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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창 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명품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세상을 지으셨다.”(p.43)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시작하고 있다.(창 1:1) 그리고 그 창조사역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이다.
Q1)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하이에나와 지렁이 그리고 모기와 같은 혐오스럽거나 인간에게 해로운 것 같은 것을 왜 창조하셨을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불필요하거나 나쁜 것은 하나도 없다. 피조물 중에서 죄를 짓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며, 피조세계를 파괴하는 유일한 존재도 인간이다. 반면에 하이에나와 독수리와 같은 동물은 동물세계의 청소부 역할을 하며 징그러운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한다. 모기도 식물의 꿀을 먹고 살기에 식물의 수정에 도움을 준다. 다만 알을 밴 암모기가 사람이나 동물의 혈액을 일시적으로 취할 뿐이다. 이처럼 모든 동식물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도 질서와 조화를 지키며 결코 창조세계의 경계를 넘나들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다.
1.1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맡기셨다.
“작가는 그 안에서 자신을 본다. 완성된 하늘과 땅의 어울림과 완벽함은 그 어떤 개별적인 성분들보다 더 정확하게 지으신 이의 성품을 드러낸다.”(p.43)
Q2) 왜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한 것을 요구하시는가?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인간은 분명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지으시고 완전한 시스템으로 운영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사 43:7)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에 대한 관리자로 삼으셨다.(창 1:28,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따라서 관리자는 주인의 성품과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녀를 낳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했다면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이를 낳는 것을 기피한다.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살기 어려운 시대에 아이들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다. 물론 젊은 세대만을 탓할 것이 아니다. 이미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3포시대(연애, 결혼, 출산)에 대한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자녀를 낳는 목적은 자신의 삶의 연장이며, 자녀의 삶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즉 자녀들의 성공과 실패를 보면서 환희와 좌절에 빠지지고 하며, 자녀들의 미래를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없는 미래를 같이 꿈꾸기도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녀는 바로 자신을 닮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존재이기에 저들의 삶의 성공과 실패는 곧 자신의 삶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가 성공하고 때론 역경을 딛고 일어서면 같이 환호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반면에 힘들고 고난 가운데 있으면 같이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기 때문이다.
팀켈러의 말처럼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신을 본다. 자신의 열정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재능과 성향 그리고 감정까지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의 모든 별들과의 완벽한 조화과 그것이다. 지구의 축이 23.5도에서 단 1도만 틀어져도 지구는 온난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기상이변으로 단 10년 아니 1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23.5도의 신비를 과학으로 증명은 하지만 누가 23.5도의 정확한 설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대로 이 세상을 완벽하게 지으셨다. 또한 설계하시고 지으신대로 이 세상 온 우주는 빈틈없이 정확히 움직인다. 하지만 이 우주가운데 유일하게 삐그덕거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지으신 최고의 존재인데, 왜 이처럼 불완전한 존재로 지으셨을까?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불완전한 존재로 짓지 않으셨다. 인간의 신체는 소우주와 닮았다. 더우기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인간 스스로 놀랄정도로 창조적이다. 참으로 작고 연약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를 여행하고 백층이 넘는 고층빌딩을 짓는 것을 보면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같은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같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 즉 지구상에서 가장 질서를 어지럽히며, 지구를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전락한 이유는 인간의 죄성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이러한 죄성이 생긴 것은 하나님의 부여하신 자유의지때문인 것이다.
자유의지는 인간만의 가지고 있는 신적인 속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 앞에서 완전히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한 모든 믿음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완전하라!' 참으로 부담스러운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일에 완벽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완벽한 성품을 가지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기질과 개성을 인정하신다. 여기서 완전하라는 것은 죄에 대해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히 순종하라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변명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죄에 대하여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수준은 세상 죄에서 깨끗한 수준이 아니다. 마음 속으로 짓는 죄까지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간음 한 자(마 5:28)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 못지 않게 죄를 짓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가세하는 형국이라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정한 규칙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하신 원칙을 지키겠는가?
핀란드에는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을 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법'이 있다. 그래서 야코 리촐라라는 한 백만장자는 자동차로 시속 40킬로미터의 제한 구간을 약 70킬로미터로 달렸다가 우리 돈으로 8천만 원이 넘는 벌금을 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영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법'을 지켜야 한다. 그것은 곧 거룩한 행실이다.
벧전 1:15-17,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Q3) 하나님은 왜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경작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지만 우리 또한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p.44)
하나님은 인간을 신적인 존재(자신의 형상을 따라)로 지으셨다. 자신의 영을 불어넣으심으로 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프로그래밍 된 피조물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에 팔아넘기고 말았다. 죄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종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거듭난 자녀들이 자기 멋대로 또는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1.2 인간의 일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일은 음식, 아름다움, 쉼, 우정, 기도, 섹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해당한다.”(p.45)
Q4) 일이 축복이라면 왜 인간은 자신의 욕구 때문에 힘들어해야 하는가?
우리의 일상에서 행하는 일들은 기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있고,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있다. 즉 욕구(felt need)가 문제가 아니라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욕심이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남자의 경우 좋은 차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여자의 경우 명품 가방이나 엑세서리를 갖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수준에 맞지 앉는 고가의 차나 명품을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욕심이 욕심을 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죄를 낳는다는 것이다.
최근에 연일 뉴스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있다. 한국미래기술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양진호 회장이다. 실제 그는 한국 웹하드 업계의 최대업체인 위디스크 회장이다. 그는 폭행과 마약 등 온갖 추잡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인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관상가의 말 한마디를 듣고 대통령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점 보는 사람이 양 회장을 만나서는 갑자기 ‘대통령이 될 상’이라면서 큰절을 했고, 양 회장은 이를 진짜 믿고 이후 사회 상층부로 진출하기 위해 줄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도 방어해 줄만한 구석이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는 과거 다른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유리한 판결을 받고 풀려나곤 했다. 이러한 양회장의 엽기행각을 보면 어떻게 한 회사의 회장이 마약쟁이보다도 못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의하한 생각이 들지만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러한 범죄에도 오랫동안 아무런 법의 제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뒷돈을 먹은 수많은 정계 및 법조계 인사들의 비호가 있었음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문재인 정부의 통일정책에서 보여주는 안보불안감에 많은 보수층으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도 꾸준한 지지율을 보여주는 이유는 소위 '적폐'정책이 먹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양진호회장 사건처럼 과정 정부에서 수면 아래에 묻혔던 사건들이 하나 둘씩 처리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환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 한편으로는 안보나 경제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쌓여왔던 부정부패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 일각에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에 제기되고 있다. 그 핵심은 통일정책에 대한 우려와 현 정부의 이념의 색체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기독교 사상을 반영한 것인데 반하여 현 정부에서 추진하는 소위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에 대하여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다.
그런데 진작 문제는 이러한 교계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계의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서 교회 자체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일부 목사들의 추태때문만이 아니다. '적폐'로 지목하는 과거 정부에서 일하던 정.재계 및 법조계에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있었음에도 저들은 빛과 소금은 커녕 저들과 함께 뒤섞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과 관련하여, 목회자들은 장로 대통령을 찬양하고 성도들은 비리에 침묵했다며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개신교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교회의 뜨거운 민낯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기독인 국회의원의 비율은 40퍼센트에 육박했으나 저들은 가장 부패했던 정부와 한 통속이었고, 장로 대통령은 술을 즐기는 대통령이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가 있고, 청와대를 술집으로 만든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가 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일은 정권을 뒤집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회다운 교회, 주님의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교회에 속한 자들이 세상 가운데에서, 즉 그들의 삶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팀 켈러 목사의 말처럼 하나님의 정원에서는 축복이었던 일이 세상 밖에서는 고통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천국에 올라간 에녹과 같은 자가 있었고 살인을 서슴지 않았던 가인의 후예가 있었다.
욕심의 노예가 되는 자(자신의 스스로의 주인인 자)는 가인의 후예처럼 사는 것이고,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하는 자(창조자의 섭리를 따르는 자)는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대부분 전자인가? 아니면 후자인가?
Q5) 왜 이타적인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의미 있는 일이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다.”(p.47)
하나님께서 인간을 관계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처음 만남은 하늘이 만들어 주는 인연이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인연이다.”라는 말처럼 인간은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질 뿐 아니라 그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최상의 것으로 주셨다. 하지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선택이 최상의 것을 최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의 일터는 지옥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위한 욕심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희망이 없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는데, 지옥에 가 보니 천국과 똑같이 진수성찬이 차려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굶어서 뼈가 앙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천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천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국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젓가락만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젓가락 길이가 길어서 자신의 입으로 넣을 수 없습니다. 다만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는 반면에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도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역시절에 예산 관련 업무를 한 적이 있다. 자기 관련부처의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기획재정부와 국회까지 뛰어가지만 결국 예산의 효용성은 뒤로 한 채,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서로 예산을 따 내려는 다툼을 보면서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욕심 앞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양보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는 결국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를 이행할 수 있는 것은 깨닫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를 깨달은 자다. 예수님은 믿음의 후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고, 그 희생으로 모든 믿음의 자녀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드시면서 지금도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이타적인 이치를 깨달을 뿐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때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Q6)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면(p.47) 그 차이는 무엇인가?
먹기 위해(생존을 위해) 사는 것은 동물적(육체적) 수준의 삶이고, 일하기 위해(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영적 수준의 삶이다. 다만 일하는 목적이 땅에 있는지 아니면 하늘에 있는지의 차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다.
1.3 일은 자유로 이끄는 초대다.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올바른, 다시 말해서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부합되는 한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얻을 수 있다.”(p.48)
Q7) 어떻게 구속이 자유가 될 수 있는가?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연은 줄에 메여 있을 때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다. 연은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은 줄에 의지하지 않는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치고 만다.
세상 사람들도 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줄을 잘 못 서면 출세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육신은 그렇다. 하지만 영혼도 그런가?
육신의 줄을 살 서면 기껏해야 은퇴하기 전 잠시의 영광이며 그것은 백합화의 영광만도 못한 곧 시들어버릴 영광이다. 또한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줄을 잘 서면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줄은 어디에 대야 하는가? 그것은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줄이다. 바로 우리 생명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생명 줄인 것이다.
♬ 물위에 생명 줄 던지어라(찬 500장)
주의 은혜로 먼저 구원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사망의 바다에서 허우적 거리는 영혼들에게 생명 줄을 던지는 것이다.
독수리가 태풍의 눈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날개 짓이 아니라 바람에 자신의 날개를 맡긴 결과처럼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할 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참새와 같은 잡새는 폭풍 앞에서 나뭇가지와 바위 뒤에 숨을 수밖에 없지만 독수리는 커다란 날개를 펴서 폭풍을 맞서 유유히 날아 오르는 것이다. 단 한 번의 날개짓 없이 정상까지 말이다. 즉 독수리를 하늘 높이 날아 오르게 하는 것은 독수리의 힘찬 날개 짓이 아니라 큰 날개를 펴는 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바람의 역할이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날개를 넓게 펼 때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평강 가운데 있게 하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 누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 죽음 앞에서 스데반처럼 환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가? 그래서 믿음은 역설이다. 고난 가운데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스스로 구속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지만 결국 세상의 종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은 연의 줄과 같은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할 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멋진 인생의 비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Q8) 성경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인생의 매뉴얼이라면 로봇과 다를 게 무엇인가?
성경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종으로 삼기 위한)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법(죄의 종으로 삼으려는)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려는 은혜의 법이다.(롬 8:1)
Q9)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출 20:9)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6일 동안 세상의 종이 되었다가 나머지 하루를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것인가?
영생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엿새를 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안식은 천국에 예비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한 천국연습이다.
<옮긴글>
[출처] 팀켈러의 일과 영성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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