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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
부여·삼한실에서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불러오는 배경이 된 새로운 생산 기술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생활상을 소개하였다. 이 시기에는 철기를 일상 도구로 널리 사용하였으며,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어 굴가마에서 높은 온도에 토기를 굽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한의 생활과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창원 다호리 무덤’에서 나온 통나무 널과 많은 껴묻거리를 전시하고 있다. 이 자료는 중국 역사서에 남아 있는 기록과 함께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중요하다. 이와 함께 고대국가로의 성장을 촉진했던 중국 중원中原, 오르도스, 왜倭 등 주변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이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다가 사라질 무렵, 만주 지방에는 부여와 고구려, 한반도 북부 동해안 지방에는 옥저와 동예,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삼한이 자리를 잡았다. 부여는 중국과 교류하며 발전하였고,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역량을 강화하여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마한·진한·변한은 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加耶로 통합되면서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전시실 소장품
귀걸이, 구슬 : 김포 운양동 유적의 금귀걸이와 구슬은 철제 장검, 투겁창, 화살촉 등 무기류와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이 금귀걸이는 부여의 대표적인 유적인 중국 노하심老河深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금귀걸이에 달린 붉은 구슬은 부여의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여와 관련된 유물이 마한 지역인 김포 운양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볼 때 마한 지역도 부여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정 목걸이 : 투명한 수정을 여러 면으로 깎아서 만들어 엮은 이 화려한 목걸이는 김해 양동리 유적의 덧널무덤[木槨墓]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신석기시대에는 이미 옥을 가공해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대표하는 목걸이는 거의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데, 재료나 형태 등으로 시기에 따른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벽옥璧玉 같은 녹색 빛을 띠는 자연 광물을 가공해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철기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삼한시대가 되면 수정・마노・호박 등 다양한 색을 가진 재료와 중국에서 유입된 유리 제작 기술로 만든 목걸이가 유행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 사람들은 금은보다 옥과 구슬을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삼한의 무덤에서는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각종 구슬이 풍부하게 출토됩니다. 이른 시기의 수정 구슬은 평양 석암리 219호 무덤 등 기원 전후의 낙랑 무덤에 함께 묻히기 시작합니다. 그 뒤 유리 제작 기술은 경주, 김해 등과 같은 진한・변한 지역에서 더욱 발달했으며, 이 목걸이는 삼한 사람들의 뛰어난 수정 가공 기술과 화려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 줍니다. 이 밖에도 삼한의 유리 제작 기술은 더욱 발전해 거푸집을 사용하거나 잡아 늘이기, 감아 붙이기 기법 등으로 붉은색, 푸른색 등 색색의 유리구슬을 만들었습니다.
삼한의 농기구 : 삼한에서는 철로 만든 괭이, 도끼, 따비, 낫 등의 농기구로 밭을 개간하고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등 농사의 거의 모든 과정에 철기가 사용되었습니다. 농기구가 철기로 바뀌자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농작물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되었고, 수확물의 비약적 증가는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철로 만든 농기구가 당시 사회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한의 무기 : 철을 만드는 기술이 널리 퍼지면서 삼한에서도 청동 무기가 철제 무기로 바뀌었습니다. 이 시기의 철제 무기로는 예리한 강철 날을 가진 꺾창, 투겁창, 화살촉, 칼 등이 있습니다. 재질이 약한 청동제 무기는 무기라기보다는 특별한 사람들의 지위를 과시하는 도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반면에, 철제 무기는 싸움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따라서 철제 무기의 사용으로 당시 사회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말갖춤 : 말을 부리기 위한 도구인 말갖춤은 고조선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삼한 지역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말갖춤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입니다. 청동이나 철로 만든 재갈은 처음에는 단순한 프로펠러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철제품이 일반화되면서 S자 모양으로 변화되었고 끝부분에 고사리무늬를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재갈의 형태 변화와 고사리무늬 같은 장식적 요소의 등장은 말갖춤이 실용적인 도구와 의례용 도구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금제허리띠 고리 : 얇은 금판 위에 수백 개의 작은 금알갱이와 가는 금실을 붙이고 푸른 보석을 박아 장식한 금제 허리띠고리는 낙랑 유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꼽힙니다. 금실과 금알갱이로 커다란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여섯 마리의 얼굴·다리·발톱까지 세밀하고 화려하게 묘사했습니다. 현재 7개만 남아 있는 청록색 터키석은 모두 41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이 유물과 같은 기법으로 만든 금제 허리띠고리는 중국 달고성達古城에서도 출토되었습니다.
장례에 쓰이는 옥(옥벽) : 시체에 달아 무덤에 묻은 옥을 장옥이라고 합니다. 입에 물리는 함옥, 신체의 아홉 구멍을 막는 색옥, 손에 쥐는 옥돈, 가슴에 얹는 옥벽 등이 있습니다. 옥은 신령스런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는데, 매미 모양의 함옥은 부활을 의미하며 색옥은 육체의 근원인 정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돼지 모양의 옥돈은 내세에 먹을 양식의 상징으로, 옥벽은 죽은 이를 지켜 주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곰 모양 상다리 장식 :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는 식기를 비롯하여 옻칠을 한 여러 가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긴 네모꼴의 쟁반 모양 상판을 얹은 칠상은 상판의 모서리 부분에 금으로 만든 귀장식이 덧대어 있고 둘레에 금으로 만든 작은 구슬이 박혀 있습니다. 또한 상판의 아랫면 네 모서리에는 금동으로 만든 곰 모양의 상다리가 붙어 있습니다. 이 칠상은 만든 사람과 시기가 새겨져 있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새무늬 청동기 : 고성 동외동 유적의 제사터에서 출토된 새무늬청동기에는 커다란 두 마리의 새를 중심으로 모두 42마리의 새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주변에 고사리무늬, 톱니무늬, 점무늬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가장자리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있어 옷에 꿰맬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새를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는 존재로 신성하게 여겼던 고대인들은 청동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물에 새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새무늬청동기는 제사 때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출토품 : 창원 다호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목관묘군의 하나로 고대국가 형성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다호리 유적 널무덤〔木棺墓〕의 가장 큰 특징은 관 아래 무덤 바닥 한가운데 부장품을 넣기 위한 구덩이〔腰坑〕를 판 것인데, 이는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호 무덤의 구덩이에서 발견한 바구니에서는 옻칠한 칼집이 있는 한국식 동검과 철검・청동 투겁창・쇠 투겁창・화살 같은 무기류와 따비・쇠도끼 등 철로 만든 농공구류, 중국 거울과 허리띠 고리・구슬 같은 장신구, 다양한 칠기와 그 안에 담긴 곡식, 부채, 말방울, 오수전, 붓, 노끈 등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중국 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기록에는 풍부한 철광산과 제철 기술을 보유한 변한이 낙랑과 왜에도 철을 공급했으며,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호리 유적에서는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2개씩 묶은 주조철부와 중국계 유물, 야요이 토기 같은 왜계倭系 유물도 출토되었습니다. 즉 당시 변한의 지배 세력들은 철의 생산과 통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권력을 유지, 확대해 나갔습니다. 다호리 유적은 이런 변한 사회 지배층의 집단 묘지이며, 그중 가장 다양하고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1호 무덤의 주인공은 변한의 지배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호리 널무덤 : 삼한의 대표적인 집단 매장 묘역인 창원 다호리 유적의 1호 무덤은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춘 널무덤입니다. 껴묻거리구덩이와 통나무널을 가진 1호 무덤은 다른 널무덤과 큰 차이를 보이는 수장급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통나무의 속을 파내어 나무널로 사용한 점이 중국식 판자형 나무널과 다릅니다. 출토 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폐류 : 삼한 지역에서 오수전, 반량전, 화천, 화포 등 적지 않은 한나라 화폐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화폐들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초에 주조된 것들로 낙랑군이 설치된 시기에 바다를 통해 대외 교류가 빈번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나라 화폐가 출토된 유적은 대부분 서해와 남해의 여러 섬이나 해안에 자리하는데, 이곳들은 대외 교역 창구 또는 중간 거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점치는 뼈 : 이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점을 치는 일(점복)을 행했다고 합니다. 점복이 실제로 행해졌던 증거가 바로 복골(점뼈)입니다. 주로 남해안의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되는 복골은 대부분 사슴의 어깨뼈인데, 때로는 멧돼지의 뼈도 사용되었습니다. 점복은 뼈에 줄을 맞추어 가로와 세로로 점을 지져서 그 모양을 보고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점복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 즉 군사를 일으키거나 원거리 항해를 떠나기 전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농사의 풍년이나 흉년과 관련된 것도 주요한 점복의 대상이었습니다.
손칼과 칼집 : 창원 다호리 유적 1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손칼은 기원전 1세기경에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서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중국의 전국 시대와 한대 유적에서는 문방 용품으로 사용된 붓과 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연필과 지우개인 셈입니다. 당시에는 붓에 먹을 찍어 대나무쪽이나 나무판에 글을 썼고, 잘못 쓴 글자는 손칼로 깎아서 지웠습니다. 다호리 유적에서는 옻칠한 납작한 칼집에 든 손칼이 다섯 점의 붓과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쇠투겁창 [촉각 전시물] : 쇠투겁창은 투겁이 있는 쇠로 만든 창인데, 투겁은 창 밑에 긴 나무 자루를 끼울 수 있는 부분입니다. 청동으로 만든 투겁창을 모방해 더욱 단단하게 만든 쇠투겁창은 찌른다든가 던진다든가 하여 적을 죽일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이 유물의 표면을 만져보면 녹이 슬어 매우 거칩니다.
부여 (夫餘)
목차
정의
형성 및 변천
정치체제
생활형태 및 사회체제
소멸 과정
정의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濊貊族)의 국가.
형성 및 변천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 기록인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에서는,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쪽 탁리국(橐離國)에서부터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부여국의 중심집단이 어느 시기에 이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이동 시기나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근래 북류 송화강과 눈강(嫩江)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인 조원(肇源)의 백금보(白今寶)문화나 대안(大安)의 한서(漢書)문화를 동명 집단의 원주지인 탁리국의 문화로 간주하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성이 부족하다.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烏桓)·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挹婁)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부여국의 중심지역인 부여성(夫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장춘(長春)·농안(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부여성은 고구려의 북부여성이며 발해의 부여부(扶餘府)인데,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한 뒤 부여부 지역에 황룡부(黃龍府)를 설치했고, 그것이 금대(金代)에 융안부(隆安府)가 되며 오늘날의 농안부근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황금의 명산지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完顔部)의 발흥지인 아성(阿城)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창도(昌圖) 북쪽의 사면성(四面城) 지역으로 보는 설, 북류 송화강 하류의 오늘날의 부여(扶餘)로 추정하는 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이들 지역에서 뚜렷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서, 산성이 있고 한대(漢代)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던 길림시(吉林市) 일대를 부여국의 중심지로 비정하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나아가 길림시 지역이 부여국의 초기 중심지였고, 농안 부근은 후기 중심지였다고 여기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정치체제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부족연맹체적인 성격을 지녔다. 왕은 일정한 가계(家系)에서 나왔을 것이나 선임(選任)의 유제가 강하게 존속하였다.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왕은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짙게 띠고 있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영해준다.
그 뒤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갔다.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依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행해졌다. 특히, 마여가 죽은 뒤 아들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그러한 면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부자상속의 관행이 확고히 정립되지 못했고, 친족집단의 분화도 깊히 진전되지 못해 공동체적 요소는 상당히 잔존해 있었다.
당시 중앙에는 왕 아래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 가(加)는 수장(首長)으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가들이 각기의 읍락들을 통솔하였다. 대가(大加)는 수천호를, 소가(小加)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가들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참전하였다.
왕은 가들의 대표로서 군림했으나, 초월적인 권력자는 되지 못하였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의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의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제압하는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20년 위구태(尉仇台)는 부여왕자로서, 136년에는 부여왕으로서 직접 한(漢)나라를 방문했고, 한은 그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또한 위구태는 당시 요동의 지배자였던 공손탁(公孫度)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244∼245)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부여를 방문했고, 부여는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였다. 양측 간에는 그 뒤에도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한편, 부여는 동으로 읍루족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220년대 초 읍루가 떨어져나가자 몇 번 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끝내 평정하지 못하였다.
생활형태 및 사회체제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인들은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장례는 5월장이었다.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婚納金)으로 소와 말을 보내었다.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부인의 질투를 미워해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가져다가 썩게 내버려두었다가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하는데, 이는 혼인 때의 혼납금을 되돌려주는 형식이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였다. 이처럼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이 선호혼(選好婚)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은 당시 부여사회에서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도 취수혼이 성행하였는데 부여의 상황과 비슷한 면을 지녔다.
12월에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거행하였다.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때에 축제를 거행함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했다.
축제기간 중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기면서 서로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이 때 죄수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단행했고, 일부 가벼운 죄를 범한 자들은 석방하였다.
수도에 전국의 가(加)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지내고 지난 한해를 결산하며 주요 문제를 토의하여,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직도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미비하고, 지방 각지에서 읍락들을 지배하고 있던 가(加)들의 자치력이 강하던 상황에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국의 국가구조에서 기본 단위를 이루었던 것이 읍락이다. 각 읍락에는 우두머리(渠帥)인 호민이 있으며 그 밑에 일반민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읍락민이 하호(下戶)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하호는 당시 중국에서 빈한한 소작농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기록에 의거해 부여의 읍락민을 노예나 농노로 규정하는 설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 부여의 읍락에는 철제 농기구가 부족하고 특히 보습과 같은 대형의 농기구는 주로 호민이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농업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수확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읍락민은 농경 등의 일상생활을 호민의 주재 하에서 영위하고 통제를 받았다.
부여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위나라 사람이 보았을 때, 가난하고 열세한 읍락민의 외형상의 모습이 호민의 소작농이나 노복처럼 여겨져 그런 기술을 했던 것이다. 부여의 하호는 노예나 농노가 아니라 읍락의 일반민이었고, 호민은 읍락의 거수(渠帥)였다.
당시의 읍락에는 촌락공동체적 요소가 상당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호민은 기존의 촌락공동체적 요소를 활용함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강화해나갔고, 다른 한편에서는 읍락민들도 전래의 관습과 공동체적인 상호부조에 의지해 그들의 삶을 유지해나갔던 상황으로 여겨진다.
또한 부여의 읍락민은 모두 동일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읍락민이 호민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그들 내에서도 자영농민층과 빈농층의 분화가 진전되고 있었다. 전쟁 때에는 스스로 무장해 참전했던 이들과 그렇지 못해 양식을 운반하는 노무부대로 참가하는 이들로 나뉘어졌음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이러한 읍락을 수개 내지 수십개를 지배했던 것이 가(加)들이다. 가들과 그 일족은 지배계급으로서, 왕의 일정한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각기 지배 하에 있는 읍락들을 자치적으로 통할했으며, 이들 읍락으로부터 징수한 공납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외국에 나갈 때 수를 놓은 비단옷에 모피·갓을 쓰고 금은으로 장식을 하며 호사로움을 과시하였다. 전체적으로 가 계층의 부력은 상당했고,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었다.
일반민 아래 노예가 존재하였다. 가들과 호민들은 상당수의 노예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례에 때로는 백수십인을 죽여 순장(殉葬)을 하기도 하였다. 순장된 노예는 전쟁포로 노예가 많았을 것이나 가내노예도 상당했을 것이다.
노예에는 전쟁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노예와 부채노예도 있었다.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절도를 할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으며, 변상이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빈한한 읍락민 중 일부는 점차 가나 호민의 예속민으로 전락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부여의 사회는 제가층(諸加層), 호민층,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읍락민, 빈한한 읍락민, 노비 등 대략 다섯층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부여사회는 공동체적 유제가 잔존해 있는 가운데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서도 연맹체적 성격이 강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음과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멸 과정
3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데 취약점이 있었다. 그리고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있어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특히, 3세기 종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해졌다.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 팽창에 의해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 국왕 의려는 자살했고, 부여왕실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의라(衣羅)가 왕위를 계승한 뒤 진(晉)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로 피난했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그대로 머물어 토착하였다.
길림 방면의 부여는 그 뒤 계속 모용씨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많은 수의 부여인들이 포로가 되어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당시 부여는 진나라가 쇠망함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 고구려의 공략을 받자 더 이상 길림 일대의 원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346년 서로부터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대타격을 입었다. 이 때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뒤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에 군대를 주둔시켜 이를 통할하였다. 부여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북옥저 방면에 정착했던 부여인들은 본국과 분리되어 점차 자립하게 되었다. 이를 고구려인들이 동부여라고 했고, 길림 및 장춘·농안 방면의 부여를 북부여라고 불렀다. 동부여는 410년광개토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북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물길(勿吉)이 흥기해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松花江)을 거슬러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왕실은 안전한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여지역의 통제를 위해 존속시켰던 부여왕실의 명맥은 그 지역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494년(문자왕 3)에 소멸되었다.
삼한 (三韓)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방에 형성되어 있었던 정치집단.
내용
마한·진한·변한을 말한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지역에 비정된다.
삼한사회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삼국지 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이며, 축약, 정리된 내용이 ≪후한서 後漢書≫ 동이전과 ≪진서 晉書≫ 사이전(四夷傳) 등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마한은 54개 소국(小國),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구성되었다.
≪사기 史記≫ 조선전과 ≪한서 漢書≫ 조선전에 의하면, 서기전 2세기경까지도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정치집단에 대해서는 ‘진국(辰國)’ 또는 ‘중국(衆國)’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한 소국의 활동기사가 나타나는 것은 서기 1세기 초엽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 또는 삼한 모두가 진국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기≫의 판본이 ‘중국’ 이외 ‘진국’으로 기록된 것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래, ‘진국’ 자체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진국’과 삼한의 발전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진국’의 역사적 존재를 부인하고 ‘중국’설을 취할 경우, 삼한형성문제가 ‘진국’과 결부될 필요성은 없어진다. 그러나 진국설을 취하고, ‘진국’을 남부지역 전체의 토착집단으로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삼한 전체 또는 마한과 변한이 모두 ‘진국’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 ‘진국’을 남한 일부지역에 형성된 특정세력집단으로 규정하는 입장에서는 진한이 옛 ‘진국’이라는 ≪삼국지≫의 기록에 근거해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한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종래의 연구 중에는 마한족·진한족·변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집단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 정착해 삼한을 형성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선주토착집단의 점진적 발전 결과로 삼한이 대두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 중 남부지역의 정치집단에 대해 ‘한(韓)’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 유래에 대해서는 한씨(韓氏) 성을 가진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주와 결부시키거나, 간(馯)이라는 종족명에서 근거해 후한대(後漢代)부터 ‘한’이라는 정치집단명이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한’은 ‘크다, 높다’의 뜻을 가진 알타이어의 ‘한(khan, han)’이라는 말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서, 고조선 지배씨족의 이름이 되고 이것이 다시 국명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혹은 문헌자료에 나오는 ‘진국’과 한왕(韓王)의 존재를 근거로 위씨조선(衛氏朝鮮)의 멸망을 한 형성의 시발점으로 잡는 견해도 있다.
이와는 달리, 한족사회 형성의 문화배경에 주목해 한반도 남부지역의 고인돌[支石墓]사회가 점진적인 발전을 거쳐 서기 1세기경 소부족국가(小部族國家)를 형성해 대두하게 된 것이 ≪삼국지≫의 삼한이라는 주장이 있다.
역시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한강(漢江)유역을 경계로 남쪽지역이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이며, 이들이 ‘한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초기철기시대라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한다면, ‘한’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와는 별개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토착화과정은 청동기문화단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한족사회의 형성과 이 지역에 성립된 정치집단인 삼한 각 소국의 형성과정, 그리고 소국연맹체의 의미를 가진 마한·진한·변한의 대두는 시기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상호 구분되어야 한다.
삼한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각 소국의 형성과정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단계의 대소규모 단위집단들이 다수 통합되어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게 되는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삼한사회의 70여 소국들은 일정시기에 일률적으로 대두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시기와 과정이 비교적 다양하다.
고고학 자료상 지배자 개인이 소유하는 금속제 유물의 수량과 구성은 정치집단의 존재와 규모, 분포상태, 문화배경을 나타내는 주요한 척도가 된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유물이 집중 출토되는 마한지역 소국의 상당부분은 서기전 3∼2세기 이래 세형동검문화를 배경으로 대두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달리 청동기유물에 비해 철기유물이 다량 분포된 한강유역이나 경상도지역의 소국들은 서기전 1세기 이래 철기문화의 유입, 위만조선을 비롯한 북방유이민의 정착을 계기로 형성되는 것이 주로 많다.
삼한의 각 소국들은 종래 부족국가로 통칭되어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기원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읍락국가(邑落國家)·군장사회(君長社會, chiefdom)·초기국가와 같은 새로운 용어와 개념의 설정이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삼한사회의 기본성격을 규정하고 발전과정을 체계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이를 위해 소국의 전반적 성격과 조직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지식의 축적이 요구된다.
각 소국의 존재와는 별개로 마한·진한·변한의 구분은 소국의 개별적인 성격의 차이나 전체적인 문화기반의 차이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삼한의 구분은 소국 사이에 형성된 유기적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삼국지≫의 마한과 진한의 실체가 대두되는 것은 특정 소국을 주축으로 다수 소국들 사이에 통일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정치·경제적 결속기반이 확립된 결과이다.
경제적인 교역관계를 토대로 삼한 분립의 실마리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기전부터이나, 이것이 확대 발전되어 지역별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로서의 마한과 진한이 성립되는 것은 철기가 일반화되는 서기 1세기 이후 단계이다.
삼한 소국은 큰 것은 1만여 가(家)로부터 작은 것은 6백∼7백가에 불과한 것까지 규모가 다양하지만, 평균 2천∼3천가 정도의 인구를 가지는 정치집단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조선지역에 설치된 중국 군현의 통치단위인 각 현에 비교될 수 있으며, 영역상으로는 현재의 군(郡) 정도의 세력범위로 추정된다.
삼한의 소국들은 중심 읍락(邑落)인 국읍(國邑)과 다수의 일반 읍락으로 구성된다. 국읍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주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대읍락이다. 삼한사회의 읍락은 단일한 농경촌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지에 연결되는 다수의 취락군(聚落群)으로서 1천호 미만의 인구를 가지고 동일한 시조를 내세우는 의제적 혈연집단(擬制的血緣集團)으로서 독립된 지배자에 의해 통치되는 개별정치집단이다.
국읍 또는 읍락은 서기전 3세기 이래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대두한 정치집단들이 성장, 발전된 것이다. 초기의 읍락지배자는 세형동검(細形銅劍)·세문경(細文鏡)·동모(銅鉾)·동과(銅戈)·청동방울과 같은 청동제 무기와 의식용구를 껴묻기[副葬]하는 돌덧널무덤[石槨墓]·널무덤[土壙墓]의 주인공들이다. 진한 사로국(斯盧國)의 6촌(六村), 수로집단(首露集團) 대두과정에 나타나는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의 9간(九干)과 같은 집단들이 각 소국을 구성하는 읍락집단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읍락의 중심 취락은 하천을 끼거나 구릉지대에 위치함으로써 인근지역의 조망(照望)과 방어에 편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토루(土壘)·목책(木柵)·환호(環濠)와 같은 방어시설을 갖춘 경우가 많다.
민무늬토기와 김해토기(金海土器)를 출토하는 환호취락과 경상도 남해안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貝塚]유적들은 모두 삼한사회의 대표적인 취락 유적지로서, 이들은 대개 하천을 끼고 있거나 표고 20∼100m 높이의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주 월성, 대구 달성, 김해 봉황대유적·부원동유적, 서울 풍납동토성, 김해패총·양산패총·웅천패총·고성패총·마산성산패총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의 원초적인 형태는 일반 취락지였으나 인구 증가와 무력대립 등으로 비상시에 읍락주민이 대피하는 피난소로 이용되었으며, 공동집회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발전되는 읍락의 경우, 토성은 지배자의 전용 거주지가 됨에 따라 외형적인 형태와 규모에도 변화가 가해졌을 것이다.
방어시설을 갖춘 취락(聚落)의 출현은 각 집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던 무력적 대립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삼한사회에 있어서 철기문화의 확산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이 시대의 취락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철제도끼·낫·손칼[鐵刀子]과 같은 생활용구, 그리고 지배자의 분묘에서 출토되는 풍부한 철제무기들이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한다.
삼한 소국은 다수 읍락을 포괄하는 지연집단(地緣集團)으로서,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를 세우고, 대내외적으로 단일한 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국읍의 주수(主帥)는 읍락간의 교역과 소국간의 교역활동을 주관하는 경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국읍은 물자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소국은 여러 가지 형태의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독자적인 경제단위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국읍의 주수는 읍락 거수(渠帥)가 개별적으로 행사하고 있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군사책임자이다. 유사시에 장악된 군대통솔권이 일상적인 것으로 확보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지배권력의 발전과정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대외적으로 각 소국은 국읍을 주축으로 획일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개별정치집단으로 기능하였다.
이 밖에 국읍세력이 행사하고 있었던 다른 하나의 기능은 제천의식(祭天儀式)의 주관이다. 국읍에는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祭祀長)을 세워 매년 5월과 10월 곡식의 파종과 추수가 끝날 때마다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청동기시대 이래 토착사회에서 전래되어오던 원시농경의례로서 천군은 전통적인 지배권의 일부를 계승하는 토착적인 성격이 강한 지배자이다.
삼한사회의 국읍은 초읍락적인 제천의식의 주관을 통해 읍락간의 유대의식을 높이고, 다수의 읍락들을 통합하는 내재적인 결속원리를 가졌다. 이처럼 삼한 소국은 제정이 기능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정치·경제적인 권력 못지 않게 종교적인 영향력이 중요하게 작용했고 이러한 상태는 국읍의 정치권력이 미약한 초기단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삼한사회가 제정분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는 것은 철기문화의 보급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중남부지역 초기철기문화단계의 토착적인 지배자는 일반적으로 제정을 겸하는 존재로 파악된다. 청동거울·청동방울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청동제 의식용구들이 무기와 함께 지배자 분묘의 중요한 부장품이 되고 있으며, 청동기 일괄유물군의 상당부분이 의식용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 이후 정치적 지배기능을 우선적으로 행사하는 새로운 성격의 지배자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서기전 1세기 이후에는 철기문화의 유입과 유이민의 이주라는 정치·문화적인 영향으로 이러한 성격의 지배자가 수적으로 크게 증가되고, 그들의 정치·사회적 비중이 증대되면서 삼한사회의 주도적인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철기가 다량 반출(伴出)되는 단계에 이르면 지배자가 소유하는 금속기의 대부분은 무기류로 구성되고, 의식용구를 가지는 일괄유물군의 숫자는 크게 줄어든다. 이러한 변화는 철기문화의 보급을 배경으로 단위집단 지배자로서 제사장의 기능보다 정치·군사적 통솔자로서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전반적인 발전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장의 기능이 특정인에게 위임되면서 삼한사회가 점차 제정분리의 사회체제로 전환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 동이전에 각 소국에는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라고 하고 그곳에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
소도에 대해서는 동네 어귀에 있는 경계 표지 또는 신성지역(神聖地域)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와 대비되는 재래적인 신앙활동의 중심지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는 제사장인 천군이 농경의례·축제 등을 거행하던 장소로서, 민무늬토기시대 이래 생활 근거지였던 야산이나 구릉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소도는 국읍의 정치기능과 관련해 삼한사회의 문화성격을 반영하는 중요자료로 주목된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한 소국의 정치·경제적 성격이나 성장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적극적인 활용과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개괄적인 추세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전한(前漢) 말 한(漢)나라의 일시적인 철의 전매제 폐지와 후한대(後漢代)에 진행된 철기제작의 민영화 추세는 제철·제강기술의 확산을 자극해 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한족사회에도 서기전 1세기 후반 이래 철기사용이 점차 보편화되고, 생산력 증대와 함께 철을 매개로 활발한 물자교역이 전개되면서 각 집단간의 세력격차가 심화된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서력 기원후가 되면 소국의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고 각 소국간에 새로운 질서가 확립된다.
국읍의 주수는 유력한 읍락과의 혼인, 교역의 성공적 수행, 대외적 군사활동의 전개를 통해 지배권력을 강화하고, 읍락의 거수를 국읍의 지배세력으로 흡수하면서 읍락집단에 대한 통제력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확대된 통치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군대지휘, 조세징수와 관리 등 중요통치기능이 전문화되면서 지배조직의 체계화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소국의 내적인 성장과 대외적 팽창과 무력대립이 원인과 결과로서 상승작용을 거듭함에 따라, 지역별로 유력한 소국을 중심으로 소국연맹체가 대두된다.
일부의 변한 소국들처럼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속한 것도 다수 있으나, 대부분은 일정한 맹주국을 주축으로 지역별 소국연맹체의 구성원으로 편제되었다. 즉, 2, 3세기경 삼한 소국들은 경주 사로국을 맹주로 하는 진한소국연맹체와 한강유역의 백제국 중심의 소국연맹체 그리고 마한지역의 토착 맹주세력인 목지국(目支國)중심의 세력권으로 통합되었다.
소국연맹체의 결속기반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단계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각 소국들은 독자적인 통치기구와 지배기반을 유지하면서, 맹주국으로부터 일정한 형태의 정치·경제적인 제재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맹주국은 일반 소국에 대해 독점적인 교역관계를 요구하거나 교역물품·교역상대 등을 규제함으로써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상주(尙州)의 사량벌국(沙梁伐國)이 경주 사로국과의 결속관계를 버리고 백제국이라는 외부세력과의 교섭을 시도하자, 이를 무력으로 저지했다는 ≪삼국사기≫의 석우로전(昔于老傳) 기록은, 3세기 중엽 각 소국간의 결속기반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배권력의 성장에 따라 대등한 결속관계가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지배·복속 관계로 전환되면서, 공물(貢物)을 징수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하는 등 정치적인 제재가 함께 가해졌다.
그러나 3세기경까지도 소국의 토착기반을 해체하거나 규칙적인 조세를 부과하고 대외교섭을 완전히 차단할 만큼 강력한 통제력이 확립되지 못하였다.
중국 군현의 토착집단 회유정책이 실시될 때마다 연맹체에 소속된 소국의 거수들 중에는 귀의후(歸義侯)·중낭장(中郎將)·도위(都尉)·백장(伯長)·읍군(邑君)·읍장(邑長)과 같은 관작(官爵)과 인수(印綬)·의책(衣幘) 등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대외통교와 교역을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집권적 귀족국가로서 신라·백제 국가의 확립은 마한·진한 소국연맹체의 결속력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삼한은 토지가 비옥해 벼농사를 짓고 오곡(五穀)을 재배하는 토착농경사회이며 양잠을 하여 견포를 직조하였다. 가옥은 수혈주거(竪穴住居)로부터 지상가옥으로 발전하는 과도단계이나, 일반적인 가옥형태는 서까래가 있고 지붕 위에 풀이나 갈대·볏짚을 이은 초가집의 원초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葬禮)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이 없다고 하여 토광목관묘가 주된 묘제임을 알 수 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자료에 의해 토광목관묘에서 매장주체부가 확대되면서 목관 바같에 목곽을 설치한 토광목곽묘로 발전해 갔으며, 봉분 주위에 ‘ㄷ’자형, 원형, 반원형 등의 물도랑을 판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가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소와 말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고 죽은 자가 승천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변진지역에서는 편두(褊頭)와 문신(文身)의 풍속이 있어 남방문화의 영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국립 중앙박물관 부여/삼한실이 위치한
1층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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