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특목고 입학과 관련해서 일부 유명한 영어학원들이나 프랜차이즈 기업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그리고 강남지역은 그 이전부터 영어조기 교육을 위해서 아이들의 혀에 수술을 시키는 광적인 부모들까지 있었다.
확실히 대한민국은 미친 교육의 나라이다. 그런데 교육심리학적, 실험심리학적 연구를 떠나 필자는 조기교육의 불필요성을 주장한다. 물론 어릴 때부터 할 수만 있다면 영어나 제2외국어를 시키면 나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광적(狂的)인 입시 열풍이다.
필자의 외국어 교육이론은 "학습능력의 무한성 이론"이다. 이는 별로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어릴 때 영어를 배워봐야 얼마나 배우겠는가? 기껏 단어 몇 개 혹은 발음의 정확성 정도일 것이다.
"학습능력의 무한성 이론"이란 나이가 들수록 학습의 능력과 열정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단어 몇 개, 문장 몇 개 더 시키는데 기쁨을 누릴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인간이 되어 스스로 그 필요성을 느끼면 단기간에 외국어 1~2를 마스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필자의 경우, 독일에서 지도 교수가 뜬금없이 논문의 참고도서로 불어 책을 넣으라고 하여 - 당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36세에 불어를 급히 처음부터 공부하여 6개월 만에 불어 독해가 가능해 졌고 그래서 필요한 불어 참고서를 논문에 반영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성인(成人)은 자신의 필요성이 생기면, 모르던 외국어 1개를 1년 안에 마스터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물론 잘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전찾으면서 떠듬거리면서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필요성을 느끼면 사람은 외국어 5~6개를 잘 할 수 있다. 비단 영어 하나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습자의 자각적인 노력과 필요성의 인식이다.
거기에 비하면 부모들에 의해서 강요되는 공부는 극히 미미하다. 하기 싫은 놈을 억지로 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자녀 잘되기 위해서 그런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런 강압적인 상황 자체를 지양함으로써 자연적인, 자발적인 학습 동기의 발견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실업교육을 활성화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외국어 학습의 필요성을 스스로 알게해 준다면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배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들 역시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면 부모들보다 작게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큰 모순은 부모가 자식의 미래까지 책임지고 걱정한다는 것이다. 제발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위해서 걱정할 시간을 주어라!
한국에서의 외국어 학습의 비효율성은 이제 국가적 폐단의 경지에 이르렀다. 거기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도대체 얼마인가?
그런데 거기서 남는 결실은 거의 쭉정이이다.
이제 그런 흉작은 그만하고 내실있는 외국어 교육을 지향할 때이다.
사설학원 교육이 거의 없다시피하는 독일의 경우 대학에서도 한국처럼 교양영어란 것이 없다. 그러나 그곳 대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대단하다. 다들 국가가 제공하는 학교 교육에서 그런 훈련을 받는 것이다.
우리 나라 역시 그런 것이 가능하다. 단 입시를 위한 영어 교육만 없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알찬 외국어ㆍ영어 학습과 또 거기에 부응하는 외국어 이해 및 구사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4-13. 이명박 정부의 영어 교육정책
4-13-1. 영어 교육에 대통령이 나서는 나라
최근 국민들은 노무현 정부 말기의 실정을 두 차례나 적나라하게 목도하였다. 즉 서해안 기름 유출사고와 남대문 방화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자연파괴, 문화파괴를 경험했다. 곧 노무현은 물러간다. 이명박이 새 대통령이 되면 이런 국정의 실패와 실수들을 철저히 막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전초부대라고 할 수 있는 인수위의 최근 정책 구상을 보면 과연 이명박이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의 여지가 생긴다. 경부대운하 계획은 제외하고 이명박의 교육관련 정책구상, 특히 영어공교육 프로젝트를 보면 과연 이명박과 그의 지도력을 불신할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30일 발표한 ‘영어 공교육 프로젝트’는 사교육 시장으로 쏠린 영어수요를 공교육으로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육과정과 교육환경, 교원확충 등 공교육의 3대 축을 향후 5년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는 대수술을 한다는 게 핵심이다.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영어 격차’가 벌어져 ‘가난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겠다는 것이다. [서울신문 1.31]
이런 겉으로 드러난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프로젝트’는 영어를 학교에서 잘 가르치고 더 이상 사교육이 필요없게 한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 영어를 수능에서 제외하고 영어능력시험을 신설하며, 2010년부터 영어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한다는 것이다. 2013년까지 영어 전용(專用) 교사 2만3000명을 신규 채용하며 기존 영어교사는 매년 3000명씩 국가에서 연수를 시켜 준다는 내용도 있다.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향후 5년 동안 모두 4조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영어전용교사 신규채용 1조 7000억원 ▲현직교사 심화연수 4800억원 ▲영어보조교사 지원 3400억원 ▲원어민보조교사 지원 2300억원 등이 들어 있다.
이명박은 이런 인수위의 정책이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인수위 이경숙 위원장의 영어입국론을 지원하기 위하여 “영어를 잘하는 나라는 잘 산다”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나라들은 대부분 못사는 나라들이다. 그 반대로 일본사람들은 영어, 특히 실용영어에 상당히 약하지만 경제력을 세계적으로 강한 것을 생각하면 이명박의 식견의 단순함이 드러난다. 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이 잘사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가 국어가 아닌 독일, 프랑스 등이 가난한 것도 아니다.
차제에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독일의 경우이다. 한 때, 세계적인 과학과 기술의 강국이 근래에 국가경쟁력이 약화된 것은 독일의 교육제도 때문이 아니라 독일 통일의 부산물, 즉 통일비용 때문이었다.
4-13-2. 영어 사교육 지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영어 공교육 프로젝트’는 영어 사교육을 지양(止揚)하고 영어의 수요를 공교육의 체계 내에서 만족시키겠다는 대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바로 여기에서 의문부호를 찍고 있다. 즉 영어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할 경우 - 그 가능성의 문제는 접어두자 - 영어 사교육은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라는 추측들이 난무하다. 불행하게도 필자 역시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영어를 수능시험에서 제외하는 대신 일 년에 몇 번씩 영어 능력시험을 치르게 하여 수험생들의 영어 성적을 검사한다는 인수위의 대책 역시 타당한 정책이라고 볼 수 없다. 조선일보의 문갑식씨가 말하는 것처럼 영어가 입시와 연관을 지니는 한 영어 사교육은 결코 지양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핵심이다.
다시 말해 영어 공교육 강화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명박-이경숙 등의 영어 입국론자들은 학교에서 영어 수업시간을 늘이고 영어만 사용하는 것이 학생들 혹은 국민들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킨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외국어로서의 영어를 잘 가르치고 또 국민들의 전반적인 영어 실력이 출중한 나라들, 예를 들면 핀란드나 네델란드, 스웨덴 등의 나라들에서 영어 수업시간이 한국보다 훨씬 많은 것이 아니다. 정 반대로 이들 나라의 영어 수업시간은 한국보다 작다(사교육 영어 포함).
이들 세계적인 영어 강국들이 한국보다 영어를 잘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의 확신적인 의견은 이들 나라에서는 대학입시가 없다는 사실이다. 수능이니 본고사니 하는 일체의 입학시험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들 나라의 영어 경쟁력의 핵심적인 비밀이다.
가령 외국 관광객을 모시는 안내인들이나 택시운전사들은 지금처럼 복잡한 영어문법을 배울 필요가 없이 생업에 필요한 영어 지식을 쌓으면 된다.
현재의 한국의 학생들은 토플이니 토익이니 하는 영어 능력 인정 시험을 위해서 엄청난 투자를 한다. 그러나 그런 토플점수 만점을 받아도 외국인과의 실무적인 영어 회화에서는 빵점인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대학의 교수들의 학생 능력평가도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취직을 준비하는 대학생들과 졸업생들이 그토록 대학 밖에서 이루어지는 실력 평가에 목을 매는지 하는 의문점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대학교수들이 고등학교의 내신 평가를 불신하고 수능시험 점수를 더욱 신뢰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대학교수들은 고등학교 선생들을 믿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기업은 대학교수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내린 평가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개인의 이익이나 감정에 따른 편애와 집단이기주의만이 판치고 있다.
교사들과 교수들의 학생 평가를 믿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실태이다. 이처럼 무너진 사회의 신뢰성을 복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사람에 대한 평가 - 주관적인 평가-를 믿지 못하니 모두 객관적인 평가 - multiple choice- 만을 신뢰한다. 그러나 생활세계에서 진실로 필요한 것은 주관적인 평가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주관적인 평가의 보조 자료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사회는 평가의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필자가 확신하건데 만약 한국에서도 대입 수능 영어 시험만 사라져도 초중고 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어떤 추가적인 비용 투입 없이도 지금보다는 몇 배 잘 할 수가 있다.
4-13-3. 서술형 시험
가령 요즘 서울지역은 초중고 평가에서 서술형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학생들의 주관적인 능력을 점검할 수 있는 바람직한 평가 방법이다. 이런 시험 덕분에 각 학교의 선생님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의견에 따라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문제를 형성하고 실력을 측정한다. 그러나 이런 바람직한 시험방향도 100% 객관식 시험인 대입수능시험에 접근하게 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중학교까지의 좋은 평가의 방법은 고등학교에서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거기다가 고교 내신성적은 믿지 못한다는 일류대학들의 불신은 고교등급제를 지지한다.
요즘 서울의 중학교들에서 만들어지는 영어 시험문제들을 보면 - 회화 실력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 작문이나 창의적인 응용력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상당히 만들어지고 있다. 영어 외에도 물론 그런 서술형- 논술형 문제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처럼 중등교육은 긍정적으로 가고 있건만 고등학교 교육은 획일적인 답을 요구하는 국가적-중앙적 시험, 즉 수능시험 때문에 부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앙적-획일적-객관적 시험을 치루게 해야지 학생들의 실력이 드러나고 그에 따라 명문대에 입학해야 한다는 학벌주의 가치관이 국가 교육의 기층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초중등 학교에서 시행되어 이제 그 결실을 보려고 하는 서술형-논술형 시험제도의 정착과 수확을 위해서는 대학 입시는 빨리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시험만으로 대학입학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좋은 대학, 학과를 나와야지 출세한다는 학벌주의 인생관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국가적-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진학과 실업계 진학이 성적으로만 결정되는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지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청소년들의 진로에 대한 자기결정의 원리가 교육되어야 한다. 지금처럼의 형식적인 도덕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인격적 결단을 가르치고 수행하는 참다운 도덕교육이 실천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부모에 대한 지나친 경제적 의존성을 감소하도록 등록금지원과 학비 무상 교육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사실들을 눈여겨 보건데 이명박-이경숙의 영어 교육강화 플랜은 열쇠를 잘못 꽂았다고 볼 수 있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입시제도, 학벌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대학입시 제도 개혁과 학벌주의의 폐지, 지양 없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영어 교육에 물 붓듯이 쏟아 붓고 영어 시간을 지금의 2배로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북유럽식의 교육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이명박이 하고자 하는 대학자율화보다 훨씬 어렵다. 학교제도도 지금의 미국식의 단선형에서 유럽의 복선형 혹은 분기형으로 바꾸고 진학제도도 핀란드의 무학년제도 같은 획기적인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교교육을 정상화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내친 김에 말하자면 요즘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로스쿨 역시 거시적인 교육정책의 방향을 정해야 비로소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즉 앵글로-아메리칸 방식과 대륙유럽의 교육, 특히 고등교육의 방향의 차이점을 알고 한국의 교육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
일본의 경우처럼 사법고시와 로스쿨이 공존하면서 혼란만 가중시키는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유럽의 교육과 법의 뿌리와 역사를 철저히 공부한 다음 한국에서의 올바른 적용 방법을 찾아야 한다.
4-13-4. 시행착오와 역사발전
현금의 이명박 당선인의 수준에서는 필자가 앞에서 제시한 교육의 방향을 결코 인지할 수가 없다. 이병박-이경숙의 열정은 잘 이해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지나 열정이 있더라도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일을 그르친다.
그리고 영어 교육강화와 더불어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정작 그 교육의 대상인 아이들의 반응이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인 우리 딸과 그의 친구들은 요즘 이명박의 영어 때문에 벌써 걱정이 태산이다. 영어 공부를 일주일에 2시간이나 더하고 또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얼마나 공부가 어렵겠냐는 것이다.
중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입시 지옥, 학교 지옥에서 사는 아이들은 이명박이 싫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의 목소리에도 좀 귀를 기울여야 한다.
4-14. 세계화와 영어 교육
영어 교육, 영어 학습에 대한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진다. 세계화, 국제화 등의 현상에 뒤따라 한국의 영어 열풍은 식을 줄을 모르는 활화산과 같이 타오른다. 왜냐하면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가는 미국을 비롯한 영어 사용국들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부모들에게 영어 교육이 가지는 중요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각종 입시 영어 시험들과 이를 위한 영어 사교육의 지출의 문제이다. 정부는 영어 공교육을 강화한다고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영어 공교육을 강화하고 영어 수능시험을 국가인정시험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영어 사교육은 결코 약화될 것 같지 않다. 앞으로는 학생들에게는 평균 2개의 학원, 즉 보습학원 +영어 전문학원이 부담으로 작용될 것이다.
4-14-1. 영어 공교육 강화의 문제점
각종 영어 사교육은 공교육에 비례해서 그 비율은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사교육은 공교육보다 휘발성이 더 강하다. 공교육이 1 움직이면 사교육은 10 움직이다.사교육을 없애기 위한 교육정책들은 거의 항상 사교육을 더욱 부채질하는 방향으로 변질되곤 했다.
이 때문에 사교육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어떤 노력도 항상 실패해 온 것이다. 시가 총액 8000억에 달한다는 교육기업 메가스터디가 그렇게 비대하게 성장한 이유도 교육부의 개혁, 자세히 말하면 역대 정권의 입시제도의 개혁때문이었다.
이제는 방과후 수업의 형태로 학교에서도 학원식의 수업이 가능케 된다. 이명박의 어슬픈 실용주의 - 시장주의 교육관은 결국 학교마저도 학원의 손에 맡길 것이다. 이는 광우병 사태보다 더 심각한 국가적인 혼란을 가져 올 것같다. 국가 지도자의 무식과 단순한 용기가 그토록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서울시청앞 광장과 광화문 그리고 청계광장등에서 진행된 촛불집회에서 똑똑히 보았다.
누가 말한 것처럼 이명박은 건축 현장소장 같은 이해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용주의라는 단순한 생각만으로는 정국을 주도할 이념을 대체할 수 없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필자는 이대통령이 하루 빨리 한국의 실정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한-미 FTA체결을 위해서 미국산 쇠고기 무제한 수입이라는 악수를 두어버림으로서 그는 자신의 친기업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보지도 못하고 레임덕에 걸려 임기내내 절뚝거리며 목발에 의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각종 규제완화와 노동시장 유연성 등은 우리나라에 필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그는 쇠고기 협상에 발목이 잡힘으로서 이제 친시장적 개혁을 추진할 힘마저 상실한 것이다.
이번 쇠고기 파동이 이명박에게 쓴 약이 될 수도 있다, 즉 경부 대운하 건설같은 무지막지한 정책을 더 이상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무리하게 밀어부칠 의지를 상실한 것은 좋은 학습이다. 국가 지도자의 어리석은 고집을 꺽기 위해서는 이토록 처절한 국민들의 지속적인 반항과 투쟁이 요구되는 것이다.
4-14-2. 세계화와 영어 교육
세계화, 개방화가 속도를 더하는 21세기는 영어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에서는 1997년부터는 초등학교 3학년 부터 영어 교과가 개설되었고 제7차 교육 과정에서는 더욱 상세하게 영어 교육과정이 서술되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영어 몰입 교육, 영어 국가인정시험, 영어전담교사제도 등의 영어 공교육 강화를 천명한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제기하는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실제로 영어를 이해하거나 잘 구사하여 국제적인 정보획득과 문화이해를 하는 계층이 과연 전국민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지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은 인터넷 강국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인터넷, international network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국가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부류의 비율이 얼마인지 궁금하다. 컴퓨터를 이용하여 해외사이트를 방문하거나 서핑하는 넷티즌의 비율은 극히 소수일 것같다. 필자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인터넷 사용자는 국내 사이트 방문자들이고 모두 게임이나 채팅, 싸이질에 인터넷 사용의 시간을 할애한다. 인터넷 활동이 영어 사용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양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라고 하여 컴퓨터의 대중화가 도리어 정보격차를 양산한다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가 영어교육에도 성립한다; 영어 교육의 일반화, 강화가 도리어 영어 격차를 심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대통령이나 청와대 교육수석이 알수가 없다. 같은 논리로 세계화를 영어 교육의 강화와 연결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한다. 세계화를 통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은 기득권층이나 신흥 주류로 떠오르는 소위 보보스(Bobos)등이다. 세계화가 국제적인 빈부의 차이를 심화시키고 같은 국가 내에서도 빈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것은 이제 다 아는 지식이다. 물론 한국과 같은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세계화, 영어화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부작용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화를 근거로해서 곧바로 영어 교육의 강화, 일찍 영어 수업 시작하기(1994) 등은 김영삼 정부의 단세포적인 행동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보고 놀란 격이었다.
세계화, 개방화는 실력있는 자들에게는 큰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 약자들에게는 고유한 권리와 이익을 박탈당하는 기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더 큰 이익이 온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화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논점은 영어를 잘 구사하거나 청취력이 높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영어 학습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초중고 대학교까지의 일반 영어 교육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는 시간량이다.
미국의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외국어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외국어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4300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중등 학교 영어 시간과 대학의 교양 영어 시간까지 다 합쳐도 900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초등학교 영어 교육과정> 논문에서 인용)
필자 역시 위의 문장에 동의한다. 필자는 한국에서는 영어를 전공했지만 박사과정은 독일에서 철학을 연구했다. 필자의 독일어 구사 능력은 독일인들도 인정한다. 필자는 어떤 독일인에게 "당신은 독일어를 탁월하게 말한다(Sie sprechen hervorragendes Deutsch)"라는 찬사를 들었었다. 그런 이유는 9년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계속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계화에 필요한 영어 혹은 외국어 실력을 쌓기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교육에서 영어를 아무리 많이 가르친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외국어 능력의 향상을 위해서는 일반 교육을 통해서는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영어 교육기관에서 개인, 기업과 국가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필자가 말하는 인간 능력의 점진적 무한성을 살려야 한다. 인간 능력의 점진적 무한성이란 인간의 지적 정신적 성장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초중고 대학 12년을 통해서 영어 실력이 약간 상승한다면 어른이된 후에는 필요에 따라서 1년에 하나 정도의 다른 외국어를 습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 영어 단어 몇개 더 알고 좀 더 영어 회화를 잘한다고 해도 성년이 된 후의 발전 속도에는 따라 갈 수가 없다. 영어 유치원에 몇 백만원을 주고 유아들을 맡기는 것이나 애들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서 무슨 짓도 마다 않는 서울, 강남의 영어 열기는 분명 과잉된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노력과 재산을 학생들 영어 실력 향상에 투입했지만 아직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한다. 이는 위에서 말한 외국어 학습의 어려움 외에도 입학시험 제도에서 오는 비휴율성이 있다. 한마디로 모든 영어 학습이 입시나 입사 시험등의 시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핀란드나 스웨덴 같은 영어 학습 선진국의 공통점은 영어 수업의 목적이 획일적인 시험이 아니라 외국어, 영어 자체에 대한 아동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는 데 많은 노력이 기울여 진다는 점이다. 가령 학교 수업 외에도 미국영화나 TV 프로그램 들을 자꾸 방송함으로써 아동들이나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이 많이 되도록 해준다. 그럼으로써 절대적으로 부족한 영어 학습시간이나 영어노출시간을 보충해준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시험점수 향상 이외에 다른 어떤 영어 학습 동기 유발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영어실력은 새로운 학벌과 계층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되고 있다.
4-14-3. 세계화 시대의 적절한 외국어 교육방향 설정
위에서 지적된 것처럼 세계화 =영어 공용화로 보는 관점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실제 외국어 구사력을 통해서 세계화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이런 극소수의 인력을 위해서 전국민이 영어의 황사를 덮어쓸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극히 실용적인 영어, 예를 들어 관광객들을 상대하고 간단한 쇼핑이나 여행 안내 서비스 사업을 위한 실용 영어의 진작이 필요한 때이다. 이런 것들 역시 세계화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단순한 영어 구사력을 위해서 고차적인 영어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다. 한국인들은 연간 15조원(2005년 기준)을 영어 관련 비용으로 쓰고 있지만 '생활영어' 실력은 세계 20개국 중 19위를 기록해 최하위권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진정한 세계화 시대를 위한 영어 교육은 사용목적에 따른 학습의 다양화와 실용영어 능력의 진작에 있다고 본다. 지금처럼 세계화=일반 영어 교육 강화로 보는 것은 입시지옥인 우리나라의 사정에서 지독한 고비용-저효율의 외국어 학습이 될 뿐이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일반 학교교육은 실용, 즉 실제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능력 개발이다.
따라서 이명박의 생각, 즉 <영어 공교육강화= 영어 사교육 약화>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보좌할 이주호 청와대 사회-교육수석 비서관은 경쟁과 학교자율만을 부르짖는다. 자율은 학벌과 계층구조의 고착화에 유리할 뿐이다. 영어 실력을 통한 사회 개편은 진정한 개인, 기업, 국가 경쟁력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실용은 항상 구체적, 특수적 상황을 중시한다. 구체적 , 특수적 상황을 떠난 것은 일반적 교육이다.
앞으로의 영어 교육은 실용을 중시해야 한다. 즉 세계화, 국제화 시대니까 영어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교육에서도 영어를 강화해야 한다 같은 논리는 더 이상 옳지 않다. 결국 영어가 필요한 특수목적과 학습자의 자발적인 흥미를 지향하는데서 영어 교육의 올바른 방향이 정립될 수 있다고 본다.
4-15. 소비자 중심 교육의 허구와 실상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커다란 방점은 노무현 시대와 달리 보수주의로의 회귀에 찍혀있다. 이는 경제적의 신자유주의, 외교의 친미/동맹주의, 남한 정부의 역사적인 정통성 부여 등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소위 뉴 라이트(new-right)운동이다. 이로 인해 최근(2008 말) 역사교과서, 경제교과서에 대한 보수적인 개편이 대대로 전개되고 있다. 이들은 <교육의 소비자 중심주의> 혹은 <맞춤형 서비스론>를 들고 나와서 많은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4-15-1. 뉴라이트 운동의 부상
최근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소위 신보수주의- 뉴라이트 운동-이 상당한 지지세를 얻고 있다. 이들은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이제 자신들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신보수주의자들은 국가에 대한 시장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 걸쳐 국가적/법적 규제가 개인의 자유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한국의 신보수주의자 - 뉴라이트 운동- 는 분배의 문제를 떠나서 외교-통일문제에 대해서 강한 친미-반공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을 과거의 군사-독재 정권과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들은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이 지녔던 공동체적-사회주의적인 미덕을 완전 말소하고 철저한 시장주의/개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공산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정권들은 국제정치에서 반공(反共)과 친미(親美)를 국시로 삼았었다. 반공이야말로 그들 정권의 존립이유였다. 반공을 통해서 그들의 정당성을 담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경제정책은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의 - x 차 경제개발, 새마을운동, 인위적인 공업단지 조성, 신도시 개발, 대규모의 공영주택 개발 (…) - 성향을 강하게 나타냈다. 국가가 시장을 창출하고 정부가 기업들을 키웠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국가주도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 공공부분보다는 민간부분이 더 효율성과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 이제 비로소 인식이 되고 있다. “하면 된다”는 모토를 가지고 국민들이 지도자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모든 게 해결되었었다. 그런 결과 우리는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난이라는 숙명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억울하게 인권이 탄압당하고 목숨을 잃었으면서도 그런 독재자들의 시대를 미화하고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들이 그런 권위주의 시대와 그 지도자들을 그리워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그들이 펼친 사회주의적/계획적 경제 정책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국민 복지니 분배정치니 하는 개념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차이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었다. 사회적 부(富)가 상당히 고르게 배분된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맹아의 기운을 떨치는 뉴라이트운동 혹은 신보수주의 - 이는 미국의 네오콘에 해당한다 - 는 과거의 우익과 달리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기업가, 자본가들의 권위와 책임을 강조하며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한국의 정치지형도의 한 부분을 그리려고 한다. 이는 현실정치적으로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신자유주의 혹은 뉴라이트 운동은 종교계의 역할이 거기서 중요한 점이다. 특히 이 점은 뉴라이트의 소비자 중심 교육과 맞물리고, 이는 또한 정부의 사학개정법을 반대하는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4-15-2. 뉴라이트 - 반미/친북 성향의 교육 비판
위에서 말한 뉴라이트는 이제 그들의 전선을 정치, 통일, 대북 문제가 아니라 가장 국민들의 피부를 찌르는 문제인 교육의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최근 신문의 뉴스는 다음과 같다.
"교육·학생선택권 등 요구"… 뉴라이트 학부모연합 13일 출범 [국민일보 7/13]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13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뉴라이트 학부모연합' 발기인 대회를 열고 교육 공급자인 정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맞서 수요자인 학부모 중심의 교육주도권 쟁취 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학부모연합은 발기 취지문에서 "전교조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육 경쟁력은 평등주의의 포로로, 학교는 반(反)시장·반미·친북·반대한민국 가치가 전파되는 좌파이념의 선전장이 됐다"고 주장했다.
연합측은 정부에 대해서도 "고교 평준화,자립형 사립고 설립,외고모집 시·도제한 등의 통제와 간섭을 지속하면서 학생과 학부모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전 세계를 떠돌게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학부모연합 김종일 준비위원장은 "학부모는 국가재정을 책임지는 납세자이고 학교등록금도 직접 내는 수요자"라며 "정부의 통제위주 정책과 전교조의 전횡을 막기 위해 학교선택권과 교육선택권,학교의 전통과 개성회복,학교의 학생 선발권 보장 등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기인 대회에는 김진홍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과 전국 17개 지역 창립준비위원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12일까지 1600여명의 학부모가 동참 뜻을 밝혀왔으며 연말까지 5만명의 회원을 모집할 계획이라고 단체측은 전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뉴라이트 학부모연합이 표방하는 가치관은 위의 기사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정부와 전교조에 맞서 학부모 중심의 교육주도권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학부모연합은 발기 취지문에서 "전교조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육 경쟁력은 평등주의의 포로로, 학교는 반(反)시장·반미·친북·반(反)대한민국 가치가 전파되는 좌파이념의 선전장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긍정이나 부정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초/중/고교 교과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로서도 이런 면에 주의하여 상세히 분석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경제나 사회 쪽의 교과서를 보면 시장의 가치를 소홀히 한 경향이 없지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과서나 학교 교육이 학생들에게 친북/반미 경향을 보이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는 요즘 초/중 학생들에게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라고 물으면 거의가 부정적인 답변을 한다. 이 부분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지탱케 한 권력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국민들 특히 386이라 불리는 세대들은 이 반미(反美) 감정이 아주 강하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미사일발사실험과 남북 장관회담에서 우리는 북한의 불합리성에 대해서 충분히 교육을 받았다.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저지른 못된 소행으로 인해 미국과 미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축적되어왔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반미 운동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이나 전쟁의 원인이 아닌 이상 모든 역사적 불행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물리쳐야 한다. 한국전쟁의 원인이 북한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를 통일전쟁으로 미화하려는 일부세력의 편파성은 이제 버려야 한다.
4-15-3. 소비자 중심 교육 비판
위에서 필자는 뉴라이트의 반미/친북 경향 비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조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소위 소비자 중심 교육은 잘못이다. 이는 평준화 비판과 명문고 설립 자유 등의 과거 지향적인 가치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뉴라이트 학부모 연합은 "고교 평준화,자립형 사립고 설립,외고모집 시·도제한 등의 통제와 간섭을 지속하면서 학생과 학부모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전 세계를 떠돌게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그들은 "학부모는 국가재정을 책임지는 납세자이고 학교등록금도 직접 내는 수요자"라며 "정부의 통제위주 정책과 전교조의 전횡을 막기 위해 학교선택권과 교육선택권, 학교의 전통과 개성회복, 학교의 학생 선발권 보장 등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과거의 명문고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학교선택권과 교육선택권”이란 개념이다.
우선 여기서 물어 보고 싶은 것이 그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즉 학교선택의 주체가 학부모이냐 혹은 학생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고등학생의 경우도 부모가 학교선택권, 교육선택권을 휘두른다면 이는 지대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들은 자녀나 학생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아이들은 부모의 관할로 보고 부모, 학부모에게 학교 혹은 교육의 결정을 맡기려한다.
문제는 현재의 한국적 상황에서 부모들의 주된 관심이 무어냐는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 즉 명문대 입학이다. 목숨을 걸어놓고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는 것이 한국 부모들의 열정이다.
그런 학부모들의 학교선택권, 교육결정권 운운은 당뇨병 환자에게 설탕을 마구 먹이는 꼴과 같다. 학벌주의적인 상황을 정리하지 않고 학부모에게 교육선택을 맡기는 것은 국가적, 국민적 환우를 더욱 곪게 하는 일이다.
뉴라이트들은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즉 한국의 주어진 교육상황이 타고나 천부적(天賦的)인 것이나 숙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입시지옥! 그것은 한국사회의 선험적(先驗的) 조건이 결코 아니다. 멋진 경쟁과 선택은 훌륭한 경기장에서 해야지 지옥에서는 할 수 없다. 아수라장에서 싸우는 흡혈귀들에게 자유와 선택의 결정권을 주어보라!
거기다가 “학교의 학생 선발권 보장”을 허용하라는 것이다. 이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로서 공박된다. 지옥 자체를 파괴하고 해방하기 전에, 그 안에서 펼치는 어떤 노력도 무용하다.
현금의 상황을 방치한 채, 학부모들이나 사학운영자들 혹은 학원 운영자들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어보라. 그 결과는 여러 모로 부정적이다. 우선 가난한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상처받고 소외될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사회적 통합성은 심대하게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욱 비자립적인 공부기계로 전락할 것이다.
교육의 해방은 필자가 여러 번 지적하거니와 교육의 공동체주의 혹은 국가주의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개인의 학교설립이나 교육을 정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선의의 경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독일이나 북구의 나라들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반드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만 경쟁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명예의 경쟁도 있고 사랑의 경쟁도 있다.
뉴라이트의 소비자 중심주의 교육 개념의 취약점은 바로 교육의 소비자가 누구냐 하는 점을 명백히 밝히지 못한 점이다. 여기에는 아동들, 혹은 학생들의 인격과 자기 결정에 대한 심리적, 사회적 이론이 필요하다. (잘못된) 시장논리에 근거한 학부모 중심의 교육소비자 이론은 학생들에게 불행을 초래한다.
4-15-4. 교육 서비스 개념의 문제점
교육을 단순한 서비스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학교교육의 경우 그 소비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있고 따라서 뉴라이트의 논리 즉 교육의 소비자= 아이들의 후견인(학부모) 라는 등식은 일방적인 것이다. 설령 후견인 혹은 보호자가 교육의 경비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교육의 대상이나 교육소비의 주체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육비용의 부담자들이 교육의 수혜자(=소비자)의 이익을 잘 대변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가 있다. ‘공부 = 출세’ 라는 유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교육의 수혜자의 특성이나 개성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시장가치만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제기되는 다른 문제는 교육 활동을 전적으로 서비스 사업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근래에 와서 지식과 기술 그리고 정보 등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소위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니, 맞춤형 교육이니, 주문형 교육이니 하는 개념들이 널리 퍼지고 있다. 특히 방송이나 인터넷매체를 통한 원격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종래의 권위적 교육이 아니라 교육의 수요자가 교육의 키워드로 부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교육의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 혹은 능력의 전달로서의 교육이 중요하긴 해도, 피교육자의 인격과 도덕성 혹은 사회성의 개발이라는 면은 맞춤형 교육으로서는 결코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소위 인성교육이라 불리는 도덕성 사회성 교육은 맞춤형 서비스 교육으로는 접근이 안 된다. 지식 교육은 상업적으로 매매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성, 사회성, 인격성 부분은 돈으로 매매될 수 없다. 학교 교육의 도덕적, 인격적 측면은 소비자 중심이 아니라 공급자(=교사) 중심으로 펼쳐나가야 한다. 여기에 교육자와 장사꾼의 차이점이 있다. 현금의 소비자 중심의 교육은 어쩌면 교육을 “손님은 왕이다” 라고 하는 상업과 판매의 업무와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이 그들의 교사를 상인이나 가게주인으로 인식할 때 - 학원이 바로 그런 경우이지만 - 학생들의 인격적 변화나 도덕성의 개선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교육을 함부로 경제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국가적 생산의 한 부분으로서의 서비스(=용역) 사업은 국민의 상호적인 이익교환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물질적 이익을 말한다. 그러나 교육은 그것이 아무리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더라도 서비스 산업으로 타락해서는 안 된다. 서비스 산업은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교육은 상업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의 기본 형성에 관련한다. 따라서 상업이나 장사로서 교육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 혹은 특정 전문적인 관점에서 교육을 수요와 공급의 각도에서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교육의 전체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도덕성은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이다. 경제와 상업 역시 도덕성의 기초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상업이 도덕을 지배하면 안 된다. “소비-생산” 혹은 “수요-공급”의 시장원리가 도덕성, 사회성을 지배할 때, 그 사회는 타락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정의는 사라지고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친다. 그런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최근의 법조비리를 보라. 이 모든 것이 교육을 개인의 이익추구와 출세의 도구로 보는 수요자 중심, 소비자 중심의 교육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제는 이렇게 타락한 소비자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아동의 자기결정을 도와주는 교육, 아동의 숨겨진 재능과 개성을 찾도록 하는 교육 그리고 이를 세밀히 보고 관찰하며 아동 스스로 지식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우는 산파술의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개혁과 사회구조변혁이 우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공부출세주의, 학벌주의 등에 물든 기성세대와 학부모들의 의식구조의 혁명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부모라는 권리하나로 마음대로 아이들의 미래와 교육을 지배하는 독재적 교육관에서 벗어나도록 계몽해야 한다.
4-16. 88만원 세대와 교육정치
외환위기와 이를 승계한 신자유주의 물결의 여파 속에서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2대8의 사회라는 사회적인 분열상의 치유를 기치로 노무현 정부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 정부는 결국 이런 폐단을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면서 이제 그 고단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고 한다. 차기 정부-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 -가 이를 잘 치료할지는 미지수이다.
전반적인 사회불안과 고용부진의 늪 속에서 생성된 문제의 하나가 청년실업과 저임금노동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88만원 세대라는 말로 잘 표현한 것은 우석훈/박권일 공저인 “88만원 세대”이다.
4-16-1. 88만원 세대의 등장
“88만원 세대” 라는 책에 의하면 88만원 세대란 한국의 20대 중 5%만이 대기업·공기업·5급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으로 붙은 세대 명칭이다. ‘88만원’은 비정규직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가 받는 평균 급여 비율 74%를 곱하면 세전 소득이 88만원이 된다는 데서 얻은 상징적 수치다. 이들은 실업자가 아니라 취업자인지만 수입구조가 기초적인 생존의 필요도 채우지 못할 만큼 열악하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용돈을 벌기위한 시간제 노동, 기간제 노동 등이 이제는 정규적인 일자리로 변한 것이 IMF위기 이후 한국의 실정이다.
정말 한국은 극한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다. 노무현과 386들의 구호는 양극화 혹은 2대8의 사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이용해서 정권을 잡았지만 문제는 그 해결방안이 나빠서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른바 88만원 세대에 대한 관점도 필자의 경우 승자독식이나 신자유주의 등의 언어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전반적인 사회적 무능, 도덕적인 부패 등의 용어로서 기술될 것이다.
4-16-2. 순응주의 교육이 가져온 현상 - 88만원세대
노무현과 386들의 정치실험은 국민들의 경제불안, 생존불안을 분배문제로 해결한다는 환상을 심어주어 정권획득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산과 성장의 법칙을 몰라서 경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국정운영의 실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최근 발생한 서해안 기름 오염 사건이다. 아름다웠던 서해의 해안선과 황금어장 그리고 각종 어패류와 생태계의 절망을 가져온 세력이 노무현과 소위 386세대이다.
그들은 우리나라 정치역사에 영원한 오점을 남기고 말 것이다. 그들은 권위주의 권력에 대한 반항은 잘했다. 즉 그들의 능력은 부정적인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하고 실천하고 경영하는 능력, 생산과 건설의 능력, 국제경쟁력들은 초등학생만도 못했다. 이명박의 표현처럼 그들은 말은 잘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못할 수가 없었다. - 그렇다고 필자가 이명박에 대한 환상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는 실무능력은 좋지만 전체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교육과 한국인들의 정신구조에 대한 이해력이 극히 부족하다. 그래도 다른 후보들보다는 전반적으로 낫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일개 대기업의 과장만도 못한 능력으로 국가의 수반의 기능을 행사한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국민들은 모두 속은 것이었다.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과 도덕성에 대한 희망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노무현을 택한 것이었다. 부패한 차떼기 정당 한나라당과 기득권세력에 대한 불만이 노무현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었다. 그러나 그는 알다시피 조직 지도나 사업 경력이 극히 부족한 자였다. 리더의 경력이라는 면에서 볼 때, 당시 이회창이나 이인제가 노무현보다는 훨씬 나았었다. 그러나 지역감정과 지나치게 이상적인 국민성이 결합되어 역사적인 실패작을 우리는 받아들인 셈이었다. 노무현은 지나친 지역균형 정책과 신자유주의를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나라 경제를 완전히 거덜 내어 놓았다.
이런 무능한 정치인들에 의해서 경제와 환경이 파괴되는 동안 청년실업과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거의 손도 대보지도 못하고 방치된 것이다.
88만원 수입으로 상징되는 20대 인간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처지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못하고 사회 시스템에 순응하고 있다. 취업에서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그냥 감수하는 88세대는 대학시절에도 역시 그런 무력한 인간성을 표출한다. 이는 특히 요즘 대학생들의 대사회적인 무기력에서 인지된다. 다음의 신문 기사들에서 우리는 요즘 대학생들의 비판의식 결여와 그들의 정의감, 도덕성 부족을 알 수 있다.
올봄 부당해고를 당한 울산과학대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알몸시위’를 벌였을 때의 일이다. 학생들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학(勞學)연대’의 깃발을 드는 대신 일부 학생 대표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협박을 했다. 지난해 한국외대 총학생회는 부당해고에 맞서 파업을 벌인 비정규직 노조에 대해 학습권을 침해한다며 공격했다. 학생들은 당시 박철 총장에게 ‘직원들에게 무노동무임금 원칙을 지키라’는 내용의 편지를 100통 넘게 보냈다. 2005년 고려대 한 운동단체의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박사 학위수여식 저지 투쟁은 학생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됐다. (경향신문 12월 9일자)
필자는 일찍이 저서(교육공화국)에서 “수능시험은 순응시험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능시험과 각종 내신 성적의 노예가 된 청년들은 정의를 모른다. 오직 굴종과 체제순응밖에 모른다. 그들은 현 사회 시스템을 떠나면 죽는 줄 안다. 하버마스(J. Habermas)가 말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가 청년들의 삶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현행 한국의 교육은 도구적인 합리성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부각시킨다. 실천적-도덕적 합리성은 불필요한 것으로 가르친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는 지나친 입시경쟁과 성적경쟁은 인간의 정신을 노예화시킨다.
그리고 도덕성과 실천정신이 없는 곳에 창의성과 능률도 없다. 사람들은 흔히 생존과 도덕성을 대립되는 가치로 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도덕성, 실천적 사회정신 없는 곳에 효율이나 합리성도 없다. 이 양자는 불가분리적이다. 마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사회적 생존성과 도덕성은 떨어질 수 없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생존만을 최고의 법칙으로 삼는 사회는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사회이고 춘추전국 시대인 것이다.
직업과 생존의 안정을 위해서 알몸으로 시위를 벌이는 비정규직 여성에게 물리력을 행사하겠다는 학생들의 협박은 충격적이다. 이는 나라의 장래를 맡길 미래 세대들이 할 말이 아니다. 인간들은 아직 세상 물정의 때가 덜 묻은 청년기에는 어느 정도 이상적이어야 한다. 젊은 시기에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인간들도 사회생활에 접하다보면 타협과 순응을 일삼게 된다. 그런데 하물며 가장 이상적이고 이념적일 대학시절부터 약육강식의 논리에 순응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는 장래의 비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와 승자독식의 사회구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잘못된 교육의 결과이다. 강압적인 교육이 지배하는 사회는 아이들의 정신을 죽이는 사회이다. 입시위주의 교육, 주입식, 암기식의 교육이 판치는 사회는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킨다. 학교폭력과 노예적인 대학생, 88세대 등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기인한 현상들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기술은 다른 기회에 할 것이다.
공부! 그것은 아이들을 잡는 올무이며 덫이다. 자녀들의 장래를 위한다는 기성세대들의 열정은 실은 나라의 장래, 아이들의 장래를 망치는 열정이다. 이런 악취나는 교육이 벌써 60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아니 조선시대부터 친다면 600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과거시험부터 시작하여 각종 국가고시와 수능시험 등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암세포들이다.
4-16-3. 개성과 경쟁의 조화를 위하여
한국의 초ㆍ중ㆍ고 교육이 철저히 학벌주의에 근거한 노예교육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대학교육에 한해서는 경쟁과 생존을 생각해야 한다. 교육의 다의성, 양가성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교육과 치열한 교육, 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 취미로서의 학습과 일으로서의 학습, 개성신장의 교육과 국제 경쟁력으로서의 교육 등의 이원적인 교육의 이념을 충족시키는 학교제도, 교육 제도의 발굴과 개선이 필요하다. 이일은 그러나 헌법 개정으로도 다 이룰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정규직 하는 대립도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정규직, 계약직 등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대선후보들 가운데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겠다 혹은 일자리를 500만개 더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고용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용의 유연성을 부여하면서도 모순된 임금제도 등을 해소함으로써 고용의 양과 질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학력 실업자들이 많다. 이런 부분은 현재의 대학위주의 학교제도를 실업-실무위주의 학교제도로 개선함으로써 많이 해소될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노예교육을 폐지하는 대신 기업에도 자유를 많이 주는 것이 소위 88만원 세대를 지양하는 첩경이라고 할 수 있다.
4-17. 창의력 교육의 문제
경제가 어렵다. 살기 어렵다는 말이 요즘 우리사회의 바닥을 휩쓸고 있는 큰 흐름이다. 청년백수, 비정규직, 88세대, 실업자 증가, 자살의 증가, 양극화, 고령화, 인구감소 등으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현저한 부정성은 쉽게 극복될 수 없는 어려움이다.
이런 경제 생활의 어려움은 기술과 산업 발전의 부진에 원인이 있고 또 거기에는 국가 시스템의 비효율적인 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시대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실용주의 철학을 강조한다. 그러나 원유가를 비롯한 최근의 원자재 값 상승은 그런 노력을 더욱 힘들게 한다.
본인은 IMF 위기로 표상이 되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진을 근본적으로 국민의 창의성 부족으로 보고 또 그런 창의력 부족의 심층적인 원인을 교육 제도의 열악성에서 발견한다.
문제의 해결은 생각, 즉 올바른 생각과 지식이다. 그리고 올바른 생각을 추진하는 실천력이 생각을 뒤따라햐 함은 물론이다.
한국의 교육은 인간의 사고, 창의적인 사고를 함양시키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의 전반적인 사고력, 창의적인 사고, 문제해결을 위한 사고와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한 일차적인 원인은 해방후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간의 교육적인 모순과 실패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은 현안 문제를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보는 이명박식의 현안 판단에 대해서 반대한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부진 상태는 너무 실무적으로 무능한 노무현과 386 세대들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잘못된 교육과 거기서 유래하는 잘못된 사고의 탓으로 국정을 그렇게 심하게 그르쳤던 것이다. 노무현과 386의 대표적인 실수는 과거의 일본을 베껴서 지역균형발전을 시도한 일련의 정책들 때문이다. 그들의 단순한 사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려는 모방의 정신이 국가 운영을 어지럽힌 것이다. 이제는 그런 단순무식한 위정자들이 사라지고 현실의 복잡성과 해결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또 그런만큼 현실적 능력을 가진 위정자가 나타났으니 아무래도 노무현 일당만큼은 나라살림을 거덜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일당의 문제는 그 실무적, 실천력 유능성과 대조적인 이론적, 근본적인 지식의 부족이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목표와 방향이 바르지 못하면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특히 이명박의 교육에 대한 인식부족은 앞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 그는 시장지상주의를 교육에 까지 밀어부칠 기분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이명박의 등장과 함께 한국 정치사의 최악의 상태는 극복될 것으로 보인다 - 노무현 일당의 무능함은 그의 임기말의 서해안 기름 유출, 환경의 극단적인 파괴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진다. 노무현은 청와대에서 밤마다 외로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는 밤에 국민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작성하곤 했었다. 그렇게 대통령이 할 일이 없었단 말인가? 작은 학원 하나 경영하는 사람도 그 일을 잘하려면 할일이 너무 많아서 부부생활을 할 수 없을 절도로 바쁘다고 한다. 하물며 거대하고 복잡한 한 국가의 최고 경영자가 외로움을 타고 사는 집을 적막강산이라고 표현했다면 이는 완전히 국정을 수수방관했다는 말밖에 안된다. 따라서 노무현을 정치계에 입문시킨 김광일 전 의원의 말, 즉 노무현을 강화도령에 비유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역사적인 오류의 경험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4-17-1. 창의성 문제
우리는 창의적인 생각, 창의적인 사고 아이디어 등을 강조한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창의성 혹은 창조성에 함축되어 있는 다른 요소를 한 번 꺼내 보고 싶다. 창조의 다른 면은 파괴이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파괴해야 한다. 따라서 창조성, 창의성을 장려한다면 파괴성도 장려해야 한다. 파괴없는 창조는 없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창조없는 파괴는 있다. 후자는 진짜 파괴 (나쁜 파괴)이다.
창조와 창의력을 함양하고 싶다면 파괴의 필요성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창조와 창의는 단순한 생각과 아이디어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행위와 사건의 문제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나라의 교육여건을 보면 모순점이 많다. 창의성의 뒷면(the other side of the coin)인 파괴 그리고 긍정의 뒷면인 부정에 대한 배려가 없다. 가령 학교 교실이나 다른 시설에서 혹은 가정이나 어떤 곳에서 아이들이 파괴적인 활동은 전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쌓기 위해서는 부셔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여건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아무 것도 부술 수 없게 되어 있다. 시설물을 부순다는 것이 아니라 가령 나무를 자른다든지 돌을 깬다든지 혹은 못쓰는 물건들을 파괴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구장이였던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창고에 있던 못쓰는 책상과 의자들을 친구들과 (수위 몰래) 부순 적이 있다. 그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험이 나중에 집 고치는데 퍽 유용한 체험이 되었다. 필자는 차제에 만들기 교육만 하지 말고 부수기(파괴) 교육도 좀 시키자고 제안한다. 이런 체험이 없으니까 아이들은 온라인에서 매일 부수고 죽이고 파괴하는 게임만 즐긴다. 남을 때리는 아이들이 많다 - 학교폭력 -. 그런데 그들에게 고통의 체험이 무엇인지를 몸소 인식시킴으로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폭력의 부정성을 계몽시킬 수 있다. 선을 알기 위해서 악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지금 학교 현실과 교육내용은 너무 괴리감이 있다. 아이들은 욕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그런 나쁜 말 한마디 나오지 않는다. 교과서는 아이들의 생활에서 유리된 것이다.
무조건 착하고 선한 것만 가르친다고 되지 않는다. 너무 현실여건과 동떨어진 교육은 결국 피교육자들에게서 소외된다. 현실은 극히 각박하고 거칠고 험악한 데, 설교는 항상 사랑하자, 착하게 살자, 나쁜 말은 하지 말자 같이 좋은 말만 하는 가르침은 결국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목사님, 선생님들은 착한 말 고운 말을 쓰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험악한 말, 거친 말, 눈 부릅뜨고 잔뜩 찌푸린 얼굴도 필요하다.
그리고 학생 계도차원에서 볼 때, 폭력이나 파괴가 있다는 것은 거꾸로 인간의 정신에 창조와 긍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그런 창조ㆍ건설의 싹이 잘못된 내ㆍ외적인 사정으로 말미암아 왜곡될 때, 폭력범죄와 금품갈취, 왕따 등의 부정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착한 말 고운 말을 쓰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험악한 말, 거친 말, 눈 부릅뜨고 잔뜩 찌푸린 얼굴도 필요하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물질적/육체적 파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파괴, 즉 부정성이다. 우리 나라 학교, 특히 최근 중학교 신입생들의 경우 학교 규칙과 선생님의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받고 있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일체의 도전은 죄악시된다. 자유가 없다. 도발이나 복장 그리고 학교마다 좁쌀같은 규정들이 아이들을 옥좬다. 가령 어떤 학교는 친구들에게 돈 빌리는 것도 금지시킨다. 물론 그런 까닭은 있다. 소위 삥뜯기(금품갈취)를 막기 위함이다. 부정성없이 창의성을 키울 수는 없다. 기존의견에 대한 부정성, 파괴성이 곧 창의성이고 독창성이다. 그러나 대학입시 시험때문에 한국의 초ㆍ중ㆍ고 교육은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할 것만을 강요한다. 문제풀이 위주의 교육이다. 그러나 진정한 독창성은 그런 기존의 이론과 학설에 대한 부정성ㆍ파괴성에서 나온다.
이런 마당에 이명박 일당은 교육의 자율화, 시장화를 추진한다. 학벌주의 개혁없는 교육의 자율화ㆍ대학의 자율화는 반복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부정성과 창의성을 소멸시킬 것이다.
창의성에 대한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는 학교뿐만 아니라 기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업들은 오너일가의 권위주의를 밑에 깔고서 자꾸 창의성, 독창성을 부르짓즌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창의적인 인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누누히 말해왔다. 그러나 최근 삼성특검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거대조직의 이면을 보면 그런 회사에 무슨 창의적인 인재가 붙어 있을수 있을까 하는 불신이 생긴다. 진정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인재라면 조직의 더러운 부정에 대해서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창의성, 창조성은 파괴성, 부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기존의 (잘못된)권위에 대한 부정과 파괴없이 무슨 창의성과 독창성이 있을까?
4-17-2. 파괴적 창조, 창조적 파괴
창조의 길은 멀고 험하다. 이는 단순히 창의적인 아이디어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 여러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또 현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개선이 필요하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것은 예술 창조의 일이라기 보다는 사업이나 조직의 개편 들 실천적인 문제의 창의성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존의 제도나 방침 등을 바꾸려고 하면 겁을 내고 싫어한다. 가령 필자의 부모님들은 예전에 주점을 하셨는데 처음에는 잘되었으나 나중에는 손해를 볼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업종을 바꾸거나 폐업할 생각을 못하셨다. 결국 손실을 많이 본 후 그만두게 되셨다. 이처럼 현실은 부단히 변하고 거기에 따른 인간들의 적응을 요구한다. 인간의 창조적 사고는 이처럼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창의성, 그것은 예술창조 이전에 인간의 생존을 위한 능력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창조적 파괴와 파괴적 창조가 필요하다. 변화란 바로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하였다. 가장 환경에 잘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아 번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은 항상 변한다. 변하는 환경에 늘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고와 생각이 바르고 빨라야 한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우리가 살아남기에 도움이 안 되는, 도리어 방해가 되는 덕목들이다. 고정관념에 대한 반성과 파괴력이 필요하다.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찾아 나서는 것이 창조력이다. 어제 맞던 생각이나 행동이 오늘은 맞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교육은 이런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창의력을 줄 수 없다. 암기식, 주입식 교육은 변화를 싫어한다. 이는 창조와 파괴 모두를 싫어한다. 수능시험 성적하나로 60만 학생을 줄세우는 학벌주의 교육은 변화와 창조를 거부한다. 그런데도 대학들은 오직 수능 성적 하나로 인재들을 평가한다. 그들은 내신 성적도 논술시험도 불신한다.
시장은 일반적으로 경쟁을 유도하고 이는 다시 사회적 창의력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시장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교육이 시장에 종속될 때, 사회적 유동성은 굳은 기름처럼 경직되고 불신과 계층적 적대감은 늘어간다. 이명박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의 공무원 개혁은 옳다. 이제부터는 기업이 손님이고 공직자는 머슴의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의 철밥통이었다. 그들이 국가 산업발전을 위해서 한 일은 적었다. 그들은 기업위에 군림했다. 이런 공조직의 관료주의를 혁신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생각에 박수를 보내자.
그러나 현실이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국가 존립 목적의 기본 방향을 재조정해야 한다. 생산력 증대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인재 집단의 양성을 통해서 조국의 역량을 완전히 업그레이드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현행의 학교제도, 평가제도, 국가와 대학의 관계 등이 완전히 새롭게 정의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필자는 이미 수차에 걸쳐 강조했다.
경제가 아니라 교육이다.
4-18. 교육개혁이 경제성장이다.
목하 베이징 올림픽의 열기가 뜨겁다. 한국 수영의 강자 박태환은 드디어 세계무대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수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켰다. 그러나 양궁에서의 다소 부진한 성적때문에 한국의 환호는 주춤했으나 다시 장미란이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국위를 선양했다.
그러나 필자의 가슴에는 우울한 한국 및 외국의 경제지표와 그 불투명한 전망들이 더욱 또아리를 치고 있다. 그 이유는 필자부터 가난하며, 또 주위의 많은 다른 사람들 역시 취업난과 실업률, 영업부진, 물가상승과 생존을 위한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와 오락 그리고 취미생활등은 모두 생존의 물적 조건이 어느 정도 채워져야 비로소 향유할 수 있는 인간의 문화적 생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대통령 역시 경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명박은 예전에는 경부 대운하를 파서 경제를 활성화한다더니 이제는 친환경 에너지 사업으로 국가 경제를 부흥시키겠다고 선포했다. 대통령의 8.15경축사에서 나타난 저탄소ㆍ녹색성장 사상은 종전의 경제 전략에 비하면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명박은 경제 문제의 핵심이 교육에 있음을 모르고서 자꾸 경제는 경제, 교육은 교육 하는 추상적인 시선으로 문제를 본다. 그는 고교다양화 300프로젝트를 비롯하여 여러가지의 혁신적인 교육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문제가 경제를 장-단기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헤겔(W.F.Hegel)은 "추상적(abstrakt, abstract)"이란 개념을 "사물들의 관계성을 모르는, 개체적인 사물을 고립적으로 파악하는"의 뜻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사물들의 내적인 관련성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그 사물의 전부로 보는 인간의 낮은 단계의 마음을 오성(Verstand, understanding)이라고 하고 그 반대로 한 사물의 일면성을 지양하고 그 사물의 한계를 바라보면서 전체와의 연관을 보는 마음을 이성(Vernunft, reason) 혹은 정신(Geist, spirit)이라고 규정한다.
필자의 보기에는 이명박은 오성적이다, 그는 이성적이지 못하다. 특히 경제문제를 교육적으로 바라보고, 또 그렇게 풀지 못하는 한 그의 정신세계는 오성적이고 추상적이다. 필자는 교육의 경제적 함축을 핀란드의 사례를 통해서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핀란드의 교육성공, 경제성공이 가능한 조건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4-18-1. 실업, 실무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1)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
많이 아는 것처럼 핀란드는 최근 여러 지표에서 교육경쟁력과 국가경쟁력에서 최고위를 달리는 나라이다.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우선 100% 무상교육을 대학원까지 지원한다는 점이다. 이를 필자는 교육의 국가주의라고 부른다. 핀란드외에도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국가들이 이런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미국식의 교육의 개인책임과 시장주의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거들이 배워야 할 대목이다. 교육의 경쟁주의와 수월성 교육은 하등 우리 현실에 맞지 않음을 빨리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대학 랭킹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다. 핀란드는 세계 100대 대학에 드는 대학이 많이 없어도 교육의 경쟁력은 세계 1위이기 때문이다 - 필자가 아는 한 핀란드에는 헬싱키 대학 하나가 세계 70위정도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 대학랭킹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과 산업의 적절한 연계성이다. 필자가 대학서열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대학은 교육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떠나서도 사람들은 계속 자기발전을 해나간다. "실천이 이론을 앞선다" 라는독일의 속담이 있는데 이는 기업이나 정치권 등의 실제 세상이 교육기관보다 더 경쟁력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대학에서 1개를 알고 있다면 그와 같은 분야의 실무계에서는 10개를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그리고 대학이나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실무계에서 나온 것을 나중에 추후적으로 반영하여 정리하고 가르치는 것이 많다. 가령 영화 감독이나 제작을 생각해 보자. 단순히 이론과 실무를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분야에서 쟁쟁한 영화감독과 대학교수 중에서 누가 더 영화에 대해서 잘 아는가? 대학교수 그들은 영화의 역사를 이리 저리 공부하고 정리하여 학생들에게 지식을 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학교교육이란 아무리 그 수준이 높은 것이라고 하여도 결국 실무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좋은 대학가려고 재수, 삼수까지 하는 한국의 소외된 학벌주의 교육은 완전히 지양되어야 한다.)
따라서 미국식의 대학서열화 혹은 한국식의 학벌주의는 수단과 목적, 연습-준비와 실전을 혼동하는 타락한 교육 관습이다.
실무 중심, 실천위주의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대학랭킹에 그렇게 목맬 필요가 없다.
2) 교육과 산업의 유기적 구성
이명박의 교육정책은 대학자율화와 경쟁교육 부활을 말한다. 대학교육정책의 문제는 대학교육의 질을 높히거나 직장이나 산업과의 연결방안은 없고 자율화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교를 졸업해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청년백수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넘실거리는데 대학의 자율화만 부르짖는 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만 울릴 뿐이다.
대학들에게 자율화 혹은 법인화만 시켜 놓으면 저절로 대학 교육의 질이 높아질지는 모르지만 교육 복지와 국가경쟁력을 위한 고등교육의 내용적인 개선책은 없다. 그리고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더 큰 문제는 교육을 통한 기회의 균등과 사회적 유동성의 향상을 위한 방법이나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할 거의 유일한 수단이 교육기회의 균등인데 현정부에는 이를 위한 실질적인 대책이 없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그들은 교육의 불평등을 초래할 짓들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기숙형 공립학교와 마이스터 고등학교의 구상도 허술하다. 이런 교육기관들은 옥상옥, 중복투자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 교육전문가 이주호씨가 말하는 교육의 다양성은 불필요한 교육기관의 중복을 말한다.
그리고 평준화 해체, 3불정책 폐지 등도 심각한 청년실업, 고용부진에 대해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교육을 통해서 어떻게 산업을 일으키고 낙후된 지역경제를 소생시킬지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개선책이 들어있지 않다
수월성과 경쟁의 강조는 가뜩이나 교육의 소외가 심각한 현실에서 더욱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한나라당과 현정부가 계획하는 교육정책은 이처럼 멍청하다.
여기에 비해서 학문적 교육과 직업적 교육을 골고루 발전시키고 있는 독일이나 핀란드의 경우 교육과 산업구조의 유기화를 통한 기술개발, 중소기업 살리기, 창업의 증대를 약속할 수 있다. 핀란드의 예를 들어서 어떻게 교육과 산업이 결합되어야 하는지 알아보자.
경제, 산업과의 연계성을 도외시하는 불모의 한국의 교육 정책과는 달리 교육의 선진국 핀란드는 지난 92~93년 최악의 경제위기 이후 대대적인 교육개혁을 단행, 전국 200여개 전문대학을 29개로 통폐합해 4년제의 직업대학(Polytechnic)을 세웠다. 가령 "에브테크" 기술대학은 핀란드 교육부가 재계의 요구에 따라 통폐합한 기술대학의 하나이다. 다음의 도표를 보면 핀란드의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동태적이고 효율적인지 알 수 있다.
직업대학의 대부분의 교육은 철저히 실무 위주로 진행된다. 직업대학의 교수 5000여명 중 1500여명은 박사 학위가 없다. 산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기술자 출신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노키아 라우리 키비넨(41) 부사장은 “핀란드는 과거 외국자본을 유치해 산업을 일으키던 방식에서 벗어나 산·학 협력을 통한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국가로 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의 교육제도
학문적
직업적
나이
박사(Tohtori)
직업생활
국가자격 시험 (Lisensiaatti)
석사(Maisteri)
학사(Kandidaatti)
직업대학(Ammattikorkeakoulu)
직업생활
아비투어(Ylioppilastutkinto)
실업고(Ammattikoulu)
18-19
인문고(Lukio)
17
16
종합학교(Peruskoulu)
15
14
13
12
11
10
9
8
7-8
예비학교(Esikoulu)
6-7
여기서 우리는 유럽의 복선제 학교제도의 특징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즉 학생들은 종합학교의 기본교육을 받은 뒤 일반교육(allgemeine Bildung)과 직업교육(berufliche Bildung)으로 분리되어 공부를 계속한다. 인문고를 나온다고 반드시 대학진학을 하는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실업고를 나온다고 반드시 직업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문고를 졸업하고도 직업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고 실업고를 졸업하고도 일반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자기 결정이다.
핀란드의 일반대학들은 국가에 의해서 직접 경영되고 반면에 직업대학(혹은 기술대학, 산업대학)은 지방자치단체들에 의해서 운영된다. 지방자치단체들은 그 지방의 기업들과 긴밀한 협력 속에서 직업교육의 종류와 규모를 정하게 된다. 기업 내에서도 대학관계 부서를 두어 필요한 학과와 학생의 수를 공급해달라고 직업대학이나 지방 정부의 교육관련 부서에 협조를 구할 수 있다. 노키아 등 핀란드 대기업들은 아예 대학교육을 전담하는 부서를 따로 두고 이공계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대학과 정기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 샬머스공대 스테판 뱅트슨 교수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계획 단계부터 기업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참조함)
이런 방식이야 말로 국가주의 대학제도가 산업에 협력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산업과 학문의 연계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핀란드의 경우 국가나 지방정부가 기업과 학교 사이에서 중매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의 학교 지원 혹은 지배가 야기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도 기업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학의 특정 학과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업에서 그 학과의 기술이나 프로젝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경우 교수들이나 학생들의 할일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대학은 그 학과를 줄이거나 폐지하거나 한다. 그 학과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졸지에 닭좇던 개 지붕쳐다보는 것처럼 기업의 치고 빠지는 행태를 원망할 것이다.
4-18-2. 기업, 학교, 정부 3자의 협력모델의 추구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핀라드에서 우리는 어떻게 교육과 산업 그리고 정부의 역할이 분담되어 국가의 경쟁력, 기업의 경쟁력 그리고 고용촉진 등을 고양시키는지를 알아 보았다. 이런 산업과 교육의 유기적 협력을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국가의 전적인 재정지원과 목표설정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경제가 아니라 교육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5. 한국 대학의 모순 – 봉건적 지배와 인권유린
5‐1. 한국의 대학과 중세의 봉건제도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불법, 부정, 부패가 자행되고 무능과 불합리가 만연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악취가 구린 곳이 교육부서와 특히 대학사회이다. 정부 부서 가운데서도 교육부는 불법,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 찍혀있고 그곳의 공직자들은 불합리하기로 소문이 나있다. 여기서는 한국의 모든 교육비리를 다 열거할 수 없고 주로 대학의 문제점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한국의 사학(私學)은 전반적으로 큰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매일 사학의 비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도 고등교육에 한해서 몇 가지 문제점을 파헤쳐 보려고 한다.
한국 대학 사회의 온갖 불투명하고 불합리한 현상들을 종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필자는 “중세의 봉건제도(feudalism)”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기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현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줄줄이 터져 나오는 대학의 비리, 부정, 불법 행위를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한가지 유형이 아니라 기본적인 몇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① 사학 재단과 이사장의 비리 ② 흔히 “자기 사람 심기”라고 불리어 지는 교수 임용비리 ③ 교수에 의한 조교나 대학원생 착취, 학생에 대한 성폭력과 인권유린 ④ 시간 강사들의 열악한 고용사정 등이 있다.
이는 중세의 지배 구조인 왕과 영주 그리고 농노라는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상응한다. 즉 왕과 지방 영주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영주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주와 그의 농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위의 세 가지 구조적 모순과 대응한다. 그리고 시간강사는 학교의 착취와 동시에 교수들의 지위 권력의 남용 때문에 2중으로 시달린다, 굳이 중세를 들어 비교하자면 왕과 영주로부터 2중으로 시달리는 기사(騎士)라고나 할까.
그러면 한국의 고등 교육의 현주소를 기술하기 이전에 봉건제도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해 보기로 한다.
봉건제도란 서양의 중세에 있었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이다. 이 제도는 왕이나 황제, 영주 그리고 농노로 구성되는 계층제도를 말한다. 왕은 영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대신 영주로부터 충성을 요구했다. 이를 민석홍 교수는 “주종제도(主從制度)를 중심으로 한 봉제도(封制度)” 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영주(領主)와 농노(農奴) 사이에는 지배·예속관계가 기조를 이룬 생산체제를 형성한다. 이 때 영주들이 소유한 토지를 장원(莊園) 이라고 하는데 영주와 농노는 장원의 토지를 매개로 봉건지대를 수취 ·수납하였다. 이를 장원(莊園) 제도라고 한다.
장원영주(manorial lord)는 오늘날의 지주(地主)나 농장주인과는 달리 자기 땅 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대한 영주권(seigneurial rights)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영주가 단순히 토지 소유자이고 농민은 그 토지를 이용하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경제적 상호관계 이상의 특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원에서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농민들을 사람들은 농노(serf, villein)이라고 부른다.
영주권의 구체적 내용은 다양하다. 영주는 장원 내에서 제분, 제빵 등의 생활 시설을 독점하고 농노들로 하여금 그 시설을 농노로 하여금 강제로 이용하게 하여 그 요금을 징수할 권리를 가졌으며 그 외에도 도로, 교량, 항만, 시장 내의 각종 시설까지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주권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영주재판권이었다. “바로 이 영주 재판권이야 말로 농노를 부자유한 신분에 예속시키고, 그들을 장원의 노동력으로서 토지에 결박시키는 기본적인 권리였다”.. 이는 봉건 영주의 경제외적(經濟外的) 인 권리와 지배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분적으로 부자유한 농노는 토지에 결박되어 이동의 자유가 없었다. (…) 농노는 부자유한 신분을 표시하는 인두세(chevage)를 납부하였다”. 따라서 장원제도는 영주의 경제외적인 지배와 공동체의 규제가 농민을 극심하게 속박하였는데, 서유럽에서는 6, 7세기에서 18세기 시민혁명 때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된다.
5‐2. 한국 대학의 봉건적 지배구조 – 사적(私的)인 세계
앞에서 서술한 봉건적 지배구조에 근거하여 한국 대학, 더 정확하게 말해, 한국의 사립대학의 지배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국공립 대학 역시 이런 분석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거기서는 재단비리가 없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봉건적 제도에서 왕이나 황제에 해당하는 집단이 대학에서는 총장이나 이사장이다. 그 다음 봉건 영주에 해당하는 집단이 한국 대학의 교수 집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농노에 해당하는 집단이 대학생, 대학원생 및 조교 그리고 시간강사 등 대학의 약자 집단이다. 대학의 농노들 중에서도 학부생들보다는 석ㆍ박사 과정들생과 조교 그리고 시간강사들이 더욱 봉건 영주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대학의 비리와 혼동은, 근본적으로 보아, 중세 봉건주의가 보여주는 권력의 사적 소유에서 기인한다. 즉 권력을 개인의 소유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못하고 혼합되는 원시적 사회를 말한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중세 봉건제도는 권력의 사적소유와 이를 통한 계층조직(hierarchy)의 형성에 그 골격이 있다고 보겠다. 이런 면, 즉 권력의 공공성(公共性) 이라는 면에서 볼 때 중세는 고대보다 못하다. 고대 국가들, 예를 들면 로마나 그리이스의 경우 정치와 경제는 분리되고 정치의 목적은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니라 국민의 복지라고 선포되었다. 특히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통치라는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를 선구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중세의 왕이나 황제가 토지, 즉 봉토(封土)를 영주들에게 나누어 줄 때 영주들은 충성서약을 하고 왕에 대한 각종 의무를 지켜야 했었다. 이런 권력과 토지의 양도 역시 철저히 사적인 계약관계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세의 사적(私的)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중세를 지배한 봉건질서는 공적(公的)인 성질은 없고 거의 사적(私的)인 체제였다.
그리고 이런 사적 지배‐소유구조와 맹서와 신뢰를 통한 계층조직(hierarchy)의 형성은 중앙권력이 지방까지 관통하지 못하는 지역할거주의를 야기한다. 이는 마치 깡패들의 집단에서 큰형님이 동생에게 영역을 맡기는 대신 그로부터 상납이나 수익을 요구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학이나 사립학교는 공(公) 과 사(私)를 구분하지 못하고 공공의 복리를 위한 단체를 그 총수의 개인적인 탐욕을 위한 사조직으로 만든다는 공통적인 약점을 가진다. 그리고 총수의 전횡적인 지배권이 약화되면 이제는 교수들의 전횡이 시작된다. 마치 중세의 영주들이 영주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처럼 지도교수나 학과장 등이 제자들의 학적 진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무기를 가지고 임용비리, 인권의 착취, 성희롱 등을 시작된다. 이처럼 한국의 고등교육은 2중적인 모순을 함축한다. 이 모두를 제대로 연관성 내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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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대학교 소유권, 경영권 관계 비리
해방 이후 한국 교육의 발전에 있어서 사립 대학교들이 많은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도 전국 고등교육기관의 약 85%가 민간인들이 소유, 운영하는 전문대학, 일반 대학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사립학교들의 비리 규명에 앞서서 우리는 그간 정부의 대학 재정 지원이 극히 미미했음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생각하며 헌신적으로 노력한 양심적인 사립대학교들도 많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거의 매일 신문 지상에 소개되는 사학 관련 비리는 많은 사학들의 경영과 지배 구조에 큰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사학재단 비리는 사학의 당국자들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국의 교육‐사회적 환경과 구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학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역사적‐구조적 이해가 필요하다.
사립학교들은 거의 대부분 사학 재단 문제, 구체적으로는 이사장 혹은 총장의 권위와 지배구조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사립 초ᆞ중ᆞ고등학교는 배제하고 사립대학의 재단비리에 한해서 논의를 하려한다.
특히 재단 이사장이나 이와 유사한 위치에 있는 제왕적 총장이 학교 운영을 독점하는 경우 부정입학, 공금횡령이나 교수 불법해고와 임용비리 등의 부당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
현행의 불투명한 사학의 경영 방식과 회계 처리 관행은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학교법인을 남용하는 것을 조장한다.
이는 마치 한국의 사회 복지 재단들이 그 본래의 목적을 버리고 설립자나 원장의 사리사욕을 위해 운영되는 경우와 유사하다.
많은 한국의 사학재단의 총수들은 학교를 설립하거나 재단을 형성하는데 아무런 개인적인 기여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어떤 기회에 학교를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불법 사학재단은 공공의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를 사유화하고 학문탐구나 교육 여건 조성보다는 학교를 개인의 착복의 수단으로 부실화시키고 말 안 듣는 교수들을 회유, 선동하고 필요할 경우 무단 해임하는 등의 야만적인 작태를 보인 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총장님 한바꾸 더 돕시다!” 라는 교수 집단 구보 사건으로 유명한 87년 이전의 조선대학교 그리고 지난 96년 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대구의 계명대학교 총장 퇴진 운동이나 최근(2003.12) 6000명 학생 전원이 유급사태에 직면한 동덕 여대의 족벌재단 퇴진과 관선이사 파견 운동 등이 이런 재단비리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필자는 1987년부터 2년간 조선대학교에서 강의했었는데 그 때는 전제적인 박철웅 총장이 방금 물러나고 재야의 거물 변호사였던 이돈명씨가 총장으로 취임해 학내 민주화를 다지면서 민족대학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었다. 현재 조선대는 관선 이사들이 학교 법인을 운영해 가고 있다.
5‐2‐2. 대구 계명대 – 사립대학 사유화의 끈질긴 전투
한국의 사학들의 소유‐지배 구조의 파행적 역사를 일별하기 위해 필자는 현재 학교 재단과 교수 그리고 학생들간의 불신과 불화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계명대학교의 역사적 비리 사건에 대해 간단히 고찰해보고자 한다.
대구 지방의 명문 기독교 사학의 하나인 계명대학교는 원래 미국 장로교 선교회와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북 노회에서 학교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 학교는 현재(2004.4) 이 학교 총장이었던 신일희와 그의 아버지인 신태식의 부자 2대에 걸친 집요한 공작에 의해 그 뿌리인 종교단체와의 관련성을 박탈당하고 개인소유가 되어 버린 한국 사학 역사의 불미스러운 경험을 폭로하고 있다. “계명대 정상화 웹사이트(http://okanytime.com)”에 의하면 신태식에 의한 학교 사취(詐取)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
“계명대학 설립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한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이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학교운영에 참여했다. 설립과 동시에 초대 학장으로는 감부열 선교사가 2대 학장으로는 안두화 선교사(1958)가 봉직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3대 학장으로 신태식이(1961) 학장이 되었다. 신태식은 학장이 된지 3년도 채 못되어 학교법인 계명대학의 정관을 변경하여 이사회를 장악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1998년 9월 11일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된 판결문을 인용한다. "1964년 1월8일 신태식이 앞장서서 학교법인의 정관을 변경하였는데, 그 정관변경으로 이사의 수가 15명으로 감축되고, 경북노회의 파송이사가 7명에서 4명으로 축소되고, 기독교계 유지 3명은 경북노회의 인준 없이 문교부장관의 인가만 받으면 이사가 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의 친인척이었던 신명여고와 계성학교 교장은 당영직 이사가 되게 함으로써 결국 위 신태식이 과반수 이상의 이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 재단이었던 계명대는 1961년부터 1978년까지 18년간 학교를 독점적으로 운영한 신태식에 의해서 사유화되었다. 또 신태식은 계명대학교 건학 이념인 기독교 정신을 저버리고, 법인이사회를 사조직화하는 등 족벌체제를 구축한 뒤, 학교 경영권을 자기 아들(신일희)에게 물려주었다.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학교를 물려받은 신일희는 최초의 직선총장이면서도 ‘단임’ 약속을 저버리고 사조직화한 이사회를 통해 총장으로 재임명됨으로써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구체적인 예로서 대학 발전을 위해 1987년에 결성된 교수협의회 사무실을 강제 폐쇄하였고, 승진 재임용 등을 담보로 교수협의회의 평의원을 협박하였으며 대학 사유화에 반대하는 교수들에게는 징계의 전 단계인 경고장을 발부하였고 측근교수의 추천에 의해 신임교수를 채용하는 등, 철저한 연고주의에 의해 교수를 채용함으로써 학력이나 연구능력이 탁월한 지원자를 빈번히 탈락시켰다. 이런 파렴치한 신태식‐신일희 부자의 소행은 마침내 공금 횡령죄로 이어지고 법정으로부터 실형을 선고 받게 된다. 즉 신일희 총장은 자기 부친인 신태식 명예총장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6년여 동안 1억2000만원을 부당지급한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조선일보 2001. 5. 25자 기사내용
[계명대 총장] 학교 공금 횡령혐의… 집행유예 대구지법 제3형사 단독 김정도 판사는 24일 학교 재단의 공금을 부당하게 지출한 혐의로 기소된 계명대 총장 신일희(62), 학교법인 계명기독학원 이사장 김상렬(74) 피고인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신 피고인 등이 학교 명예총장으로 추대된 부친에게 지급한 돈을 실비 변상이라고 주장하는 등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나 부친이 명예총장으로서 활동한 구체적인 자료제시가 없는 상황에서 활동비 등을 지급한 것은 유죄』라고 밝혔다. 신 총장과 김 이사장은 신 총장 부친인 신태식(92)씨를 94년부터 6년여 동안 학교 직제에 없는 명예총장으로 추대해 활동비 등의 명목으로 1억2000여만원을 부당지급한 혐의로 지난해 5월 불구속기소됐었다.
그런데 그 후 신일희는 항소했고 고등법원의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줄어들어 실형에서 벌금형 900만원으로 판결되었다.
신일희는 다시 대법원에 이를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여 원심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배우는 다른 하나의 사실은 교육부의 직무유기 및 감사 부실이라는 것이다. 즉 교육부가 특별감사에서 신일희의 비리를 적발하고도 경고만의 조치로 면죄부를 준 것에 대하여 사법부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는 법원이 교육부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판결로서 심판한 것이었다.
신일희의 업무상배임죄에 대한 원심판결은 교육부가 특별감사에서 신일희의 비리를 적발하고도 경고만의 조치로 면죄부를 준 것에 대하여 정의로운 사법부가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교육부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판결로서 심판한 것입니다.
이래의 사진은 플레카드를 걸고 계명대 동문앞에서 2년 6개월째 한결같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한철순 교수의 모습이다. 한철순 교수는82년 제주대학에서 계명대학 수학과로 이적했다. 96년 4월 교수협의회의 도움으로 총장에 당선된 신일희씨가 단임약속을 파기하고, 96년 3월 28일 지방 7개 사립대학 총장과 함께 총장직선제를 폐지하기로 결의한 다음 신일희 총장 퇴진운동에 돌입했다. 이런 신일희의 행위가 지식인사회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칙행위라는데 침묵할 수 없어 선생은 거리로 나섰다. 온몸 열정으로 조폭들의 폭력에도 맞섰다. 한교수는 신일희에 의해 99년 2월 28일 재임용에서 탈락됐다. 이제는 정년을 넘기고 계속 신일희 일가의 독재에 맞서 대학 민주와 투쟁을 하고 있다.
한철순 교수는 다음과 같은 계명대 신일희 총장의 비리를 고발하고 있다.
1억 2천여 만원 교비 배임 ‐ 2억 8천여 만원 판공비 유용 ‐ 3억 4천여 만원 대입전형료 전용 ‐ 4억 5천여 만원 업무추진비 부당 집행
5‐3. 교수 임용 비리
교수임용 비리는 재단차원의 경우와 학과 차원의 경우의 2가지가 있다. 예전에는 주로 재단 차원에서 신임교수를 채용할 때 거액의 금품을 요구하거나 학교발전을 위한 기부를 강요하거나 했다.
요즘도 지방의 작은 대학에서는 이런 종류의 임용비리가 발생한다.
그러나 수도권의 큰 대학들에서는 이런 유형의 교육임용비리는 요즘 보기 힘들다. 요즘은 교수채용은 공개로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예전처럼 황당한 사람이 연줄로 낙하산을 타고 대학 강단에 진입하거나 돈으로 교수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의 경우는 많이 줄었다고 할 것이다.
요즘의 교수 임용비리는 주로 해당 학과 교수들이 신임자를 선출할 때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심사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돈을 주고 받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학교 출신자를 선호하거나 자기와 가까운 후배를 밀어주는 등의 정실인사(nepotism)를 말한다. 한국 대학 고용 시장에는 ‘상아탑 정실주의(academic nepotism)’가 판을 친다.
이런 종류의 인사 부정은 사립대학교 뿐만 아니라 국공립대에서도 흔히 발생한다. 이런 임용비리는 위에서 서술한 “봉건 영주”의 전횡과 비교될 수 있다.
이런 봉건적인의 교수 임용 비리는 기본적으로 재단이나 이사장 혹은 총장의 권한이 약하고 교수들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큰 학교, 이른바 “주인 없는 학교”에서 왕왕 발생한다. 필자가 아는 서울 Y 대 철학과의 경우 신규 교원을 임용할 때에는 거의 매번 처절한 당파 싸움을 벌인다고 한다.
교수들 간의 파벌 싸움 때문에 신규 교수 임용이 해당 연도에 이루어 지지 않고 연기되거나 아니면 아주 뽑지 못하는 불상사도 발생한다.
연구업적이나 강의 능력 등 교수임용의 객관적 기준을 무시하고 친한 사람이나 편한 사람 그리고 학연, 지연 혹은 편의 위주로 교수를 뽑을 때, 뒤의 한국 외국어 대학의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실력 있는 교수 후보자들은 도태되고 학문과 교육의 발전은 멀어진다. 이런 교수 임용의 비리가 한국 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주범임에 틀림없다.
성경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사람의 탐욕이나 주변 환경에서 기인하는 강박적 심리상태나 혹은 기존의 고정관념 등은 진리의 자유로움을 방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비진리(非眞理) 와 부자유(不自由)의 노예가 되도록 한다. 대학 신규 교수 임용의 경우에도 새로 들어 올 사람의 실력이 출중하다면 이를 겸손히 수용하고 설령 새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기나 학과 내의 발언권 등이 약해지더라도 감내하고 이를 오히려 자신의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학문과 사회의 발전이 있다. 현재 나라의 살림살이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사회에 만연한 불법과 도덕적 파탄 상태를 만든 근본적인 요인은 대학을 비롯한 교육 기관들의 부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유롭지 못한 대학의 정신은, 지성인들이 아직 전근대적 유교적 전통에 묶여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자유롭지 못한 대학의 정신은, 지성인들이 아직 전근대적 유교적 전통에 묶여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교적 전통은 흔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개인의 지성과 사유 능력에 대한 신뢰보다는 아버지나 상급자 혹은 연장자의 말이나 권위를 무조건 신뢰하고 따른다는 권위주의적인 진리관이다.
우리는 앞의 단락에서 지식(knowledge)과 진리(truth)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였다. 다시 한번 상기한다면 지식이란 사물의 아르케, 즉 원리, 원인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리고 진리는 세 가지 의미, 즉 대응, 정합 그리고 합의 등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진리관, 지식관은 위의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 불합리한 견해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이런 권위주의적인 견해도 필요하지만 성인이 되면 각자 스스로 판단하고 탐구하는 이성 능력이 성숙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인 지식이나 명령은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침해한다. 즉 권위주의적인 지식이나 도덕은 인간성의 부정이요 인권의 침해인 것이다.
그런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사상이나 상고주의(尙古主義) 등은 진리 자체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보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이나 선철(先哲)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을 강요한다.
진리나 지식은 그 자체로 볼 때 비개인적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공유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진리나 지식은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이는 왕이나 신하에게나, 자유인이나 노예에게나 혹은 선생이나 학생에게나 모두에게 공통적인 원리이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동양 철학은 이런 만인의 공통적인 이성 개념 혹은 로고스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를 어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소유물로 보았다.
지식은 그것이 지닌 보편성과 법칙성 때문에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선생이거나 아버지이거나 왕이거나 하는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한 인류 공유의 자산인 것이다.
이런 지식은 그러나 그냥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든 노력과 탐구를 통해 발견되거나 생산된다.
그리고 지식과 진리는 귀한 보배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지고 보호된다. 또한 진리는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즉 진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사람이 거짓으로 진리를 은폐하거나 위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들의 탐욕이나 필연성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고 은폐한다. 그래서 때로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는 어려운 결단을 요구한다.
한국 사회는 아직 진리와 지식의 보편성, 무당파성(無黨派性)을 무시하고 이들을 마치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즉 상급자나 권력자이거나 선생이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이 더 있고 항상 옳다는 미신이 사회를 지배한다. 구체적인 예로, 교수가 말하면 아무런 의문도 없이 이를 맹목적으로 인정하는 풍토가 있다. 학생이나 시간강사가 교수 보다 더 똑똑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카르텔이 대학을 구속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힘을 키우지 못한다.
이 나라의 학문 기관은 청년들로 하여금 지적(知的), 도덕적(道德的)으로 자립하는 것을 방해하며, 비굴하고 줏대 없는 의존적 인간형을 양산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런 것이 또한 흉악한 한국의 정치, 경제적 부패를 가져온 원인이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아직 진실게임을 권력게임으로 간주하는 어두움에 묻혀 있다. 즉 우리는 흔히 ‘누가 옳으냐’, 하는 문제를 ‘누가 더 힘이 세냐’하는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힘이 있는 사람은 항상 옳다는 말은 반대로 힘이 없는 사람은 옳지 않다 라는 말이다.
물론 실제 사회 생활에서 반드시 힘이 없는 사람의 견해를 오류라고 치부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힘이 없는 사람의 의견이나 견해는 쉽게 무시당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는 무명(無名)의 지식인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무리 시간강사가 책을 많이 쓰고 논문을 많이 쓰더라도 학계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떤 방면의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교수라는 타이틀이 있는 사람들이 발언권을 가진다. 즉 학문적 역량과 학문적 직책이 전혀 별개로 노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일례를 들면 서울의 명문 Y대학 독문과의 K모 교수는 지금까지 24년간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단 3편의 논문을 학회지에 게재하는 연구결과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비해 이 학교 독문과 교수 공채에 지원한 김모 강사는 무려 40편의 학술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는 역량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강사는 공채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맛보았다. 그 학과 교수들의 불공정한 교수 임용 심사 때문이었다.
동물들의 왕국에는 힘이 바로 진리이다, 그래서 흔히 동물의 세계를 약육강식(弱肉强食) 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니 하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는 힘과 진리가 서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힘이 진리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 즉 인간의 세계는 이성과 도덕성이 현존하는 권력과 힘 그리고 기득권을 통제해야 한다. 흔히 인간은 이성적(理性的)인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덧붙여 필자는 인간을 이상적(理想的)인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즉 인간은 현존하는 세계의 질서에 불만을 지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보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한다는 것이다.
현존의 지배체계가 옳지 않다면 과감하게 이를 잘못이라고 소리질러야 한다. 현실의 세계는 물질적, 경제적 체계를 말한다, 이를 변화시키기는 무척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는 항상 개혁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그곳은 영원한 혁명이 필요한 곳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부패하여 악취가 나게 마련이다.
한 사회에서 진리보다 힘이 지배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그 사회는 전통과 습관이 발견이나 발명을 억누르게 되며, 따라서 새로운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채택되기 어려워진다.
힘보다는 이성과 진리를 존중하는 사회는, 토인비(A.Toynbee)가 말하는 “도전과 응전”의 원리가 살아있는 약동하는 문명 사회이다.
권력과 힘 혹은 돈은 현실 세계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다. 우리는 권력과 힘과 돈을 한마디로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이 진리와 이성을 무시하고 억압, 은폐하는 야만적인 사회는 역사의 도전과 시련에 대해 적절한 응전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항상 이성과 현실의 대립 내지 갈등이 있다. 현실과 이성의 갈등에서 이성이 현실을 이겨야 한다. 토인비(A.Toynbee)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란 다시 말해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인식하고 이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실천적 이상주의자이다.
어떤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을 때 이를 치유하기 위한 창조적 소수와 실천적 이상주의자들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의 앞날은 밝다.
이럴 경우 세상은 밝고 인간이 살만한 낙원으로 변한다. 병든 사회가 그를 치유하려는 의사들, 즉 창조적 소수와 실천적 이상주의자들을 거부하고 “이대로 좋다” 라고 하며 계속 중병을 앓기를 원한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다시 말해 현실이 이성을 지배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고 고통과 탄식과 절망의 소리만이 가득하다.
한 사회가 임박한 역사적 도전을 직시(直視)하지 못하여 이를 임기응변적으로 대처하는데 만족한다면 이런 사회는 조만간 침체와 몰락의 길을 가기 마련이다.
다시 대학 사회의 부정과 비리라는 우리의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대학교수 임용의 경우 후보자의 학문적 역량을 심사하여 공정하게 뽑기보다는 기존 교수들과 가까운 사람을 뽑는다는 정실인사(nepotism)가 한국의 지성인 사회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위에서 지적했다. 이렇게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을 공직에 임명하게 되면 교수사회는 자연히 학문적인 비판이나 개선이 어려워진다. 위에서 언급한 바, 이른바 권력게임이 진실게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후배 교수가 자기를 뽑아준 선배 교수나 은사의 이론이나 행동을 비판하면 그는 불경죄(不敬罪)나 배신자(背信者)의 오명을 덮어 써야 한다. 이는 또한 경쟁을 기피하는 한국의 고등교육의 근본적인 모순과 직결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위에서 필자는 교수 임용의 편의주의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실은 이것이 대학 사회의 나태성과 무사안일주의를 상징하는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가령 실력이 훌륭한 신참자가 신규교수로 발령이 나면 기존의 무능하고 게으른 교수들은 학생들로부터 외면 당하거나 인기가 떨어지며 따라서 학교나 학과 내에서 영향력이 줄어든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실력이 출중한 박사나 강사보다는 좀 부족한 사람을 선호한다. 이는 비단 대학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고질병에 속한다. 한국 사회는 튀는 사람보다는 어중간한 사람을 선호한다. 특히 공직 사회에서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한국 사회는 순응주의자를 요구한다. 필자가 만난 일이 있는 부천에 있는 모 대학 학과장님은 “너무 똑똑한 사람은 교수가 될 수 없어요”라고 교수 임용의 비리 관행을 증거했다, 좀 똑똑한 강사들은 거의 임용되지 못하고 강의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 한국 대학가의 서글픈 현실이다. 이런 경우를 필자는 주위에서 여러 번 경험했다 :
a.부산지역에서 시간 강의를 하는 이00씨의 경우, 그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철학박사이다. 그는 대학 교수 채용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 점수가 4000%, 즉 40편에 달한다. 이는 대학 채용 시장에서 쉽게 넘볼 수 없는 점수이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꾸준히 모교에서 강의하고 저서도 여러 권 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대학 교원으로 채용될 수 없었고, 급기야는 모교에서 시간 강의도 빼앗기게 되었다.
그리고 아래 실린 한국 외국어 대학 통역 번역 대학원 교수 임용과정 소송과 관련하여 필자의 모교인 한국 외국어 대학의 문제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대가 원래의 명성에 비해 현재 발전이 부진하고 소위 “대학 랭킹”도 점점 하향조정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대학 교수사회의 봉건주의 습성 때문이다, 이들 학과 교수들은 학생 교육이나 학교발전보다는 오직 개인적‐이기적인 관점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을 채용하는 타성에 젖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외대 옆의 경희대는 제왕적 총장의 권위적인 경영 덕분에 점차 학교가 좋아지고 있다. 최고 경영자가 희미한 기업이나 사립 대학은 중세 봉건주의적인 몰락을 걷게 되는 것이다.
b. 필자가 아는 외국어 대학 xx과 강사인 신00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xx 학계의 제 1인자이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xx어를 공부했고 페르시아 문학과 언어에 정통한 학자이다. 그는 유학 갔다 온 후 모교에서 시간 강의를 하면서 오직 전공 과목 교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학과와 교수들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면서 10년 이상을 기다렸다. 그러나 작년에 시행된 xx과 교수 채용에서 그보다 한참 실력과 업적이 모자라는 후배에게 교수자리를 빼앗기는 고통을 맛보았다.
이제 그는 모교 출신학과에서 교수로 채용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실의(失意)에 빠져 모교의 시간강사 마저 포기하고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불공정한 교수 임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거나 항의하면 학과 교수들로부터 다음에 반드시 불이익을 당하게 됨으로 해서 이들 무력한 박사들은 천추의 한을 품고 대학을 떠나든지 아니면 조용히 분을 삭히면서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교수 채용 시장에는 “교수 임용은 사전에 내정(內定)되어 있다, 공개 채용은 없다”라는 소문이 정설화되어 있다. 이렇게 내정(內定)되어 있는 사람을 이기려면 노벨상을 타 와도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의 대학에서 이런 교수 임용의 불공정성과 정실인사(nepotism)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와 관계되는 몇 가지 신문 기사를 인용하여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알리고자 한다.
c. 교수 임용 심사의 투명성 요구 ‐ 재판에서는 이겼으나 강의 권리 마저 빼앗긴 경우
요즘은 교수 임용 과정을 공개하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지만 이전에는 임용 지원자들이 심사과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신규 교수 임용에 지원한 후보자들을 모두 잘 아는 학과의 경우 사전에 누가 어떤 학문적 업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교수 임용에는 열악한 후보자가 낙점되었을 때 다른 후보자들은 당연히 교수심사 과정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2001년 한국 외국어 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의 임용심사는 불투명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래서 그 때 같이 지원했던 한노과 강사들인 성종환·최문정·전혜진씨는 외대를 상대로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임용 과정 공개를 요구하며 1년6개월 동안 싸웠다. 이들 임용 지원자들은 심사의 불공정성을 법원에 제소했고 법원은 두 번이나 이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 학교에서 퇴출당하는 손해를 보았으며 이들의 권리주장, 즉 능력있는 사람이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직 실현되어 지지않고 있다.
인터넷 언론 매체인 오마이뉴스의 2003년 9월 1일 입력된 기사 “그들은 잘렸지만 결국 이겼다(부제: 임용 성적표 공개 요구한 이단강사 3인의 승리)”는 다음과 같다 :
“(…) 2001년 10월 한국외국어대는 통역번역대학원 한노과 전임교수 채용공고를 냈고, 당시 외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4명이 지원했다. 심사 결과 학교는 예상과는 달리 방아무개씨를 최종 임용대상자로 결정했다. 나머지 3명의 지원자와 통역번역대학원 내에서는 '뜻밖의 결과'라는 반응이었다.지원자 4명은 모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강의를 해왔던 선·후배 사이로 서로의 경력과 연구실적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이들 3명은 고심 끝에 학교를 상대로 임용과정 공개를 요구했다.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기초심사, 외부심사, 공개강의 등 평가 과정에서 불공정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 평가 과정에서 번역실적이나 공개강의, 외부심사 등에서 의혹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 2002년 5월 13일 심사기준 및 결과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모두 이들 3명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은 정당하다"며 "피고인 한국외국어대는 임용 최종심사결과표를 공개하라"고 밝혔다.
(…) 성종환·최문정·전혜진씨(왼쪽 부터)는 외대를 상대로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임용 과정 공개를 요구하며 1년6개월 동안 싸웠다. 이들 소송에서 이겼지만,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 .[오마이뉴스의 2003년 9월 1일]
그러나 요즘은 심사의 기준과 결과가 공개되어도 이는 어디까지나 사립대학의 내부적 문제이기 때문에 법원에서 왈가왈부 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외대의 경우 이 소송은 법적 권리의 문제라기 보다는 대학의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문제, 즉 도덕적 문제로 낙착되기 쉽다. 대학 교수채용은 근본적으로 기업 공채와 같다, 즉 어떤 기업의 신입사원 공채 심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소송을 걸어 봐야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는 기본적으로 사인(私人)들 간의 계약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수신문 2002년 10월 19일 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강희원 경희대 교수(법학과)는 “사립대의 경우 임용기준은 사적이며 내부적인 계약에 불과하기 때문에 법 앞에서는 힘을 상실한다. 평가기준들 자체도 추상적이기 때문에 대체로 승소할 확률은 매우 낮다”라면서 “부당하게 교수임용에서 탈락했다고 호소해 오는 사람들이 많으나, 안타깝게도 현행법 하에서는 구제되기가 힘들다. 특히 임용이 끝난 경우 그 결과를 번복하기란 매우 힘들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그 기준이 구체적이지 못한 까닭에 임용비리는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오마이뉴스의 2003년 9월 1일]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교수 임용의 평가기준이 학교마다, 그리고 학과마다 거의 모두 다르다. 특히 마지막 임용 심사인 면접의 경우 이는 전적으로 심사관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여기서 탈락하더라도 그 임용심사가 부당한 것이라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가령 최근에(2004년1월) 문제가 된 연세대 독문과 교수임용 의혹사건을 보면, 평가기준 자체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자의적인 평가기준을 두고 법원에서 이를 타당하다 혹은 부당하다 라고 판정할 수 없다. 이는 모두 학교 내부의 문제인 것이다. 이 학교 독문과 강사 김이섭씨가 실명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 채용 평가의 기준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설정될 수 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제목 : 나는 고발한다 (1) ‐ 독문과의 교수임용 비리
글쓴이 human21 (연세인) 날짜 2004‐01‐07 08:31
2004년 1학기 독어독문학과 신규교수 임용이 비양심적이고 비정상적인 전임교수들 때문에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신규교원 임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연구업적이다. 그것은 교수의 연구능력과 성실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체 평가내역 가운데 연구업적에 관한 비중을 50%가 넘게 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교수임용 인사과정에서 독문과 전임교수들은 연구업적의 평가비중을 20%로 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식 있는 1명의 교수가 이들의 부당한 제안을 거부했고, 그래서 이들은 마지못해 연구업적의 평가비중을 30%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전체 평점 100%에서 연구분야를 50%로 정하고, 그 50% 가운데서 연구업적 평가를 30%로 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구업적의 비중이 전체 평점의 15%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규정은 어느 대학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당한 행태라고 하겠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왜 이들이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지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지원자의 연구업적이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전혀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하면서라도 그를 채용하려고 한 것이다. (…)
그 밖에도 교수 채용 심사의 불공정성은 끝없는 사례가 있고 여기서 일일이 그 종류를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여기에 대한 총평으로서 한겨레 신문의 사설 : “국립대도 ‘교수채용 비리’인가”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한국 대학 사회에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퍼져있는 임용 비리에 대한 보고를 마치려고 한다.
국립대도 ‘교수채용 비리’인가 (한겨레 사설 03.07.17)
서울대를 비롯한 10개 국립대학에 대한 교육부 표본 감사 결과 이들 대학이 신규 교원임용과정에서 각종 위법 부당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교수 채용을 둘러싼 비리는 그동안 주로 사립대에서 빚어진 것으로 인식됐는데, 이번 감사 결과 국립대도 그에 못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다.
눈에 띄는 위법 행위를 보면 지원자와 특별한 관계인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거나, 심사위원들이 전공 분야와의 부합 여부 평가 때 자신의 대학 후배들에게 다른 학교 출신자보다 높은 점수를 주는 등의 수법을 썼다. 두 사람의 임용이 취소됐다고 하지만 대학들이 심사위원 위촉 때 신규 교원 임용에 따른 기본 규정조차 지키지 않았다니 한심하기 그지 없다. 지원자와 학력 및 경력 등에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심사위원으로 위촉할 수 없도록 돼있는 규정을 무시한 것이다.
이런 기본적 요건을 어긴 대학이 전체의 절반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비리가 비교적 덜 한 것으로 알려진 국립대에서마저 교수 임용과정의 잘못된 ‘후배 챙기기’ 정실인사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번에 교육부 감사가 일부 국립대만을 대상으로 했음에도 이 정도의 비리가 쉽게 적발됐는데, 감사를 나머지 국립대와 공립대, 그리고 사립대로 확대했더라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아마 훨씬 심각하리라는 게 교수사회의 중론이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나라 발전의 원동력은 ‘지성의 산실’인 대학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학마저 우수한 인재가 전근대적인 불공정 경쟁으로 탈락하고 지연·학연으로 끼리끼리 뭉쳐 움직인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희망이 없다. 나라안에서 내로라 하는 대학들이 세계적으로는 하위그룹에서 맴도는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다. 정부는 그야말로 나라의 백년대계 차원에서 이번 기회에 교수 임용제도를 보다 공정하고 투명하게 개선하고, 이를 어긴 대학과 교수들에 대한 처벌을 한층 강화할 것을 촉구한다. [ 국립대‘교수채비리’인 한겨례 03.07.17) ]
임용 비리에 대한 기록이나 보고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정한 채용을 위한 방법의 모색이다. 요점만 말하면 한국의 대학을 전부 공영화하든지 아니면 전부 민영화해야 한다. 이게 약간 황당한 주장같지만 국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둘밖에는 길이 없다. 사립과 공립의 병존 현상은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혼잡스런 정책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뒤에 다시 추구할 것이다.
5‐4. 대학원생, 조교 등에 대한 노동 착취와 프로젝트 인건비 갈취
한국 대학의 봉건적 지배 구조을 말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시간강사들의 직업적 불안정과 근로의 착취를 피해갈 수 없다. 필자 역시 시간강사로서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많은 고통을 받아 왔다.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지와 직업적 불안에 대해서는 아래 4‐6. 인터넷 카페 '시간강사 이야기' 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학원생, 박사과정 그리고 조교들의 문제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프로젝트 연구비‐인건비 횡령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역시 대학의 봉건적 구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학의 생성과 존립 문제가 근대적 관료주의도 아니고 시장주의도 아닌 ‘반관‐반민’이라는 체계적 부정합성(systematic inconsitency)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법률적으로는 모든 대학의 설립과 감독을 교육부에서 관장하지만 그 재정적 문제는 개별의 대학에 일임함으로써 사학의 비리와 부정을 눈감아주는 제도적‐구조적 관행에 있다. 교육부가 각 사립대학에 대해 제대로 감시 감독만 하더라도 위에서 말한 재단비리니 임용 비리니 하는 것들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이처럼 대학의 재정 문제가 각 대학의 자율에 맡겨짐에 따라 그 하부 기관인 학과와 교수들에 의한 숱한 금전적 비리가 끝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연구비 갈취, 대학원생, 조교들에 대한 노동착취 등은 한국의 대학이 겉으로는 순결한 체하지만 실은 구역질 나는 인권의 사각 지대 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교와 학과의 교수들은 그 박봉과 탐욕 때문에 그들과의 지배관계에 있는 조교,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몸종 부리듯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런 대학가의 악습이 구조화, 내면화 되어 “내가 교수가 되면 결코 조교, 강사, 대학원생들을 착취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 교수 지망생들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똑 같은 악습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래향이란 닉네임을 가진 한 시간 강사는 자신의 지도 교수나 학과장 교수로부터 자신의 다음 학기 강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 즉 다음학기에는 강의를 줄 수 없다 ‐ 듣고는 실망하여 아래와 글을 섰다. 그녀는 “시집살이 제대로 해본 며느리가 나중에 시집살이 시킨다더니, 해보신 분이 더 하시더라구요” 라고 하며 시간강사와 교수의 관계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 그 교수는 강의 자리를 준다는 핑계로 자기 대신 논문을 써달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처음 느껴본 시간강사의 서러움...
글쓴이 : 야래향
아! 이것이었나 봅니다. 서럽다는 것이... 두 달 가까이 학생들과 함꼐 공부하고 나누는 시간이 참 즐거웠었는데, 오늘 저를 불러주신(?) 교수님과 한참을 얘기하고 나오는 뒤끝이 너무나 씁쓸했습니다. 참... 결론은 '나한테 충성해라. 너보다 더 학벌 좋고 강의 잘하는 이런 이런 사람들 다 나한테 엄청 충성한다, 누구누구는 뭐가 어째서 짤렸고...'이런 얘기. 그리고 논문한번 써봐라...물론 교수님 이름으로 써달란 얘기지요. 그 위치까지 올라가기 위해 참 고생 많이 하신 분인데. 시집살이 제대로 해본 며느리가 나중에 시집살이 시킨다더니... 해보신 분이 더 하시더라구요. 처음이자 마지막학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학생들 한테 열심히 뭐든 가르치고 싶었는데, 참... 다른 길을 찾으렵니다. 그 교수님 말처럼 교수사회란 참 더럽고 치사한가 봅니다. 보수가 적은 것만이 우리들의 고충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계신 모든 분들께 술이라도 한잔 사드리고 싶은 밤이네요 ㅠㅠ 저는 참 학벌도 부족하고 인내심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살아있나 봅니다.
위의 야래향의 글 중 “교수사회란 참 더럽고 치사한” 곳이란 구절이 현금의 한국의 상아탑과 그 주인공들의 상태를 진술하고 있다. 이런 교수사회의 더러움과 치사함이 벗겨지지 않으면 한국 교육과 사회의 무능성과 악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한번 언급한 연세대 독문과 강사 김이섭 박사는 연세대 교수임용의 문제와 동시에 프로젝트 연구비 비리를 폭로함으로써 그간 쉬쉬해왔던 대학교수들의 연구비 유용, 횡령 및 (보조)연구원의 연구비 갈취 등의 문제가 신문 방송에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특히 이공계 교수들의 연구비 횡령과 조교, 대학원생 인건비 착취 등은 하나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학 '눈먼 연구비' 사실로 연세대 교수 국가지원비 억대 유용 10명 전액 환수…형사 고발은 못해 연세대 교수들이 국가예산으로 지원된 연구비 일부를 개인적으로 쓰다 적발됐다. 허위 영수증을 첨부하거나 영수증 금액을 부풀리는가 하면 연구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것처럼 꾸미는 등 각종 변칙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9일 연세대 3개 학과 교수 5명과 박사급 연구원 5명이 7개 연구과제 연구비 11억9천7백60만원의 10.5%(1억2천5백58만여원)를 연구 목적 외에 개인 용도 등으로 쓴 사실을 확인하고, 전액 환수했다고 밝혔다. 특히 B교수는 2개 과제 연구비로 6억5천4백50만원을 지원받아 허위 영수증을 첨부하는 방식으로 6천1백46만여원을 목적대로 쓰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교수들도 박사급 연구원에게 인건비를 준 다음 다시 일부를 돌려받거나 아예 주지 않는 수법으로 공동경비를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회의비나 학술대회 비용으로 쓴 영수증을 제출했으나 금액을 부풀린 사실도 밝혀졌다. 재단 측은 개인적으로 사용한 돈의 용처를 추궁했으나 교수들이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바람에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 관계자는 "계좌 추적권이 없어 교수 개인 통장에 입금된 금액의 집행 내역은 알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이 대학의 시간강사가 "연구 과제 심사가 잘못됐다"고 인터넷을 통해 고발한 데서 비롯됐다. 문제의 교수들은 전체 연구비가 재단으로부터 학교 측에 입금되자 우선 4천9백69만여원을 간접경비 명목으로 떼냈다. 대학 부설 연구원의 인건비 등 공동경비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또 이들은 4천8백23만여원을 개인적으로 사용했으며, 나머지 2천여만원은 연구원의 공동기금으로 보유하다 적발됐다. 연구비를 간접경비 명목으로 떼거나 연구목적 외로 사용(私用)하는 것은 재단 관계법상 금지돼 있다. 재단은 이들이 유용한 연구비를 전액 환수하는 한편 관련 교수 5명에 대해 3~5년간, 박사급 연구원에 대해서는 1년6개월~2년간 연구비 신청을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또 조사 결과를 연세대에 통보해 관련 교수에 대해 징계 등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다만 재단 측은 "형사고발은 현행법상 어렵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재단은 다른 대학에서도 연구비 유용 사례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혜 대학을 무작위로 뽑아 사용 실태를 연중 조사키로 했다. 강홍준 기자 <kanghj@joongang.co.kr> [중앙일보대학 '눈먼 연구비' 사실2004.02.09 18:26 입력 / 2004.02.10 08:26 수]
인터넷 한겨레 신문 게시판에서 “원생출신(parkcr75)”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대학원 조교 시절을 “매일같이 시다바리하고...심지어 교수 구두도 닦고...연구는 연구대로 하고. 박사과정 커피 심부름하고...이따위 생활을 2년하고” 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는 또 “저는 조교하고, 2년간 2개의 프로젝트와.교수님 벤처의 직원으로 생활했지만. 받은 돈은 한푼도 없습니다. 오로지..조교비 뿐이지요. 그것도학교에서 조교TO를 5명 두어서 필요한 조교 15명이 5명 것를 나누어 가졌답니다”라고 이공계 교수비리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공계 기피에 대한 한 신문 기사를 평가하면서, 동시에 대학연구비 관련 비리와 이공계 대학원생, 조교들이 당하는 인권 유린 그리고 노동 착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소하고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요?
공무원들도 알고, 교수들도 알고, 대학원생도 알고,..심지어 검찰도 아는 사실아닌가요?.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주고 있었던 주제들이 이제서야 조사하는 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전시행정 잠시 하고 다시 쏙 들어갈 거 아닌가요?. 오늘날 우리나라 이공계 위기가 왜 왔다 여깁니까? 이 기사처럼. 인건비..한 달에 300씩 받는 석사과정생이 있다고 생각하나요?.매일같이 시다바리하고...심지어 교수 구두도 닦고...연구는 연구대로 하고. 박사과정 커피 심부름하고...이따위 생활을 2년하고 기껏 취업하면...10년 다니고 짤라 버리는 나라에서 어느 또라이가 연구합니까?(…)
저는...조교하고, 2년간 2개의 프로젝트와.교수님 벤처의 직원으로 생활했지만...받은 돈은 한푼도 없습니다. 오로지..조교비 뿐이지요. 그것도..학교에서 조교TO를 5명 두어서 필요한 조교 15명이 5명 꺼를 나누어 가졌답니다. 등록금 모두 내고 다닌 석사생이라..상상이 갑니까? 책값도 없었습니다...이따위 세상이 대한민국이고 이따위 나라가...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공학이 죽으면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죠...탁상공론이 먹여줍니까? 농사도 안 짖고 모두 고시패스하면 먹고 삽니까? 한심한 인간들...국회쓰레기...정책입안
이공계 대학원의 조교가 “시다바리”라는 조폭 사회의 똘마니를 연상한다면 학교의 정식 직원인 조교, 사무원에 대한 비유는 “알바생”으로 비유되고 있다.
필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한 사립대 조교는 다음과 같이 사립대 조교의 애로 사항을 토로했다 :
저는 사립대학에서 조교합니다.
사립대학 조교는 안 힘든 줄 아십니까?
저희도 월급 조금이구요, 저희도 신분 보장 안됩니다.
대학은 돈 벌려고 증원한다는데 조교들은 한낱 알바생 취급합니다.
일이라는 일은 조교들한테 다 시키면서 말입니다.
무슨 놈의 잡일은 그렇게 많은지..
이번에 교육부에서 또 취업조사라는 명목으로 4월 말까지 프로그램 입력하라는 데, 저희는 할 일도 없는 줄 아시는 것 같더군요.
물론, 그러시겠죠. 학과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거 처리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고 학생들 취업이나 시켜주려고 한다면 또 모르겠네요.
저희도 교수님들 돕느라 힘듭니다.
물론 ' 니네가 그런 거 해야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 라는 말을 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