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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과 백성의 죄
말 1:6-14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1:7-14 / 너희는 더러운 제물들을 내 제단에 바칠 때마다 나를 모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더러운 제물들이라니요?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반문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값나가는 물건은 기꺼이 가져다가 하나님께 바치겠다!' 하고 큰소리 칠 때마다 나는 모욕을 당한다. 8) 너희는 눈이 먼 짐승을 내게 바칠 희생제물로 끌고 오면서도, `그런 곳에 쓰기에는 아직도 성한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내게 바칠 희생제물로 끌고 오면서도, 너희는 `그런 짐승 때문에 하나님이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선물을 너희 총독에게 한번 주어 보아라! 너희도 그런 선물을 가지고서는 총독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9) 그런데도 너희는 그따위 선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은총을 입으려고 궁리한다. 그러나 너희가 그따위 선물을 바칠 때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풀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10) 오히려 너희가 그같이 헛된 제물을 내 제단에 바칠 수 없도록, 너희 중에서 누가 내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모두 폐쇄해 놓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가 하나도 반갑지 않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전혀 반갑지 않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11) 그러나 내 이름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세계 만민들에게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든지 향기로운 번제와 깨끗한 제물을 바쳐서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진실로 내 이름은 세계 만민들에게 위대한 이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12) 그런데도 너희는 `주님의 식탁이야 더럽혀도 상관없고, 주님의 음식이야 깔보다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내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13) 더군다나 너희들은 `주님을 섬기기가 너무도 어렵고, 해달라는 대로 해드리기가 정말 지겹다!' 하고 투덜거리기도 잘한다. 그럴 때마다 너희는 나를 코웃음치고 업신여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생각해 보아라!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 절뚝거리고 병든 짐승들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훔쳐 온 짐승들까지 희생제물이라고 바친다. 이것이 너희가 할 짓들이냐? 내가 그런 것들을 받고서 좋아해야 옳겠느냐?' 여호와께서 물으셨다. 14) `그러므로 자기의 양 떼 중에서 가장 좋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내게 서원을 했고 또 그토록 깨끗한 양들이 있는데도 나중에는 병들고 흠 있는 짐승을 바치며 나를 속이는 것들아, 저주를 받아라! 나는 위대한 왕이요, 세계 만민들이 내 이름을 듣고 떠는데도 너희는 나를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6-8)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부정한 제물을 제단에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흠 있는 제물을 바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레 22:20-23; 신 15:21). 그러나 제사장들은 눈멀고 병든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경히 여기는 제사장들의 마음자세를 질타합니다.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7)는 구절은 제사 업무에 임하는 제사장들의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말라기는 저들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 비교방법을 사용합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이 임명한 유다 총독에게도 가져다줄 수 없는 흠 있는 제물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느냐는 것입니다(8).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9-11) 흠 있는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전한 예배를 통해 임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심정은 차라리 성전 문을 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종교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이름’입니다. 이름에는 인격과 존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외하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당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지만 이후 참된 예배가 유다 지경을 넘어 온 세상에 퍼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12-14) 제사장들은 부정한 제물과 음식을 드리는 것이 제단을 더럽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결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번거롭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형성 없이 종교인 행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맥의 키워드는 ‘속여’(14)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릴 온전한 제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온전한 봉헌물을 숨기고 부정한 봉헌물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속임수는 어리석은 인간들에게나 통합니다. 하늘에 계신 큰 임금이신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적용: 오늘날 당신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인지 돌아보세요.
트루만은 미국의 33대 대통령을 지낸 뒤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독서와 봉사로 말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오래된 도서관에서 그가 책을 보고 있을 때 견학 왔던 초등학생들이 그에게 다가가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공부도 잘했고 지도력도 있었죠?”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반대였지. 눈이 나빠 안경 없이는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고 열등생이었으며 큰소리에 벌벌 떠는 심약한 아이였어.” 그 이야기를 듣던 초등학생이 다시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까지 되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트루만은 “나는 하나님을 믿었어. 그리고 성경말씀을 늘 읽었지.”라고 대답했습니다.
< 설 교 >
상관(相觀)관계의 행복
말라기 1:6 / 석원태 목사
‘나의 사자(My Messenger)’란 이름의 뜻을 가진 선지자 말라기(ykalm)가 있습니다. 그는 포로시대가 끝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B.C. 516년경)이 끝난 이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앞시대를 살았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감동적인 설교를 들었던 백성들은 성전 재건과 함께 찬란한 역사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오리라고 했던 여호와의 큰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창대와 번영은커녕 오히려 기근과 흉작으로 고통이 연속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말 1: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회의와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말 2:17). 저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선한 자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크게 무익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말 3:14).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말 3:15).
말하자면 모순논리, 모순사고, 모순의식, 모순감정으로 충만해져 버렸습니다. 그러한 모순관계가 저들의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말라기는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백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말라기서는 전부 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절 수는 57절밖에 안 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 자신이 ‘나’라고 하는 1인칭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구절이 무려 47절이나 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과 얼마나 깊고, 크고, 넓고, 끝이 없는 인격적 관계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모순관계에서 오는 불행을 해소하고, 상관관계의 행복을 회복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백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받은 행복이라고 선지자 말라기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 관계성의 행복한 내용들이 무엇인가?
Ⅰ. 사랑관계의 행복입니다.
말라기 1장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랑은 아하브(bh'a')라고 하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혈통적인 사랑 스톨게(stovlgh)나 친구간의 우정 필레오(pilevw)나 성적(性的)인 사랑 에로스(e[rw")가 아닌 아가페(ajgavph) 사랑을 가리킵니다. 특별한 사랑입니다. 선수적 사랑(요일 4:10), 무궁한 사랑(렘 31:3), 선택적 사랑(신 7:7, 8, 15, 말 1:2), 언약적 사랑(말 4:4), 구속적 사랑(신 4:37, 호 11:1)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행복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부부간의 사랑관계를 축복하였습니다. 부자간의 사랑관계를 축복하였습니다. 형제간의 사랑관계를 축복하였습니다. 친구간의 사랑관계, 사제간의 사랑관계, 군신간의 사랑관계를 축복하였습니다. 그 모든 사랑관계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사랑관계입니다. 거기에 뿌리를 두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는 이스라엘과 사랑관계에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Ⅱ. 부자(父子)관계의 행복입니다.
말라기 1장 6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요, 이스라엘은 그 주인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인 이스라엘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말 1:6). 종인 이스라엘은 당연히 자기 주인을 두려워해야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말 1:6b). 이스라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낀다고 하였습니다(말 3:17). 그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채워 주시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말 3:10-11). 말라기 2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한 아버지를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한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말 2:15).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특권이요, 영예요, 행복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실로 무상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온전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모든 것이 풍족한 아버지’, ‘온전한 빛들의 아버지’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 모든 영(靈)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성령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고 하였습니다(롬 8:14-15). 그러므로 부자관계의 단절은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우리는 지난 8월 15일,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에서 50년이 넘도록 부자관계가 단절되었던 비극이 얼마나 아픈 것이었던가를 실감하였습니다. 그 부자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행복한 것이었던가를 보았습니다. 그나마 그 관계는 2박 3일로 다시 끊어지고 기약없는 이별의 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부자관계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갖는 모든 관계 중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만큼 그렇게 뜨겁고 간절한 관계는 다시 없습니다. 바로 그 혈육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이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식들인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야 될 자식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에 따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관계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혈육의 관계가 잘 될 때 웃음이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관계성의 행복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 사랑의 계시적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고 싶은 그 이상한 충동, 그 이상한 행복, 그 이상한 기쁨, 그 이상한 자원심이 일어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을 향한 혈통적 부성과 모성의 그 사랑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계시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자관계의 행복이 어떠한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섬김을 최상의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Ⅲ. 이상적 군신(君臣)관계의 행복입니다.
말라기 1장 14절에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크신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열방 중에서 그 이름이 세세토록 떨친 큰 임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는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의 이방민족 중에서도 그 이름이 크게 떨치실 왕이라고 하였습니다(말 1:5, 11).
이스라엘은 이러한 큰 임금을 섬기는 신하요 종이라고 하였습니다(말 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요 주인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왕을 모신 이스라엘은 행복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위대하신 왕께서 우주적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고, 그 이름이 열국 중에 크게 떨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왕을 섬기고 따르는 이스라엘의 행복이 어떠하겠는가? 권세 있는 왕, 세세토록 살아있는 왕, 그 국권이 영원하고 그 도모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참으로 행복하도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 말라기였습니다.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행복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Ⅳ. 특별한 소유관계의 행복입니다.
말라기 3장 1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6장 18절에는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는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한 소유, 보배로운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
이 특별한 소유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한 날에 의의 태양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메시야적 믿음을 가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특별한 소유이기 때문에 그 이름이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말 3:16).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는 바로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되어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출 32:32, 빌 4:3, 계 3:5, 20:12). 그 이름이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열국 중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구원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불행을 벗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과 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모순관계의 불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관계성의 회복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랑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부자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상적인 군신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관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행복이요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관계성이란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요 축복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 지음받은 인생은 대신(對神)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의존적 피조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인(對人)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물(對物)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복이요, 개발이요, 다스림인 문화적 관계입니다. 결코 사람은 유아독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 상호관계성의 바른 정립에서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존의 법칙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주권적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상관관계의 법칙을 어기고는 잘 사거나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때만이 행복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겨야만 행복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일 때만이 진정으로 사람의 사람된 신분과 내용과 명예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영원하신 통치를 받아야만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결국 역사의 영원한 통치자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 특별한 소유, 보배로운 소유가 될 때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예수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속의 은총을 담고 있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30배, 60배, 100배의 복된 생을 누릴 자인가? 바로 모순관계의 불행에서 상관관계의 행복으로 돌아서는 자입니다. 영감받은 선지자 말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 보배로운 존재임을 잊지 말라!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은 행복의 노다지요 축복의 노다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순관계는 역리(逆理)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질서요, 불행이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상관관계는 순리(順理)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질서요, 행복이요, 축복이요, 영생입니다. 상관관계의 순리 앞에 축복받기를 기원합니다. - 아 멘 -
깨끗한 제물 Pure Offerings
말라기 (2) Malachi 1:6-14
도입 Introduction: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is attitude.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 즉 태도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믿음이 좋은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믿음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아는 것은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지만, 삶으로 옮겨야 합니다. 제가 이번 서아프리카 선교를 통하여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곳 성도는 가슴이 뜨거운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머리 중심의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머리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머리로 배우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들은 것을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의 자세입니다.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주전 430년경의 이스라엘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의 영성은 총체적으로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 깨끗한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전 43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자신이 “깨끗한 제물”로 드려지기를 축원합니다.
1.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If I am a father, where is the honor due me?” (6-8)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6 "A son honors his father, and a servant his master. If I am a father, where is the honor due me? If I am a master, where is the respect due me?" says the LORD Almighty. "It is you, O priests, who show contempt for my name. "But you ask, 'How have we shown contempt for your name?'
예배와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 가운데 바로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아버지로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으로 불렀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냐?”고 항변했습니다. 제사장, 왕, 예언자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인도하라고 세운 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신하고,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제사장이 백성의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할 때 하나님을 멸시하고, 공경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들이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7 "You place defiled food on my alter. "But you ask, 'How have we defiled you?' "By saying that the LORD's table is contemptible.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제사장들이 항변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언자 말리기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더러운 음식을 나의 제단에 드린다.” 한국어 번역의 “더러운 떡” (לֶ֣חֶם מְגֹאָ֔ל)은 영어 번역처럼 “더러운 (혹은 오염된) 음식”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빵 (진설병: shewbread)은 제단 (altar)에 드리지 않고, 빵을 드리는 상 위에 드리기 때문입니다. 매 안식일마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개의 빵을 드립니다. 히브리어로 빵이 “레헴”인데, 이는 “베들레헴” (빵집)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지 빵만이 아니라, 뜻이 확장되어 음식도 됩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입니다. 먹어야 삽니다. 먹을 것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기와 곡식이 우리의 음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음식인 고기와 곡식을 하나님의 제단에서 불로 태워서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곧 하나님의 식탁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처럼 음식을 드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정결한 제물을 원하실까요? 레위기 22:29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When you sacrifice a thank offering to the LORD, sacrifice it in such a way that it will be accepted on your behalf).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곧 우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제단에 올라야 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대신에 우리의 음식을 받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 따로 예물 따로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더러운 음식을 드리는 것입니다. 더러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예배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8 When you bring blind animals for sacrifice, is that not wrong? When you sacrifice crippled or diseased animals, is that not wrong? Try offering them to your governor! Would he be pleased with you? Would he accept you?" says the LORD Almighty.
이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드리는 예배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특정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눈 먼 동물, 저는 동물, 병든 동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22:2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을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Do not offer to the LORD the blind, the injured or the maimed, or anything with warts or festering or running sores. Do not place any of these on the altar as an offering made to the LORD by fire). 하나님은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하나님은 당신을 세상의 최고 권력자에게 비교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페르시아의 총독을 비교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주지사나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도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In every place incense and pure offerings will be brought to my name” (9-11)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9 "Now implore God to be gracious to us. With such offerings from your hands, will he accept you?" - says the LORD Almighty.
이제 하나님은 더러운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식탁을 경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경멸하는 이스라엘이 불쌍히 여겨달라며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도 그 어느 한 사람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실까요? 우리가 기도를 드리지만, 우리를 기뻐하실까요?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0 "Oh, that one of you would shut the temple doors, so that you would not light useless fires on my alter! I am not pleased with you," says the LORD Almighty, "and I will accept no offering from your hands.
하나님은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 문을 닫아라! 내 제단 위에 헛되이 제물을 불사르지 못하게 하라. 나는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너희가 드리는 것을 받지 않겠다.” 이는 함께 예배하는 사람이 많은가, 적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의 음악이 은혜가 되는가, 아닌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가, 적게 드리는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진다면, 하나님은 그 성전, 그 교회의 문을 닫으라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공허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교회 문을 닫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진정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야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받아드려지고, 우리의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1 My name will be great among the nations, from the rising to the setting of the sun. In every place incense and pure offerings will be brought to my name, because my name will be great among the nations," says the LORD Almighty.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whoever curses you I will curse; and all people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you) (창 12:2-3). 아브라함은 결코 아브라함만을 위한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결코 이스라엘만을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도 역시 교회만을 위한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삼으시고 큰 나라로 만드셔서 하시는 일은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에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일이 그 마지막 모습으로 드러난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 7:9-10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great multitude that no one could count, from every nation, tribe, people and language, standing before the throne and in front of the Lamb. They were wearing white robes and were holding palm branches in their hands. And they cried out in a loud voice: "Salvation belongs to our God, who sits on the throne and to the Lamb"). 우리가 하나님 성호를 거룩하게 부르며 정결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이루어진 이방 민족 가운데 택정하신 이를 부르시는 보좌 위의 하나님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영원히 깨끗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받아드려지는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하게 하시는 보혈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감싸진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보혈로 우리 모두가 정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주님께 기쁘시게 드려지는 예배가 됩시다. 우리 자신이 이 자리에서 우리의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예물을 드리고, 마음을 드릴 때, 오직 주님의 보혈을 의지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My name is to be feared among the nations” (12-14)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2 "But you profane it by saying of the LORD's table, 'It is defiled,' and of its food, 'It is contemptible.'
하나님께서 음식으로 주신 것은 고기와 곡식만이 아닙니다. 과일과 채소와 기름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식탁에 드리는 예물은 고기와 곡식만이 아니라 과일과 채소와 기름도 드립니다. 특별히 땅의 소산물인 과일이나 채소를 드릴 때, 그 맏물 즉 첫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26:1-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When you have entered the land the LORD your God is giving you as an inheritance and have taken possession of it and settled in it, take some of the firstfruits of all that you produce from the soil of the land the LORD your God is giving and put them in a basket. Then go to the place the LORD your God will choose as a dwelling for his Name and say to the priest in office at that time, "I declare today to the LORD your God that I have come to the land the LORD swore to our forefathers to give us." The priest shall take the basket from your hands and set it down in front of the altar of the LORD your God).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흙의 소산물을 먹으며 삽니다. 우리 생명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 음식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경시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13 And you say, "What a burden!' and you sniff at it contemptuously," says the LORD Almighty. "When you bring injured, crippled or diseased animals and offer them as sacrifices, should I accept them from your hands?" says the LORD.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을 지겨운 것, 번거로운 것, 부담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멸하고 하나님께 코웃음 쳤습니다. 그래서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받겠느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것은 지겨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입니다.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산뜻한 것입니다.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이렇게 진정한 예배를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 짐승 떼 가운데서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Cursed is the cheat who has an acceptable male in his flock and vows to give it, but then sacrifices a blemished animal to LORD Almighty, "and my name is to be feared among the nations.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년 되고 정결한 수컷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먹이십니다. 주십니다. 아십니다. 셈하십니다. 받으십니다.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 큰 임금, 크고 두려운 이름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결론 Conclusion: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요 John 4:23)
요한복음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에서 그 곳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완성하신 이후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사람은 그 거듭난 영으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거듭난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 있습니다. 주일에 주 앞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또 한 주간 하나님께 받은 분량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이 또한 거룩한 예배로 드려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마음을 드리는 예배
말 1:6-14 / 홍문수 목사
일제시대 서양화가로 유명한 이중섭(1916~1956) 화백의 일화입니다. 한번은 그의 절친한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문병을 가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내심 섭섭해 있었는데, 며칠 후에서야 이 화백이 나타났습니다. 친구는 반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무척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오는가?” “미안해. 벌써 찾아오려고 했지만 빈손으로 올 수 있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빈손으로 오면 어때서. 자네가 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당시 이 화백은 아주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들고 온 꾸러미를 친구에게 멋쩍은 듯 내밀었습니다. “이게 뭔가?” “내 정성일세. 실은 이걸 갖고 오느라고 늦었네.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게나.”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맙네.” 친구는 꾸러미를 풀어보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림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림인가?” “천도(天桃)를 그린거야.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마음으로라도 이걸 먹고 얼른 일어나게.” 과일을 사다 줄 돈이 없어서 복숭아를 그려 갖고 온 것입니다. 그 마음은 천도 복숭아 몇 트럭보다도 더 아름답고 귀중한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친구의 마음에 영원히 남는 최상의 선물이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주고받음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만일 마음의 주고받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남남과도 같을 겁니다. 예를 들어 한 지붕 밑에 살아도 가장 가깝다고 하는 부부 관계나 부모 자식 관계라 할지라도 마음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멀고 먼 사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표현하면 하나님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나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 이게 곧 예배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형식이나 모양도 중요합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 역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식을 가급적이면 아름답고 단정하게 꾸밀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 마음이 담뿍 담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순서마다 요소요소에 나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주일에 이어 예배에 관한 두 번째 메시지로 ‘마음을 드리는 예배’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우리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더 나아가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라기서는 주전 5세기 중엽에 기록된 책으로 구약성경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당시 이스라엘의 잘못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잘못된 예배 생활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 생활, 더 나아가 인생의 중심이 곧 예배이므로 말라기는 예배에 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잘못되면 심령 상태가 잘못되고, 도덕성이 흔들리고, 결국은 모든 삶이 부패하고 뒤틀리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예배에서 실패하고, 그로 인해 도덕적인 부패와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1] 하나님께 거절당한 예배 : 마음이 빠져버린 예배
본문은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이 주어진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메시지가 얼마나 강렬한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본문 6절~14절을 보면 9개 절인데,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는 표현이 조금씩 형태가 달라진 것까지 포함하면 무려 8번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6절에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 ”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 9절, 10절, 11절, 1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13절(하)에서는 “ ...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그리고 14절(하)에서는 “ ...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엄하신 모습으로 책망하며 말씀하고 계신지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①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배 관행 :
하나님은 지금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백성들을 선도할 제사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예배 관행에 젖어 있는지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습니다. 7절 보면 하나님의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린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떡이란 더러운 짐승 제물을 가리킵니다. 레22:19~22의 제시된 기준에 의하면 제물은 흠없는 숫컷이어야 하고, 눈먼 것이나 상한 것 등 조그만 흠이 있어도 안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흠 투성이인 제물을 제단에 바쳤던 것입니다. 8절 보면 그 구체적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 등을 드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차피 죽을 것들이며 어차피 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쳤다기보다 처리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골라서 좋은 것을 드린 게 아니라, 골라서 나쁜 것을 처리한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엉터리 제사를 드리면서도 투덜거렸다는 사실입니다. 13절 보면, 그들은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하며 불평했습니다. 번폐스럽다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다는 뜻입니다.
이런 왜곡된 제사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14절 보면 하나님은 아예 그들이 사기를 쳤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오죽 하면 그런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② 이스라엘의 가증스러움 :
그런 제사를 멀쩡히 드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한 마디로 가증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빠져버린 헛된 예배요 실패한 예배였습니다. 6절 보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빗대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인간 관계들 속에서라도 당연히 공경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전혀없다는 겁니다. 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 ”
이런 문제는 구약 이스라엘 가운데 고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엿습니다. 사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 나중에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마15:7~8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음이 빠져버린 신앙과 예배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아마 하나님으로서는 구역질이 날 정도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8절. “ ...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이렇게 해놓고도 하나님 앞에 은혜와 축복은 받고 싶어 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9절 보면 그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탄식하며 말씀합니다. “ ...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이 바로 이겁니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 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 외식적인 예배, 타성에 젖은 예배, 억지로 하는 예배, 성의없는 예배였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가증스러운 예배였고, 그들은 철저히 예배의 실패자였습니다.
③ 하나님의 거부 :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거절하시고, 그들 자신조차 거부하십니다. 9절(하) 보면 하나님이 반문하십니다. “ ...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통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4절. “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게 거부당한 인생이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습니까?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비극적인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 마음을 드리는 예배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이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백성을 일으키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새 이스라엘입니다. 말라기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으로 예언합니다. 그 중에 한 말씀이 바로 1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기서 ‘깨끗한 제물’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된 성도들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정해진 성전에서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영이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성령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 찬양, 감사 등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모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참조) 따라서 마음을 담지 않은 그 어떤 예배 순서도 무의미합니다. 잠23:26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 ” 마음을 달라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유일한 소원인 것입니다.
어느 아프리카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추장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됐습니다. 추장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신발을 선교사에게 가져와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추장의 신발을 원치 않으십니다.” 추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장 좋은 말 한 필을 끌고 와서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선교사는 하나님이 말을 원치 않으신다고 대답했습니다. 당황한 추장은 이번에는 추장의 지위의 상징인 깃털이 달린 모자를 들고 왔습니다. 선교사는 여전히 머리를 저었습니다. 추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외쳤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가장 아끼던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제 생명뿐입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원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추장은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예수님을 위해 바치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돈 몇 푼, 몇 시간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인 참 예배요 참 신앙입니다. 시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가 많이 나옵니다. 고라 자손의 시의 중요한 특징은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점입니다. 시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고라 자손은 무명 인사지만 시편에 여러 편의 시를 남기게 된 이유는 그의 진실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게 참 신앙 고백이요 참 예배인 것입니다.
[3] 오늘 우리의 예배 점검 : 참 예배를 위한 체크 리스트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예배 생활을 한번 찬찬히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예배 순서마다 마음을 담아 드리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마음을 드리는 예배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의 의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예배를 본다’는 말을 씁니다. 그 말은 예배의 기본 정신에서 한참 벗어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즉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닙니다. 구경하거나 관람, 감상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 어떻게 하나 보자, 찬양대가 어떻게 하나 보자, 대표 기도자가 어떻게 하나 보자 이게 아닙니다. 모든 순서 순서에 나의 마음을 가득 실어야 합니다. 감상자가 있다면 오직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관해서는 말도 바르게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가 바로 드려질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드리는 예배를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유의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① 예배의 준비 :
예배에 우리의 마음이 실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준비의 소홀입니다. 정성스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준비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주일예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토요일부터 미리 예배 준비가 이뤄져야 합니다. 설교자나 찬양대원, 대표 기도자, 안내위원 등 예배위원만 준비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든 성도들이 예배자요 예배위원이므로 성도 각자가 준비해야 됩니다. 한 주간 동안 바로 살아야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세상의 죄악에 물든 게 있었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정결한 마음이 준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이 위대하심과 놀라운 은혜를 묵상함으로써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예배 순서담당자,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이런 준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예배는 정말 엄청난 차이가 날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자기 할머니를 추억하면서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어린 시절에는 물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지금은 천국에 가 계신 할머니의 아름다운 옛모습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고 고백했습니다. 청년은 특히 할머님의 예배 준비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할머니는 토요일이 되면 갖고 계신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잘 세탁하고 다려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헌금할 지폐를 물을 축여가면서 인두로 잘 다려놓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하고 번거로워 보여서 그 이유를 여쭤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오히려 질문을 하는 손자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답니다. “얘,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가정해 봐라. 얼마나 준비한다고 야단이겠니?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 예배드리러 가는데 아무 준비 없이 가서야 되겠니?”
물론 우리가 이 할머니와 꼭 같이 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성스런 자세만큼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리라 믿습니다.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정성을 들여 준비할 때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마음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 마음이 예배의 실제 속에 반영되어서 하나님께 올려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은혜와 복을 충만히 내려 주십니다.
② 예배의 실제 :
예배를 잘 준비하면 벌써 예배의 살제 상황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기뻐받으시고 은혜를 내리십니다. 그리고 준비한 사람은 당연히 시간도 잘 지킵니다. 간혹 사정으로 시간이 늦어져도 미리 준비한 사람은 훨씬 낫습니다. 그렇지 않고 준비 없이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은 결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위치나 자세도 중요합니다.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야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편적으로는 앞 자리에 앉는 게 좋습니다. 집중력이 달라집니다.
매 순서마다 긴장감을 갖고 임해야 합니다. 딴 생각을 한다든지 다른 일을 하면 그 예배는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봉사자들은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됩니다. 예배 시간에도 봉사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이런 저런 것으로 방해 받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는 가급적 1부 예배를 드리면 좋습니다.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한 예배를 드린 후에 봉사하면 최선의 봉사가 될 겁니다.
모든 순서에 최선을 다하고, 특히 헌금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분량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많든 적든 반드시 그 속에 마음이 담겨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막12: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부자들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헌금에 담겨진 마음의 간절함과 진실함의 크기입니다.
이렇게 예배 준비 과정이나 실제에 있어 마음을 드릴 때 우리는 예배의 승리자가 됩니다. 또한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은혜를 풍성히 부어주십니다. 삼상2:30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배에 실패한 엘리 제사장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 말씀의 경고대로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귀중히 여기던 엘리는 제사에도 실패하고 가정과 인생에서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그를 하나님이 경멸하신 겁니다.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즉 예배 태도가 곧 하나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마음을 드리는 참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복된 인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말 1:6-9 / 허태성 목사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4지 선다형 문제 하나를 내보려 한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을 때의 주님께 대한 사랑과 현재 가지고 있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비교해 본다면 어떠한가?( )
①지금 더 깊어졌다. ②예전과 같다. ③옛날보다 더 못하다. ④잘 모르겠다.
그 사랑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을까? 주님께 대한 공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립 서비스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사랑하면 행동으로 공경을 한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하여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번에는 질문하신다.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일반적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아들은 아비를 공경한다. 종은 주인을 공경한다. 심지어 미물인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안다(사1:3). 그런데 너희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왜 공경하지 않느냐?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질문에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 지난 주일 말씀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제사를 빼놓지 않고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공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시며 그 증거를 몇 가지 제시하신다.
1.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징후들 : 불경스런 제사(예배)
1)이스라엘은 더러운 떡을 주의 단에 드렸다(1:7).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더럽다고 하신다. 만일 실제로 이스라엘이 더러운 떡을 드렸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주의 상은 경히 여길 것이라' 이 말은 대충해도 된다는 말이다. '뭐 꼭 그렇게 정성을 드릴 필요 없어.' 마치 처삼촌 묘 벌초하듯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안 할 수는 없고 제대로 할 맘은 없고.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원하신다.
2)이스라엘은 성의가 없는 예배를 드렸다(1:8). 눈먼 것이나 저는 것 그리고 병든 것으로 제물을 드렸다. 레22;18-25에 보면 이런 것은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물은 희생 제물이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는 제물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러기에 순전한 것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귀하게 아끼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드리는 것이다. 성의 없는 제물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한 가지 시험을 해 보라고 제안하신다. 총독한테 그런 것들을 선물로 바쳐봐라. 그가 기뻐하면서 받나 안 받나 봐라. 그런데 너희는 나를 총독만큼도 공경하지 않고 있다. 그러고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하니 내가 하나나 받겠느냐?
2.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1)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방식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마치 아기가 자기 입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것을 물려주어야만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2)영적 지도자(제사장)의 신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들의 눈치를 더 살피고 있었다. 제사장들은 잘못된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서 거절했어야 했다. 혹 백성들은 몰라도 제사장들은 그 제물이 하나님께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고 타협했다. 백성들의 죄를 꾸짖지 못했다. 혹 그나마 그런 제물마저도 안 가져오면 자신들의 식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리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는 법이다.
3.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눈을 열어 주의 사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그러기 위해서 먼저 왜 나의 눈이 감겼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죄, 탐욕을 버리지 못한 죄, 주님의 자리에 내가 스스로 올라가서 교만하게 행한 죄,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은 죄를 회개하자.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다시 깊이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우리는 회개할 힘도 없고 깨달을 지혜도 없고 사랑할 마음도 없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들을 주셔야 한다. 그렇게 해 주시면 공경하게 된다. 예배를 바로 드리게 된다. 주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면서도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제사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오늘은 신약시대이기에 구약적인 의미의 제사장은 없다. 예수님이 마지막 제사장이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목사, 전도사, 선교사, 장로, 주일학교 교사, 남편, 부모,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제사장이다. 제사장인 나부터 주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그래야 영적 타락을 막을 수 있다. 자신의 경건과 신앙이 허물어졌는데 어찌 남을 보고 바로 하라고 할 수 있는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날마다 더 자라가야 한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넘쳐나야 한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주님을 사랑하다고 공경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가을에 말라기서를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듣는 모든 강변가족에게 주의 사랑이 넘쳐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사랑 경고
말 1:8-11 / 박형근 목사
오늘 읽어드린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에 있지요. 말 1:1에‘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하는데, 말라기란 이름의 뜻은‘나의 사자’입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선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예수를 믿음으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경고입니다. 설교 제목을‘하나님의 사랑 경고’라 한 것은, 하나님이 벌하거나 겁주려고 경고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너희들 그러지 말고 돌아서서 주님의 복을 누리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말라기서는 주전 430년경 써진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백여 년 지난 때입니다. 근근이 유대민족과 여호와 신앙은 이어가지만,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지 않고, 타락하고 여호와를 등진 생활을 하지요. 여호와의 택한 백성 선민이라 하나, 계속 불평불만을 해댑니다. 말라기선지는 그런 불만을 적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알려주지요. 사랑의 하나님은 자상하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화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소망하는 메시야를 보낼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경고를 살펴봅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택한 백성, 선민이라며, 다른 민족에 비하여 사랑받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예수 믿고 힘껏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안 믿는 이보다 부요합니까? 건강합니까? 평안을 누립니까? 자녀가 잘 되었습니까? 없잖아요? 가질 수 있는 의문이지요.
하나님의 답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형 에서는 미워하였다. 죄송스러우나, 좀 엉뚱한 답 같지요. 왜 그리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형 에서를 미워하고, 동생 야곱을 사랑한 것은, 야곱이 착하나, 에서는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지요. 하나님 마음입니다. 이때 흔히 하는 말이‘엿장수가 가위질을 몇 번 할까요?’요사이는 못 보는데, 예전에는 엿 팔고 다니며, 쇠 가위로 철컥 철컥 가위질을 했지요.‘두 번, 세 번?’답은‘엿장수 마음대로.’죄송하나, 하나님 주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안 믿는 이보다, 더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뜻으로 선택을 받아, 믿고 하나님 자녀,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하나님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지요. 우리는‘하나님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할 게 아니라, 부족한 날 택해주신 걸 감사해야지요. 이처럼, 사랑을 깨닫는 이는‘하나님이 어떻게 날 사랑하셨어요?’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건강하고 부요하게 살고 싶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나를 택해주신 것만으로도, 주님 사랑에 감사하며 삽니다. 이를 알려주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살핍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위엄을 떨치느라, 들판에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고, 풍악이 울릴 때 모든 백성이 절하라 하는데, 다니엘 친구들은 절하지 않지요. 평소, 그들이 왕의 사랑받는 것을 질투하던 동료들이‘왕이여, 저들이 절하지 않습니다.’
왕이, 다니엘 친구들을 불러‘기회를 줄 테니 풍악이 울리면 절해라, 하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 불에 던질 것이다.’세 친구는‘하나님이 구해주실 겁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타 죽더라도 절하지 않습니다.’마음에 품을 구절입니다.‘그리하지 않으실지라도.’(복창)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 불에 타죽더라도, 절하지 않는 것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우상에 절하는 것은, 세상과의 타협이요, 돈, 명예,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는, 그런 것이 없더라도, 나는 오직 주만 믿고 따릅니다. 믿고 살아보니, 하나님의 날 사랑을 알겠고, 하나님이 가장 믿음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겐, 다니엘 친구들이 모르던 더 크고 확실한 하나님 은혜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저처럼 찢어짐으로, 누구나 지성소 여호와께 나가게 되었습니다.‘하나님 아버지!’부를 때, 여호와 앞에 설 수 있으니, 믿는 여러분은 누구나 언제든,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갈 수 있지요.
자주‘하나님!’외치며,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쓰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선 듯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누릴 가장 큰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것을 믿는 이 입에서‘내게 하나님이 해주신 게 뭐야요?’나올 말이 아니지요. 그다음은, 여호와께서 제사장들을 질책하십니다. 요사이로 목회자를 향하신 경고인데, 내용을 보면,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6절에‘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는데, 내가 너희 아버지인데 어찌 나를 공경하지 않느냐?’하시니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그러는 제사장들에게, 제단에 떡을 바칠 때 더러운 떡을 바치고, 눈먼 것이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친 것이, 나를 멸시한 것이 아니냐 하십니다. 다음 말씀으로, 뜻이 선명해집니다.‘너희가 총독에게 그렇게 드려보라 그가 너희를 기뻐하고 받아 주겠느냐?’총독에겐 좋은 것을 바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아무거나 바쳤지요. 요사이로 목사가 설교를 건성하거나 거짓 설교를 하는 것이고, 성도들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지 않는 것이지요.
아울러, 말 3:13 이하에‘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완악한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 즉 금식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뿐아니라, 교만한 자가 복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합니다.
요샛말로, 예수 믿고 교회가 다니는 건 말짱 꽝이야. 우리는 어렵게 근근이 사는데, 안 믿고 마구 사는 이는 오히려 잘 사니,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고, 하나님 명령을 지키거나, 금식하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어, 하는 것이, 주를 대적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가끔 이런 말을 하지 않나요?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생각이지요.
우리가 오늘도 드린 참회의 기도는, 예배를 시작하며,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씻음을 받고, 주님 앞에 깨끗하게 나가기 위해서지요.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회개로 비워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혹, 우리 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으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 기뻐 받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가 듣기 힘든 말씀 두 가지 하십니다.
하나는‘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해봐라.’너희가 잘못 행했으니 어찌 하나라도 들어주겠느냐? 하나님이 어찌 그리 째째하시냐, 하렵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믿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 따라서 복 받고, 기도도 응답도 받으니, 사랑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반대로, 듣지 않아 잘못된 길을 가고, 기도해도 응답 못 받는 것과 180도 다르지요.
둘째로, 말 1:10절에 여호와께서‘너희가 내 제단에 헛되이 제물을 불사르지 못하게 성전 문을 닫는 자가 있으면 좋겠다, 너희를 기뻐하지 않고, 제물도 받지 않을 테니까.’헛된 예배를 드릴 바에는 아예 예배를 드리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오죽 답답하시면 그리 말씀하실까요? 요사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예배드리기 힘듭니다. 성전의 문을 닫은 것은 아니지만, 성도로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혹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얹잖은 것은 아닌가, 스스로 살필 때라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교인은 교회에 안 나와서 좋다는 분, 집에서 티브로 예배를 드리니 편하다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아니지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더 바른 믿음을 찾아가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 말 2:17는‘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그 말은‘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되는데, 즉, 악을 행하는 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그러고도 정의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어요?’시73편의 내용도 같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불의를 행하며 입으로 하나님을 향한 막말을 하는 자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잘 사는데,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면 그럴 수 있습니까? 시편 시인의 답은 무엇이지요? 그들이 순식간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정의를 깨닫습니다. 이 땅의 삶만으론 성경의 의문에,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 땅은 잠시오, 천국은 좋고 영원함을 믿으면‘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 더 살피면 말 3:8 에‘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습니까?’내가 열심히 일하고 벌어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고, 내 마음 따라 헌금하는데, 왜 주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합니까? 저는 헌금에 대해 자주 말씀드리지 않지요. 성경에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하는 헌금을 하나님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수요, 금요기도회로 모여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교회와 학사의 채워주실 것을 간구하고, 매월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심을 주님께 감사드리지요.
주님의 약속 말씀인 말 3:10을 줄이면‘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지 아닌지 나를 시험해 보라.’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쓰고 십분의 일만 헌금해라. 그러면 풍성한 복을 내려 주리라.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을 드리고, 하늘의 복도 받으니 좋지 않습니까?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이제 마지막 살필 것은, 유대 백성들이 한‘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돌아가리이까?’질문에, 답은 거의 나왔지요. 앞의 것들이 답입니다. 우리는 허물 가운데 살 때, 하나님이 먼저 선택하셔서 믿고 구원받아 영원을 누릴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 왜 나를 사랑치 않습니까? 할 수 없지요. 믿어도 별 소용없다, 안 믿는 이가 복을 받는다는 등,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앞에 보는 듯, 정성을 다해 섬깁니다. 그리 살기에 힘쓰면, 주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요.
여호와께서 말 3:1에‘너희가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를 보내신다.’말씀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을 고치지 못했음에도,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시지요. 더 고마운 것은, 하나님 은혜가 땅 끝까지 미친다고 하신 것이, 우리가 이렇게 예수 믿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이뤄졌습니다. 말라기의 하나님 언약은, 이천 년 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오심을 통해 이뤄진 후, 복음이 전 세계로 퍼졌지요.
이를 아는 우리는, 아직 남은 약속인 여호와께서 당신의 때에 예수님을 다시 보낼 것을 믿고, 대비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그대로 이뤄졌음을 보며, 앞으로도 그리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말씀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당신이 정한 날에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는 자를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또는, 생명책) 에 기록하시고, 그들을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라 하시지요.
얼마나 귀한 약속의 말씀입니까? 반면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이 불살라 그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 하시지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성도답게 살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뻐 뛰며 삽니다. 어두운 외양간에 갇혀서, 주는 먹이로 근근이 살다가, 도살장에 끌려가 죽는 소 같은 인생이 아니라, 풀려난 인생, 주님의 밝은 빛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기쁘고 활기차게 살라고, 말라기선지를 통해 하나님은 사랑의 경고와, 귀한 약속을 하셨지요. 정리합니다. 오늘 나눈 이스라엘 백성들의 질문은, 오늘날 교회 다니는 이들도 흔히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 내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나 살피며, 질문에 하나님이 하신 답을, 성경 말씀으로 헤아리면, 자신이 사랑받은 성도, 천국을 약속받은 성도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인 내가 할 일은, 이 땅에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푸른 초장을 펄쩍펄쩍 뛰며 즐겁게 살다가, 때가 되면 저 천국에서 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이걸 깨닫고 그리 살도록 도우십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하라!
말 1:10-14 / 허태성 목사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남의 눈치를 봐야하기 때문에 그대로 다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눈치를 보시지 않기 때문에 하실 말씀은 다 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차마 하실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누군가가 성전 문을 닫아 주면 좋겠다고 하신다. 지금처럼 하려면 성전 문을 걸어 잠그고 복덕방에 내놓으면 더 낫겠다는 말씀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상하셨을까? 무슨 일이 있기에 이토록 화가 나셨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으로 대접을 받고 있나?
1.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기에 당신의 이름이 크게 되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은 매우 위대하신 분이시다(God is very great).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God is everywhere).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God knows all things).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God is holy).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God is almighty).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God is faithful).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의 대사를 행하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그 아들을 보내셨다(God sent His Son). 따라서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으로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 중에서도 당신의 이름이 크게 되기를 원하신다(1:11).
2. 이스라엘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섬겨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그들의 예배는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신 하나님이라도 참기에 너무 역겨운 예배였다.
①그들은 성의가 없는 예배를 드렸다(1:7-8). ; 더러운 떡
②그들은 무분별한 예배를 드렸다(1:8-9). ; 눈먼 희생, 저는 것, 병든 것
③그들은 모독적인 예배를 드렸다(1:12-13). ; 코웃음, 토색한 물건, 저는 것, 병든 것
④그들은 위선적인 예배를 드렸다(1:14). ; 흠 없는 수컷이 있는데도 흠 있는 것으로 드림
이러한 예배는 다 헛된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3.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러한 예배를 드렸을까?
제사장들이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어버렸다. 제사장들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해 버렸다. 그 결과로서 온 이스라엘의 예배의 수준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최상의 것으로 예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께 최하의 것을 드렸다. 그 결과로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제대로 영광을 받으실 새로운 민족을 이방 가운데 세우셨다. 만일 우리들도 제대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자.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하는 삶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주님을 크게 하면 주께서 그를 크게 하신다. 주님을 작게 하면 그도 역시 작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