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는 병들어 말라 비틀어져도
··································· 병든 국화의 그림, ‘병국도(病菊圖)’ 앞에서
능호관(원령) 이인상 선생의 ‘병국도(病菊圖)’를 감상하면 그 감흥이 경이롭다.
낙목한천(落木寒天)에 홀로 피는 꽃이 국화다. 서리가 그 꽃의 빛깔을 지울 수 없고 삭풍(朔風)이 그 꽃잎을 지게 할 수 없으니 국화는 어엿한 오상고절(傲霜孤節)이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남송의 문인 정사초가 국화의 고집을 시로 읊었을까. ‘차라리 향기를 안고 가지 끝에서 죽을지언정, 어찌 부는 북풍에 휩쓸려 꽃잎을 떨구겠는가!’ 하지만 보라, 이 그림의 국화가 얼마나 가여운가를. 고색 짖은 바윗돌 앞에 국화는 힘에 벅찬 꼴로 서있다. 모가지는 죄다 꺾이고 잎사귀는 모다 오그라들었다. 두 그루 구드러진 가지는 곁에 가냘픈 기둥처럼 선 대나무에 기대 버틸 따름이다. 쇠망하는 국화일러니 그 향기인들 고스란할까. 말라비틀어진 모습은 가엽다 못해 가슴이 다 아리다. 화면 귀퉁이에 적은 사연이 있다. ‘남계(南溪)에서 겨울날 우연히 병든 국화를 그리다’ 팔팔하고 생생한 국화 다 놔두고 굳이 시든 꽃을 그린 이는 누군가?
그는 문자기(文字氣)로 이름 높은 조선의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 선생이다. 그는 함양의 옛 이름인 사근도에서 찰방 자리를 관둘 무렵, 명품 국화인 조홍(鳥紅)을 심었다. 오래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 보니 국화는 잔향을 품은 채 애처로이 시들고 있었다. 이인상은 다시 생기를 찾지 못하는 국화를 옹호한다. 그는 바짝 마른 붓질로 사위어가는 국화를 그린 뒤 아는 이에게 편지로 알리기를 ‘목숨을 아끼려는 구실로 천성(天性)을 바꿔야 하는가!’라고 했다. 국화는 살아남고자 구차한 욕심 부리지 않는다. 비록 단명할지언정 절개를 저버리는 일이 없다. 화가는 구차한 일상에 수그리는 세상을 꾸짖는 듯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버리면 군자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경(經)의 철학’을 말하는 듯하다.
능호관 이인상 선생은 병들어 시든 국화를 메마른 먹색으로 그렸다. 국화 그림은 꽃이 발랄하거나 야취 물씬한 것을 으뜸으로 친다. 가장 늦게 피고 가장 늦도록 향기를 잃지 않아 그 끈질긴 정절(貞節)을 칭송받는 것이 국화다. 참으로 별스러운 것이, 화가는 상쾌한 국화를 놔두고 굳이 시름시름 앓아 비틀어진 국화를 찾아냈다. 꽃송이들이 고개를 꺾은 채 쇠잔한 가지에 매달린 모습은 처연하다 못해 참담할 정도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빈사상태(瀕死狀態)에 놓인 국화를 그렸을까. 빼어난 명문가의 서출 신분으로 높은 식견에도 미관말직(微官末職)에 봉사한 그의 반평생이 한스러워서였을까? 남들은 이 그림에서 화가의 긴 고난을 헤아리기도 하지만 나는 이인상 선생의 풍자를 엿본다.
국화는 가을 서릿발처럼 오만하고 고고한 절개를 상징한다. 하지만 시절의 다그침을 못 이겨 초심을 저버린 군자는 쇠락하는 국화의 몰골을 닮는다. 화가는 군자의 변심을 병든 국화의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 혹 아닐까 한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말라 비틀어져도 오상고절의 국화는 마지막까지 그 고상한 향기를 잃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지조(志操) 높은 선비가 모진 고난으로 비록 죽어가더라도 그 지조를 결코 잃지 않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이런 고결한 선비가 많이 있었는데, 화가의 조상인 백강 이경여, 한포재 이건명, 소재 이이명 등 다수의 선비들이 대대로 모두 그러하여 가풍을 이루었는데 화가도 여기에 속했던 것이다.
2024. 7. 4. 素澹
첨부 그림 : 능호관 이인상 선생, ‘병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