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현에서
살다보면 불가피한 사정으로 거처를 옮겨 살 수 있다. 주중 머무는 거제에서 창원과 다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접하고 있다. 물론 창원 이전 유년을 보낸 고향 의령과 학업과 청년기는 진주와 대구와 밀양을 거치기도 했다. 풀꽃이나 풀벌레가 자연과 잘 어울려 살아가듯 인간도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군림하려거나 지배하려해선 안 된다.
거제에서는 어디든 갯가를 나가면 ‘포’자 돌림 포구 마을이 많았다. 해안가다운 고유한 지명이었다. 고향에선 이맘때면 마당귀나 밭둑에 자란 감나무에서 빨갛게 익은 감을 흔히 보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대신 노랗게 익은 유자를 본다. 산마루를 넘는 고개는 거제에도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연사고개가 있다. 옥포로 넘어가는 송정고개가 있고 장목에는 관포고개가 있었다.
장목에서 황포로 가는 어디쯤 답답고개가 나왔다. 버스를 타고 가니 차내 자동안내방송에 다음 정류소가 ‘답답고개’라 했다. 나는 다음 틈이 나면 그 고개를 찾아가 지명이 생겨난 유래를 알고 싶다. 옥포 대우조선소를 돌아가 두모고개를 넘으면 장승포였다. 연초가 내륙이라 바다가 보고 싶으면 가끔 장승포로 나가기도 한다. 장승포에서 지세포를 지나 와현을 넘으면 구조라였다.
십일월 초순이다. 첫째 화요일 일과 후 와현에서 산책을 시작하려고 서둘렀다. 와실에 잠시 들려 옷차림을 바꾸고 연사 정류소로 나갔다. 고현에서 출발해 온 22번 버스를 탔다. 연초삼거리와 송정고개를 넘어 옥포로 갔다. 대우조선소에서 두모고개를 넘어 마전을 지나 지세포에서 와현으로 갔다. 누울 와(臥)에 고개 현(峴)인 와현은 진시황이 보낸 서불이 잠시 쉬다 잠든 고개란다.
우리나라 행정구역 경계는 대부분 강줄기나 산줄기에서 나뉜다. 옛날에는 강을 건너거나 고개를 넘어야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강은 장애물이긴 하나 거룻배로 쉽게 건넜다. 산마루는 힘들게 넘어야하는 고생길이었다. 고개를 이른 한자는 넷이나 된다. ‘령(嶺)’이 가장 일반적이다. 치(峙)나 점(岾)도 있다. 점(岾)은 ‘재’로도 읽힌다. 그리고 ‘현(峴)’이다.
지난 봄날 와현에서 길게 뻗은 산등선 숲길 따라 걸었더니 지세포성이 나왔다. 이후 허물어진 석축을 복원시킨 와현봉수대를 올라봤고, 더 땅끝으로 나가 서이말등대에도 발자국을 남겼다. 차량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 공곶이 강씨 노인 농장도 둘러봤다. 나오는 길에 예구마을에서 능포로 가는 버스가 와 연초로 되돌아 왔다. 몇 차례 구조라로 가던 길에도 와현고개를 넘어 다녔다.
이젠 와현에서 고갯길로 내려서서 모래숲해수욕장으로 가볼 셈이다. 여름 한낮이 아닌 늦가을 초저녁에 가로등은 불빛이 희미한 비탈을 내려섰다. 해안가로 내려가면서 날이 저문 구조라 바깥 바다를 응시했다. 바람의 언덕과 해금강이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낙조 이후 붉은 기운이 사라지면서 어둠이 내려앉는 즈음이었다. 바다에는 조업을 끝내고 귀항하는 어선의 불빛이 비쳤다.
해안가에 닿으니 공곶이로 가는 길과 모래숲해수욕장으로 나뉘었다. 모래밭에는 바다와 마찬가지로 어둠이 깔렸다. 서이말등대 방향 하늘에 반달이 걸려 있었다. 시월상달 초아흐레로 상현에서 만월로 채워져 갔다. 둥글게 원호를 그린 해수욕장 모래밭에는 어둠과 달빛이 함께 내려앉았다. 해안선 따라 리베라호텔 아래로 가니 유람선 선착장이었다.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이 없었다.
어둠이 내린 해안가를 한동안 서성였다. 파도는 연이어 밀려와 잘게 잘라 부서졌다. 달은 더 중천으로 옮겨갔다. 와현마을 어귀엔 ‘누우래’마을 유래와 ‘서불유숙지’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비탈진 언덕을 올라 구조라에서 고현으로 가는 23번 버스를 탔다. 대우조선소 앞을 지날 때 작업복 차림 근로자들이 다수 보였다. 옥포에서 송정고개를 넘어 연초삼거리로 내려가 와실로 들었다. 19.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