에서 이미 거기 담겨서 오늘 아침에 들은 대로 성령 세례와 함께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겁니다. 우리는 그 질투를 알아야 돼요.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세상에 어떤 것도 안 바꿀 정도로 세상보다 더 큰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 사랑이 있기에 너를 이렇게 힘들게 했던, 너를 이렇게 아프게 했던 그 보이지 않는 세상을 뭉개버리면서까지 주께서는 그걸 건지시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너희에게 주노라. 사도의 임무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려고 뛰어들다가는 실타래 얽히듯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서 오히려 우리가 세상적인 사람으로 점차 달라지고 변신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어느새 세상적인 것이 더 좋아져버린 우리의 망가진 기계, 하지만 주님의 질투가 담긴 사랑으로 기어이 건져내서 주님의 사랑이 이 세상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날마다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