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한때 저것은
쩔쩔 끓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철로 굳어지기 전, 철길이 되기 이전
그때는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세상을 벌겋게 달구기도 했을 것이다
단단한 쇠파이프나
창, 칼, 망치 같은 것이 되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벽을 뚫거나 부수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 한 끼를 위해 추운 거리를 헤매는 이들을 떠올려
뜨끈한 밥과 국물을 담아주는 식판이나 국자를
상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 교향곡에 담겨 절절한 사랑노래를 부르고도
종소리에 실려 널리 울려 퍼지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굳어지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
그래서 철은 길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저 길을 보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해 하염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차디찬 현실과 뜨거운 심장이 동시에 멎는
자살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 길로 방금 열차 하나가 지나갔다
바퀴가 지날 때마다 더 낮아지고 단단해지는 철길을 보며
또 누군가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 김순아 -
고교 교사 시절 1학년 신입생을 받으면 매번 장래 희망을 적어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희망하는 대학은 요즘 흔히 말하는 SKY였다. 직업으로는 검사, 의사, 대기업 회장, 국회의원…… 등을 써낸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가 다시 적어보라고 하면 SKY가 아니라 그냥 4년제 대학이었고, 3학년이 되어서는 그저 인서울(In Seoul)로도 족했다. 정작 수능이 끝나고 나면 적성이나 취향과 아무런 상관없이 성적에 맞추어 지방 2년제라도 감지덕지였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는 오로지 취업만 되다면……으로 바뀐다. 맞다. 고교 3년 동안에도 그렇게 변하는데, 어린 시절의 꿈을 그 꿈 그대로 이루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순아의 시 <철길>을 읽다가 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물었던 ‘장래 소망’이 떠올랐다. 물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어린 시절 꾸던 꿈을 어떻게 이루는가는 아니다. 시인은 ‘철’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시작하여 ‘철길’로 쓰인 때까지를 서술하며 그 안에 소박한 인생론을 담아낸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그러할 것이리라.
철은 철광석에서 추출한 금속이다. 그러니 용광로에서 ‘쩔쩔 끓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요 그때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세상을 벌겋게 달구기도 했’다. 게다가 ‘철로 굳어지기 전, 철길이 되기 이전’에는 나중에 무엇으로 쓰일지, 어떤 도구로 만들어질지를 꿈꾼다. 창, 칼, 망치, 식판, 국자, 악기, 종…… 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각 도구마다 나름대로의 쓰임을 생각했다. 그러나 서서히 식어지면서 생각이 바뀐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그래서 철은 길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물론 철의 생각이 아니라 시인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철길이 되어 침목 위에 누운 철을 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이는 ‘가지 않은 길’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드는 ‘자살을 꿈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여행, 출퇴근, 고향길, 기관사가 되는 꿈…… 등 사람마다 철길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할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시선이 바뀐다. ‘그 길로 방금 열차 하나가 지나갔다’고 하며 ‘바퀴가 지날 때마다 더 낮아지고 단단해’진다고 한다. 그리고는 철길 위로 달리는 그 열차를 보며, 아니 방금 지나간 열차를 보며 ‘누군가는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란다. 누구였을까. 방금 그 기차에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고향으로 온 사람일 수도 있겠고, 사업에 실패하여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려다 실패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철광석이 용광로에서 녹아 순수한 철만 뽑아졌고, 쩔쩔 끓던 쇳물이 식으며 굳어 철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철은 여러 용도로 쓰일 도구로 만들어진다. 어떤 도구로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니 세상에 공헌하는 바도 다를 것이다. 시인은 철로 만들어진 철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고 나아가 ‘조용히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철길이라 인식한다. 나아가 그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를 보며 이제는 철이 아닌 기차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식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창, 칼, 망치, 식판, 국자, 악기, 종…… 은 모두 철로 만들어진다. 같은 철인데 다른 도구로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도구들은 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쓰임은 물론 그 결과까지 달라진다. 기차 ‘바퀴가 지날 때마다 더 낮아지고 단단해지는 철길’이지만 그 위를 달리는 기차 역시 그 기차를 바라보는 사람들 숫자만큼 그 의미는 다 다를 것이다.
나는 지금 유년 시절 그리고 젊은 시절 꿈꾸었던 삶을 살고 있는가. ‘가장 낮은 몸’으로 누군가의 삶을 돕고 있는가. 그가 자식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못가진자나 불쌍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내가 ‘가장 낮은 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쥘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철로 시작하여 철길로, 다시 기차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념은 단순히 철이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철, 철길 그리고 기차…… 시인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
- 이병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