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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20ㄴ)
제1독서<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1베드5,5ㄴ-14)
5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
12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화답송>시편89,2-3.6-7.16-17(◎2ㄱ) ◎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 ◎
○ 주님, 하늘은 당신 기적을 찬양하고, 거룩한 모임은 당신 진실을 찬송하나이다. 구름 위에서 누가 주님과 견줄 수 있으며, 신들 가운데 누가 주님과 같으리이까? ◎
○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 ◎
복음<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20ㄴ)
15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1베드5,5ㄴ-14)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5ㄷ)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덕인 겸손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다.
아마도 베드로는 최후 만찬 전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장면(요한13장)을 연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겸손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의미의 권면(5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본문에서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노이스'(hypereoanois)의 원형 '휘페레파노스'(hyperepanos)는 '~위에, 너머에' 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빛이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노'(p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들 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인간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데까지 이르게 되는데(창세3,5 ;이사14,13.14), 이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이다. 하느님은 그런 자들을 대적하신다.
여기서 '대적하시고'로 번역된 '안티탓세타이'는 '안티탓소마이'(antitass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이것은 '~반대하여', '~에 대항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안티'(anti)와 '놓다', '두다'란 의미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대적하다'(사도18,6)뿐 아니라 '물리치다'(야고4,6)란 의미까지 지닌다. 이것은 적을 궤멸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이나 그 결과를 나타내는 군사 용어로서,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철저히 패망하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 라고 했다.
반면에 하느님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섬기를 자를 높여 주시는 분이다.
본문에서는 '대적하시고'에 해당하는 '안티탓세타이'(antitassetai)와 더불어 '(은총을)베푸십니다'에 해당하는 '디도신'(didosin)역시 모두 현재 직설법인데, 이것은 교만한 자에게 임하는 화와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복이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절대 불변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
여기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이라고 번역된 '케이라'(cheira)의 원형 '케이르'(cheir)는 일반 명사로서 신체의 일부인 '손'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때때로 권한, 소유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할 때도 있다.
예를들어, 십자가 상에서 죽어 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한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곧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권한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루카23,46)
또한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속한 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표현에서도 '케이르'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다.(요한10,29). 이 단어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아들의 권위에 복종시켰다는 표현에서도 사용되었다.(요한3,35 ;13,3)
이상에서 '케이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는 소유, 권리, 권위, 능력, 주권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을 보게된다. 더구나 본절에서 '손'이란 명사앞에 '강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라는 말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 혹은 통치 아래에서' 라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본문은 '하느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이러한 권고를 따를 때에 뒤따르는 보상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바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는 것이다.
'여러분을'로 번역된 인칭대명사 '휘마스'(hymas)는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즉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진 자만을 높이시는 것이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kairo)의 원형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주권하에서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결정적인 때, 또는 하느님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때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때'는 그리스도인이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의 경륜 안에 있으며 하느님 아래에서 겸손한 자가 높여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때가 이 세상의 어느 한 때인지, 아니면 재림 후 심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두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경의 흐름속에서 본문의 '때'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7)
본절에서 11절까지는 고난 중에 굳게 설 것에 대한 권면이다. 그리고 12-14절까지는 본 서신의 결말 부분으로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이 담겨 있다. A.D.64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본서는, 기록된 지 얼마 후 로마 대화재 사건이 있었고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이를 그리스도인의 고의적 방화로 그 누명을 덮어 씌움으로써, 정말 피비린내 나는 대박해가 있었다.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이제 스스로의 죽음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든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마치 유언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굳세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내맡기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걱정'(염려)으로 번역된 '메리므난'(merimnan)의 원형 '메리므 '(merimna)는 본래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메리죠'(meriz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마음이 나누어 지는 것, 상이한 방향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즉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걱정'(염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걱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긍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걱정의 자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걱정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는 자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마태오 복음 6장 25-33절에서 하셨고, 루카복음 10장 38-42절에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면서 마음이 나누어진 마르타의 행동을 지적하며 꾸중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필리피 서간 4장 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우리는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맡기십시오'에 해당하는 '에피립산테스'(epiripsantes)는 '~의 위에' 혹은 '위를 향하여'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던지다'(루카17,2)란 뜻의 동사 '립토'(ri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에 던져버리다' 혹은 '위를 향하여 던져 버리다' 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립토'(epiripto)의 명령의 의미를 지닌 분사로서, 6절 상반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종합하면, 우리들 마음의 관심사들을 독점하는 것이 결국 걱정(염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의 주권적 경륜 아래에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심시오. 여러분이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8-9ㄱ)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넵사테(nepsate)는 '근신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그레고레사테'(gregoresate)는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잠에서 깨어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권고나 요청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적 경각심에 대한 이러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완벽한 헌신이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영적 경각심을 갖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1코린16,13)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사도 베드로는 과거 겟세마니 동산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 마귀에게 삼키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러한 호소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으로, 자신과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가슴 절절한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적대자'에 해당하는'안티디코스'(antidikos)는 법정 용어로서, '소송의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이다.(잠언18,17) 이 단어가 마태오 복음 5장 25절과 루카복음 12장 58절에서는 '고소한 자'로 번역되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꼐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베드로 사도가 마귀(악마)를 '안티디코스'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마귀의 특성(욥기1,6-2,7 ; 묵시록12,10)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에페4,27) 하느님께 참소한다.(묵시록12,10)
이러한 사실을 '마귀'(악마)에 해당하는 '디아블로스'(diablos)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디아블로스'는 '디아'(dia)와 '블로스'(blos)의 합성어인데, '디아'는 '관통하는 (through)', '쪼개고 들어오는'의 뜻을 가진 전치사이고, '블로스'는 '(낚아채서)반대 방향으로 던져 버리다' (throw down)라는 뜻을 가진 '발로'(ballo)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마귀(악마)는 죄와 유혹을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쪼개고 파고 들어와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인간을 하느님 반대편으로 던져 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아블로스'는 '비방하다', '중상 모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아발로'(diabalo)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방자', '참소자', ' 중상 모략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참소하는 자의 특성 및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는 자의 특성을 지닌 마귀 (악마 ; devil)라는 의미로 쓰였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번역된 '레온 오뤼오메노스'(leon oryomenos)는 '우는 사자'(a roarling lion)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배가 고파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모습이나 혹은 먹이를 잡아 두고서 승리의 환호의 표현으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구약의 에제키엘 22장 25절과 시편 22장 13절을 참조하면 된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볼 때, 우는 사자의 이미지는 먹이감을 움키고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두렵고 잔인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다. 이와 같은 사상은 야고보서 4장 7절에도 나온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그리스도인을 피해 달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테이'(pistei)는 '신앙', '신뢰', '신실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피스티스'(pistis)의 여격이다. 이 용어는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중심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라'고 베드로는 권고하는데, 여기서 '굳건히 하여'로 번역된 '스테레오이'(stereoi)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박해를 틈타 마귀가 행하는 위협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14ㄴ)
여기서 '평화', 즉 '에이레네'(eirene)는 '광야'를 의미하는 '에레모스'(eremo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광야의 분위기와 같은 평온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평온함은 외부에서 밀어 닥치는 소란과 위협 등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며 모든 근심과 염려(걱정)와 두려움을 초월한 평정한 마음이다.
이런 '에이레네'는 그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요 열매이다.(갈라5,22).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에 마르코 복음의 특징에 관하여 묵상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성자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선포합니다.
반면 마르코 복음은 그분의 신원이 서서히 밝혀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복음서의 후반부 1/3가량을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관한 내용으로 채우기 때문에, 그 첫 번째 특징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서 초반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이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실수록, 그분의 메시아 신분이 점차 공적으로 드러납니다.
베드로의 고백(마르 8,29 참조), 유다교 최고 의회 대사제 앞에서 응답(14,62 참조), 백인대장의 고백(15,39 참조)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의 두 번째 특징은 ‘메시아 비밀’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세 번째 특징은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시고, 구원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 특별한 교육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메시아 비밀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메시아 비밀 구도(예수님의 함구령과 제자들의 몰이해)에 따르면, 파스카 신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일상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때 파스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4월 25일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영의 구원을 위한 용서가 신앙의 목적이다.
(마르 16,14-20)
사람의 마음, 감정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씻어내 주셔야 할 뿐~~~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유다의 완고한 마음이 예수님을 팔아 넘겼듯이 그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남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 완고한 마음이 언제든 예수님의 뜻을 죽이는 믿지 못하게 하는 죄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못하게 합니다.
(요한6,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사람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나라는 깨끗하고 거룩한, 의로운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레위11,45)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주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그런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으로 그 누구도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흠도 티도 없으신 예수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 주시어~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흘리신 그 깨끗한 피로 우리의 죄를 씻기시어 깨끗한 이, 거룩한 이로 만들어 구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의로움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정해 놓은 제사와 윤리의 그 의로움은 구원의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의로움을 고집하는 그 완고한 마음을 부수는 깨달음을 위한 시련, 사건들이 믿는 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묵시7,13-14)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 하느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 그래서 그 약속을 꼭 붙들고 가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묶일약(約), 묶일 속(束). 광야의 삶, 그 인생 동안 예수님과 꽁꽁 묶이는 것, 신앙 생활입니다. 그 예수님과 묶이기 위해, 믿기 위해 세상을 믿었던, 묶였던 그 끈을 풀어내는 것, 끊어버리는 것이 세례(洗禮)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르8,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 마귀, 곧 뱀의 말, 그 거짓들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묵시2,9)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 또한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중상을 받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시는 그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뱀의 유혹으로, 선악의 계명으로 받아 열심히 착하게 의롭게 살았던, 그래서 선이 악을 대속한 그 십자가의 의로움, 그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죽이고)~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그 유대인들이 뱀의 후손, 사탄의 무리인 것입니다.
그 거짓, 위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겨납니다. 예수=구원자. 그 이름을 진리로 믿는 것이 쫓아내는 것입니다. 빛이 드러나면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
그러면 선악의 도덕과 윤리의 말이 아닌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시는 그 진리의 말, 새로운 언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의 말, 그 심판이라는 독을 먹어도 그 심판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심판의 두려움으로 발생하는 모든 질병에서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마음의 평화, 안식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언17,22) 즐거운 마음은 건강을 좋게 하고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 예수님의 모든 표징은 예수님 당신의 대속, 그 죽음으로 주시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표징입니다. 표징은 구원을 가리키는 손, 이정표입니다.
손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손만 쳐다보느라 정작 달은 못 보는~ 그렇듯 손, 그 표징만 바라본다면 헛된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죄의 용서의 표징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9,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육의 치유가 아닌 영의 구원을 위한 용서가 신앙의 목적입니다.
(에제36,25)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십자가 위,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입니다.
(히브10,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아멘.
숫자 5는 구약의 모세 5경, 율법을 뜻하고 숫자 2는 선악의 사람의 두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모두 미완성입니다. 그 미완성의 빵을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완성된 생명의 빵으로 돌려주신 것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마르16,15~20)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6~17)
마르코 복음 16장 16절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외적 표시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인 세례를 언급하셨다.
'세례를 받는'으로 번역된 '밥티스테이스'(baptistheis; is baptized)는 '밥티조'(baptizo)의 과거분사이다.
'밥티조'(baptizo)는 '반복하여 담그다', '담가서 물로 깨끗히 하다'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되었음을 (로마6,3) 공적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요한 복음 3장 5절에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루카3,21~22; 마르1,9~11; 마태3,13~17).
이것은 단순히 겸손의 모범으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며, 자연수를 축복하기 위해서만 요르단 강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한편,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에서 '단죄를 받을 것이다'로 번역된 '카타크리테세타이'(katakrithesetai; will be condemned)는 '카타크리노' (katakrino)의 미래 수동태이다.
'카타크리노'는 보통 재판 때 사용되는 법적 용어로서 '판결을 받다', '죄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그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믿는 이들에게 맡길 때에 일방적으로 선교의 의무만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먼저 복음을 능력껏 전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주시면서 사명을 맡기셨다.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아'(semeia; signs)는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 주격이므로 여러가지 다양한 표징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세메이온'(semeion)은 '표적', '징조'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보증하기 위해 행하시는 기적과 놀라운 사건을 뜻한다.
즉 표징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내려오는 하느님의 능력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능력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미 12제자의 파견(마태10,1; 마르3,15)때와 일흔 두제자의 파견(루카10,17) 때도 주어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사도들과 제자들을 대상으로 제한되었던 능력이 복음을 믿고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확대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으로 구마와 신령한 언어가 있을 것이 예언된다.
구마는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에페2,2)들의 능력을 제어하신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귀에게 종되었던 이가 복음이 전파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어 자유롭게됨을 보여 주는 표징이다.
여기서 '쫓아내고'로 번역된 '에크발루신'(ekbalousin; they will cast out; they will drive out)은 '에크발로'(ekbalo)의 현재형이다.
'에크발로'는 어떤 이가 행하는 권세를 빼앗고 다른 장소로 쫓아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의 세력들을 쫓아내는 것을 뜻한다.
즉 복음 전파시 이것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음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현재형으로 기록된 이유는 이러한 표징이 오고가는 세대에 항상 현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들'에 해당하는 '글롯사이스~카이나이스' (glossais~kainais; new tongues)는 오순절날 이후에 내려질 이적에 대한 암시이다(사도2,4; 10,46; 19,6).
'새로운 언어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안되는 마르코 복음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새로운 언어들'에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외국어 방언(사도2,4)과 개인의 깊은 경건한 신심 생활을 돕고, 교회의 선익을 위해 잘 봉사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사로서 천상의 방언이 있다(1코린12,10; 14,4).
아마도 여기서 나타난 '새로운 언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던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새로운 언어들'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사도2,4).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예수님의 이러한 약속은 몰타(Molta) 섬에 있었던 바오로에게 일어났으며(사도28,3~6), 독을 마셨지만 해를 입지 않은 경우는 성경에는 없지만,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Eusebius, 교회사,Ⅲ, 39)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누리게 될 놀라운 권능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이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개인의 공명심을 위해 이러한 시험을 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것이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정확하게 바오로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 주어서, 하느님의 약속의 엄정성과 더불어 바오로가 진실한 복음의 사도임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중에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행하셨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마르6,5; 7,32; 루카4,40).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표징을 행했으며, 이러한 표징을 행한 대표적인 제자는 바오로이다(사도28,8).
여기서 '손을 얹으면'에 해당하는 원문은 '케이라스 에피테수신'(cheiras thesousin;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they will lay on by hands)이다.
04월 25일 화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서의 ‘긴 결말’(16,9-20 참조)에 속하는 부분으로 2세기 무렵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승천 이야기를 보충하고 싶었던 이들이 다양한 전승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빈 무덤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마르코 복음서에 이를 더한 결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목격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여 믿지 못하는 제자들(16,11.13.14 참조)을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도구로 쓰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복음 선포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로 드러날 것입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믿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이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겠다는 결의와,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입니다.
복음의 수용과 거부에 따른 결과는 극명한 차이, 곧 구원 아니면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있는 우리는 그 복음을 진정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4년 04월 25일 목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본디 마르코 복음서는 16장 8절로 끝나지만 오늘 복음이 포함된 9절에서 20절은 부활과 승천,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사명과 함께, 이를 구현하고자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너희”라는 주어와 “주님”이라는 주어가 상응하면서, 복음 선포가 우리 몫이라면 그 뒤 여정은 하느님께서 몸소 완성하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독서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제시하고, “그분께서”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이나 설득 또는 강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일상을 증언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독서). 그러면 하느님께서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복음).
복음화를 완성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0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하느님은 당신을 ‘야훼’로 알려 주셨다.
“야훼”- ‘내 말을 네 말로 쓸께’라는 뜻이 들어있다. 오늘도 사도의 말 안에 하느님의 말, 그분의 뜻을 깨닫고자 한다.
독서(1베드5,5ㄴ-11)
5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 겸손(謙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낮아질 수 있을까? 하느님은 당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을 죽이는, 그 낮아짐을 말하신다.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흙의 티끌, 먼지, 그 없음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숨(생명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그러나 사람(아담, 나)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곧 자신의 뜻(욕망)을 위해 뱀(악마)의 유혹을 먹고 ‘하느님 처럼’의 자리에 앉는, 그 교만함의 죄악으로 영원한 죽음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창세3,5 참조) 그때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덮어 다시 살리시기 위해 그의 죄를 씻어줄 피, 곧 대속, 그 계약의 피를 위해 어린양을 죽이셨고 그 남은 가죽으로 손수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그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의 외 아드님(獨生子)께서 인간의 육(肉)을 입고 오셔서 인간들의 죄로 죽으셨고, 의롭게 하시려 부활하신 그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구원자 시다. 그렇게 낮아지고 겸손하신 분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사도는 아담(사람)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죄를 씻어 덮어줄, 그 구원의 어린양의 가죽 옷을 받아 입었듯이 사람인 우리 또한 그 겸손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것이다. 그 겸손의 옷(예수)을 입고, 서로 동정과 호의로 대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13,14)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골로3,12) 12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 사람은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 질 수 없기에 겸손하신 예수를 입으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으로 이웃을 대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동정, 호의, 온유, 인내’ 마찬가지다. 모두 입어야 한다. 그래야 할 수 있다.
(필리2,3-5)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예수의)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걱정 되시나요?
7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아멘!)
= 걱정을 내어 맡기는 것, 정말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신뢰(信賴)’, 믿음이 생기면, 곧 그분의 대속, 그 사랑의 높고 깊고 넓고 긴~ 영원한 그 사랑을 알고 믿게 되면 어렵지 않게 된다. 아니 의탁(依託)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을 위해 반드시 말씀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유혹)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 악마인 뱀은 사람으 욕정(欲情)을 이용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善惡)의 말씀, 곧 도덕과 윤리의 법(法), 계명(誡命)으로 먹게 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거짓되게 하는, 그 거짓 가르침 그대로 먹게 된다.
현세에서도 여전히 뱀의 유혹인 자신의 뜻, 의(義)를 위해 도덕과 윤리로 착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진리’라 유혹한다. 거짓 말(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2코린11,13-14) 13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14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 사탄(악마)은 무서운 모습이 아니라 천사처럼 착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느님의 선(善), 의로움을 입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분별(分別)해야 한다. 곧 하느님의 뜻을 위한 의(義)를 말하는지, 사람의 뜻을 위한 의(義)를 말하는지 분별해야 한다.
예화(例話)로 온갖 신앙 행위로 지칭 의인(義人)인 바리사이와 죄인(罪人)임을 인정한,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롭다’하신 죄인 세리(稅吏)를 보면 알 수가 있다(루가18,10-14 참조) 인간의 의로움은 구원의 가치, 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태6,33) 33 (그래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에페2,9)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행위,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공동번역성서)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 대항(對抗)? 믿음을 얻기 위해,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해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말씀을 사람의 지혜인 도덕과 윤리로 먹지 않고, 하느님의 지혜인 진리,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먹는 것, 믿는 것이다. 그것이 의로움이다.(로마3,24 참조) 성경(聖經) 전체는 그 한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7,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10ㄱ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 이 땅(세상)의 삶은 뱀의 유혹을 이겨내야 하는, 곧 내 뜻을 죽이는 고난(苦難)의 삶이다. 그래서 겸손(謙遜)의 예수님을 입고, 견디고 살면..
10ㄴ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 말씀이 활동을, 말씀이 구원의 일을 하신다.(1테살2,13)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
이 모든 말씀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마르16,15-20ㄴ)
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 새겨듣자. ‘예수님의 이름(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믿으면 마귀(거짓 가르침)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새 계약의 말씀)로 듣게 되고, 손으로 뱀(유혹)을 집어 들고 독(선악의 법)을 마셔도 아무런 해(죄의 심판)도 입지(받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선포하면) 병(죽을 조)이 낳을 것(용서)이다.’ 하신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진리)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진리의 영으로 오시어)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예수님을 ‘하느님의 힘, 지혜, 속죄판, 새 계약.’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죄인들의 생명의 빛’으로 믿는 우리가 표징(標徵)이다. 그것이 곧 새 창조(創造)인 것이고 기적(奇蹟)이다.
잊지말자~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은총이신 진리의 성령님!
말씀 안에 늘 머무르는 삶을, 신앙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구원의 기적, 표징의 증거가 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새 창조)가 아버지의 뜻(표징)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