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한 길보다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
장자(莊子) 외편(外編) 12편 천지편(天地篇) 第11장에 기계문명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子貢南遊於楚反於晉 過漢陰見一丈人方將爲圃畦 鑿隧而入井 抱甕而出灌 搰搰然用力甚多 而見功寡 子貢曰 有械於此一日浸百畦 用力甚寡而見功多 夫子不欲乎 爲圃者卬而視之曰 奈何 曰鑿木爲機後重前輕 挈水若抽數如泆湯 其名爲橰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子貢)이 남쪽 초(楚)나라를 여행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올 때였다. 한수(漢水)의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야채밭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았다. 손으로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항아리로 물을 담아 날라 밭에 물을 대고 있었다. 힘은 많이 쓰지만 효과는 적었다. 자공(子貢)이 노인에게 말을 건냈다.
“물을 퍼 올리는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백 이랑이나 물을 댈 수 있습니다. 힘은 아주 조금 들이고 효과는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어르신은 그와 같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까?”
노인이 일을 멈추고 자공(子貢)을 보고 되물었다. “어떻게 하는 건데?”
자공(子貢)이 대답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들되 뒤쪽은 무겁고 앞쪽은 가볍게 하여 잡아당기듯 물을 끌어올리는데 콸콸 넘치듯이 양이 많고 빠릅니다. 그 이름은 “두레박(고橰)”이라고 합니다.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必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자공(子貢)의 말을 들은 노인은 순간 불끈 얼굴빛을 붉혔다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은 말이 있다. “기계를 갖게 되면 반드시 기계로 인한 일이 생기고, 기계로 인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로 인한 욕심(機心기심)이 생기고,
기심(機心)이 가슴속에 있으면 순수 결백(潔白)함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순수 결백(潔白)함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신통하고 묘(神妙)한 본성(本性)이 안정(安定)을 잃게 된다.
태생적(胎生的) 성품이 불안정(不安定)한 자에게는 도(道)가 깃들지 않는다.” 라고 했다.
내가 “두레박의 편리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내 소중한 육신(肉身)을 두고 조금 편리함만 생각하여 너무 기계에 의존하여 조물주가 준 몸을 게으르게 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기계를 쓰지 않을 뿐이다.”
子貢瞞然慙 俯而不對有閒 爲圃者曰 子奚爲者邪 曰孔丘之徒也 노인의 말을 들은 자공(子貢)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자공이 말했다. “공자(孔子)의 제자입니다”
爲圃者曰 子非夫博學以擬聖 於于以蓋衆 獨弦哀歌 以賣名聲於天下者乎 汝方將忘汝神氣 墮汝形骸而庶幾乎 而身之不能治 而何暇治天下乎 子往矣無乏吾事 노인이 말했다. “그대는 배운 것이 많고 학식(學識)이 넓은 사람(博學)으로 소문나있다. 성인(聖人) 흉내를 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서,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목소리로 노래하여, 온 천하에 명성(名聲)을 팔려는 자가 아닌가. 그대는 지금이라도 그대의 그 잘난체 함을 버려야만 도(道)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대의 몸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그대는 이만 가보시게. 내가 하는 일 방해 말고.”
필자는 설악산에 갈 때마다 케이블카 생각이 난다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찬성 반대 환경과 이용의 절충점 찾아야 (2014.01.13. 조선일보)
위의 신문기사처럼 찬성과 반대로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필자 생각은 저 운무(雲霧)속에 있는 설악산을 사람이 능력껏 올라가야 설악산의 신비로움을 즐길 수 있지 케이블카로 쉽게 올라가서 보면 그게 무슨 설악산을 즐기는 것인가?
끝까지 올라가는 사람, 중간까지 가는 사람, 처음 출발하다 그치는 사람등 능력껏 올라가는 것 이것이 설악산을 사랑하고 신비롭게 여기는 아닐까
TV방송에서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티벧 등의 불교 신앙인들을 본다. 불교인이 아니라서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탁발(托鉢) 오체투지(五體投地)등 스님들의 생활하는 모습은 2500여 년 전의 부처님 시대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방송에서는 말한다.
수행자들은 옷차림이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걷는 모습을 본다. 겉으로 볼 때는 너무 비효율적이고 현대감각에 뒤떨어진 모습이다.
한국승려들의 화려한 옷차림과 편리하게 생활하는 것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물론 나라마다 불교에 대한 (소승불교 대승불교) 수행(修行) 방법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이지만 종교가 세상의 변화에 따라 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방송 TV 인터넷으로 종교를 선전하는 것도 종교의 본질을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양(量)이나 질이 아니라 종교 근본(根本)의 목적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불교는 반야파라밀다심경을 바탕으로 기독교는 주기도문을 기본으로---
위에 자공(子貢)과 대화한 노인처럼 종교도 세상 따라 산다면 그게 중생의 삶이지 어디 종교라 할 수 있겠는가?
IT산업시대로 인해 인공지능(AI)가 지금까지 영위(營爲)하여온 인간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라 단언(斷言)한다.
일반 사람들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일일이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과학의 발달로 사람생활이 너무 편해졌다 사람의 살아있다는 증거인 움직임이 싫어졌다.
움직이기 싫어한다는 것은 인간의 큰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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