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릇
김수우
여행가방에 그릇 하나를 담습니다
다락방을 닮은, 수도원 뒷마당을 닮은, 오월광장을 닮은 그릇입니다
모든 하루의 입구와 출구인 그릇의 당부를 따라
산비탈 안고 가는 실개울을 따라 새 주인을 찾아 떠납니다
어디선가 그릇 주인은 막노동이나 전쟁으로 지쳐 있을 것이고
부러진 다리로 변방을 걷고 있을 겁니다
내가 모래폭풍 속 길 잃은 나그네였듯이
눈물꾸러미를 팔아 덜 익은 감자를 겨우 씹었듯이
그릇이 나에게 도착한 그날처럼, 문득
그릇이 그에 닿은 어느 봄날, 문득
바위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초록도마뱀이 돌아볼 겁니다
검은 숲 잎새 하나 온몸으로 고요한 파문을 낳을 것입니다
언제나 늦은 듯해도 한 번도 늦은 적 없는 그릇 속에
한때 북극성이 살았고 한때 예수 태어났고 한때는 감자꽃이 가득했으니
그릇을 잘 전해 주면 드디어 나는 그릇이 될 것이니
그때 누군가가 나를 여행가방에 담을 테니
그제야 사람의 안부가 완성될 터이니
그제야 이방인의 오래된 문장이 해독될 터이니
― 《생명과문학》 (2023 / 봄호)
김수우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산문집 『쿠바, 춤추는 악어』 『어리석은 여행자』, 옮긴 책 『호세 마르티 시선집』 등. 부산작가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부산에서 글쓰기 공동체 ‘백년어’를 열고 공존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