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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경건한 성도의 사회생활(4)
엡 6:1-9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무엇보다 귀한 자녀(7)
엡 6:4, 렘 12:1-6 / 김동호 목사
우리는 요즘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자녀들을 어떠한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가?’하는 점을 함께 생각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맥아더의 기도문 중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 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아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부분을 중심으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부분이 다 마음에 들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잘못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자녀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면 안 되는데, 우리들은 자녀들이 안쓰러워 무조건 편안하고 쉬운 길로만 인도하려고 하며,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아는 자녀로 키워야 하는데 우리는 자녀들을 온실 속에서 키워 험난한 세상에서 도저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의 무능력자로 키우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에 대한 지혜와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사랑으로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우를 종종 범하곤 합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과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제일 처음 요구한 것이, 단 하나 요구한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탐스럽고 욕심나는 선악과를 택하여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순종하면 살고 순종치 않고 욕심을 따라 살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어가면서 점점 신앙과 삶의 문제가 결국 선악과의 문제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생명과 승리와 성공과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할 때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용기입니다. 골리앗처럼 거대하게 보이며, 여리고 성처럼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불의한 세상에 항거할 줄 아는 용기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목사요 신학자였던 본 훼퍼는 ‘복종과 저항’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려면 먼저 그리고 반드시 불의한 세상에 저항 할 줄 알아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항 할 줄 아는 용기 없이 절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는 절대로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난 주 교회는 오랫동안 기도해 오던 교육관과 사무실을 위한 건물을 계약하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리한 이 지역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건물을 계약했습니다. 건물을 계약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은행대출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저는 그 은행대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은행은 그냥 우리가 필요하다면 언제나 돈을 대출해 줄줄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목회하던 상황은 거의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그렇게 어려울 상황이 아니었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은행대출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은행본점의 심사 팀과의 미팅을 약속했습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아 그래서 사람들이 은행 대출을 받을 때 커미션을 준다고 그러는 거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심사 팀이 그것을 요구한 적도 없고, 그런 눈치도 준적이 없지만, 그리고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좋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에 왜 사람들이 은행대출을 위하여 커미션을 주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목사가 그렇게 문제를 풀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기도하고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안 되면 은행융자를 포기할 각오를 했습니다. 교육관 없이 교회를 하는 한이 있어도 그런 방법으로 교육관을 마련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집중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은행에서 우리 교회에 대출을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수십 억 원이나 되는 건물을 매입하려고 하는 교회가 단 몇 억원도 모아둔 돈 없이 은행 융자로만 건물을 사려고 하는가?’라는 것이 문제가 되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 설명을 기도하면서 작성하였습니다. A4 용지 두 장 정도의 설명서를 기도하면서 작성한 후 심사 팀을 만나자 마자 그것을 복사하여 나누어 준 후 읽었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우리 교회가 건물을 매입과 예배당 건축을 가장 먼저 해야 일로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과 교회개척을 시작하면서부터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힘쓰려고 하였던 것은 최소한 예산의 1/3 이상을 선교와 구제를 통하여 밖으로 돈을 쓰는 것이었지 우리 예배당부터 짓고 건물부터 매입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 밖에도 한두 가지 정도 더 이야기를 하였지만 저는 그 심사 팀이 첫 번의 부정적인 결론을 뒤집고 대출 승인 결정을 내린 가장 중요한 요인이 우리 교회는 예배당 짓고 건물 사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은행 대출을 받은 것이 기쁩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기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의 꾀로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식과 방법대로 도전하여 작은 문제이지만 풀었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이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바로 본 훼퍼가 이야기한 ‘복종과 저항’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목적을 달성하여야 한다는 세상 식에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작년에 교인 한 가정이 천안에 있는 아주 좋은 땅 4천평을 수련원 용지로 교회에 기증해 주셨습니다. 그곳에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가정사역과 바른 교회 운동을 위한 시설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획에 들어갔습니다. 그 계획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로에서 우리 교회 부지를 가로막고 있는 양계장 2천 평을 먼저 매입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라고 결국 작년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양계장 주인이 자신의 일을 마무리 할 시간을 위하여 올 6월 말에 잔금을 받겠다하여 그렇게 작년에 계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수도이전이라는 문제 때문에 그곳의 땅 값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중도금까지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약을 할 수는 없었지만 길만 있으면 해약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주인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와 잔금을 치룰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땅을 교회 명의로 등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입하려고 하는 땅이 농지인데 농지는 교회 명의로 등기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안시청에 가서 알아보고 주위의 법무사 사무소와 행정사무소를 통하여 알아보아도 답은 같았습니다. 편법을 쓰기 전에는 교회 이름으로 땅을 등기할 길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땅은 앞으로 우리 교회가 수련원을 건축하기 위하여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요긴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결심했습니다. 아무리 그 땅이 필요하고 욕심이 나도 편법으로는 사지 않는다. ‘포기하면 포기했지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생각했습니다.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그 땅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는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드릴 당시 인간적으로는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변호사 몇 분이 계십니다. 변호사를 하시는 집사님 한 분에게 남 장로님이 자문을 구하신 모양입니다. 그 집사님이 천안 땅을 검토하시다가 우리가 매입하려고 하는 땅이 농지가 아니라 목장지라는 것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목장지는 농지와 다른 법 적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료 변호사들의 도움까지 받아내며 알아내셨습니다.
천안시청 직원과 법무사 사무소 그리고 행정 사무소에서도 농지와 목장지는 같은 것인줄 만 알고 때문에 교회는 등기 할 수 없다고 했던 것인데 농지는 안 되지만 목장지는 교회도 등기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지난달에 잔금을 다 치루고 주인으로부터 등기 서류를 넘겨받아 법무사 사무소에서 등기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수련원 땅을 사고, 교육관 건물을 매입 하여야겠다는 생각과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일에 먼저 예산을 집행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땅과 건물은 천천히 준비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 약속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천안에 수련원 부지 6천 평이 생긴 것과 이번에 너무나 근사한 교육관과 사무실 건물을 계약한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 욕심나는 것들을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얻게 된 것이 저는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천안 땅을 등기하고 은행 대출을 받은 것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편법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식대로 하려고 하다가 천안 땅을 등기하지 못하고, 은행 대출을 받지 못했을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게 됐다고 하여도 저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성공은 천안 땅과 은행 대출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식과 방법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진정한 성공위에 세상적인 성공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더 기쁩니다.
저는 제 아이들과 우리 교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에게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세상 속에서, 서울을 못가는 한 이 있어도 모로는 가지 않겠다는 용기, 서울을 가기 위하여 모두 모로 가는 세상을 거슬려 그와 같은 삶의 방식에 저항하고 똑바로 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식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울은 절대로 모로는 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모로 가서 도착한 서울은 서울이 아니라는 것, 그런 가짜 서울은 안가고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것, 그리고 그런 가짜 서울을 포기하고 용기 있게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거슬려 살면 하나님께서 진짜 서울을 가게 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번에 계속해서 한 번 더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는 무엇보다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 있는 삶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나약하게 키우지 아니하십니다. 강한 사람으로 키우시기 위하여 폭풍우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말과도 경주시키십니다. 그에 대한 말씀을 다음 번 설교에서 집중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용기 있는 자녀로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기란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세상 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불의와 편법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세상과 자신에 대하여 저항하여만 합니다. 그와 같은 것에 저항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길이 비록 좁고 험하여 죄 된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한 우리들의 자녀를 그런 믿음과 용기로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8)
엡 6:4, 렘 12:1-6 / 김동호 목사
기독교와 미신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지만 구태여 비교한다면 미신은 운명과 팔자를 믿는데 우리 기독교는 ‘그와 같은 운명과 팔자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집을 짓는 건축에 비교한다면 미신은 신이 집을 자기 마음대로 건축하여 사람에게 운명적으로 그것을 분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집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을 바꾸고 싶으면 신에게 제사를 드려 신의 마음을 움직여 그 집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저들은 ‘팔자를 고친다.’라고 말하며 그 팔자를 고치는 것이 미신적인 종교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유일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집을 운명적으로 지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의 집을 자기가 직접 지을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주시고 자기 인생의 집을 자기가 최선을 다하여 아름답게 훌륭하게 지으라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집은 운명적으로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신껏 최선을 다하여 자유스럽게 지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하는지를 일러주시고 또 잘못하고 실수하여 건축을 망친 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일을 하시며 끝까지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의 집을 건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을 잘못 오해하여 기독교도 미신처럼 믿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결혼을 할 때 궁합을 봅니다. 그리고 궁합이 맞느니 맞지 않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답답한 일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결혼을 하면서 궁합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어느 교회 권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궁합 때문에 자녀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무당 점 보듯 하며 믿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운명적으로 결정 되었을 경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운명적으로 고정시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우리의 과거는 혹 알아 마칠 수 있다고 하여도(귀신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 우리의 앞날을 다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날을 결정해 놓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겨 자유스럽게 개방시켜 놓으신 것을 어떻게 귀신이 결정하고 그것을 알아 마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에스겔 33장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겔 33:13-16)
하나님이 의인에게는 ‘살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악인에게는 ‘죽으리라’ 말씀하셨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운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운명적인 심판의 말씀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인 ‘살리라’는 말씀은 그러므로 너는 이제부터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인 ‘너는 죽으리라’는 말씀도 이제 너는 끝났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라 하신 의인도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지은 죄악 중에 죽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죽으리라 하신 악인도 그 말씀을 듣고 죄에서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니누웨 성에 보내어 ‘40일 후에 망하리라’는 예언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그와 같은 예언을 들은 니누웨 백성들이 임금으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언한 날에 니누웨가 멸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망신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말을 안 듣는 요나를 니누웨까지 보내어 그 예언을 하시게 하신 것은 니누웨를 40일 후에 멸망시키시기 위함이 아니라 40일 안에 회개케 하여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말씀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운명과 팔자를 주시지 아니하시고 스스로의 인생을 건축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 그리고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건축하고 개척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지혜롭고, 무엇보다도 강하여야만 합니다. 엄청난 지혜와 엄청난 능력이 있어야만 아름답고 성공적인 인생을 건축하고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가진 지혜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건축자로서 자기 인생을 훌륭하고 아름답고 성공적으로 건축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말미암지 않고는 절대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건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건축하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을 아름답게 완성하려고 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감당해야만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하나님의 영이요,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이요, 음악을 하거나 미술을 하거나 건축을 하거나 학문을 하거나 하여튼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성공하려고 하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감당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만 성령 충만함이 필요한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이고 세상 적 이라고 하는 모든 일상적 생활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해야만 그 모든 것에서 진정한 승리와 성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마음에 명심하시고 여러분이 세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으로 감당하시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들 중에 더러 보면 교회 생활은 꽤 성령 충만하게 하는데,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은 전혀 세상 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건축하고 개척하는데 필요한 것이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힘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인간들을 훈련시키시고 단련시키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백성을 온실에서 키우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광야로 내 모시며, 물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불 속에도 집어넣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편안한 삶을 사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반대이십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믿으면 편안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환난과 역경을 격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종종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여 강한 사람으로 키워야 하시기 때문에, 그래야만 능력 있는 자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건축하고 개척하는 사람이 되겠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오히려 더 힘들고 어려운 길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 예레미야 12장의 말씀은 제가 참으로 좋아하여 늘 마음에 새기고 사는 말씀입니다. 삶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는 형통하고 그렇지 않는 자는 고난을 당하여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살다보니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 못할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12:1-4)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질문을 통하여 예레미야에게 주어집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12:5)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답은 이것입니다. 말과 경주하여도 이기고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도 능히 살아남는 강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왜 의인이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지혜와 하나님의 훈련으로 말미암은 능력이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건축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들의 자녀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키우시듯 키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자식들을 세상적인 지식으로만 키우려하지 말고 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영과 지혜로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지식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영과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영과 지혜가 없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지식은 자신에 삶에 궁극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 적으로는 좀 부족한 듯 보여도 하나님의 영과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온실에서 편하게 키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한 기도문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 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아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문을 잘 이해하고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을 키운 엄마가 아들이 군대에 가서 힘들고 어렵다고 우는 소리를 하자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서 그 아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제대할 때까지 다섯 번을 옮겨 다녀야만 했습니다. 다섯 번을 옮기면서도 제대를 한 것이 저는 참 용타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어머니를 보면서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망치는 아주 보편적인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와 같이 나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말과도 경주하고 요단의 창일한 것과 같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성공적인 자신의 인생을 건축하고 개척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둘째가 훈련소로 갈 때 제가 운전해서 훈련소까지 대려다 주었었습니다. 차 앞에는 저희 부부가 타고 차 뒤에는 우리 둘째와 친구 둘이 탔었습니다. 우리 아이 친구 놈 하나가 우리 둘째에게 ‘야 군대는 요령이래. 집합하면 앞에 서지도 말고 뒤에 서지도 말고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무슨 미꾸라지 새끼냐? 가운데로 파고들어 숨게? 그런 나약한 정신으론 힘들어서 군대 생활 이겨내지 못한다. 눈에 띠어 매 몇 차례 더 맞는 한이 있어도 집합하면 맨 앞으로 튀어 나가거라. 모든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돌파해 버려라’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둘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군대에 아는 사람 많다. 장군들도 많이 안다. 될는지 안 될는지는 잘 몰라도 전화를 걸어서 우리 아들 군대에 갔는데 좀 편한대로 보내 달라고 부탁 할 데는 많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군에게 전화 안 한다. 아버지는 하나님께만 전화 할 꺼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 아들 지켜달라고 전화 할 꺼다’
둘째를 훈련소로 보내 놓고 정말 하나님께 전화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 둘째가 배치를 받은 곳은 최전방이었습니다. 그것도 군대에서 가장 힘들다고 하는 곳에 하나인 수색중대였습니다. 힘든 수색중대로 배치 받은 것만도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격조교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든지 우리 아이가 배치되기 전 5개월 동안 두 명이나 자살을 한 그런 부대였습니다. 정말 더 골라서 힘든 부대를 가기가 어려울 정도의 부대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장군에게 전화하지 않고 아들에게 이야기 한대로 하나님께만 열심히, 정말 열심히 전화하였습니다.
몇 달 후 둘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유격 재미있어요’ 저는 둘째에게서 그 편지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식이 옳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 힘든 유격이 재미있을 만큼 강해졌는데 앞으로 세상에 나와서 두렵고 힘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과정이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둘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말과도 경주하고 요단의 창일한 중에도 능히 이겨 살 수 있는 강한 하나님의 자녀로 연단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길을 가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일어나도록 하였습니다. 일어나면 안아주었지만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지혜로운 건축자로 키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지혜와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까닭은 좋은 운명과 팔자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과 능력을 덧입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업을 할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으로 그 일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아더는 자신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게 하소 서”
자신과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과 자식을 쉽고 안일한 길로 몰아가지 말고 오히려 곤란과 고통의 길로 인도한 후 그것을 돌파해 나오도록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아는 강한 자신과 자식이 되도록 연단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강한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인생을 건축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자녀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10)
엡 6:4, 마 5:8.
몇 주 전 텔레비전을 보니 30대 초반의 부부가 10년 동안 10억원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7,8천 원 정도 드는 쓰레기 봉투를 아끼기 위하여 버릴 쓰레기를 들고 온 동네를 다니며 미처 채우지 않고 버린 쓰레기 봉투를 찾아 거기에 자기 쓰레기를 함께 채워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저 부부들 정말 10년 동안에 10억원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달성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촬영을 하던 기자가 10억 원을 모아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느냐를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그 부부의 대답은 정원이 딸린 집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그 부부를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집념이라면 10억 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모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의 생각은 10년 후 10 억 원을 모아 정원 딸린 집을 사면 과연 저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거의 그와 같은 식으로 살아 정말 정원 딸린 집을 산 몇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정원 딸린 집을 산 후에도 한 달에 7,8천 원 하는 쓰레기봉투 사는 것이 아까워서 계속해서 자기 쓰레기를 들고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지며 다니는 삶을 그만두지 못하고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재산은 많이 늘어났지만 그 많은 재산에 세상과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작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도 큰 의미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생활 때문에 생활의 리듬이 깨지고 가족간의 관계도 좋지 못해 고통을 격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30대 부부도 거의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 보였습니다.
다음은 제가 상상으로 지어낸 낸 이야기입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결혼하여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셋방에 살았지만 저들은 행복했습니다.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하고 사느냐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아이가 밤에 좀 울고 시끄럽게 하자 집 주인이 그 젊은 부부를 찾아와 방을 빼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마음에 상처를 받는 말 중에 하나가 ‘방 빼’라는 말인데 그만 그 말을 듣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그 부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날부터 절약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어느 날 조그마한 집을 하나 사게 되었습니다. 비록 화장실이 마당에 있는 작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저들은 참 행복했습니다. ‘방 빼’ 소리를 안 듣게 된 것이 저들은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고 집들이를 하였습니다. 친구의 아파트를 다녀온 후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것을 보고 그 젊은 부부는 화장실이 마당에 있는 자기 집이 못 마땅했습니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안 입고 안 먹고 안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저들도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아파트를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밤에 화장실을 가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저들은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전에 집들이를 하였던 친구가 아파트 평수를 늘려 이사를 했다면 다시 집들이를 하였습니다. 집들이를 하는 친구의 아파트를 가보니 평수가 넓어 화장실이 두개나 되었습니다. 화장실이 두개나 있는 친구의 아파트를 본 순간 화장실이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파트가 또 못 마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고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 맨 후 또 안 입고 안 먹고 안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 결국 화장실이 둘 있는 아파트를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안 있어 저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말이 쉬어서 화장실 둘 있는 아파트이지 우리 한국에서 그와 같은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하면 시간이 보통 많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저들 부부는 몇 년 동안 화장실 둘 있는 아파트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부부는 평생 뭐하다가 죽은 사람입니까? 예, 저들은 평생 화장실 즉 변소 간 바꾸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인생의 목표가 변소 간 바꾸는 것입니다. 열심히 변소 간 바꾸다가 나이 들어 늙어 죽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저와 여러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먹고 사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관심이 많았다기 보다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셨고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어려서부터 참 많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제가 지금 큰 걱정 없이 먹고 살며, 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 먹여 살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스스로 또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저는 겉멋이 들어서 먹고 사는 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일의 해결은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먹기 위하여 사느냐?’ ‘살기 위하여 먹느냐?’라는 질문을 하곤 하였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게 차이가 없는 애매한 질문일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먹어야만 합니다. 때문에 먹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은 삶을 위한 수단과 도구일 뿐 삶 그 자체는 아닙니다.
먹고 사는 일을 우습게 여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문제는 먹고 사는 일을 삶 자체로 여기고 그것을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한 삶의 의미와 목표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최대 유행어 중에 하나는 웰빙(wellbeing)입니다. 사람들은 웰빙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가장 큰 삶의 목표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식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저 밥이나 먹다가, 기껏 해서 잘 먹다가 인생을 마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크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고 호의호식하다가, 그 짓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싶은 생각은 정말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그 뜻과 목적으로 내 삶의 목적과 목표를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저는 제 사랑하는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기껏 좋은 집에서 좋은 차타고 호의호식 하는 것과 화장실이나 바꾸는 것에 두고 사는 자식들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맥아더는 그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중에 ‘높은 이상을 갖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적어 넣고 있습니다. 평범한 말 같으나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뜻 밖에도 많은 부모들의 자녀를 위한 기도는 그저 ‘우리 아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십시오’라는데 머물러 있습니다. 오로지 그 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공부를 시키고 유학을 보내며 아이들을 들볶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그보다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녀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는 생각 밖에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중요한 것은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좋은 집에서 살려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좋은 집은 죽어 천당에 가면 널려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좋은 음식이나 먹고 좋은 옷이나 입고 살려고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화장실이나 바꾸려고 태어난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다 각기 다른 하나님의 뜻과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하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람들이며 더 중요한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삶의 중요한 의미와 목표로 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모두가 다 그와 같은 근사한 목표를 이루고 사는 근사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비젼이 되어야 하고 이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가 되어야 하고 목표가 되어야만 합니다.
제게는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비젼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추상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믿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 그보다 더 어린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최선을 다하여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특히 청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제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살던 시대에 청년들이 가장 교회에 많이 다니고 열심히 다니고 뿐만 아니라 열심히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동안에는 청년들이 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없게 하는 것입니다. 건방진 이야기이고 잘못하면 매우 위험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제가 전도사와 목사로 있었던 교회는 언제나 청년과 청소년들이 왕성했었습니다. 제 욕심은 제가 있었던 교회에 청년들이 왕성해 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살았던 시대가 청년들이 왕성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죽기 전에 바른 교회의 틀을 잡는 것입니다. 바른 교회의 표지와 틀을 연구하고 그것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답게 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이 주인이신 바른 교회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기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뜻과 그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저는 제 사랑하는 자녀들이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기대에 민감한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기대로 삶의 목표를 삼아 그 목표를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자신의 온 삶을 헌신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을 경주하듯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저와 제 자녀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근사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저축은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한 저축과 더 넉넉한 생활비를 쓰기 위한 저축은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늙어서 지금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지금 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지금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욕심을 현재 자리에서 끝내려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만큼 마음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지는 만큼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게 되면 그 하나님의 뜻으로 내 삶의 목표와 이상과 비전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자가 하나님을 본다 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하여 욕심 없는 가난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그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중에 높은 이상을 갖게 해달라는 말 앞에 그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달라는 기도문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높은 이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이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는 돈 벌어서 출세하고 남보다 좋은 집에서 남 보다 좋은 차를 타며 남보다 좋은 옷을 입고 남보다 풍족한 생활비를 쓰면서 사는 것 이상의 목표와 꿈과 이상과 비전이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정원 딸린 집에서 사는 것을 위하여 남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고 계시는 것은 아니십니까? 여러분 그렇게 살면 나중에 여러분들도 결국 화장실 바꾸다가 죽은 사람이라는 비명(碑銘) 밖에는 얻지 못할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차를 타면서 더 좋은 음식을 먹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지 마시고, 그것을 위하여 돈을 벌거나 모으지 마시고, 시간을 보내지 마시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이루어 드리는 데 욕심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돈을 벌고, 모으고, 쓰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높은 뜻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생과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와 교회의 이상이 되어야 하고 비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높은 이상과 비전을 품고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짧은 인생을 근사하게 마무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11)
엡 6:4, 고전 9:27 / 김동호 목사
에릭 프롬이라고 하는 분이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인간을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소유 (to hav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존재 (To b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에릭 프롬은 전자를 소유형의 인간(having mode)이라고 정의하였고 후자를 존재형의 인간(Being mode)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현대사회는 점점 더 소유형의 사회로 치닷고 있는 듯 싶습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자녀교육도 점점 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기술을 배워 주는 쪽으로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너무 바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과 법에 대하여는 정말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 우를 그것도 아주 큰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한문을 잘 하시는 장로님이 계셔서 교회 안에 서당을 만들어 방학 중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같은 것을 가르치시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맞지 않아 성사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늘 마음 속에 ‘서당’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옛날의 서당 교육은 밥 벌어 먹고 사는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는데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교육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천안에 수련원이 세워지게 되면 방학 동안에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학교(서당)를 만들어 제가 직접 운영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도를 교육하고 싶습니다. 학교 이름도 벌써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학교의 이름은 ‘사람 학교’입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는데, 가르칠 것이 많아 한번에 다 가르칠 수는 없고 몇 단계로 나누어 교육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에게 요즘 설교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중심으로 한 코스를 만들어 교육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보면 to have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to be에 대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인생의 교사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은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은 가르치고 다스리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셨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죄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사람들을 보면 그 반대입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합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며 안타까워 하더니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는 아예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삼은 말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목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바울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치려 하였으며,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려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윤동주 시인을 참 좋아합니다. 그의 서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웠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은 ‘잎새에 이는 바람’입니다. ‘잎새에 부는 바람’도 아니고 ‘잎새에 떠는 바람’도 아니라 그가 그의 시에서 표현한 바람은 ‘잎새에 이는 바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윤동주 시인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민감하고 예민한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에서 남의 눈에 티를 보기 이전에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고 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남의 눈에 티는 들보라고 과장하여 비판하고 자기 눈의 들보는 티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얼마나 피곤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정말 훌륭한 자녀로 키우시기를 원하신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민감한 자녀가 되게 하며 맥아더의 기도문과 같이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우리의 무엇을 다스려야만 할까요? 우리가 반듯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다스려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속에 있는 죄일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다스리는 것이어야 할까요? 대략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욕심을 다스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바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모든 죄는 욕심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려면 먼저 욕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욕심을 다스리기 위하여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실제로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고 또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욕심을 버린 욕심 없는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욕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입니다. 욕심에는 좋은 욕심이 있고 좋지 못한 욕심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욕심을 가지면 좋은 욕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욕심을 갖게 되면 좋지 못한 욕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욕심은 좋지 못한 욕심입니다. 무조건 욕심을 버린다고 좋은 욕심까지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좋은 욕심까지 무조건 좋지 못한 욕심으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소유에 대한 욕심보다 존재에 대한 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부모들이 가르쳐야만 합니다.
둘째, 교만을 다스려야만 합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심각하고 문제가 되는 죄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주의 피조물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교만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겸손해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만해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바로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겸손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겸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시고 교만을 다스리게 하려고 얼마나 애쓰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욥 22:29)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 (시 10: 17)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신다. (시147:6)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 3:34)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5:33)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8: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은 많으나 겸손한 사람은 참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아이들을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으로만 키우려고 하였지 아이들을 겸손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게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교만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되게함으로 정작 쓸모없고 볼품없는 사람이 되게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나태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교만만 죄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태도 교만 못지 않은 죄입니다. 죄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학생 때 감동적으로 읽었던 글 하나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그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독일 군에 저항하였습니다. 어느 날 독일 군인들에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조직 하나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레지스탕스 조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빵 장수 하나가 잡혀와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취조를 하는 독일 군인이 묻습니다. ‘너도 레지스탕스지?’ 자신이 레지스탕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빵 장수가 최선을 다하여 자기 변명을 합니다. ‘나는 레지스탕스가 아닙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빵 장수를 구석에서 물끄러니 쳐다보던 레지스탕스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구? 나라를 독일에게 빼앗겼는데 프랑스 사람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구? 그러므로 너는 유죄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우리를 그냥 죄만 짓지 않으면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 물론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의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 핑계대고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의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핑계로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죄 때문에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 22: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고 그 길과 일을 행하도록 훈련시켜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의와 선에 대한 게으름을 다스리라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롬 12:11)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고전 4:2)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욕심도 버리지 못하고, 교만도 버리지 못하고, 게으름도 버리지 못하고, 남의 잘못과 허물에만 민감하여 저들을 탓하고 저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어 욕심을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게으름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남을 가르치고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치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늘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욕심내며 기도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무엇보다 귀한 자녀(15)
엡 6:4, 잠 18:12 / 김동호 목사
우리 교회의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의 높은 뜻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영어 표기는 God"s will soongeui church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교회의 mission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인이 먼저 건강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교인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건강한 교인이 되기 위하여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것과 같은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됨’과 ‘함’입니다. ‘됨’은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함’은 일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함’은 하나님의 젓가락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잔칫상을 차려드리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됨’은 어떤 일과 사역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은 ‘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설교를 하고 목표를 세우고 조직을 하여도 하나님을 위한 잔칫상을 차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사역을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제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설교는 ‘무엇보다 귀한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어떤 자녀가 되게 할 것인가를 통하여 ‘사람 됨’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 전에 하였던 설교는 ‘Buffet, just for God"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사역 즉 ‘함’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이 두 설교를 마음에 새기시고 기도하면서 노력하신다면 저는 저와 여러분이 건강한 교회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는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그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경주하는 삶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자녀를 위한 기도 중에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를 기도를 합니다.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빼놓지 말아야 할 기도 중에 하나가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잘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자녀를 양육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하였습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은 기도하지 않고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성취한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만 기도하지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겸손한 척만 하지 실제로는 교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 교만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삶에 멸망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품으라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것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겸손과 낮추심을 말씀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1)
빌립보서의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오늘 본문으로 읽은 잠언 18장 12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에게 꿇게 하셨다고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라는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과연 무릎을 꿇고 싶으리만큼 존경스러운 사람과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몇 사람과 일이 생각났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서 23년을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목회하시다가 은퇴를 하시게 된 임택진 목사님께서 은퇴식에서 답사를 하셨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답사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답사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는 누가복음 17장 9절과 10절의 말씀을 암송한 후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동안 감사 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하신 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강대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 김익명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참 사업을 하실 때 교회 재정의 1/3 정도를 혼자 하시리만큼 헌금을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유년부 교육전도사 시절 그 분이 유년부 부장이셨습니다. 얼마나 일을 잘 도와주시고 후원해 주시는지 제 목회생활 중 가장 기억이 남는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회에 건의 할 일이 하나 있어서 그 장로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시는 분이시니까 당회에서도 당연히 발언권이 강하시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 장로님에게 말씀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제 부탁을 정중히 사양하셨습니다. 자기는 당회에 가서 가급적 발언을 안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었을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연보를 많이 하든지 말을 많이 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 둘 다 다 하면 못 씁니다”
영락교회에 김광호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시고 제주도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 같으리만큼 겸손하신 분입니다. 겸손을 생각할 때 늘 생각이 나는 장로님이십니다.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와 고생 끝에 집을 하나 사실만한 돈을 모으셨습니다. 집을 사려 하시다가 맨 손으로 피난을 내려와 굶어 죽지 않고 돈 까지 벌게 되었는데 내 집부터 사지 말고 하나님의 집부터 사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여주에 땅을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나중에 당신 집을 사시게 되었는데 여러분도 충분히 상상이 가시리라 믿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본래 사려고 하던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을 사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주에 건축하신 교회에 헌당예배 때 참석하신 이후로 한번도 찾아 가지를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 행사에 여러 번 초청을 해도 정말 고집스럽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자기는 영락교회 장로지 그 교회 장로가 아니며, 자기가 세운 교회라고 자꾸 찾아가게 되면 교만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대 사역을 감당합니다. 믿음 없고 말 안 듣고 불평만 일삼는 백성들을 인도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사역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고 외로웠었는가는 민수기 11장 11절에서 15절 사이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 같은 고생 끝에 모세는 드디어 자기의 사명을 완수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와 같으신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공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공을 아시기 때문에 그 공을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느보산으로 올라가라.
모세의 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겸손해 질래야 겸손해 질 수 없습니다. 가나안은 모세에게 교만의 위험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면 평생의 수고와 공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험에서 모세를 건져 영원토록 모세의 수고와 공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느보산으로 올라가라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아무 원망과 불평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느보산으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외롭게 혼자 죽습니다. 마음껏 이스라엘 온 지파를 축복하고 죽습니다. 우리는 그 축복의 기도를 신명기 33장과 34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느보산에서 정말 외롭게 죽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모세의 겸손에 대하여 ‘존귀의 앞잡이’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맨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겸손은 자기와 자기가 한 일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겸손은 말로만 쉽지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 싶으리만큼 어렵습니다.
겸손은 믿음으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Lordship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자신을 대단치 않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 집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가 되려면 늘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면 우리는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티끌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지렁이 같고 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만 서면 누구나 다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그와 같은 사실을 잊습니다. 즉시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됩니다. 훌륭한 존재가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또 사실 하나님 외에는 세상에 우리 인간 보다 대단한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려면 충성하여야 합니다. 충성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도 겸손할 수 없습니다. 충성한 후에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충성은 겸손의 필수 조건입니다. 충성이 없다면 느보산에서 죽어도 겸손이 아닙니다.
1분도 안되는 은퇴사가 겸손이 되는 까닭은 그가 23년 동안을 충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당회에서 말 안한다고 겸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교회 재정의 1/3을 혼자 감당하리만큼 충성하고 말을 안 하였기에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가지 않는다고 겸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기 집을 사기 이전에 하나님의 집을 먼저 사드리는 충성이 있었기에 그 예배당에 나가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일이 되는 것이고 겸손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안에서 충성할 때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충성하지 못할 때 겸손할 수 없고, 충성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 밖에서 충성하면 교만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멸망의 선봉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존귀의 앞장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존귀의 앞장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겸손을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아더와 같이 자신과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올바른 양육
엡 6:4 / 피종진 목사
가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사막과 같은 세상이라도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일들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불행하면 에덴동산과 같이 아름다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고난과 슬픔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이런 아름다운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에게 올바른 양육을 받은 자녀는 절대로 불효자식이 되지 않고 부모를 잘 공경하며 반드시 성공하는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자녀에게 올바른 양육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째,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4절a) 우리는 절대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여움’이란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성을 낸다, 화를 품는다, 짜증을 낸다, 저주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성을 내면 자녀들이 그것을 닮습니다. 엄마는 자녀에게 아버지를 칭찬하고,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엄마를 칭찬해주며 평생 성을 내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밖에 나가서 아이들이 화를 내게 해도 ‘웃기지 마’라고 하면서 성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주 성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농담으로 한 말인데도 버럭 성을 냅니다.
어떤 경우에 화를 내게 됩니까? ①급한 마음을 품을 때 화를 내게 됩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잠언 12:16에도 보면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②성령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체를 따라 행할 때 화를 내게 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하나님은 분을 품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26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말씀했습니다. 분은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도록 하여 육체의 일로 인해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③예배에 실패할 때 화를 내게 됩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5) 여기에 보면 가인이 제사에 실패했을 때 그 마음에 분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분을 잘 품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이 따릅니다. 우리는 예배에 성공하는 자가 되어 우리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분노는 ①벌을 받게 합니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잠 19:19) ②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 ③다툼을 일으킵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15:18)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아니하는 가정이 될 때에 그 가정이 화목하고 찬양이 넘치며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되어집니다.
둘째,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4절b) 교양이란 ‘가르쳐 기른다’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네 가지 면에서 양육해야 합니다. ①교육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심어주고, 바로 깨닫게 하고, 바로 실천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그 속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부모는 자녀에 대한 권위의 우위를 앞세워 감정상으로 그들을 노엽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신 6:7).
②신앙적인 면에서 체험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과 기도의 응답, 치료, 축복,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이 힘을 갖게 되고, 이단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③인격적인 면에서 본이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④사명적인 면에서 헌신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해주시고, 높이 들어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셋째, 선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6) 프랑스의 교육자 룻소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양심을 주었고, 선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성을 주었으며, 선을 선택하게 하기 위하여 자유를 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이러한 선을 선택하고 선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자가 되도록 선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선한 교훈이란 ①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는 것입니다.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잠 23:12) ②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③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④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딤전 3:4)
죠지 뮬러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고 평생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하며 수많은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도록 선한 교훈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선한 교훈으로 양육하여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서 부모를 잘 공경하는 자녀가 되고, 부모는 자녀에게 모범된 신앙의 본을 보이는 작은 목자가 되어서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 박덕기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한 사회학자가 지나간 19세기를 여성을 발견한 세기요, 20세기를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요,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를 발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그전까지는 어린이가 하나의 인간이나 인격으로 간주되기보다, 부모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취급되어 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1920년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만 해도 어린이라는 말조차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어린이들은 이놈, 어린 것, 애새끼라는 말로 불리 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민족의 미래는 다음 세대를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존대 말 쓰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어린이'(어리신 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임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1921년의 일이었고, 다음 해인 1922년 5월1일에 처음으로 '어린이 날' 제정을 제안하고, 1923년에는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게 됩니다. 그해 5월1일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어린이날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어린이는 가정의 꽃이요 우리 사회의 꿈나무들입니다. 어린이는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의 보배들입니다. 어린이는 가정과 사회에 웃음을 주고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아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좀 시끄럽고 귀찮은 것 같지만 아이들이 있어야 웃을 일도 생기고 살맛도 나며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없는 교회, 어린이가 없는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농촌에도 아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와글와글하고 교회에 가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농어촌에는 거의 아이들이 없습니다. 어떤 농촌 교회에 전도사님이 시무하는데, 그 전도사님의 아이가 동네 어른들의 눈에 너무도 신기하게 보여 가지고 하도 쓰다듬는 바람에 아이가 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농촌에는 지금 아이들이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는 유년 주일 학생들이 4백 명이 넘고, 해마다 유아 세례를 받는 아이들이 30명이 넘으니 작은 개척 교회 하나 만큼씩 태어나는 셈이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영국에는 ‘집안에 아이들이 없는 것은 지구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돋보였던 연출은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가는 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이 아이가 등장을 했을 때는 사람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온 세계가 감동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세계의 언론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어린이는 바로 우리의 내일이며 인류의 내일입니다. 이들이 자라는 모습에 따라 인류 역사의 내일이 있고 우리 교회와 우리 가문의 내일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잘 양육하는 것이 부모에게 맡겨진 제1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이를 양육해야 할까요?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화병은 어른에게만 나타날까요? 대답은 NO! 입니다. 어린이 화병은 어떤 것일까요? 취학 전 아이들은 식욕부진이나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짜증이 느는 등의 증상을 보이고, 취학 후 아이들은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피로해 하고, 점차 두통, 어지럼증, 복통, 식욕부진이나 식욕과잉, 소화 장애, 변비, 야뇨증,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는 등의 신체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말을 더듬거나 발음장애, 학습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잘 웃지도 않고, 놀이를 해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화병은 왜 생길까요? 어린이 화병은 스트레스성 증후군의 일종으로, 부모의 과잉보호와 과도한 기대가 주요 원인이라고 합니다. 과잉보호로 인해 심신은 약해지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부모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거나 늘어만 가는 학습량을 견디기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조기교육 열풍을 타고 점점 학습량은 늘어만 갑니다. 아이의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부모의 욕심만 강요하다보면 아이는 지칠 수밖에 없는 반면, 밖으로 나가 뛰놀며 자신의 욕구를 발산할 기회는 자꾸 줄어들고 과잉보호로 심신은 더욱 약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는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도 결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쉬웠던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와 같은 작은 사회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좌절과 우울 스트레스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자녀 양육하는 문제에 있어서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부모의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파멸시키는 길입니다. 아이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자라가며 중대한 행동장애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디디고 일어설 수 있는 자율성을 키워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평생 부모를 의존해야 하는 무기력하고 유약한 인간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부모가 아닌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움을 받고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일,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책임입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를 교육하되 그들로 하여금 노하거나 죄스런 원망을 일으키지 않을 그런 방식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부모가 화가 난 상태에서 어린아이를 훈육한다면 유익보다 해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는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훈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화가 나서 매를 가지고 징계한다면 아이는 몹시 노여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술 취한 사람처럼 격동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인 자제가 필요합니다. 자제력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첫째 선결 조건입니다.
또한 진정으로 자녀를 바르게 훈육하고 싶다면 결코 변덕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기분이 좋을 때 아이가 팔을 벌리고 달려들면 면 ‘아이고 내 새끼, 우리 강아지’ 하면서 예뻐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기뿐이 나쁠 때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면 ‘저리 가, 귀찮아’하면서 매몰차게 뿌리칩니다. 이 일만큼 자녀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녀는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부모는 언제는 ‘아이고 내 새끼, 내 강아지’하며 예뻐해 놓고, 언제는 ‘저리 가 귀찮아!’하면서 뿌리치면 아이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부모의 변덕은 술 취한 사람의 행동과 같아서 마침내 신뢰성을 상실합니다. 오히려 자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자녀를 적절히 징계해야 한다.
교육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잠 13:24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이 두 말씀의 한계와 범위 안에서 자식을 균형 있게 양육해야 합니다.
과거의 유교식 교육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고 폐쇄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교육법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자녀의 개성을 개발해서 용기를 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통제나 강제적인 것은 절대로 안 되며, 체벌이나 교정도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소위‘몬테소리’ 교육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을 어린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허락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견해는 전적으로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은 기만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제재를 가하라고 가르칩니다. 잠 22:15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콜리지에게 한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평소 콜리지를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의 주제가 어린아이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때 방문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들이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결심을 하는 법을 배우거든요.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완전하게 키워 나가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어요.’ 여기서 콜리지는 그 사람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 잠시 꽃을 좀 보러 갈까요?’ 이렇게 말하고 콜리지는 방문객을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정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방문객은 그의 정원을 한번 둘러보고는 놀라서 외쳤습니다. ‘아니! 왜 여기는 잡초들밖에 없지요?’ ‘여기도 예전엔 꽃들로 가득했었지요. 그러나 금년에는 손질을 안 하고 일부러 내버려 뒀다오. 자기들이 자라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정원이 어떤 꼴이 되는지 한번 보려고 했던 거요. 그랬더니 이 꼴이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체벌하는 선생님들을 오히려 고소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요즈음 부모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 시간에 아이들이 마음대로 돌아 다니면 깜짝 놀라 제제를 가해야 할 것인데 그저 가만 뇌둡니다. 며칠 전 수원 중앙 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사모님이 TV에 나와서 대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모님은 외국인 입니다. 그 분이 우리나라의 자녀 교육에 대해서 한 마디 충고를 하는데,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는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이것저것 하지 말라 하면서 제재를 가하는데 그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엄격하게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규정해 주고, 성장하면 점차 자율적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식을 근실히 징계하지 않아서 그 자식이나 가정이 비참하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 다윗의 아들-아도니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쿠데타 기도)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근실히 징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잡초가 자라나는 정원이 아니라, 샤론의 장미꽃 같은 자녀들이 자라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여기 나오는 ‘교양’이란 성경에서 ‘훈련’ ‘교훈’ ‘징계’등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이 모든 말을 종합해 보면 교양이란 ‘심신의 발달을 위한 행위적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훈계’란 ‘말을 통한 훈련’을 의미합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교양’이란 행위를, 그리고 ‘훈계’란 말을 통한 자녀 훈련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을 통한 훈련은 ‘주의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부모의 주장이나 말로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은 가정에서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학교로 넘겨줄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의 영향보다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할 일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어떻게 자녀를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격이 바뀌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맨 먼저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 6:4-9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잠 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원도 보내고 과외 공부도 시키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얻기를 위해서 돈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투자하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마음과 정성을 들여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복 주신다고 했습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지식도 필요합니다. 학벌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되고,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고, 노인보다 지혜롭게 하며, 모든 스승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소망을 얻고, 힘 있는 자녀로, 힘 있는 인생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비록 작은 민족이었지만,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전 세계에 흩어진 사람 다 합쳐봐야 불과 1,500만 명밖에 안됩니다. 한민족은 7,500만 명, 그러므로 한민족의 5분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은 유대인입니다.
록펠러 어머니는 자녀에게 ‘주의 교양 훈계’로 10가지를 가르쳤습니다. 록펠러는 가난하여 9살부터 남의 집 점원으로 일을 했는데, 어머니가 가르쳐 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1)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가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2)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목사라고 하면 배가 아파하는 분이 있어요. 주의 종이라고 하면 물고 늘어지는 진돗개 같은 신자도 있어요. 항상 목사를 걸고 씨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의 종과 다투고 헐뜯고 해서 유익 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3)주일 예배는 꼭 본 교회에서 드려라-내 교회가 있고 내 자리가 있어야 돼요. 교회에 와도 아무 곳이나 말고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 좋아요. 윤보선 대통령은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내 집이 있듯이 내 교회가 있는 것 얼마나 좋아요. 반대로 떠돌아다니는 것, 집이 없다는 것,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교회도 내 교회 없이 돌아다녀 봐요. 믿음이 약해집니다. 꼭 설교만 들어서 은혜 받는 것 아닙니다. 내 교회는 문만 열고 들어와도 평안이 오고 은혜가 되는 거예요.
4)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주머니가 십일조 주머니예요. 평생 동안 세계 최고의 재벌이라도, 십일조 잘 하기로 유명한 분이 록펠러예요.
5)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품어 주시고, 용서하는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6)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하루를 그냥 되는대로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얼마나 좋아요? 아침에 문을 열듯이 기도하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새벽기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앞서 가시고 그 길을 축복하실 때 얼마나 잘 되겠어요?
7)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성하며 기도하라-하루를 지나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밤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평안한 잠을 자게 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밤사이에 준비해 주셔서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하게 해 주시니 얼마나 좋아요?
8)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신문을 읽으면 온갖 불의한 것들, 어려운 것들, 슬픈 것들, 답답한 것들 보니까 마음이 답답해요. 해외에 나가서 한 열흘 동안 신문을 안 보면 한 이틀은 궁금하다가 한 일주일 지나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천국의 뉴스는 매일 매일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9)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남을 돕는 것이 좋아요. 평생 남을 유익되게 하고, 말 한 마디라도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고 하는 것이 좋아요.
10)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아라-그리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들을 수가 있어요. 우리 성도들도 꼭 본받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입니다. 동시에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해주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의 기쁨을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 길러져야 하고, 주님의 형상대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도, 그 돈으로 어린이의 육체는 성장시킬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성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21세기를 리드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로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
엡 6:4 / 강성찬 목사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의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영혼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함께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강력한 복음의 능력으로 뒤덮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이 시대에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찾아 실행하여야 합니다.
지난 새 생명 대 축제로 많은 심령을 교회로 초청했고 등록을 시켰습니다. 계속하여 전도하며 양육하는 일을 해야 하겠기에 금년 표어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목회방침에 있어 생활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 하는 교회(딤전 4:6)입니다.
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 (딛2:11,12)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 (딤전4:6) 지식과 명철로 양육 (렘3:15) 선한 행실로 양육 (딤전4:6)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양육(히 10:24)하는 교인입니다.
월별 실천 사항으로 1월은 하나님을 본받아 양육(사1:2) 2월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양육(엡5:29) 3월은 목자를 본받아 양육(겔 34:23) 4월은 아버지를 본받아 양육(살전2:1) 5월은 유모를 본받아 양육(살전2:8,9) 6월은 사라를 본받아 양육(창21:7) 7월은 바울을 본받아 양육(고전3:2) 8월 한나를 본받아 양육 (삼상 1:23) 9월은 엘리를 본받아 양육(삼상2:11) 10월은 여호세바를 본받아 양육 (왕하11:2,3) 11월은 요셉을 본받아 양육(창 45:10,11) 12월은 의인을 본받아 양육(마25:37,40)입니다.
성구는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 3:15)입니다.
그래서 표어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양육은 기본적으로 새 신자를 도와주는 것으로 훈련은 리더를 위한 것으로 이해들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 수년간 훈련은 리더와 새 신자를 위해서 공동으로 사용했지만 진정으로 새 신자를 훈련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새 신자 교육을 양육으로 리더교육을 훈련이라 구분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전도가 귀한 만큼 양육도 귀합니다. 양육(엑트레포)은 '가르쳐 길들이다, 교육하다, 기르다, 가르치다'를 의미합니다.
중국에는 거위에게 억지로 먹이를 먹이는데 그러면 거위는 금방 성장하는데 그들은 억지로 먹이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거위 주위에 음식이 많더라도 스스로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신앙적인 면에도 이와 같은 면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새 신자가 교회에 예배하고 다시 집에 갔다 다시 교회에 오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치 억지로 먹는 것처럼 되면 나중에 스스로 먹는 법을 모르게 되어 성장이 없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같고 스스로 먹지를 못한다고 지적들을 합니다.
새 신자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양육입니다. 새 신자가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육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생산적인 제자가 될 때까지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 종류의 문제를 안고 있을지라도 그들을 위해서 계속 섬기며 영적으로 변화 시켜 생산적인 성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배우게 하되 스스로 말씀을 배우게 하는 고기를 주는 방법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옛날 한 덕망 높은 관리가 변방의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장은 관리에게 마을의 견고한 방비상태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우선 병사들이 철옹성처럼 구축한 진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조망이 무섭게 엉켜있는 국경의 수비망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관리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장은 관리의 격려를 유도해내기 위해 거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굉장한 방어력이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라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이 마을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것은 군사가 아니라 학교와 가정입니다. 왜 나에게 제일 먼저 학교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강력한 군대가 최상의 방어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이 강한 것은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교사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덕분이라 합니다.(인터넷 정보클럽)
양육에 있어 누가 양육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양육자에 따라서 신앙인격이 달라지고 신앙생활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서먹한 관계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부모의 일차적으로 부모의 양육을 받습니다. 어린이가 낯 갈이를 하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양육자는 일차적으로 인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자가 양육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른 양육자가 양육하도록 연결해 주어야 합니다. 종국적으로는 먼저 믿은 성도들 모두가 새 신자들을 양육하는 양육자가 되어야 합니다.
양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 또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한꺼번에 열 명을 낳게 하지 않으시고 한 명씩 낳게 하신 이유는 그 아이를 잘 양육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새 신자들을 양육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듯이 일대일로 양육하는 방법이라고들 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하려면 먼저 양육자의 기본적인 교양이 필요합니다. 새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양육내용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면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성실히 인내하며 사랑으로 새 신자 양육을 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양육할 것인가 하는 내용 또한 중요 합니다.
성경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교양(파이데이아)은 `훈련, 훈계, 징계' `훈육'을 함축합니다.
훈계(누데시아)는 '경고'로도(고전10:11)교육 방법에 대하여도 사용되었습니다.(엡6:4).
양육하는 올바른 방법은 교양과 훈계로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양과 훈계는 자신의 생각이나 가문의 전통 따위를 내용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을 근거로 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주의 교양과 훈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옥스퍼드 원어성경)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은 하나님의 인간 교육 방법을 강하게 반영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계속 보존케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징벌을 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고 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이 경험되는 것은 바로 이 징계 속에서입니다. 고난이나 징계는 아버지가 책임 있는 사랑 안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 보면, 징계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 됨의 보증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에 대한 보증입니다.
징계나 고난은 기독교인을 영적 투쟁을 위하여 강하게 하는 훈련만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는 징계나 고난의 경험은 기독교인을 그리스도 곁에 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경험은 그에게 그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람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조차, 참된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가 그를 교육하고 '징벌하는'데서 드러나기 마련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는 더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궁극적인 통찰력 없이 자녀를 징계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으나,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한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하십니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 12:10)고 합니다.
이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라고 합니다.
이런 '교양과 훈계'를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 양식을 가르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메시야로 아는 지식과 믿음 가운데서 새 신자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삶과 교육으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양육책임자가 먼저 주님의 교양과 훈계를 잘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훈을 받으며 책망을 받으며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는 과정과 결과를 새 신자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교육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친히 듣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말씀을 서로 나누고 삶 가운데 적용하며 적용의 결과를 서로 느끼며 생활로 보여주는 교육은 살아있는 교육이 됩니다.
수년 전 한 아가씨가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습니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여선생님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보비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출석을 잘하도록 했습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를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보십시오."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목사입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나오게 했습니다.(사랑의 열매-디럭스바이블)
훈계는 복을 가져오는 전조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받을 때만 그 복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훈계를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 책임이고 할 일입니다. 소화시키지 못하는 음식이 결코 몸에 유익하지 않은 것처럼 훈계도 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히려 성격이 황폐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는 목적은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려 함이 아니라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를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때에 따라 가지도 치시고, 약도 뿌리시며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훈계에는 목적이 있어 부드럽게도 하고 절제케도 하며 강건하게도 합니다.
이씨 조선 영조 때의 이름난 학자 이재(李縡)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양육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가 12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작은 아버지이자 당대의 정치가인 이만성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까닭에 이 아이의 앞날이 잘못될까 걱정이 됩니다. 이 아이를 맡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괜히 귀한 집 아들에게 매를 들어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 거절했으나, 어머니는 끝까지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결국 그날 이후로 이재는 작은 아버지의 집에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이만성이 형수, 즉 이재의 어머니를 찾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형수님, 용서해 주십시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 글쎄, 글을 읽으라고 분부하고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마당에서 장난을 치고 있지 뭡니까. 그래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고 매를 들었는데, 그게 잘못되어 그 녀석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시동생의 말을 듣고 난 이재의 어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찌 제 자식 놈이 미워서 매를 드셨겠습니까 ! 다 잘되라고 한 것인데 제 명이 짧아 그렇게 된 것이겠지요." 이만성은 형수의 태도에 깜짝 놀라 일어서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아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형수님, 실은 모두 거짓입니다. 제가 형수님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형수님께서 그렇게까지 저를 믿고 아들을 맡겨 주셨으니 이제부터라도 더욱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이재는 20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문인으로 이름을 떨치는 대학자가 되었습니다.
양육에 여러 가지 결과 따를 수도 있습니다. 이를 두 나무에 견주기조 합니다.
하나는 '벤진'이라는 나무로 이 나무는 열대성 나무로서 옆으로 가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그 뻗어난 가지가 땅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옆으로 계속해서 가지가 뻗어나가 결국 거목이 됩니다. 많은 가지로 새들이나 동물들이 와서 한가롭게 쉴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결정적인 약점은 옆으로 뻗어나갈 때 그 밑에는 단 한 포기의 풀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거목이 영양분을 빨아 올렸기 때문에 땅은 척박해지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주위에 생명력을 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나나 나무입니다. 바나나 나무는 육개월이 되면 반드시 옆에 한 싹을 냅니다. 그리고 다른 나무가 옆에서 자라 올라오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일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 바나나 나무는 계속해서 새싹을 만들고 다른 나무들이 자라도록 뒷받침을 해줍니다.
자기가 죽을 때에 무수한 다른 나무를 만들어내는 바나나 나무와 거대한 숲을 만들지만 마침내는 주변을 황무케 하는 벤진 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교회가 웅장함과 영광스러움만을 계속해서 펼쳐나가며 위대함만을 자랑한다면 쓰러질 때 자기도 죽고 주변도 황무케 하는 벤진 나무가 될 수 있다고 지적을 합니다. 반면 계속해서 싹을 키우고, 잘 자라게 할 뿐 아니라 베어진 자리에 무수한 싹을 만들어 낸다면 사람들에게 열매를 제공해주고 생물들에게 먹이를 제공하여 잎사귀의 싱그러움으로 보는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밥상도 되고 비를 피하는 우산도 되며 지붕을 잇는 재료도 되는 바나나 나무가 될 수 있다고도 합니다.
계속해서 벤진으로 키워갈 것인가 아니면 바나나처럼 새싹인 사람을 잘 키워 이 땅에 싱그러움을 주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벤진 나무와 바나나 나무)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행복한 가정
엡 6:4 / 김남수 목사
독일에 신학자인, 본 헤퍼는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있어서 당신의 영력으로 위임하신 기관이, 네 개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째는 교회이고, 두 번째는 가정이고, 세 번째는 Culture (문화)고, 네 번째는 정부다 라고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문화나 정부에 대해서는 복잡한 이론 설명이 필요하므로, 우리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교회와 가정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위임하신 기관이라는 것을 우리가 구차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수 있을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기 때문에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정의 참 가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일단 병이 나면, 건강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고 느끼지만 대부분 늦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도 건강할 때 가정을 지켜야지, 병들면 그 가정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어떤 때는 퍽 늦어서 돌이킬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초에 사람을 만드시고, 가정을 만드시고, 국가나 사회나 민족이 형성되기 전에 최초에 인간의 단위로써, 한 묶음을 묶어주셨는데 이것을 가정이라 말합니다.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녀와 부모의 인간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 기관으로써,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관에서, '가정이 무엇이냐?' 이렇게 설문조사를 하였더니, 800여 가지의 답이 나왔는데, 그 중에 일곱 개를 소개하면, 가정은 투쟁이 없는 세계요, 큰 자가 작은자로 변하는 곳이다. 경쟁, 분쟁도 없는 그리고, 큰 자가 작은자가 되어서 서로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또, 가정은 작은 자가 크게 되고, 큰 자가 작게 되는 것이다. 집에서 나이 많은 어른들이 어른이지만, 갓난아이가 더 어른인 것처럼, 어른들이 아이를 위해서 시간을 내고 마음을 쏟고 섬기는 것을 보면, 가정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은 아버지의 왕국이고, 어머니의 세계요, 자식들의 낙원이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왕국으로 다스리고, 어머니가 전체를 품은 세계고, 그 안에서 자식들은 낙원처럼 편안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정은 불행이 많은 곳이지만, 거기 따르는 어려움과 위로를 주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죽음이라든지, 질병이라든지, 실패라든지, 외로움, 고통, 수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가정이라는 곳에서는 이것을 잘 위로하고 치료하는 유일한 가정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가정은 애정의 중심이고, 마음이 있는 곳이고, 우리의 소망이 있는 곳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 가정은 하루 세끼 밥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천 번이나 먹을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지만, 마음은 천 번이나 양식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은 땅위에 있어서 인간의 허물과 실패를 아름답고 또 용서하며 그 속에 숨겨주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가정의 달을 맞으면서 가정의 소중함, 가정의 가치관을 다시 한번 생각해서 참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정관, 성령충만한 오순절 교회의 가정의 가치관, 신령한 성도의 가정관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 엡5장에서는 성령충만한 사건, 성령충만한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그다음 6장에서 성령충만한 사람의 가정생활 특별히 부부의 아름다운 관계, 그리고 자녀들과 모든 가족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반드시 생활에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고, 성령충만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아름다운 사랑과,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이 아름다운 원리로 순서적으로 우리에게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삶과 가정의 아름다움을 함께 일치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정에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여러 관계가 있습니다. 기둥이 무너지면 지붕이 내려앉듯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깨지면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도 무너지고 자녀들의 꿈과 평안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소중한 가치관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보기드물게 집을 잘 짓고 고급가구로 데코레이션을 하고 그림과 장식들이 너무나 품위있는 것들로 되어 있었고, 주변환경도 황홀할 정도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마치 천국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집이 훌륭하고 모양이 안팍으로 굉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안은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고 큰소리가 나고 복잡한 상태였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그러다 보면 형제와 형제가 서로 부딪치고, 어른과 아이들의 싸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기 시작합니다. 환경은 천국인데 가정이 지옥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된장찌개 끓여 먹고, 모여서 화목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웃으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에 더 좋은 생활이 무엇이냐 하면 마른 떡 한조각만 가지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을 가득히 쌓아놓고 싸우는 것 보다 낳고, 또 큰 집에서 다투는 것보다는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낳다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환경에 가치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안(심령)에 가치를 두어야 됩니다. 소중한 가치가 무엇이냐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치에 따라서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되고, 우선순위에 따라서 행동과 시간을 투자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가치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서 우선순위가 결정이 되고 우선순위에 따라서 행동이 결정되고 시간의 투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 어떤 선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선 순위를 자기는 이렇게 정한다 하셨습니다. 첫째가 교회와 하나님이 아니고 가정이다. 그 다음이 교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분이 실수하시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저 분이 그 열정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뜨거운 열정을 잊어 버렸구나. 앉아서 듣던 사람들이 다 식상했습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보니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깨어지면 교회가 무엇이 되며, 목회자로서 가정이 깨어지면 무슨 목회가 되겠으며 무슨 신앙과,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 가정이 먼저 잘 되어야 그 다음에 교회도 잘 되고 목회도 잘 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깨닫고 나니 사실은 그 우선순위가 어떤 것이 중요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에 우리 아이들과 자주 얘기를 깊이 나누고 대화를 많이 합니다. 제가 늘 만나서 깊은 얘기를 할 때 어떤 occasion이 되면 아빠로서 너희들이 필요한 시간에 옆에 주지 있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아파하고 너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평생 너희들에게 아픔을 주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깊이 사과를 합니다. 아이들이 크니까 어렸을때는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 크니까 교회 일, 하나님 일, 성도들을 돕는 일을 위해서 밤과 낮도 없이 뛰어 다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해를 할 수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며 이야기를 해주니 고마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마음에 아픔이고, 슬픔이고, 고통이 나의 시간과 생애를 필요한 시간, 필요한 때에, 내가 그들을 위해서 그 옆에 있어주지 못했음을 나의 큰 아픔이라는 것을 제가 하나님 앞에 늘 고백합니다. 중요한 우선순위인데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그렇거든 하물며 우리가 세상일을 할 때에 우리의 시간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해도 그렇습니다. 무슨 출세를 하고 명예를 얻어도 이 세상에서 밖에 있는 것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으며, 화목하고, 사랑하는 가정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 그 안에 참 기쁨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유명한 설교 예화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캐러 한 청년이 나갔습니다. 있던 땅을 다 팔아서 돈을 만들어 평생을 다이아몬드 광을 발견하려 다녔지만 결국 돈은 다 없어지고 인생도 다 낭비하고 후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팔아먹은 그 땅이 다이아몬드 광맥이어서 acres of diamond 수천평의 다이아몬드가 거기서 나왔다는 얘기를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이 밖에 있지 아니하고, 안에 있으며 외형에 있지 아니하고, 내적으로 있으며, 물질에 있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에 있으며, 신령한 영적 생활에 참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어디서도 참 기쁨을 찾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우리는 느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어지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쓰고 가정이 화목하고, 천국이 될 수 있도록 애써야 됩니다. 환경 천국을 만들려다 심령의 지옥을 만들지 마십시오. 환경의 천국을 만들려다가 가정의 지옥을 만들지 마십시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 거기서 진정한 기쁨,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참 가치관을 가정에 둘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천국이 되어야 되고, 가정의 천국이 이루어져야 될 줄 믿습니다.
행복이란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이란 소유가 말해주지 않고,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에 가치관을 두고 그것을 위해서 마음을 쓰고 시간을 쓰고 노력할 때에 거기에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다 할 수 없고 누구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깊고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입니다. 다 할 수 없지만 가정의 달을 맞아서 가정에 가치관을 두라. 가정 멤머를, 가정이라는 단위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는 것을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어떤 가정은 벌써 상처와 아픔을 지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깨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수습할 수 없는 깊은 골진 상처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라도 천국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주위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교회와 우정을 나누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내가 머물러 있는 그 자리가 천국이 되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참 기쁨과 행복한 보금자리로 만드십시오. 인생을 성공한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조건을 따지지 마십시오. 조건은 항상 바뀔 수 있습니다. 소유가 행복이 아니듯이 조건도 행복이 아닙니다. 바뀌고 바뀌는 조건에 행복을 걸지 마십시오. 자체 있는 그 모습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인정하자. 지금 있는 위치를 소중하고 행복한 보금자리로 다시 만들자 하는 것이 가정 주간의 첫 번째 서론입니다.
가정의 아름다움을 꾸며나갈 수 있는 첫 번째 원리를 말씀 속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말(언어) 관리입니다. 말하는 것을 잘 control하고 말하는 것 때문에 받는 상처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존경과 신뢰를 잃어버리고, 애정과 삶의 의욕을 상실해 버리는 수많은 경우를 우리가 봅니다. 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성경에서 우리가 보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좀 쉬운 말로 "부모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에게 anger를 가져오게 너무 꾸짖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충분한 인격형성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거나 깨어집니다. 충분하지 않은 애정에서 오는 이상성격이나 충격에서 오는 불안심리와 이상심리는 우리가 늘 주위에서 보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겪거나 문제가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어렸을때부터 생각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아픔과 그 상처들이 너무 너무 오래가고 그것 때문에 정신적인 착란이나, depression이나, 혼란이나 불신, 누구를 믿지 못하고, 창의력이 없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그런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너무 많이 보면서 어린 아이들을 다룰 때에도 심한 상처가 가지 않도록 주의 말씀과 훈계로서 양육하고 그들을 잘 타이르면 그들이 반드시 이해하고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 아이들은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도록 아이들을 잘 양육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부관계, 가족관계 여러 가지로 볼 때에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그 상처 때문에 일생동안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서도 많은 케이스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상처를 주고, 외마디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의 많은 경험에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도 가능하면 분노로 아이들을 꾸짖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훈계하고 잘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느 어머니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소녀적에 오줌을 자주 싸는 어둡고 괴로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기억은 아침이 되면 지도가 그려진 요와, 어머니 분노의 소리와 함께 반드시 키를 쓰고 옆집을 다니며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그것 때문에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한번도 사람앞에 떳떳이 서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야단치고 부끄러움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고통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 셋을 데리고 독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중에 한 명이 똑같이 오줌을 싸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밤만 되면 잠을 자지 못하고 화장실을 들랑날랑 하다가 아침에 잠이 들면 오줌을 싸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자기의 아픈 기억을 생각하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자기와 똑같은 딸을 만들지 않으려고 어느날 그녀는 딸을 불렀습니다. "얘야! 독일에는 좋은 것이 많지만 세탁기가 가장 좋단다. 무엇이든지 넣기만 하면 빨려서 나오니 오줌 싸는 것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라고 했더니 그날부터 그 아이는 안심하고 자게 되었고 다시는 오줌을 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평생 아픔과 고통을 주는 일과 이 한마디가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좋은 교훈인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들의 가치관이 밖에 있었는지 안에 있었는지, 물질에 있었는지 가정에 있었는지, 소유에 있었는지 관계에 있었는지를 조용히 생각하면서 5월 가정의 달을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성령 충만한 후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는데 다시 새롭게 정비하고 고쳐갈 수 있도록 가치관을 허락해 주시고 볼 수 있게 하시고 우선 순위를 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자녀 양육의 원리
엡 6:4 / 박덕기 목사
한국 부모들의 자녀 교육열은 아마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유치원 교육부터 시작해서 초등학생만 되어도 영어 학원, 수학 학원, 논술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미술학원, 웅변 학원 등등 여러 곳의 학원에 보내는가 하면, 초·중·고생 포함해서 지난해 미국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 수가 10만 명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 이민세관국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07년 12월 말 기준으로 자국 내 외국인 유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1위를 기록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다음으로 인도, 중국, 일본, 대만, 캐나다, 멕시코 등의 순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교육 열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 열풍이 가져 온 폐해도 심각해서 이미 사회문제화 된지 오래입니다. 지난해에는 수년간 딸의 해외 유학생활을 뒷바라지하던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딸에게 느낀 배신감과 박탈감을 이유로 딸을 상습 성폭행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역할이 점점 감소되고 있습니다. 이미 수많은 어머니들이 가족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작가 헤밍웨이가 엽총 자살한 이유는 어머니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킨 20세기의 대표적 작가 헤밍웨이는 네 번 결혼하는 등 불행한 결혼생활을 거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였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일을 싫어하여 아이들을 직접 돌보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편집증적으로 욕심이 지나쳐 매일같이 아이들을 엄격하게 닦달했다고도 합니다. 헤밍웨이는 그러한 어머니를 극도로 증오했으며 어머니에게 반항하여 가출을 시도하였다고 하며, 그의 아버지도 그의 어머니의 이러한 성격을 견디지 못하여 권총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성격이 강한 여자를 제일 싫어했고, 부인이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이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무 강한 어머니의 성격이 아들에게는 콤플렉스가 되어 매사에 균형감각을 잃고 반항 일변도로 빠지는 성품을 빚어냈고, 결국엔 자살이라는 비극까지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아이들이 비뚤어지고 잘못되는 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아이들을 그릇 대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의 중요성은 이래서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며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길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나라와 민족 앞에 쓰임 받는 존재가 되게 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해야 할까요?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병은 어른에게만 나타날까요? 대답은 NO! 입니다. 어린이 화병은 어떤 것일까요? 취학 전 아이들은 식욕부진이나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짜증이 느는 등의 증상을 보이고, 취학 후 아이들은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피로해 하고, 점차 두통, 어지럼증, 복통, 식욕부진이나 식욕과잉, 소화 장애, 변비, 야뇨증,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는 등의 신체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말을 더듬거나 발음장애, 학습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잘 웃지도 않고, 놀이를 해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화병은 왜 생길까요? 어린이 화병은 스트레스성 증후군의 일종으로, 부모의 과잉보호와 과도한 기대가 주요 원인이라고 합니다. 과잉보호로 인해 심신은 약해지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부모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거나 늘어만 가는 학습량을 견디기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조기교육 열풍을 타고 점점 학습량은 늘어만 갑니다. 아이의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부모의 욕심만 강요하다보면 아이는 지칠 수밖에 없는 반면, 밖으로 나가 뛰놀며 자신의 욕구를 발산할 기회는 자꾸 줄어들고 과잉보호로 심신은 더욱 약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는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도 결코 좋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쉬웠던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와 같은 작은 사회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좌절과 우울 스트레스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자녀 양육하는 문제에 있어서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부모의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파멸시키는 길입니다. 아이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자라가며 중대한 행동장애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디디고 일어설 수 있는 자율성을 키워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평생 부모를 의존해야 하는 무기력하고 유약한 인간으로 자라갈 것입니다. 부모가 아닌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움을 받고 평생을 살아가게 하는 일,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책임입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를 교육하되 그들로 하여금 노하거나 죄스런 원망을 일으키지 않을 그런 방식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부모가 화가 난 상태에서 어린아이를 훈육한다면 유익보다 해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는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훈육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화가 나서 매를 가지고 징계한다면 아이는 몹시 노여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술 취한 사람처럼 격동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인 자제가 필요합니다. 자제력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첫째 선결 조건입니다.
또한 진정으로 자녀를 바르게 훈육하고 싶다면 결코 변덕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기분이 좋을 때 아이가 팔을 벌리고 달려들면 면 ‘아이고 내 새끼, 우리 강아지’ 하면서 예뻐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기뿐이 나쁠 때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들면 ‘저리 가, 귀찮아’하면서 매몰차게 뿌리칩니다. 이 일만큼 자녀를 화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녀는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부모는 언제는 ‘아이고 내 새끼, 내 강아지’하며 예뻐해 놓고, 언제는 ‘저리 가 귀찮아!’하면서 뿌리치면 아이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부모의 변덕은 술 취한 사람의 행동과 같아서 마침내 신뢰성을 상실합니다. 오히려 자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자녀를 적절히 징계해야 합니다.
교육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잠 13:24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이 두 말씀의 한계와 범위 안에서 자식을 균형 있게 양육해야 합니다.
과거의 유교식 교육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고 폐쇄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교육법이 도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자녀의 개성을 개발해서 용기를 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통제나 강제적인 것은 절대로 안 되며, 체벌이나 교정도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소위‘몬테소리’ 교육의 원리입니다. 모든 것을 어린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허락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견해는 전적으로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은 기만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제재를 가하라고 가르칩니다. 잠 22:15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콜리지에게 한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평소 콜리지를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의 주제가 어린아이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때 방문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들이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결심을 하는 법을 배우거든요.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완전하게 키워 나가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믿어요.” 여기서 콜리지는 그 사람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 잠시 꽃을 좀 보러 갈까요?” 이렇게 말하고 콜리지는 방문객을 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는 정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방문객은 그의 정원을 한번 둘러보고는 놀라서 외쳤습니다. “아니! 왜 여기는 잡초들밖에 없지요?” “여기도 예전엔 꽃들로 가득했었지요. 그러나 금년에는 손질을 안 하고 일부러 내버려 뒀다오. 자기들이 자라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정원이 어떤 꼴이 되는지 한번 보려고 했던 거요. 그랬더니 이 꼴이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체벌하는 선생님들을 고소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요즈음 부모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 시간에 아이들이 마음대로 돌아 다니면 깜짝 놀라 제제를 가해야 할 것인데 그저 가만 뇌둡니다. “자녀를 망치는 10가지 비결”이란 것이 있습니다. 1)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사줘라 2)나쁜 말을 해도 웃어라 3)교육과 훈련을 시키지 말고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둬라 4)잘못된 품행을 책망하지 말라 5)아이가 치우지 않은 침대 옷 신발 등을 모두 정리해줘라 6)TV나 책을 마음대로 보고 읽게 놔둬라 7)아이 앞에서 부부싸움을 자주하라 8)달라고 하는 대로 용돈을 줘라 9)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것, 좋다는 것 다 해줘라 10)아이가 이웃이나 선생님과 대립할 때 언제나 아이 편이 되라 등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식을 근실히 징계하지 않아서 그 자식이나 가정이 비참하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 다윗의 아들-아도니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쿠데타 기도)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근실히 징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잡초가 자라나는 정원이 아니라, 샤론의 장미꽃 같은 자녀들이 자라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교양’이란 성경에서 ‘훈련’ ‘교훈’ ‘징계’등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이 모든 말을 종합해 보면 교양이란 ‘심신의 발달을 위한 행위적 훈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훈계’란 ‘말을 통한 훈련’을 의미합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교양’이란 행위를, 그리고 ‘훈계’란 말을 통한 자녀 훈련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을 통한 훈련은 ‘주의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부모의 주장이나 말로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은 가정에서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학교로 넘겨줄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의 영향보다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할 일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어떻게 자녀를 가르치느냐? 에 따라서 그들의 인격이 바뀌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맨 먼저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원도 보내고 과외 공부도 시키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 얻기를 위해서 돈도 아끼지 않습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영특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수석이라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이 그와 같으면 세상 걱정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나라 최고 명문 대학을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사법 시험을 수석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그만 날마다 퍼마신 술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 간암에 걸리게 되었고, 젊은 나이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래도 그저 공부만 잘하면 걱정이 없습니까? 만사가 잘되어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신앙으로 살 때만이 걱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교육에 투자하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마음과 정성을 들여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복 주신다고 했습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지식도 필요합니다. 학벌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되고,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고, 노인보다 지혜롭게 하며, 모든 스승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소망을 얻고, 힘 있는 자녀로, 힘 있는 인생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유대인은 비록 작은 민족이었지만,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전 세계에 흩어진 사람 다 합쳐봐야 불과 1,500만 명밖에 안됩니다. 한민족은 7,500만 명, 그러므로 한민족의 5분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은 유대인입니다.
록펠러 어머니는 자녀에게 ‘주의 교양 훈계’로 10가지를 가르쳤습니다. 록펠러는 가난하여 9살부터 남의 집 점원으로 일을 했는데, 어머니가 가르쳐 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1)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섬겨라-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가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2)목사님을 하나님 아버지 다음으로 잘 섬겨라-목사라고 하면 배가 아파하는 분이 있어요. 주의 종이라고 하면 물고 늘어지는 진돗개 같은 신자도 있어요. 항상 목사를 걸고 씨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의 종과 다투고 헐뜯고 해서 유익 될 일이 하나도 없어요.
3)주일 예배는 곡 본 교회에서 드려라-내 교회가 있고 내 자리가 있어야 돼요. 교회에 와도 아무 곳이나 말고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 좋아요. 윤보선 대통령은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내 집이 있듯이 내 교회가 있는 것 얼마나 좋아요. 반대로 떠돌아다니는 것, 집이 없다는 것,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교회도 내 교회 없이 돌아다녀 봐요. 믿음이 약해집니다. 꼭 설교만 들어서 은혜 받는 것 아닙니다. 내 교회는 문만 열고 들어와도 평안이 오고 은혜가 되는 거예요.
4)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주머니가 십일조 주머니예요. 평생 동안 세계 최고의 재벌이라도, 십일조 잘 하기로 유명한 분이 록펠러예요.
5)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품어 주시고, 용서하는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6)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하루를 그냥 되는대로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얼마나 좋아요? 아침에 문을 열듯이 기도하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아침기도, 새벽기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앞서 가시고 그 길을 축복하실 때 얼마나 잘 되겠어요?
7)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성하며 기도하라-하루를 지나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밤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평안한 잠을 자게 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밤사이에 준비해 주셔서 또 새로운 날을 맞이하게 해 주시니 얼마나 좋아요?
8)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신문을 읽으면 온갖 불의한 것들, 슬픈 것들, 답답한 것들 보니까 마음이 답답해요. 해외에 나가서 한 열흘 동안 신문을 안 보면 한 이틀은 궁금하다가 한 일주일 지나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천국의 뉴스는 매일 매일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9)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남을 돕는 것이 좋아요. 평생 남을 유익되게 하고, 말 한 마디라도 격려해 주고 사랑해 주고 하는 것이 좋아요.
10)예배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그리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들을 수가 있어요. 우리 성도들도 꼭 본받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입니다. 동시에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해주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의 기쁨을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 길러져야 하고, 주님의 형상대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도, 그 돈으로 어린이의 육체는 성장시킬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성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여러분의 자녀들이 21세기를 리드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로 쓰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요
엡 6:4 / 최장훈 목사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이 되고,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자신의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고 테스트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장소가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란, 부부만 사는 곳이 아니라 부모가 계시고, 자녀들이 동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부가 아무리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할지라도 부모나 자녀에게 잘못하면 말씀대로 순종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에 소속된 가정에서 이런 모순된 삶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왜 부부간에는 잘하는데 자녀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자녀를 문제없이 키운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아서, 많은 가정들이 자녀로 인한 갈등과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자녀를 양육하기에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문화적인 환경과 교육여건이 우리가 성장할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자녀를 자기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고 사랑은 하지만 정작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데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서 자녀들이 잘못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물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 부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교훈하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 부모의 큰 문제는 무지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심리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저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별 것 아닌 자동차도 운전을 하려면 많은 훈련과 공부를 통하여 자동차를 이해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방법을 배워 운전을 합니다.
그래도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끔씩 운전면허가 없는 중.고등학생들이 부모의 자동차를 몰래 운전하다가 큰 사고를 내는 경우를 뉴스를 통하여 보곤 하는데, 바로 그것이 훈련과 공부없이 자기 자신을 과신하다가 일으키는 큰 사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식의 사고를 우리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에 있어서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느냐”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녀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바로 이 “어떻게?”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공부와 훈련이 우리 부모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2.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 부모의 큰 문제는 무례함입니다.
자녀를 바르게 교육함에 있어서 무지보다 더 나쁘고 무서운 것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무례함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무례함이라는 표현자체가 이상하게 들리고, 불편하게 들리는 부모님들이 혹 여러분들 중에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많은 자녀들이 바로 이 부모들의 무례함으로 인하여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상처와 고통이 자녀들이 잘못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경우뿐만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때 무례해지기 쉽습니다.
따라서 사랑할수록 더 예의를 지켜야만 합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생기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무례함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무례함으로 인하여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무례함은 자녀에 대한 부모들의 무례함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가 어리기 때문에 함부로 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비록 어리지만 저들도 하나의 소중한 인격들입니다.
물론 아직 미숙한 인격이기 때문에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매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잠13:24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필요하다면 자녀들에게 매도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꾸짖고 교훈하고 매질을 할 때에도 아이들의 인격을 함부로 무시하고, 저들에게 무례함으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폭력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언제 부모에 대하여 노여움을 품게 되는지 아십니까?
저들도 잘못을 했을 때, 부모들에게 꾸짖음을 받고, 심지어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상처를 받고 문제가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들이 자녀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저들에게 나름대로의 예의를 갖추어 준다면, 저들은 부모의 꾸짖음과 초달을 인정하고 받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꾸짖음과 초달은 아주 좋은 효과를 가져와 아이들을 바르게 자라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줄 알아야 합니다.
예의는 아이들이 어른에게만 갖추는 것인 줄로 아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의는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에게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에 대하여 예의를 갖출 줄 알 때, 우리 아이들은 예의를 배우게 될 것이고, 어른들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3.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부모가 자녀의 본이 되지 못함”과 “정직하지 못함”입니다.
참된 교육은 말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삶에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그 사람의 삶이 따르지 않은 말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경우는 “삶이 따르지 않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있는데, 그것은 자녀를 삐뚤어지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삶이 따르지 않는 말”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말만 하는 사람이야”하고 우리가 돌아서 버리면 그만이기 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는 남이 아니라 자녀가 사랑하는 사람이요,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부모가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녀들에게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라고 항상 “말과 삶”이 일치 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을 할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역시 온전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럴 경우에 자신의 한계와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면, 자녀들은 그런 부모를 오히려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쓸데없는 권위의식 때문에 자녀들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때 아이들의 눈에 부모가 위선자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그리고 자랑스러워야할 부모가 자녀들의 눈에 위선자로 보이게 될 때, 아이들이 받는 충격은 엄청난 것입니다.
더 이상 교육이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4.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시127:3절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일들이 아무리 잘되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자녀가 잘못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스승과 교사가 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저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열심히 학비를 주어서 공부시키면, 그것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많은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자녀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자녀에 대한 중요한 부모의 책임은 저들에게 세상과 인생 그리고 신앙을 가르치는 참된 교사와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 실력으로 아이들이 필요한 영어와 수학 그 밖의 세상적인 지식들을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선생님들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삶과 신앙은 제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반드시 제가 가르쳐야만 합니다.
따라서 저는 제 아이들의 선생이 되고 싶고, 아이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의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으로 좋은 고현교회의 목사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여 하나님의 훌륭한 일군으로 키워 달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세상적으로도 승리하고, 성공하시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녀 교육에 승리하고, 성공하시는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성경을 공부하고, 저들의 심리와 성격을 공부하여, 저들에게 그와 같은 진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배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자녀에 대해서도 예의를 갖추어 말 한마디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부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자녀를 가르치며,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는 정직하고 솔직한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부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들의 자녀들은 우리들의 기업이 될 것이요, 우리들의 상급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나침판이다
엡 6:4 / 오창우 목사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데 “네가 보고 싶은 책을 골라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딸이 골라놓은 책을 보니까 아이가 내놓은 책은 “올바른 자녀 양육법”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너 왜 이 책을 골랐니?”하고 엄마가 물으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가 나를 제대로 양육시키나 보려고요.” 했답니다.
자녀! 내속으로 낳았지만 내 맘 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자녀의 나침반입니다.
나침반! 아시지요? 자석바늘 침으로 방위를 알게 하는 도구 말입니다. 일설에 나침반은 우리나라 신라시대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당나라에 주었거든요? 그랬더니 당나라사람들이 신라에서 온 침반이라고 해서 라침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앞에 ‘나’자가 신라의 ‘라’자라고 합니다. 신라의 침반, 그래서 나침반입니다. 대단한 민족입니다. 나침반은 방향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나침반은 방향을 표시하는데, 표시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침반의 바늘은 2개의 다른 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파란색은 남쪽, 붉은색은 북쪽입니다. 나침반을 보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하게 됩니다. 동서남북 가야할 길을 알려줍니다. 이것을 가지고 비행기가 운행이 됩니다. 깊은 산속에서도 나침반이 있으면 방향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망망대해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나침반이 무엇이냐? 바로 부모입니다. 이와 같이 자녀들은 부모를 보면서 자기 인생의 방향을 정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의 아들이 신대원에 갔습니다. 면접을 하는데 면접관이 “자네는 아버지도 목사, 할아버지도 목사이신데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라고 물었더니 아주 명답을 했습니다. “얘, 제가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목사 밖에 없어서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은 부모를 보고, 아니 나를 보고 무엇을 배웁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여러분, 몰래카메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여러분의 자녀들입니다. 아이들은 다 보고 있습니다. 본대로 배우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 문제아가 있으면 문제부모가 있다 」라고 A. S 니일 이란 영국 교육개혁자가 말을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모델입니다.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똑똑한 여 집사가 있었습니다. 일류대학에 외국유학, 그리고 좋은 직업을 가졌습니다. 이 분은 매사가 완벽합니다. 자녀 교육도 똑 부러지게 해서 학교 공부도 전교 1등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사춘기가 될 때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학업을 못하게 됐습니다. 엄마의 완벽함과 일류병에 자녀가 병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만나는 사람들도 이분만 만나면 긴장을 합니다. 그러니 이 자녀들은 얼마나 더 긴장을 하겠습니까? 참 안됐습니다. 여러분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이 자식문제입니다. 이 엄마는 자기의 욕심을 자식에게 심었습니다. 아이의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했습니다.
한 아이를 바이올린을 시키기 위해서 그 아버지는 속옷을 덧대어 입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한번은 이렇게 말을 하더라구요. “우리아이 1억짜리 바이올린을 사줬습니다.”‘ 나는 안 입고 안 먹고 해줬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하는 자랑입니다. 저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하나도 감동이 안 되더라구요. 그런다고 자식들이 다 좋아합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자식이 뭐라고 한줄 아세요? “아버지가 내게 해 준게 뭐가 있어요?” 그랬답니다. 1억짜리 해주고선 나중에 나는 속옷하나 못 사 입으면서 너에게 다 해줬다. 하면 이거 부담스러운 겁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가지고 제세를 하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 부담이 되고 상처가 되는 겁니다.
문제부모는 무식하고 가난한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고 도덕과 윤리가 없는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배웠고 돈도 있고 그리고 신앙도 있는 집에서도 얼마든지 문제아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학교와 직장 어디를 가든 1등 만하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이 여 집사는 빨리 병 앞에서 두 손, 두 팔을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와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제발 내 딸을 살려달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 집사의 영이 회복되어서 새로운 환경의 길이 열리고 이 딸은 새로운 곳에서 학교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자녀교육은 내 지식이나 경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됩니다. “주여 내 자녀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 자녀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번에는 아이들의 이름을 넣어서 해봅시다. “주여 내 자녀 OO에게 복을 주옵소서!”
가네히라 케노스케의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아버지가 “내가 웃으면 거울이 웃는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내가 좋은 모델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면 자녀들에게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받는 자녀가 될 것인가의 가르침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2가지를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나침반을 보게 되면 파란색과 빨간색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손을 잡아야지요. 방향 판에는 언제나 빨간 것과 파란 것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첫 번째 파란색 바늘은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녀를 대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노회에 개척교회를 하신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정말 어렵게 목회를 하십니다. 교회는 상가 건물입니다. 사택이라고 해봐야 옥탑 방입니다. 안방이라고 하는 곳에 거실 겸, 주방 겸 쓰는 그런 곳입니다. 그 방에 딸려서 있는 방에 할머니와 두 아들이 삽니다. 말이 집이지 너무나 환경이 열악합니다. 그러나 목사님, 사모님, 두 아들은 교회를 위해서 동분서주하십니다. 그런 형편이니까 자녀들 교육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두 아들은 고등학교나 겨우 졸업했을까요? 옆에서는 걱정을 했습니다. ‘저 애들 앞으로 뭐가 되려나....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지? 대학도 못가고 특별한 재주도 없고... 모아둔 재산도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 하시는 일에 놀랐습니다.
큰아들 군대 갔다 와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마땅히 자리가 없었습니다. 구청에서 나오는 신문을 봤더니 임시직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남들은 다 채용이 됐는데 이 큰 아들은 안 된 겁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안됐습니다. 공부를 잘 못했으니까 자포자기 하고 있는데... 연락이 왔답니다. 청와대 행정직을 급히 구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마침 구청에 이력서 들어온 것 중에서 다 채용이 되고 남은 것은 이 한 사람뿐이라, 큰 아들 서류만 남아서 청와대에 올라간 겁니다. 그래서 임시직으로 채용이 됐다가 청와대 정식직원이 되어 관사도 나오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번 노회 기간 중에는 청와대 직원 부모초청 대통령만찬에 100명이 초청했는데 이 목사님 내외가 대표 인사를 하게 됐다고 해서 다를 잘 하시라고 축하해 드렸습니다.
작은 아들도 아버지 교회위해 복학으로 피아노를 배워서 예배 반주를 했는데 가진 기술이 없고 해서 비디오 학원에 비디오 배우러 갔다가 특별채용이 돼서 KBS ‘VJ특공대’ 가서 찍더니 지금은 ‘무한지대Q’에서 촬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촬영장에서 아들에게 반한 대학졸업자인 여성과 결혼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들 이 개척교회 목사님을 보고 자식 축복받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사모님과 같이 앉은 자리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들은 다 대학가고, 남들은 다 뭔가를 하겠다고 그럴 때, 장학금을 탄다고 했을 때, 왜 우리 애들은 공부도 못하고 장학금도 못타고 대학도 못갈까? 하며, 그럴 때는 복덩이라는 생각을 못하셨지요? 오히려 웬수 덩어리라고 생각을 하셨죠?” 했더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걱정을 했는데, 왜 이 엄마가 걱정을 안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얼마나 기쁘세요? 얼마나 좋으세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크고 비밀한 은혜가 이런 겁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사모님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이 노회에 와서 20년 정도를 만났는데 정말입니다. 한번도 목사님, 두 아들, 교회, 모시고 사는 어머니에 대해서 한마디 불평하는 것을 못 봤습니다. 항상 가족들에게 너그럽습니다. 항상 감사한 얘기만 하십니다. 지금도 며느리가 아이 봐달라고 하면 “그래 알았다. 이렇게라도 도와 줘야지..”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녀들을 기쁘게 해줘야 합니다. 왜? 너그러워야 하는 이유가 있잖아요. “자식은 여호와여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 선물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그러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상급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보석이니까 귀하게 여겨야지요. 노엽게 하지 말아야지요. 하나님이 하실 텐데 왜 내가 하는 걸로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심었고 아보로가 물을 주었으며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우리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을 자라게 해주신다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서요. 하나님의 선물은 주신분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을 텐데.... 선물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주게 돼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신 자식인데....
선물에는 보내는 이의 마음과 정성이 있습니다. 우리도 선물합니다.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시지요? 받는 사람이 좋아하면 나도 좋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선물을 줬는데도 무관심하거나 투박하거나 불평을 하게 되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다음에 주나 봐라’하는 생각만 듭니다. 자식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녀가 내 말대로 하지 않는다고 내 욕심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남들처럼 자라지 않는다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속상해 하면 자녀는 상처를 받게 돼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으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선물이 얼마냐? 크던 작던 일단 받으면 기뻐해야 합니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데... 꼭 필요했던 건데..... 감사합니다.”
이런 사람은 더 주고 싶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을 보면서 크고 작던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자녀들에게 감사하세요. ‘내 딸, 내 아들 하나님이 주신 선물! 어쩜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을 볼 때마다 ’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이 네 앞길을 책임지실 꺼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실 꺼야. 천군 천사로 보호하실 꺼야. 성령님이 함께 하실 꺼야. 잘될 거라 믿는다.’
그대로 봐주면서 축복하고 감사하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잖아요. 우리를 죄인으로 봤으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잖아요. 나를 지옥백성으로만 봤으면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생명으로 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희생하시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산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겁니다.
한사람의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육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하고 정신적으로 교육하고 배울 것이 필요하고 그다음에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를 하면 내가 하는 것만큼 자녀들이 복을 받게 돼 있습니다. 내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5월 5일보다 앞서서 어린이주일을 드리려고 저희교회만 특별히 한 주 당겼습니다. 이번 5월 5일에 아이들에게 오늘 제가 가르쳐 드리는 것을 해 보세요. 자식들을 끌어안아 주세요. 지금은 가족들 끼리만이라도 안아보세요. 고 장로님 최 권사님 배웅을 나갔었는데 거기서 장로님을 안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권사님도요. 괜히 눈물을 나더라구요. 안으면서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좋은 소식 보내주세요.” 눈물바다가 돼서 헤어지게 됐습니다. 여러분 그런 일들이 아침저녁으로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난아이들은 뽀뽀해 주고 얼굴 비벼주고 안아 주어야 합니다. 이 초등학교 다니 아이들한테는 안아주고 목마도 태워주면 좋아합니다. 청소년 아이들은 등이며 팔이며 끌어안아서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보물)입니다. 5월 5일에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하시지 말고 너그러움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식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자식들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안아주시고 예뻐하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잘 됩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렇게 다스리면 좋습니다.
두 번째 빨간색 바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겁니다. 꼭 기억하고 해야 할 일입니다.
한 가족이 오랜만에 좋은 식당에 갔습니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맛있는데 음식이 남았습니다. 그냥 두고 나오기 아까워서 음식을 싸가지고 가려는데 좀 민망한 생각이 들어서 웨이터에게 이렇게 둘렀습니다.
“여보게 웨이터, 남은 음식을 싸주게나, 집에 개가 있어서” 그랬더니 옆에 있던 똑똑한 아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빠, 집에 갈 때 개 사가려구요?”
여러분 정직한 것이 좋습니다. 솔직한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데 하나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그 솔직함이 무엇이겠습니까?
삼상 2장에 두 가정이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 가정과 한나의 가정입니다. 엘리는 제사장인데 그 아들도 제사장입니다. 제사 드리는 것은 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습니다.
한나라는 여인은 자식 못 낳는 여인인데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어느 정도 기도를 하는지 술 취한 여자가 아닌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도 속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나한테 아들 없는 데,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직책이 있다고 하나님한테 더 큰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직책이 없다고 복을 못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너무 직책에 연연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역사가 있으십니다.
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직도 교훈으로 받아들이십니까? 교훈이라니요? 그러면 여기 안 오셔도 됩니다. 다른 곳에 가도 교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책방에 가도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여기십니까? 그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으십니까? 너는 왜 이러냐구? 여러분 아직까지도 그러십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남은 게 뭐있습니까? 교회가 그렇고, 한국이 그렇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남을 정죄하고 남에게 충고를 했는데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속상해 합니까? 그건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게 기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하면 마음이 기쁩니까?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을 격려하고 칭찬을 하니까 마음이 좋습니까? 그러면 그건 하라는 겁니다. 내가 해서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하지 말라는 겁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는 겁니다. 약속으로 믿고 그 약속 앞에 자기를 집어넣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말씀을 따라갔기보다 약속을 따라 갔습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약속을 들었잖아요. 그 약속 믿고 나아갈 때 금의환향을 할 수 있던 것입니다. 요셉이 남의 집에 팔려가고 감옥에 가도 좌절하지 않은 이유가 무언지 아세요? 하나님이 주신 꿈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보게 되면 믿음의 선조들은 약속을 따라 갔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약속의 말씀입니다. 교훈이 아닙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자기를 변화시키세요. 그 말씀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세요. 기도해서 응답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교훈으로 주어지거나 율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와 행복해지려면 먼저 판단하지 말고 스스로 문제 해결해야 합니다. 미리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합니다. 먼저 열 받지 않아야 합니다. 감정적이 됩니다. 미리 준비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어보지 않습니다. 미리 걱정하지 말고 먼저 단정 짓지 말고 하나님의 축복은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약속 믿는 부모의 3가지 역할은
① 제사장 역할 -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119기도 표를 항상 갖고 다니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② 선지자 역할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을 폈을 때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얘기를 하셨네. 우리도 이렇게 살면 복 받을 꺼야. 말씀대로 살고 복 받자! 하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③ 왕의 역할 - 왕은 다스리는 분입니다. 권력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왕은 단순한 권력자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상의를 했습니다. 이것이 왕으로써의 부모역할입니다. 하나님 앞에 물어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직분을 가지고 자녀들을 훈계하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일을 가지고 누르려고 하지마세요. 그 아이의 능력을 가지도 누르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녀가 복을 받고 못 받는 것은 부모에게 달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기업이라고 생각을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고 그 약속 앞에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의 나침판입니다. 방향을 제시할 뿐이지 힘으로 권력으로 눌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그러움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할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자녀들을 축복하시고 우리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나침반은 하나의 바늘이지만 한쪽에는 파랑, 한쪽에는 빨강입니다. 파랑은 하나님의 너그러운 마음, 빨간색은 하나님의 약속, 우리가 잘 믿고 잘 방향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잘 키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복된 자녀양육
엡 6:4 / 최낙중 목사
시127:3 이하 말씀을 보게 되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독신을 선언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결혼을 할지라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식을 낳는 일과 기르는 일이 힘들고 고생이 된다는 이유입니다. 그런 결혼은 서로의 사랑을 통해서 즐기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발상은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둘이 한몸되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이라는 동산에서 피어나는 꽃들입니다. 올 여름성경학교에서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꽃처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집안의 어른되는 부모님과 교회학교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어린 아이들을 그리고 자손들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시92:12 이하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 곧은 나무여야 커서도 곧은 기둥감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뉴욕의 니치피트에서 출생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독실한 어머니 밑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나이 6살 때에 어머니가 주신 용돈 20센트에서 십일조를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59년 친구와 조그마한 사업을 함께 시작해서 훗날에는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설하였고 그 석유회사가 미국의 정유소 95%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899년 이후에는 그의 유전과 정유소가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고 수입금중 십일조만 계산하는 직원이 무려 46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890년에 시카고대학을 설립할 때에 4억 2천만 달러를 기부한 이후에 유니버시티 12개, 칼리지 12개 무려 대학을 24개나 지어서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그가 세운 예배당이 무려 4,928개나 됩니다. 그가 바로 죤 데이비슨 록펠러라는 사람입니다. 록펠러는 일찍이 어머니 일라이저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배우되 실천하기를 그가 96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했다고 합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이 아니라 일생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록펠러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온 어머니의 가르침은 아주 중요했는데, 첫 번째는 주일예배는 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배를 드릴 때는 맨 앞자리에 가서 드리라는 것이었고, 셋째는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었고, 넷째는 오른쪽 호주머니는 늘 십일조만 넣으라고 했으며, 다섯 번째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라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에 있었던 일들 중에 실수한 일을 하나님앞에 용서를 구하고 잠자리에 들라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되 후하게 도우라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그 누구와도 원수맺지 말고 화목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록펠러는 그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서 허드슨 강변에 [리버사이드 쳐어지]라는 강변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다녀갑니다. 또한 1,200만명의 뉴욕시민들은 록펠러재단에서 대신 내준 수도세로 그들은 수도세를 내지 않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습니까?
훌륭한 아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교육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호4:6에 보면 사람들이 망하는 근본 원인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왕 솔로몬은 전12:13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역사를 빛낸 사람들은 그 부모님에게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학교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18세기의 영국은 도덕과 윤리가 타락했습니다. 성도덕이 무너졌습니다. 쾌락주의에 빠졌습니다. 사회가 어두운 때였습니다. 그 때에 요한 웨슬레라는 한 사람이 나타나서 온 영국에 회개운동을 일으키며 전도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를 통해서 창녀들이 회개하고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부정부패가 사라졌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온 이후에 그는 성령을 체험한 이후에 놀라운 일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 그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었음이 있었습니다. 수산나는 사무엘 웨슬레 목사님을 통하여서 19남매의 자녀를 나았습니다. 가난한 목사님의 가정이었지만 수산나는 밤마다 자녀들을 불러 모아놓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였습니다. 문답식 교육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느냐?”“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예수님은 너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하나님이 예수믿는 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위대한 사람되라 말씀하셨습니다.”“너희를 위대하게 해 주실 분이 누구냐?”“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문답식으로 교육을 했다는 것입니다.
잠22:6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가장 복된 자녀교육의 목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혀를 보면 건강을 안다는 의사의 말이 있습니다. 신장기능이 정상인 사람의 혀는 붉고 광채가 난다고 말합니다. 신장기능이 정상인 사람의 혀는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알아낸다고 합니다. 또한 언어의 표현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장에 열이 있는 사람은 혀끝이 붉어지고 혀에 염증이 생기고 입안이 써서 단 음식도 쓰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신장의 생리기능이 비정상적인 사람은 언어도 장애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다 알 수 있습니다. 말은 곧 인격이고 사상입니다. 그리고 또 신앙입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로 가득 찼을 때, 그리스도 예수가 입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전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 해야 하고 교회학교 교사들이 해야 합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우리 자녀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심어주고 말씀으로 심어주고 믿음을 심어줍시다. 그들을 거듭나게 합시다. 믿음을 키워줍시다. 그들이 이 나라와 민족, 세계 인류를 위해서 큰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그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날에 생각하는 아버지
엡 6:4 / 이정선 목사
오늘이 아버지날이군요. 아버지날이니까 아버지의 은혜를 상기시키고 아버지의 수고를 위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다만, 오늘 저는 다른 각도에서 아버지를 조망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가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모습으로 여러분의 기억에 남아 있다면,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 아버지가 엄격하면서도 자녀를 올바로 양육하시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 심지어는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이미 사도 바울이 아버지들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기 쉬운 자리에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어머니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모르겠어요, 제가 요즘 카운슬링을 배우면서 또 실습을 하고 하다 보니까 맨 그런 사람들만 보이는지도 몰라요. 어쨌든 어머니들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바울이 ‘아비들아’라고 말할 때 사실은 어머니도 포함된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1절과 2절에서는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언급했거든요. 만약 바울이 아버지라는 단어로 어머니까지 포함하는 부모를 염두에 두었다면 1절에서도 ‘자녀들아 너희 아비를 순종하라,’ 또 2절에서는 ‘네 아비를 공경하라.’ 이렇게 말을 했어야지요. 그런데 1절에서는 부모(parents)라고 말했고, 2절에서는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같이 언급했단 말이지요. 그래놓고서 4절에서는 아버지(father)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녀를 노엽게 하는 사람으로 바울이 어머니를 포함해서 말하고 있다고 하기는 곤란하게 됩니다.
제가 이것을 발견하고 나서 충격이 좀 컸어요. 왜냐하면 저도 아버지니까요. 이 말씀을 ‘부모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이해했을 때는 아내와 제가 공동으로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자녀를 노엽게 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만 지적을 당하니까 정신이 없네요.
어쨌든, 만일 여러분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아직도 품고 있다면, 정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제 그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할 때입니다. 아버지를 여러분의 그 분노 속에 붙잡아놓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지 말자는 거예요. 나를 정말 노엽게 했던 그 아버지, 나에게 너무나 함부로 하고 소홀히 했던 그 아버지를 이제 용서함으로 보내드리세요.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지요. 마음 굳게 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에요.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용서하든 용서하지 않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설령 살아 계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버지를 위한 것보다 나 자신을 그 분노에서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노엽게 했던 아버지를 용서하는 방법 밖에는 없단 말이에요.
만일 나의 아버지가 나를 노엽게 하는 아버지였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입니다. 나는 내 자녀에게 어떤 아버지가 되고 있습니까? 나도 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아버지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구요? 그렇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지 아닌지는 자녀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엄마는 딸을 키우면서 딸을 잘 키워보려고 너무나 애를 쓰는데, 딸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자기 생각과 달라서 얼마나 힘들어요. 엄마는 딸을 노엽게 하려는 의도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딸의 입장에서는 엄마가 자기를 너무나 노엽게 하고 있어요. 이 딸의 입에서 만약 엄마만 아니라면 줘패주고 싶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듣고 얼마나 제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어머니는 빼줄 것처럼 얘기하다가 갑자기 딸을 노엽게 하는 엄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자칫 방심하면 우리도 자녀를 노엽게 하는 부모가 되기 쉽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맨날 아이들 눈치만 보면서 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를 배려하지 못하거나 또는 부모 자신의 세계를 자녀에게 억지로 투영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수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훈은 궁극적으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정직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 거기에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특별히 아버지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하기보다 자녀들에게 인정받는 아버지, 자녀들과 의사소통도 되고 하는 아버지가 되십시오. 오늘 아버지날을 맞아 우리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도록 한번 각오를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란 어떤 것인지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기를 요구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좋은 아버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을 복되고 아름답게 세워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자녀를 사랑하라
엡 6:4 / 김남준 목사
Ⅰ. 본문해설
하나님께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셨다. 즉,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만들어졌기에, 어렸을 때 육체는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고,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와 교양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하고자 가정의 교육과 교회의 목양을 세우셨다.
Ⅱ. 부모의 마땅한 의무
부모는 자녀를 낳는 순간 그 아이를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게 할 일차적인 의무가 있다. 오늘 본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하였다. 이것은 아비들이 자녀를 노엽게 할 위험이 더 많기 때문에 특별히 아비를 언급한 것이고 자녀 양육의 의무는 부모의 공통된 의무이다.
A. 자녀를 양육하라
‘양육하라’는 희랍어 성경에 ‘에크트레페테'(ektrepete)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자라도록 돌보다’, ‘영양을 공급하다’ 등의 뜻으로, 갓난아이를 유모가 잘 돌보아 양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다. 어린아이는 특별한 보호와 안전한 환경이 필요하고, 아이에게 알맞은 음식이 필요하다. 부모는 아이에게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세상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을 사용하여 자녀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온전한 사람에 이르도록 잘 돌보아야 한다.
B. 교훈과 훈계로 하라
성경은 부모에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한다. 우리말 성경은 “교양과 훈계”는 두 단어이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파이데이아’ 한 단어이다. ‘파이데이아’란 말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이 말은 정확한 지식으로 아이의 지성을 설득하고, 그 지식을 따라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양육을 하되 주의 ‘파이데이아’를 하려면, 아이에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그 지식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외가 일치된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야 가능하다. 부모는 먼저 진리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삶이 결탁된 부모들만이 하나님 앞에 참 사람답게 살게 하는 탁월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이 된다. 지식과 생활의 일체에서 오는 아름다운 삶과 그 삶을 위한 마음의 열정이 자녀들을 경건한 ‘파이데이아’로 양육하게 할 수 있다.
C.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들은 노여움을 타도 부모에게 노여움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노여움은 아이의 마음에 쌓여 일평생 자녀를 사로잡는 제 2의 천성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 커다란 폭력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 대한 중대한 파괴행위이다.
자녀들은 무엇 때문에 노엽게 될까? 첫째는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관심사로 밀려나는 것 자체가 자녀에 대한 무언의 폭력이며 상처이다. 둘째 가르침과 불일치한 부모의 생활이 아이를 노엽게 한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의 얼굴 앞에서 배우지만 나이가 먹으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가르침과 불일치한 부모의 생활은 아이들의 도덕의식에 대한 심각한 폭력으로 작용한다. 셋째, 과도한 기대이다. 자녀를 향한 빗나간 사랑은 아이의 능력을 뛰어넘는 과도한 기대를 갖게 만들고 결국 관계의 파괴를 가져온다. 과도한 징계와 폭력, 폭언 등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상처로 남아 아이들의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소극적인 것인 잘못이라면 적극적인 잘못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인격적 승복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붙들게 하셨다. 이처럼 모든 가르침은 반드시 사랑을 받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다. 자녀를 양육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오래 참으심으로 돌보시고 가르쳐 주신 것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해야 한다.
Ⅲ. 적용과 결론
자녀는 여러분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특별하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자녀를 주실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달라는 부탁을 함께 주셨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며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양육하여야 한다.
자녀를 이렇게 키워라
엡 6:4 / 이성렬 목사
『서론』
미국의 어느 대학교의 대학원 졸업식을 앞 둔 어느 날 오후에 미국 학생 중의 한 사람이 기숙사 학생들의 방을 찾아다니면서 “나는 작년에도 낙제를 하여 졸업을 못하였는데,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금년에도 학점이 미달되어 함께 졸업 못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라며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 한 명이 이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다 못해 그 미국 학생을 멸시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못해 몇 년 동안 낙제를 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졸업하는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축하인사를 하는 그 학생이 어딘가 좀 모자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졸업식 날 안내를 하며 졸업식 순서지를 나누어주는 재학생들과 함께 그 낙제생이 봉사를 하면서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축하합니다” 하면서 인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그를 멸시하던 한국 유학생은 마음 속으로 “용서해 다오. 그대가 승자요. 나는 석사학위를 그대에게 양도하노라”며 입 속의 말을 곱씹었다고 합니다.
우리네 풍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 됨의 모습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얼마나 많이 알고 가지느냐 하는 소유 지향적인 인간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존재, 사람됨의 뚜렷한 방향설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고, “누구를 배우고, 닮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집약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상급이요, 기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시127:3) 부부 사이에 사랑의 열매로 태어나는 것이 자녀이며, 부모의 분신으로 태어나는 것이 자녀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녀를 버리는 비정한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는가 하면, 부모를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패륜아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정이 붕괴되고, 가족 관계가 파괴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원인이 방향 설정이 잘못된 교육의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의 로마의 가정은 아버지가 가족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혹독한 벌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거나 내다 버릴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바울은 부모와 자녀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는데, 본문은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을 통해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론』
Ⅰ.첫째,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첫째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 4절 상반 절을 보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비들아’라는 말은 아버지만을 가리키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비들아’라고 표현한 것은 아버지는 가정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자녀 교육을 책임지는 대표자도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아버지는 가정에서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졌으며, 가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가정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아비들’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라는 말은 부모가 자녀를 분노케 하는 태도나 말, 행동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정도 이상의 엄격한 훈련, 비합리적인 요구, 권위의 남용 등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며, 자녀의 실제적인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2.둘째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는 그 첫 번째 이유는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라고 맡겨 주신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이어갈 기업으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하는 청지기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낳았기 때문에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소유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방향이나 방법보다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과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어 대리 만족을 느끼려고까지 합니다. 한 마디로, 자녀를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외에, 학원에, 개인교습 등으로 자녀를 몰아붙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의 자녀로 만들려고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모의 욕심 때문에 자녀들이 정신적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비합리적인 요구 때문에 자녀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기 중심적 사랑에 빠지면 안 됩니다. 자녀들도 자신들의 삶과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녀를 소유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절대적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청지기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신 인생을 실현하도록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어 대리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자기 중심적 사랑에 빠지면 안 됩니다.
부모가 자기 중심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기 자녀를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과 자꾸 비교하게 됩니다. 자기 자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재능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녀는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월등하게 앞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게 하고, 심지어 열등감을 갖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격려하고, 자신감과 용기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결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부담감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들이 자기 중심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자녀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만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린 자녀라고 할지라도, 부모와 동일한 인격적 존재입니다. 때문에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인격적 존재로 대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대할 때 한 인격으로 그들을 대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로 하여금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자녀들이 가정 폭력의 희생물이 되고 있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권위 행사로 자녀들이 평생을 두고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무관심과 방치, 자녀 유기는 물론이고, 자녀의 잘못을 훈계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폭력까지 휘두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격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과잉 요구, 비인격적인 요구들을 삼가야 합니다. 자녀들의 잘못을 마땅히 징계해야 하지만, 폭력이 되어서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없으면 자녀들이 부모를 욕되게 만듭니다.(잠13:24, 22:15, 29:15) 그러나 책망 속에서 부모의 화풀이 식의 꾸지람은 오히려 자식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는 결코 부모의 감정을 쏟아 놓는 휴지통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입힌 상처는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부모에게 돌아온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골3:21을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대한 자신들의 권한을 남용하여 지도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실패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이 반발심을 가지고 어긋나는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징계할 때도 사랑으로 하는 징계가 되어야 하며, 자녀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기보다는 자녀들의 개성과 취미에 따라 재능을 개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Ⅱ.둘째,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1.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으로 그 책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부모가 아니며, 자녀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 준다고 해서 부모가 아닙니다.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게 한다고 해서 부모의 책임을 다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 준다고 해서 부모의 책임을 다 한 것도 아닙니다.
마땅히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쳐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할 길을 알게 하지 못한다면, 부모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은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에게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양’(paideiva)이란 말은 훈련이나 교육을 동반한 책망을 의미하며, ‘훈계’(nouqesiva)라는 말은 말로 하는 교훈이나 교정(矯正)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의 교양과 훈계’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신앙으로 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은 부모는 자녀를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인다운 행동 양식을 가질 수 있도록 신앙으로 훈련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질 수 있도록 잘못된 것을 교훈 하여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마땅히 행할 길이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어머니들은 임신을 하게 되면, 바로 성경을 가지고 태교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성경을 날마다 암송하고 낭독하여, 그 말씀이 아이에게 전달되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귓가에 성경을 읽어줍니다. 또한 아이가 말과 글을 알게 되면, 하루동안에 일정한 분량의 성경을 읽게 하고, 반드시 암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18세가 되면, 율법에 대한 시험을 보는데, 율법의 중요한 것은 아주 암송하고 통달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날, 유대인 랍비인 벤자이카는 웨스 파샨 장군을 만나서 교육의 도시인 아브레만은 남겨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벤자이카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버리고, 영토와 주권이 송두리째 박탈을 당한다 할지라도, 교육이 계속되는 민족은 언젠가는 역사에서 재기할 날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민간 교포들의 65%가 자녀교육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녀교육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녀교육에 성공한 요소는 선민공동체, 가족공동체, 예배공동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학교나 어떤 교육기관이나 교육제도를 통한 교육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가 교육이 되고, 특히 가정은 교육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의 교육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철저히 종교교육으로 시작되는데, 생후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름을 지으며, 40일이 되면 어린양을 잡아 번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쉐마인 신6:4-9, 11:13-21, 민15:37-41을 암기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세계의 영광이라고 자랑하던 로마인들이 ‘유대 아카프다’, 즉 “유대인을 잡았다”는 뜻이 새겨져 있는 승전기념 동전을 만들어 노래하고 춤추며 즐길 때, 유대인들은 망국의 비참함을 씹으면서 저들의 자손에게 율법을 교육하였던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교육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이나, 유대인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람아메드’, 즉 ‘배우는 백성’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일방적으로 교육하려고 하지 말고, 그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공동체 의식을 길러주며, 올바른 행동 규범을 가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학교생활 못지 않게 신앙생활이 중요함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어, 신앙 자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훌륭한 인격을 소유할 수 있도록 성장에 따른 갈등과 고통에 대해 좋은 상담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특히 부모는 자녀의 거울임을 알고, 자녀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그 모델로 삼기 때문에 부모가 처음부터 경건한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하며, 화목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이 주 안에서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22:6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의 교양과 훈계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성장한 후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어릴 때 예수를 믿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회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예수를 믿은 사람은 한때 곁길로 빠져 세상으로 나아갔다고 할지라도, 연어가 먼바다로 나갔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처럼 다시 돌아오는 확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철저히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쳐야 합니다.
4-5세 가량 된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산만할 뿐 아니라, 무례하고 불손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버릇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가정교육이 안 되어 있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여자아이는 한 부인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기도 하고, 어떤 신사의 무릎으로 기어올라가 안경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엄마는 어떠한 주의도 주지 않았습니다. 여자아이가 조금 전에 신문을 빼앗았던 부인의 목 근처를 손으로 쳐도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아이의 행동에 당황한 부인이 아이의 엄마에게 아이를 꾸짖어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젊은 엄마가 흥분된 목소리로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난 권위의식 있는 부모가 아니에요. 내 아이를 권위적으로 기르지는 않을 거란 말이에요! 우리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세요”라며 소리를 쳤습니다.
바로 그때 대략 열 아홉 내지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엄마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자유 분방한 옷차림과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갑자기 아이 엄마의 얼굴에 침을 탁 뱉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청년의 무례하고 우악스러운 행동에 대해 몹시 분개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버릇없는 놈 같으니! 내참 기가 막혀서, 너 같은 놈은 당장 고발해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 내가 지금 당장 차장과 경찰을 불러 너를 끌어낼 테다. 두고보자.” 그러나 청년은 아이엄마의 흥분한 협박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픽 웃기만 했습니다. 그것을 본 아이의 엄마는 더 화가 나서 심한 욕설을 퍼부어 댔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점점 더 크게 웃으며, 빈정거리는 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도대체 뭘 원하십니까? 왜 나에게 소리지르는 거예요? 나도 역시 권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 내 멋대로 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청년의 말을 들은 아이의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범죄자들의 상당수가 가정교육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치 못하고 결함이 있는 부모, 범죄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부모, 자녀에 대하여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서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자녀에 대하여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도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정교육이 범죄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만약 가정에서부터 이런 교육이 되지 않는다면, 그 가정은 미래의 범죄자를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양육하라’(evktre,fete)는 말은 ‘성숙하도록 키운다, 장성하기까지 키운다, 훈련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은 자녀들이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하도록 주의 교양과 훈계로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오직’(ajllav)이란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인데,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지만 반드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은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22:6의 ‘가르치라’는 말은 ‘훈련하다, 연단하다’는 뜻인데,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말은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들에게 훈련을 시켜 몸에 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들이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주의 교양과 훈계로 훈련하고 연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훈련하고 연단을 하면, 성장한 후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현대교육의 목표는 철저히 기능인을 만드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화 교육에 실패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사람보다 일등 하는 사람, 인간미를 가진 사람보다 유능한 사람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능인간이 되게 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은 되어도 인격 형성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돈을 벌면 타락하고, 부유해지면 동물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학교에서 지식을 많이 배우기만 하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하게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 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제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인격이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실패하고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고상한 인격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형성된 신앙인격이며,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서 살아가는 사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철저히 하나님 경외를 가르쳤습니다. 유대인 부모들은 지금도 자녀들이 침대에 잠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들려주어서 마음 깊이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어릴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지면, 인생 전체가 실패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을 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녀를 기업으로 주신 것도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도록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녀들을 성숙한 신앙인격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훈련하고 교육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이어가는 가정을 세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철저히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 지식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먼저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가 잘못 되어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하는 것보다 세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적으로는 유능한 기능인간은 되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청지기 사명을 잘못하여, 자녀들의 영원한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녀를 사랑할 줄 아는 현명한 부모라면, 그 자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되도록 가장 먼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양육이 곧 신앙입니다
엡 6:5 / 김철현 목사
고전에 속하는 부자 시리즈 중에 하나가 목욕탕 시리즈입니다. 뜨거운 물에 먼저 들어간 아버지가“어어 시원하다. 어서 들어와”하면 그 말만 믿고 뜨거운 물에 들어 선 아들이 놀라서 튀어 나오면서 하는 말이“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몇 년 뒤에 똑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어 시원하네. 너도 들어와라”하는 아버지의 말에 발을 디밀었다가 화들짝 놀라 튀어 나오면서 하는 말이“그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네!”하더랍니다. 왜 이런 시리즈가 유행되는지 생각해 보면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반영이라고 여겨집니다. 부모와 지식의 관계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화를 통하여 일그러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깊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죄라고 할 만큼 잘못된 것들이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공부하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학력 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물질문명의 편리한 것들이 생활을 이끌어 주기 때문에 굳이 깊이 공부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알고 싶은 정보라는 것도 컴퓨터를 뒤지면 인터넷을 통해서 금방수집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인간의 가치를 물어보고 땀 흘리며 수고하는 가운데 지혜를 얻는 그런 공부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천하지 않는 죄입니다. 아는 것은 있는데 그 아는 만큼 행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득이 하다는 말로, 혹은 약한 인간이라는 변명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생활에 옮기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말은 많고, 비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데 비하여 행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 이것이 죄라고 할 만큼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 큰 죄라고 합니다. 남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자식들에게도 가르치지 않아서 세상을 이기주의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됩니다. 상식이든, 교양이든, 특별히 신앙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선하게 살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알아서 하겠지 하고 마냥 내버려두는 것은 악하게 살아가도록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가정일수록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을 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 교육의 근본은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하여 오늘 성경본문이 명쾌하게 답하고 있습니다.“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말씀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한절입니다만 이 짧은 말씀에 아주 중요한 교육의 지침이 들어 있습니다. 무심히 지나지 말고 가르침에 있어서“무엇을?”.“어떻게?”라는 구체적인 교육방식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봅시다. 무엇을 가르치라는 것입니까? 주의 교훈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르치라고 합니까? 훈계로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단순한 가르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양육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가르친다는 것과 양육한다는 말은 그 의미에 있어서 좀 다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식을 전달하고 나면 끝입니다. 그가 배운 것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 배움으로 무엇을 하느냐까지는 책임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육이라는 말은 가르친 후에 그가 그 배운 것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 나가는지 까지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즉 그의 전인격적인 부분까지를 세밀히 살피고 도와주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양육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가르친다는 말보다 양육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책임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마디 툭 던지는 정도의 교육이 아니라 그의 삶을 돌봐 주며 하시라도 바르게 자라도록 관심을 놓지 않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양육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그런데 실제적으로 양육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경험만으로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 우리의 경험, 우리의 지식으로 얼마만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금방 끝나버립니다. 양육이라는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잘 보살펴 자라게 한다는 계속적인 의미가 있는데 아무리 우리의 자식이지만 우리가 잘 보살피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부모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잘 보살피려고 하지만 그 사랑만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교훈으로 가르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먹이는 일이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밖에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라게 하실 텐데 그 전에 우리에게 부탁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말하자면 먹이는 일입니다. 한 인격이 온전히 형성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먹이는 일, 가르치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요,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먹이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아무리 줘도 받아먹는 데는 각각입니다. 그래서 고민이요, 힘든 겁니다. 아이들이 각각 다릅니다. 아무리 형제요, 심지어 쌍둥이라도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자세도 다릅니다. 하지만 부모 된 도리로써 반드시는 먹이는 일, 즉 가르치는 일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출생 순위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흥미롭습니다. 출생서열, 즉 맏이나 막내냐에 따라서 성격이 좌우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의[프랭크 셀러웨이]연구원은 성별, 인종, 민족, 계급보다 출생순서가 성격형성에 더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을 담은<태생적 반항>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에 따르면 맏이는 대체적으로 부모의 권력이나 권위와 동일시하며 독단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을 보이는 반면 둘째나 셋째는 체제와 권위에 맞서는 혁명적 성격으로 흐르기 쉽고 그 확률은 맏이보다 최고 열다섯 배까지 높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격형성의 배경에 부모의 사랑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 있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둘째나 셋째 등은 약세로 출발하기 때문에 서열이라는 체제에 이의를 품고 자연히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맏이들은 포용력이 강한반면 둘째나 셋째로 갈수록 참지 못하고 괴팍스러운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모든 것이 다르지만 자식이기에 우리는 가르쳐야 하고 먹여야합니다.
자, 그럼 보겠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먹이라는 것입니까? 주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주님의 말씀 혹은 주님에 관한 말씀이 교훈입니다. 내 지식, 내 지혜, 내 마음, 내 경험에서 나오는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가르치고 먹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52절에는 기독교 교육의 기본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입니다. 키가 자라는 것은<체육>입니다. 지혜가 자라는 것은<지육>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워 가는 것은<신앙>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는 것은<도덕>입니다. 이런 네 가지 측면으로 우리는 자녀들을 가르치고 먹여야 합니다.
<체육>적인 면을 생각해 봅시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육체적인 것은 중요합니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영양을 공급해야 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영향이 될 수 있도록 잘 먹여야 건강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가 아니라 먹어야 할 것을 먹도록 해야 합니다. 육체에 해로운 것, 이로운 것을 잘 선별하여 먹이는 것이 곧 교육이요, 양육입니다.
<지육>적인 면을 생각해 봅시다. 육체적으로 먹이는 것 못지않게 정신적으로는 많은 지식을 주어야 됩니다. 들어야 될 것은 듣게 하고, 보아야 할 것은 보게 하고, 경험해야할 것은 다각도로 경험하도록 해서 지능이 발달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듣지 않게 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게 하며,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은 자제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야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수다스러운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아이의 I.Q.가 높다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가 자꾸 말을 하니까 아이의 생각도 많아져서 뇌가 발달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깁니다. 어쨌든 아이들을 유익한 것에는 많이 듣게 하고 보게 하고 경험하게 하고 무익한 것에는 둔감하게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면을 생각해야합니다. 가장 우선적인 종교적인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부모로서 신앙적인 경건을 보여 줘야 되고 영적인 기도를 가르쳐야 됩니다.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 나가야 합니다.
<도덕>적인 면은 어떻습니까? 사실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랑스러워지는 정도라면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인정받게 됩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신앙적인 면은 괜찮은데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 도덕적인 면을 너무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인격이 균형을 이루도록 잘 가르치고 교육하는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교훈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자라 가셨던 모습보다 더 훌륭한 교훈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육의 가장 기본을 눅2장 52의 말씀에서 찾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이렇게 가르치고 먹일 때에 하나님께서 길러주실 것입니다.
자. 그럼 어떻게 교육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훈계로”하라고 하십니다. 훈계라는 말을 사전에 보면“타일러서 잘못이 없도록 주의를 주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훈계로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말은 가르침의 마지막, 교육의 마지막은 반드시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육의 결말은 잘못되지 않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 말입니다. 가르치면서 잘못되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 배워서 나쁜데 써먹으라고 하는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 마지막은 우리가 알지 못할뿐더러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키워가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양질의 것들을 먹을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이 양육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낳는 것에도 고통은 따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간다고 하는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젭니다. 긴 노력과 수고와 희생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욕심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마지막이 잘못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신앙의 길입니다. 믿음이 그 생의 마지막까지를 책임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교육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시렵니까? 부모 된 우리가 먼저 선행의 본을 보여주고, 진실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봉사를 보여주고, 특별히 섬기는 본을 보여줘야 합니다. 섬기는 생활 속에서 기뻐하는 그런 생활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때 이것이 곧 교육이 되는 것이요, 자녀들이 이 모습을 닮아가는 속에 양육되어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먹고사는 것이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삽니다.“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자녀의 양육이 곧 부모 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크리스챤의 자녀교육
엡 6:4 / 조민수 목사
1. 자녀교육의 문제점
(1)가정의 부재입니다.
오늘날 집은 있으나 가정이 없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세대차이와 사고방식의 차이들은 많은 갈등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평화롭고 사랑이 깃들어야 할 가정들이 갈등과 상처를 지닌 채 그저 하숙집, 숙박업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가정이 없어진 가정’이 너무나 많이 생겨서, 오늘의 자녀들이 어둠의 세력에 몰리게 되고 악한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2)가정 신앙교육의 부재입니다.
크리스챤 부모들은 당연히 자녀에게 신앙을 가르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이 신앙교육을 시키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고,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하겠다는 세속적인 생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키워야 합니다.
(3)자녀들에 대한 교육의 방향과 목표가 상실되었습니다.
크리스챤 부모들은 자녀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살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소유한다면 그 자녀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물질은 자녀들을 더욱 불행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는 성경의 원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교육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엄격하게 자녀들을 다스리고 어머니는 온유함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품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적절하게 나타날 때 올바르게 자녀를 교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아버지에게 자녀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기독교 교육의 방법
(1)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 말은 자녀로 하여금 화를 내지 않도록 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이 화를 낼 때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격이 거칠어지고 과격해지고, 가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밖으로 나돌게 되고, 결국은 불건전한 오락과 불량한 친구들 때문에 악한 길로 빠지기 쉽게 됩니다. 격동기의 청소년들은 자칫 큰 사고를 낼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면 부모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이 형성되기 쉬워 사회성이 약화되고, 대인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2)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님이 생활에서 본을 보여주어서 자녀들을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닮아갑니다. 부모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자녀들을 말씀을 읽고 기도하게 됩니다. 부모가 온유하고 정직하면 자녀들도 온유하고 정직해집니다. 우리가 먼저 자녀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3)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훈계는 징계로 연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무신론 철학으로 자녀들에게 채찍질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자녀들에게 칭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거부합니다.(잠13:24,22:15)
우리가 자녀들을 너무 예뻐하고 원하는 대로만 해주면 자녀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또한 채찍 없이 자란 아이들이 서로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서 결혼하니 부부간에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징계할 때 우리의 자녀들이 잘되고 훌륭한 신앙의 사람들로 자랄 줄로 믿습니다.
3. 징계의 중요성
하롤드는 “Train Up a Child”에서 징계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1)징계는 아이에게 행복과 소속감을 주고 적응력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구속하는 것 같고 한계를 지어주는 것 같지만 거기에 참 행복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이 징계를 받음으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바로 알게 되어 참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2)징계는 한계를 지어주어 안정감을 갖게 합니다.
자녀들을 징계할 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가르쳐주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한계를 깨닫고 안정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징계를 하지 않으면 그 한계를 알 수가 없어 제멋대로 살게 되고, 결국은 불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
(3)징계는 순종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죄성은 악한 의지를 동반합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징계를 통하여 악한 의지를 꺾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의지가 계속 자라게 되어 어른이 되어서는 더욱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4)징계는 분별력을 주어서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징계는 자녀에게 분별력을 길러줍니다. 징계를 받은 자녀는 인생에서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징계하지 않으면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5)징계는 책임감을 갖게 합니다.
4. 그러면 어떻게 징계해야 되겠는가? (훈계의 지침)
징계한다고 걸핏하면 자녀를 때리고 자녀에게 고함질러서는 안 됩니다.
(1)자녀에게 행동의 한계를 분명히 지어줘야 합니다.
(2)부부간에 서로 동의하여 자녀를 징계해야 합니다.
(3)징계는 아이와 단 둘이 있는데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징계하면 그 아이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고 인격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느낍니다. 징계할 때는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징계시에는 단호하고 엄격해야 합니다.
(4)징계할 때 과거의 허물을 들추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다 용서하고 오늘 당면한 문제만을 가지고 징계해야 합니다.
(5)징계는 엄격하고도 부드럽고 조용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징계 받는 이유를 알려주고, 징계 이후에 그것을 용서해 주고, 품에 안고 기도해줘야 합니다.
(6)징계 이후에 다시 동일한 잘못을 하면 다시 징계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합니다.
(7)사랑과 징계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무조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감정과 기분으로 아이를 징계해서도 안 됩니다. 기분 나쁘다고 해서 고함을 질러서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좋은 학교입니다. 최고의 교사는 부모이고, 최고의 아름다운 교육의 장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세속주의 교육에 치중해서 믿음을 떠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아서 앞으로 어두운 사회를 밝히는 신앙의 사람들로 성숙하기를 축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2 /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본문은 에베소서에 기록된 본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이고 또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한 몸 교회가 되게 하신 경륜이 무엇인지를 밝혔습니다. 마치 웅장한 노래처럼 들리는 이 1장에서부터의 4장의 교리적인 내용들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흐르는 교향악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부분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위대한 경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수단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진 이 세상을 온전히 회복하시고 완성하시는 그 날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향기요, 또 편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목회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노래한 후에 사도바울은 5장에서 그 포커스를 교회에 초점을 맞춘 다음 우리가 성도로서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무엇이고 교회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6장에서는 가정과 세상과 그리스도인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다루는 것이 가정과 가족들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편지의 구성으로 볼 때, 우리 가족들과의 관계와 가정생활이 교회의 영광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과 가정 안에서 진정한 구성원이 되어 가는 것이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고 하였습니다. 이 서신이 불신자들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서 구원을 받아 성도라 일컬음을 받는 무리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라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녀들은 예수를 믿는 자녀들이며 부모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경건한 부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II. 공경한다의 의미
A. 존경을 드림
‘공경한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존경을 드리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야레’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옮겨진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은 바로 공경입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존경한다는 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어떤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무겁게 생각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서 스스로 머리를 숙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을 향한 존경입니다. 즉, 우리와 같은 인격적인 인간이 영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땅한 칭송을 드리고 인정을 하는 것이 바로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를 공경하지만, 존증 하는 마음으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고생하며 살아와서 불쌍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적선적인 효도입니다. 성경은 존경함 없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방식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무엇인가 칭송할만한 장점이나 뛰어난 덕성이 없고 일평생 자식에게 상처만 준 부모라면 어떻게 이러한 존경을 드릴 수 있습니까? 부모를 존경한다는 것이 부모가 가진 영광에 대한 굴복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원리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람됨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가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아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마땅히 인정해야 할 부모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창조의 질서이고 종족의 보존과 번식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하나님 앞에 부여 받은 원리적인 영광입니다.
또 다른 영광은 실제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다른 부모들과는 다른 그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자식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영광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다른 사람보다 재산이 많다면, 자식들은 유산을 바라보며 서로 모시겠다고 하며 싸울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실제적인 영광은 영광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효도를 받아낼 뿐입니다. 부모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을 만한 덕성을 지니게 될 때 자식은 스스로 그 부모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영광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부모가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며 누가 보더라도 공경하고 영광스럽게 인정해 줄만한 장점을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면 어떻게 존경을 드리는 공경에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가슴에 분명히 새겨 두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타인에게로 가거나 혹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랑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해서 우리를 통과하고 우리가 사랑한 대상들도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회기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끊임없는 고통을 주었던 부모를 공경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요? 부모의 결점을 보고는 부모와 화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이 편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괄호 속에 들어갔다고 치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므로 자녀들아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너희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과 비교될 수 없는 큰 사랑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자식들이 아니냐, 그러니 네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왜 이렇게 상처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남들이 모두 누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과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산산이 찢어진 고통 속에서 어린 날들을 보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상처받은 가정에서 불신자인 부모에게 신앙의 박해를 받으며 부모들의 나쁜 습성과 타락으로 아이들의 마음에 못을 박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구약의 다윗 왕은 고백하였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부모로부터 우리가 버림 받은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계기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독실한 신앙의 재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모든 삶은 전적으로 우리 주님의 주권에 있고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어도 하나님 앞에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와 아픔이 남이 맛보지 못한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남은 상처와 많은 고통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올무가 되어 우리를 찌르고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슬픔과 비극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잘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매 순간 의지하며 부모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에 집착하는 대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를 기억하며 끊임없이 나를 십자가에 목 박고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B. 깊이 사랑함
공경한다는 말의 다른 의미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여 죽어 가시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이 미래에 당할 끔찍할 형벌을 염려하시며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비셨습니다. 바로 그런 사랑 때문에 부모는 우리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셔서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더 아버지 앞에서 순종하며 사랑하며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III. 자녀의 마땅한 의무
부모 공경은 자녀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피 흘려 죽기까지 십자가에 목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못준 사랑까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이 우리에게 모두 주셨기 때문에 부모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운데는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님 밑에 자라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이라면 그 부모님을 더더욱 깊이 존경하고 하나님께 갑절이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머리를 깎아서 부모님이 신으실 신발을 삼아도 모자랍니다. 여러분들의 살가죽을 벗겨서 부모님의 옷을 지어드려도 모자라고 온전히 그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그 부모를 공경하는 대의를 우리의 자식들에게 가르쳐줌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가정의 대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그런 종자 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011-05-08
믿는 부모와 자녀
엡 6:1-9 / 박조준 목사
오늘 부모님 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믿는 부모와 자녀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 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 : 1 - 3) 하 였습니다. 효도는 모든 사회 도덕의 기초가 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를 잘 몰라서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실 기독교 이상 윤리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기독 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윤리 를 떠난 기독교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윤리를 떠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사 교입니다. 가령 우리 기독교의 강령이라고 볼 수 있는 십계명을 보세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낸 계명이 먼저 4계명까지이고 그 다음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인데 그 첫째가 무엇입 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 한 것입니 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해야 할 계명 중에 첫째 계명입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합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생활양식도 달라집 니다. 풍속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은 변하지 아니합니다. 마 찬가지로 도덕의 법칙도 변하지 아니합니다. 말하자면 부모에게 자녀가 순종하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은 도덕법칙 가운데 제1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맺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면 형제를 만나기 전에, 자매를 만나기 전에 제일 먼저 만나는 분이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옳게 가져야 형제와 이웃, 나아가서는 나라와의 관계도 옳게 가질 수 있습니다. 옛말에 충신을 찾으려면 효자의 문에서 찾으라고 했는데 옳은 말이라고 생각 합니다. 부모 잘 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나라 사랑할 줄도 알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도덕을 간추려 말하면 삼강오륜입니다. 요즘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어느 대학에서 입학시험에 삼강오륜이 무엇인가? 고 물었더니 수많은 학생들이 삼강은 압록강, 한강, 낙동강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삼강에는 제일 먼저가 부위자강(父爲子綱)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했습니다. 오륜에 도 제일 먼저가 부자유친(父子有親)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 니다. 이렇게 모든 도덕이 효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효도를 말하지 아니하고 도덕을 말하는 것 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으로 그 당시의 부도덕한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 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 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 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 이 행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성경에 주 너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하나님께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 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매달 월급을 받는 생활을 한다면 월급받는 날 제일 먼저 십일조를 떼어놓고 부모님께 드릴 용돈 갈라놓고 그리고 저금하고 그리고 애들 학비 쓰고 다른 것들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 공경은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에는 부모 뿐만 아니라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 - 2절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했습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에서도 제5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제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 속한 지위와 인륜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 고 행할 일을 행하라는 뜻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사회 질서가 유지됩니다. 이것이 없을 때 사회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에게 순복할 때 가정의 질서가 섭니다. 학교에서 학생들 이 선생님의 말씀을 순복하고 선생님을 존경할 때 그 학교의 질서가 섭니다. 어느 기관이나 단체 에서 책임자를 존경하고 그 지시에 따를 때 그 기관과 단체의 질서가 섭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 니다. 모든 국민이 국법을 존중히 여기고 그 법에 순종할 때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 니다. 더구나 효도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참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데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부모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나아야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경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하였습니다. 어떤 아버지 어머니는 얼 굴이 몹시 상해서 왜 그런가고 이유를 알아보면 그 아들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해서 저렇게 되었다 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청년 여러분, 자녀된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쁘시게는 못해드릴 망정 속을 썩혀 드리지는 않았습니까? 나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가 나 몰래 눈물 흘리 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이 자리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계시리라 믿습니다. 또 그런 분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잠언 23장 15절에 보면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부모의 기쁨입니다. 어떤 아들이 지혜로운 아들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녀입니다.
요한 3서 3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 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했습니 다. 믿는 부모의 기쁨은 자녀들이 돈 많이 벌었다는 것보다, 세상에서 출세했다는 것보다 믿음으 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도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그래 서 사도 바울은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떤 계획을 하나, 무슨 일을 하나,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면서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을 내가 믿음으로 하나?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내 생각대로 하나? 하는 것을 살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우리 믿는 사람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 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착한 행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비취게 하 면 결국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빛된 생활 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는 영광 대신 욕이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 어떻데 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다시 말 하면 믿음으로 살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그대로 살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고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 하나님께 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학교 당국에서 부모님을 뵙기 원하는 때가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하고 생활이 단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될 때 선생님이 이 학생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 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셨나? 해서 격려하고 치하하기 위해서 부모님을 뵙자고 하는 때입니다. 이 런 때는 학교에 찾아가는 부모의 가슴이 쭉 펴지고 발걸음에 힘이 있습니다. 선생님 만나는 것이 버젓합니다. 혹시 누가 좀 봐주지 않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학교에 찾아갑니다. 이런 때 이 자 녀는 부모의 영광이요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가지 경우는 학생이 공부는 낙제 점수만 맞고 게다가 품행이 좋지 않아 학교에 서 문제만 일으키는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하고 고심하던 선생님이 부모님과 만나서 서로 의 논하고 싶어서 좀 뵙자고 연락을 합니다. 이런 부모님은 어떻습니까? 학교에 찾아가기가 부끄럽 습니다. 발걸음에 힘이 없습니다. 혹시 누가 아는 사람이라도 있다가 만나서 어떻게 오셨어요?
물을까봐 누가 볼새라 몸을 숨겨가며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 가서 교무실에 들어서면 선생님 만 나기가 왜 그렇게 부끄럽고 죄송한지 경찰관 앞에 선 범인 같습니다. 이런 때 이 자녀는 부모의 수치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자녀들은 모두 부모의 영광이요 자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우리 온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예수 님도 순종하는 자녀 노릇을 했습니다. 지금도 순종하는 아들로 사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는 행복한 자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가 옳을 때 순종하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비록 너희 부모가 그릇되더라도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부모 의 그릇된 명령이라도 순종하는 자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빛 가운데 거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보다는 순종하는 편이 가정의 화평과 부자간에 신의와 애정을 심어주는 것 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부모는 자녀들을 정당하고 올바르게 그리고 아주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도록 힘써야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인간이며 따라서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더구나 저들은 대부분 정신 적으로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부모가 됩니다. 지혜도 부족한 상태에서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러 므로 부모의 판단과 결정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결정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책임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만일에 이 계명이 다른 계명과 모순된다면 하나님은 돌파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부모라고 하더라도 그릇된 결 정을 하거나 잘못된 명령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부모는 그 잘못 을 고백하고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된 사람들은 이로 인해서 부모의 권위가 손상되고 하락될 것을 우려하는 가운데 고집 부리지 말고 자녀에게 진정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 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란 완전한 것을 보여주는 부모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권위를 받아들이 는 우리 자녀에게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진정한 권위는 우리 뒤에서 그것을 지지해 주는 사람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권위는 자녀에게 저들을 권위로 세워주신 하 나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잘못을 저지를 때 내가 만일 이것을 시인하면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 지 말고 내가 만일 이것을 숨기고 이것을 속이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자 문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자녀와 부모에게서 정직하고 솔직한 회개를 좋게 여기십니다. 자녀 에게 잘못을 시인한다는 것은 부모의 신분과 권위를 상실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마귀의 속임수입 니다. 사실은 부모의 권위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정직하고 솔직할 때 굳게 강화됩니 다. 부모의 권위는 저들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에게 주신 권위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믿기가 어려운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 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 어야 합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순종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탁상 공론하는 이론가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친히 함께 하십니다. 자녀된 여러분, 우리 부모에게 순종하십시다. 이것이 우리 자녀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 획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할 때 여러분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 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예수님의 임재와 축복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 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부모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세 가지 기본 명령, 다시 말해서 사랑, 훈계, 가르침 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 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우리 부모된 사람은 모든 자녀가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어떤 욕망과 야심을 자녀에게 씌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기 자녀의 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의도한 생활의 일면을 드러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때 자녀에게 막대한 고통과 좌절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러므로 부모는 내가 내 자녀를 바로 가르치고 있는가? 되풀이해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내 가 르침이 이 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있을까? 생각하곤 하세요. 여러분,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를 낳 도록 위임 받았으며 일정 기간 동안 교육을 시키고 양육할 책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들의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 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잘 지도하십시오.
우리 자녀에 대한 가르침은 철저한 교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밥상에서 밥먹는 몸가짐에서부터 시작해서 작은 일 큰 일을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훈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를 훈계할 책임이 있다고 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에 따라 자녀를 훈계하면서 키운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허락하심과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그의 아들들을 훈계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의 집에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사무엘상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 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 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였습니다. 부모의 책임이 이렇게 큽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훈계를 바로 합니다. 잠언에도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 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한다 고 했습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이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한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특별 히 돌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녀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시간임을 가리 킵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쓰지 않고도 우리 자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바치지 않고는 우리의 사랑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부모가 저희 주머니를 털어 가면서 자녀에게 물질의 사랑은 보여주면서도 진지하게 눈과 입과 귀로 느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의 사랑에는 외 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일이면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가 없어집니다. 오늘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 그가 장성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하십시오. 아버지들은 그들의 돈이 아니라 시간을 자녀들에 게 바쳐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된다는 것은 두려운 책임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의 수행을 도우라고 분명히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여러분, 자녀를 가르치고 훈계하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 에게 축복을 안겨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자녀는 자라서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고 주님에게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이 여러 부모님과 자녀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1-9 / 박조준 목사
구약 출애굽기 20장 12절을 읽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 중에 다섯 번째 계 명입니다. 부모 주일을 당해서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십계명은 원래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우리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루는 네개의 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만 택하고 하나님만 섬기라 했습니다.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바로 알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 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여 주시며 우리와 영원 히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 고 넷째 계명은 주일을 지키는 일에 대한 계명인데, 가장 기쁜 날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첫째 돌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여섯 개의 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부 모를 공경하라 는 계명이 약속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십계명은 우리에 게 두 가지 큰 교훈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교훈은 사람이 바로 살려면 종교 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교훈은 종교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당면한 큰 문제는 인간 관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 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묻혀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든 나는 상관없어. 나는 나대로 살 거야 하는데, 사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천성적으로 함께 모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둘려 있지 않으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는 않습니다. 사람은 함께 살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조화 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 다. 그런데, 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우리가 인간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교훈을 배우는 교실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가정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도, 직장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에게 주신 말씀은 지극히 실제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 는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아주 필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인심이 변합니다. 생활 양식이 변합니다. 풍속도 변합니다. 옷 모양도 변합니다. 화장하는 법도 변합니다.그러나 변하는 가운데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절은 변하지 않습니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되고 가을을 보내면 겨울이 닥칩니다. 물론 물이 섭씨 0도가 되면 얼음이 되고 섭 씨 100도가 되면 끊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다시 말하면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 다.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 이와 같습니다. 첫째로, 부모 공경은 도덕 법칙의 제일조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맺는 인간 관계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를 옳게 가져야 다른 사람과도 옳은 관계 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효도는 모든 사회 도덕의 기초가 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특 히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오해입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는 분들은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이상 윤리적인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과의 관계의 정상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사 이에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뭐랬어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 랑할지니라 했습니다. 사실 윤리를 떠난 기독교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도덕을 간추려 말하면 삼강 오륜(三綱五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대학을 진 학하는 학생들도 삼강오륜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에게 삼강오륜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삼강은 압록강, 한강, 낙동강이고, 오륜은 올 림픽을 한문으로 표시한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현실입니다. 여러분, 삼강의 제일 먼저는 부위자강(父爲子綱)이라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했습 니다. 그리고 오륜의 제일 첫째도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다른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효도는 도덕 법칙의 제일조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모든 도덕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쩌로, 부모공경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말씀 은 꼭 부모뿐만 아니라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문답에 보면 제 5계명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제 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속한 지위와 인륜 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행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두려워하여야 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뜻입니 다. 그래야 사회 질서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을 때 사회의 질서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 다. 요사이 우리 사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을 점점 못해 가고 있는 것입니 다. 존경할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에게 순복할 때 가정의 질서가 섭니다. 노아의 자녀는 노아에게 순종했고,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가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역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목사의 자녀가 순복하지 아니할 때 목회 생활에 오는 지장이 얼마 나 큰지 모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학교의 질서가 섭니다.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그 책임자를 존경하고 그 지시에 따를 때, 그 기관이나 단체의 질서가 잡힙니다. 모든 국민이 그 나라의 법을 존중히 여기고 그 법을 준수할 때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라야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에게, 직장에 가면 상사에게 순종하고 사회에서는 좋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렇지 못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사회는 자연히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얼른 볼 때 요사이 미국이나 구라파에는 도덕 질서가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이 아닌 것들이 눈에 띄게 크게 부각되는 것 같지만, 사실 서구 사회는 기독교의 깊은 영향을 받아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리 괴상한 것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지만, 그것은 소수이고 소위 조용한 대중(Silent majority) 이 있기 때문에 서구 사회가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깊이 가정과 사 회에 뿌리박고 있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부모 공경은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십계명 중에 첫 번째 네 계명은 하나님께 신앙적 인 면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섯째 계명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 다시 말하면 믿음 을 가진 사람의 생활의 첫 열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 면에서도 나아야지, 못하게 되면 안 되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은 어린이가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 고 이 말씀은 십대 소년 소녀가 자기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갓 결혼한 청년 부부가 자기들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주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계신 중년들도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말씀을 더 어기고 있습니다. 10대보다 20대가, 20대보 다 30대가, 30대보다 50대 사람들이 더 어기고 있습니다. 자녀 되신 분 잘 들으세요. 여러분 가정에 연세 높으신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날이 언제 인지 아십니까? 부모님의 생신일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그 날만은 특별히 대접을 받고 싶 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생일 잔치 준비를 시키면서 애들아, 내가 무슨 대접을 받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니! 너희가 복 받으라고 그러는 거야 하시면서 생일 잔치 독촉을 하십니다. 가끔 연세 높으신 댁 생신에 초대받아 보면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아니, 나는 그저 지내자고 했는데, 우리 애들이 이렇게 야단스럽게 그러지 뭡니까? 라고 하시면서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아마 자세히는 몰라도 그 할머니는 너무 좋으 셔서 음식 장만하시는 데 간섭하시느라고 한 달 전부터 애쓰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시는데, 자녀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겠어요? 제가 전에 이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요. 목사님, 제 시어머님이 목사님네 교회에 다니시는 데요. 아, 그러세요. 이제 며칠 있으면 우리 시어머니 생신이 되거든요. 네, 그러세요 축하합니 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생일 축하 예배를 드리려는데, 좀 와 달라는 부탁인가 보다 하고 생각 했거든요. 그런데요, 목사님. 우리 시어머님은 벌써부터 생일 준비하시느라 야단이셔요. 그러시 겠죠. 그런데요. 그런데요 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게 아무래도 무슨 어려운 말을 하고 싶은 눈치 예요. 목사님, 교회에서 노인들 생일 잔치하지 말라는 설교를 좀 하실 수 없으세요? 왜요? 형편 이 허락치 않는데 저희 시어머니는 벌써부터 친척, 친구 다 몰아 오신다고 야단이시거든요. 그 러세요. 가정 형편이 그렇지 못하거든요. 저는 속으로 너무 가난해서 전화나 겨우 놓고 사는 댁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 다. 애기 아버지는 무슨 일을 보시는데요? 우리 아빠는 아무 회사의 중역으로 있어요. 그러시면 생활해 나가시는 데는 괜찮으시겠어요. 그렇지요. 상류는 못 돼도 중류 이상은 돼요.
그러시겠 어요.그런데 애 아빠와 의논해 보셨어요? 우리 그 이는 그저 가만 있어요. 그럴 것 아니겠어요. 부인과 어머니 사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그런 부인 얻은 게 한심하지요. 오늘 우리 주변에 이 와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가 부모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 자녀가 나이 들면 우리를 대하 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인생을 다루는 방법으로 우리를 다룹니다.야곱이 젊어서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랬더니 야곱이 늙어서 그 자식에게 또 속았습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부모를 등한히 하기가 쉽습니다. 옛날부터 내 리사랑 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지만 부모를 위해 쓰는 것은 아까울 수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허리가 끊어지는 것같이 아프면서도 손자를 업고 수 고했는데, 할머니 등에서 애를 받는 어머니가, 할머니, 얼마나 허리 아프셨겠어요? 하고 말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예쁜아, 다리 아팠지?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흔히 가정에서 커피 끓여 드시면서 젊은이들끼리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빼 놓은 경우는 없 습니까? 경우 있으신 분들은 젊은이들 틈에 일일이 끼여들기가 미안해서, 얘, 나는 커피 좋은 것 모르겠더라. 난 숭늉이면 돼 하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씀은 몰라도 그런 말씀은 액면 그대 로 들으시면 안돼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정말 안 좋아하시는 줄 아세요? 전에 어느 나이 많으 신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입맛이야 젊은이나 늙은이나 한 가지지 하십니다. 늙어도 입맛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젊은이가 맛있어 하는 것은 나이 드신 분들도 맛이 있어 하십니다. 젊은이는 사업하느라고 교제도 하고 그러자니 용돈도 많이 쓰게되지만, 나이 많아지면 뭐 용 돈도 필요 없지 않겠나? 생각하기 쉽지만,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나이 들수록 용돈이 더 필 요하다고 해요. 손자애들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돈을 줘야 할아버지, 할머니 하면서 따른다고 해 요. 나이 들면 아무리 아들, 딸이라고 해도 용돈 달라고 하기가 참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부모님들을 대신해서 말씀드립니다. 미리 알아서 자녀는 부모님께 용돈을 넉넉히 드 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의 길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 믿는 사람만이라도 이 말씀대로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