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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와 하갈의 비유
갈 4:21-31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 4:21-31 /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형제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율법이 정말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십니까? 22) 율법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낳고 또 하나는 부인의 몸에서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은 인간의 육신이 맺어져 낳았지만, 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에 따라 난 아들입니다. 24-25)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우시려고 열어 놓으신 두 길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율법을 주시어 이 율법에 복종하라고 하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어 이 길을 보이셨습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이 시내산을 `하갈산'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여종인 하갈은 유대인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계명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를 따라 가는 유대인들은 모두 다 하갈이 낳은 노예의 자식들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로 율법에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27)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ㄱ) `예루살렘아, 너는 이제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러라! 네가 버림받은 여인의 신세와 비슷하지만 오히려 남편이 있는 여자보다 더 많은 자식을 둘 것이다.' (ㄱ. 사54:1) 28)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이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녀들입니다. 29) 그런데 성령으로 난 여러분이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마치 약속의 아들 이삭이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30) 그러나 성경에 어떻게 적혀 있습니까? 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종의 아들은 자유인의 아들과 똑같이 상속을 받을 수 없으니 여종과 그 아들은 쫓아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ㄴ. 창21:10) 31)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유대교의 율법에 묶인 노예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실 자유인의 자녀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과 ‘복음 아래에 있는 것’의 차이를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21-25) 바울은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을 지칭하면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비유로 율법과 복음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고 한 사람은 자유 있는 본처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대로 여종에게서 아들을 낳았고 자기의 본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지만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 언약 곧 모세의 율법을 말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유대인들이 그 시내 산 언약, 곧 모세의 율법 아래 있으면서 그것을 지키려 종 노릇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28) 그러나 하늘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곳에는 종이 아닌 자유자 어머니 사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성령을 따라 난자들입니다. 율법은 정죄만 있을 뿐 절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이사야 54장 1절의 예언처럼 잉태하지 못한 자요 산고를 모르는 여인이었던 사라는 수많은 자녀를 낳는 기쁨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온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29-31) 바울은 말합니다.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던 것처럼 육신으로 율법을 섬기는 자들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을 박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며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창 21:10). 마찬가지로 율법에 종 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자유를 누리는 것과 그 나라의 유업을 함께 공유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모든 율법주의는 사라져야 하며 그것의 추종자들은 내쫓김 받음이 마땅합니다.
적용: 교회가 전통화, 의식화되면 그것들을 따라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화석화된 습관의 길만 남아 있는데 그것은 무엇들이 있는지 서로 나눠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선 안 됩니다. 즉 내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실력 심지어 내 경건의 능력까지라도 의지하고 자랑하고 교만한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의 믿음이 유지되어야 하겠습니다.
< 설 교 >
두 어머니, 두 언약, 두 아들
갈라디아서 4:21-31 / 김형익 목사
1. 서론: 믿음을 외적 조건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을 외적 조건으로 증명하는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할까요? 갈라디아에 와서 거짓된 가르침을 주었던 유대주의자들은 물론 이 대답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그렇다’(Absolutely yes.)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믿음은 할례를 받았는가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은 율법의 계명들을 그가 지키고 사는가에 의해서도 증명이 됩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갈라디아 교회에만 국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많은 교회 그리고 모든 시대의 교회 가운데 있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믿음을 혹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됨을 외적 조건이나 증거로써 증명하거나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할례, 율법의 순종, 기타 여러 경건의 조항들의 준수와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과연 신앙이 이렇게 기계적이고 외적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답을 하면 하는 만큼 우리의 신앙과 그 가르침은 심각한 오해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정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고 맙니다.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그런 신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빠져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결코 세례를 받았다는 것, 혹은 직분을 가졌다는 것, 또는 열심히 봉사하는 삶이나 기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 것들로 증명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긴장이 존재합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며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이 되게 하라는 말씀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약 2:17~18). 그러나 동시에 그 순종의 행위가 과연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인가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그런 식의 분위기에 젖어있는 두 교회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한 교회는 가르침에 있어서도 매우 율법주의적이었고 생활면에서도 그랬습니다. 또 한 교회는 가르침이 꼭 율법주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생활면에서는 분명히 그런 율법주의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는 이러기가 쉽습니다. 저는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 안에서 신앙에 대한 오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장하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더 바르게 깨달아가면서 배우게 된 것은 남의 믿음을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참 믿음이고,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분별력이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 나쁘다고 할 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판단 기준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종교적 노예가 되려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확신과 은혜와 자유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특별히 갈라디아서를 대하면서 우리가 그런 믿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통찰을 바르게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견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외적 조건?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비록 너희는 직접적 자손은 아니지만, 너희도 그 축복을 누릴 수는 있는데 그 길은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길이다.” 그들이 믿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믿음만으로는 아니고, 믿음 위에 할례와 율법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는 호칭에서 우리는 그가 느끼는 위기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그들은 아직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아래 있으려고 그 쪽이 좋아보이니까 그리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부르면서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정말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깨닫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먼저 22~23절에서 구약의 역사를 소개하고, 24~27절에서는 그 의미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28~30절에서 그 해석을 각 개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가 역사를 소개하는 장면을 봅니다.
2. 역사(22~23)
또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보다, 그가 가졌던 두 아들과 그 두 아들을 낳은 두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이고 각각 두 아들의 어머니는 하갈과 사라입니다. 그런데 그 각각의 이름을 여기서 바로 부르지 않고 ‘계집종’과 ‘자유하는 여자’라고 부릅니다. 의도가 있겠지요.
A.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점
아브라함의 집 안에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두 아들은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었고, 한 집에서 자라났으며, 둘 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표시로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둘의 차이점인데, 첫째는 그들의 어머니가 달랐으며, 둘째로는 태어난 방식이 달랐습니다.
i. 어머니가 다르다(22): ‘계집종’ vs. ‘자유하는 여자’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계집종이었던 반면,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하는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애굽 태생으로서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를 대신하여 이스마엘을 낳아준 여인입니다. 그래도 그녀의 신분은 계집종이었습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한 여인었습니다.
ii. 태어난 방식이 다르다(23): ‘육체를 따라’ vs. ‘약속으로’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태어난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났다는 표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창세기 16장을 거슬러갑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85세가 되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10여년 차이가 나니까 75세 정도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10년이 지났습니다. 이 10년은 단순한 10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25살 된 부부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셔서 10년이 지나도 35세 나이 정도라면 뭐 10년 더 기다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나이에 10년은 이미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야말로 ‘zero’였습니다. 그 때 조급해진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내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기다려서 얻은 아들입니다. 모든 인간적 조건, 자연적 조건이 불가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받은 응답이었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이삭은 정말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지혜, 능력, 시도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B. 이삭은 선물이었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방법 대신 자기 방법으로 시도한 결과였다.
두 아들이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분명히 차이가 존재했습니다.두 아들 중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낳았고 하나는 약속을 따라 그리고 성령을 따라 낳았습니다. 이삭은 선물이었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방법 대신 아브라함이 자기 방법으로 시도한 결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식을 선물이라는 표현으로 종종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부가 결혼해서 자연적으로 낳는 것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자식이라는 엄청난 신앙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자식은 선물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낳은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구별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출생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행한 태도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이었지, 결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자기들이 팔걷고 나서서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했고 그 결과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이런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사실 우리 믿음이 절대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절대 무한의 신뢰인데, 아무리 겉으로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선물이지요’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사실 자기 마음 속에는 ‘우리가 하갈을 취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이스마엘은 태어날 수 없었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운운해도 속으로는 압니다. 내가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행동으로 얻은 아들이고, 이삭은 믿음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종교이고 이삭은 복음을 대변합니다. 전자는 율법이고 후자는 은혜를 대변합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성경의 역사 중심에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을 그리고 야곱은 열 두 아들을…하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운 사실 하나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삭 아니면 이스마엘이라는 것입니다.
3. 비유(24~27)
이제 이 역사의 이야기를 바울 사도는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다소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 역사의 이야기를 비유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어머니(하갈과 사라)가 각각 두 아들이 있는데(이스마엘과 이삭), 이 어머니들은 각각 두 언약을 상징하며(옛 언약과 새 언약) 또한 각각 두 성을 상징합니다(현재의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이것이 바로 아웃라인에 써놓은 것입니다.
A. 하갈=옛 언약(율법)=현재의 예루살렘?이스마엘
B. 사라=새 언약(복음)=위에 있는 예루살렘?이삭
바울 사도는 소위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옛 언약 즉,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즉 후에 이스마엘이 자기의 근거지로 삼게 된 아라비아를 연결시키면서 그 아라비아에 있던 시내산을 또한 연결시킵니다. 그 시내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입니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맺어진 새언약과 대조되는 옛 언약입니다. 하갈은 이렇게 옛 언약을 대표합니다. 그 율법 행위에 매여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계집종인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가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종의 자녀이기에 종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이 하갈은 현재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지리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제도적 유대교의 중심지입니다. 갈라디아에 온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서 갖다 대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가 하갈은 오늘의 예루살렘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바울 사도 당시의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는 이방인이며, 나아가서는 아랍인과 다름이 없다라는 선언이므로 매우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라는 옛 언약이 아니고 새언약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율법이 말하는 바, ‘하라’와 ‘하지 말라’가 아니라 복음이 선언하는 바, ‘내가 하겠다’, ‘내가 해주겠다’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26절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말입니다.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자유자입니다. 이로써 바울 사도가 상징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결코 아브라함과 혈연적 관계를 가진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종처럼 눈치를 보면서 살지 않고 아들의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라가 바로 우리 어머니다 라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울 사도는 바로 이사야 54:1을 인용합니다. 27절입니다.
갈 4: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유다 왕국이 망하여 무수한 유다의 자녀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후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었습니다. 즉,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교회를 상징하는 사라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잉태치 못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슬퍼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에게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녀는 남편이 있어서 자식을 많이 낳은 자들?가령, 하갈 같은 여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식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4. 교훈과 적용(28~30)
바울 사도가 이렇게 다소 어려워보이는 해석을 갈라디아 교회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의 권위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이라 불리우는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한편, 갈라디아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율법 아래 속하여 종과 같은 신앙 생활로 떨어지는 것을 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교훈과 적용을 주고 있습니다.
A.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29).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28). 그러나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스마엘은 14살이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던 3살 때 이스마엘은 17살이었습니다. 그 때 사라가 본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놀린다는 말은 ‘희롱하다’ 혹은 ‘가지고 놀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핍박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원리를 말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도 그러합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그 때도 유대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이 참 성도들인 갈라디아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이 다 유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두 아들 모두 아브라함의 혈통적 아들들이었지만, 하나는 약속의 자녀로 유업을 이을 자였고 하나는 종으로서 나가게 될 자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믿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희롱하며 핍박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기대치입니다. 좋던 관계가 상하고, 집안에서도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여러분, 이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참 성도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평화가 깨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온전한 샬롬,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위기를, 이런 결과를 겪고 사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은 참과 거짓을 나눕니다.
고후 6:14b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a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B.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30).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을 본 사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입니다.
창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합니다.
창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주려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넘어지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내어쫓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묘하고 교활하게 자기의 의도를 가지고 돌려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였습니다. 거짓된 가르침, 거짓 복음이 교회를 얼마나 무섭게 넘어지게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바울 사도는 그들을 내어쫓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존재한다면, 목사는 바뀔 수 있고, 교인들도 바뀔 수 있지만, 교회의 터가 되는 진리의 말씀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보는 교회의 터를 흔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은 계집종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함께 얻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C. 당신은 정말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인가?(31)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31절에서 3장과 4장 전체의 결론을 줍니다.
갈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의 많은 성도들은 분명히 바울 사도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으며 의롭다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유대인들처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봉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그런 식의 외적 조건으로 증명하고 살기에는 너무나 불안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양심의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듭난 자들에게 주시는 그 위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더 봉사하고 더 노력하고 더 경건의 외모를 가짐으로써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는 삶을 반복적으로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는 반증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여러분의 선한 행위와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됨의 지위와 신분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코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아들은 아들의 영인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주시는 영이십니다(롬 8:16). 그는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이 변치 않는 확신으로 인하여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비록 감당할 수 없는 죄에 넘어졌을지라도 아들이라는 확신 때문에 더욱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은혜를 구하는 담대함을 가지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죄인을 찾아오시는 자비로우시고 무한히 긍휼하신 은혜의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자신이 종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아들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확신 가운데 있는 분들은 감사함으로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어찌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더욱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내가 아직도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분들이나 외적 조건으로 자기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해왔다는 생각을 가지는 분들을 하나님은 지금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무조건적인 초청은 결코 없습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구원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을 뿐 아니라, 죄인의 아버지가 되시기를 기뻐하시고 죄인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홀로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나는 누구인가?
갈 4:21-31 / 김필곤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어린 감자가 하루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감자 맞아?” 엄마는 “당근이지!”라고 답했답니다. 엄마가 자신을 당근이라고 말하자 그 길로 꼬마 감자는 가출해 버렸답니다.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꼬마 감자가 할머니 감자에게 다시 물었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대답했답니다. 자신이 감자가 아니고 오이라를 말을 듣고 또 꼬마 감자는 엉엉울며 집을 나갔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하시는 우리 성도님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고민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답니다. 너무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 옆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부딪혔답니다. 그 사람은 화가 나 쇼펜하우어에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데 길도 보지 않고 다니는 거요?" 하고 화를 와락 냈답니다. 그때, 쇼펜하우어는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참 좋겠소."라고 말했답니다. “네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을 남긴 소크라테스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마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답니다. 내가 누구인지 일생동안 탐구한 소크라테스의 결론은 바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은 단지 유인원에서 진화한 고등동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에게는 인간은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은 유전정보를 실어나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처럼 나는 고등동물이나, 물질 덩어리나 유전전보를 전달하는 그릇에 불과할까요? 우리 신앙인은 나를 정확히 알려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는 나는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약속의 자녀입니다(28)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경수가 끊어져 인간적인 방법으로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약속에 따라 태어났습니다. 약속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통해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체의 족보를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태어나며 성령의 세례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29).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요3:5).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라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은혜를 받은 사람만 초자연적 방법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다시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원숭이에서 진화된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포 덩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에베소 2장 10절 상반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 말씀에서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대가를 지불하고 산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였고,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우리를 우리 하나님이 아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아서 1장 5절에서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16:3)”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어느 날 산에 올라갔던 농부가 바위절벽에서 독수리 알을 하나 발견하여 암탉에게 품게 하여 부화하였습니다. 병아리들과 함께 자라 어미 닭을 졸졸 쫓아 다녔고, 부리로 땅을 헤치며, 곡식과 벌레를 쪼아 먹었습니다. 물을 마시고는 다른 병아리들처럼 꼭 하늘을 쳐다보고, 강아지가 오면 병아리들과 함께 잽싸게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날갯죽지는 다른 병아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발톱과 부리가 날카롭게 났습니다. 병아리들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병아리와 다른 자신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리고 깃털을 뽑아내고 부리고 발톱을 뽑았습니다. 닭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이상한 닭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한 닭들이 “와 새의 왕 독수리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닭이 된 독수리는 말합니다. “우리 닭은 절대로 저렇게 날 수 없어. 우리가 누구야. 우린 닭이야!! 닭!”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닭장 안의 닭독수리는 자신을 한 마리의 이상한 닭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다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닭독수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어릴 때 코끼리가 작은 말뚝에 묶여 있으면 커서도 그 말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조건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판단합니다. 스스로 키 작다고, 눈 작다고, 돈 없다고, 실력 없다고, 권력 없다고, 실패했다고 루저로 판단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비하합니다. 결혼도 조건이 되지 않으면 안하고 홀로 사는 것입니다.
타인이 보는 눈으로 자신을 누구인지를 판단해 버립니다. 여성들은 외모가 평가의 기준이라고 죽기 살기로 성형을 합니다. 남자들은 돈이 나됨을 나타내는 평가의 기준이라고 죽기 살기로 돈에 집착을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어야 인생은 행복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뒤늦게 구치소에서 최순실 씨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회고록을 쓰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자신을 살펴봐도 자기 미화나 자기 기만, 자기 사랑, 자기 비하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내가 되어서도 안 되고, 타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나의 평가자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나를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돈이 없다고 미모가 뛰어나지 못하다고, 실력이 없다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열등감을 가지고 비굴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나를 무가치하고 무능한 존재로 단정하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6장 14절에서는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처절함 삶의 환경에서 기도하면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나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입니다(5:1).
5장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000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비유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로 무엇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두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내산 언약과 약속으로 특징지어지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부인 사라와 하갈을 예로 들어 옛 언약인 율법과 새 언약인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고대 사회는 모친의 지위에 따라 신분과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홍길동전에서도 보면 아버지가 아무리 양반이라도 종의 몸에서 태어나면 양반 노릇을 못하지 않습니까? 종이었던 하갈을 시내산 율법에 비유하여 옛 언약이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5절에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갈-시내산-예루살렘을 동일 선상에 놓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결국 죄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유인이 사라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유인라는 말씀입니다(22,23).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말합니다. 율법의 종에서 해방시키신 예수님이 통치하는 영적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이 거룩한 도성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믿는 사람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신분과 상속자라는 특권을 갖게 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유하는 여인의 자녀입니다.(갈4:31) 우리는 율법에 묶인 노예의 자녀가 아닙니다(31)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실 자유인의 자녀, 자유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 빠져 자꾸 율법의 종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자를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21) 그래서 이미 자유인 되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리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갈5:1)
율법이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참 해방은 정죄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정죄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확정을 짓는 것입니다. '세금' '부채'를 의미합니다. 즉 죄의 삯, 죄의 부채를 의미합니다. 부채가 있는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자유롭지 못합니까? 어디에나 쫓아다니며 괴롭히지 않습니까? 밥맛이 없어지고, 협박당하고, 도망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경련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동반자살하기도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 과거를 보라, 너의 추잡한 인생을 보라 네가 예수 믿는다고 웃기지 말라. 위선 떨지 말라.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는 더러운 인간이야. 너의 과거를 폭로하면 너는 얼굴 내밀고 사람들 앞에 서있을 수 없어. 고상한 채 하지 말고 그저 질퍽하게 살아." 조롱하고 정죄합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정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누가 정죄하며 "그래서 어쩠다"고 반문하면 됩니다. 그 정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다 받아버렸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아시지 않습니까? 공소시효가 소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정죄 상태에서 해방 시켰습니다. 법정적으로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고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평안히 가라'고 하신 선포와 같이(요8:11) 우리가 어떤 죄를 졌다 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양털같이 희게해 주시고 기억지도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죄의 결과로서 오는 사망의 원리 사망의 법칙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이었고, 속박되었고, 사망의 언도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무기력해 집니다. 아무리 지식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있는 사람도 이 법 앞에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권력 있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고상한 지성의 소유자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도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 "아,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이 어둠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죽음의 공포와 이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겠습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해방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복음은 하나님의 정죄하시는 진노, 도덕적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사탄의 속박과 죄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주십니다. 사망의 공포와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우리를 죄와 죽음, 절망과 좌절, 불안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을 속박하는 모든 얽매이는 것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탐심, 죽음과 죄, 저주와 지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방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입니다. 단순히 “외부로부터 속박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죽음과 정죄,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진정한 자유를 말합니다.
3.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상속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종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인 사라의 아들 이삭 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유업은 26절에 나온 것처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천국입니다. 천국을 상속받을 자들은 율법으로 할례를 받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궁극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지옥갈 자가 아니라 마침내는 천국 갈 자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이 없으니까 인생은 공허하면 허무하고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합니다. 권력이 있는 철학을 하든, 부자이든, 유명인이든, 마지막 가는 곳을 모르면 다 허무할 뿐입니다. 모파상(Guy de Maupassant)은 베스트셀러를 많이 써서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답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으며,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답니다. 은행에는 그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1월 1일 아침,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답니다. 목숨은 구했지만 이후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으로 절규하다가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반복해서 했던 말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허무한 나그네 인생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하여 수고하며 도전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도, 남보다 앞서 가려는 경쟁심도, 인간의 욕심과 허영심도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 버리고 허무한 인생 앞에 소망 없는 나그네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로 살았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41세의 나이로 약물중독으로 죽었습니다. '할리우드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도 37세 젊은 나이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약물과다복용으로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독교인을 핍박했던 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권력을 찾지하기 위해 죽인 인간입니다. 그는 31살 젊은 나이에 근위대에 체포되어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사고 사는 것입니다. 너 나은 본향은 바로 천국입니다.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싸움도, 질병도, 아픔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 곳입니다. 그 천국에 대하여 계시록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곳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땅은 잠깐 육신을 입고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국을 가장 많이 소개해 주었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합니다. 믿습니까? 허무가 극복된 나라, 죄와 죽음이 정복된 나라, 고통과 슬픔이 사라진 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나는 바로 이 나라를 상속받은 자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같은 친구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 들수 없도다"
이 유업은 단지 천국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업을 이을 자는 유산을 다 받을 자, 하나님 나라를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상속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전부 나의 것 되는 것입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의 부요를 누릴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편 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그러나 이 땅은 생로병사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다고 해서 믿지 않은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죽음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천국을 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종이었던 하갈이 아들 낳았다고 사라를 박해합니다. 종의 자식이 이스마엘이 자유자의 자식인 이삭을 괴롭힙니다. 박해하는 말은 문법적으로 미완료형으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이것은 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믿고 거듭난 사람을 계속 괴롭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목사를 ‘먹사’라고, 집사를 ‘잡사’라고,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요즈음처럼 과학문명이 발달된 세상에서 미신같은 기독교를 믿느냐고 잘난 체 합니다. 조금 지식을 가지면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라고 조롱합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라고 설득합니다. 이들은 하나님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반대하며, 인간을 속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빼앗으며, 인간의 소외를 가져 오게 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에서 기도하면 종교 차별한다고 못하게 합니다. 소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듭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하고 벌금을 물게 만드는 법을 만들어 신앙인의 삶을 제한하려고 합니다. 동성연애를 하여 에이즈가 걸린 사람들을 100% 국가에서 치료시켜주면서도 동성연애가 죄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소수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신앙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예배도 기도도 못하게 합니다. 어느 순간 인권법으로 전도도 못하게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이단, 사이비들은 기성 교회를 매도하며 교인들을 빼어내어 갑니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중에서도 교회 내에서 눈알을 부릅뜨고 비난거리만 찾아 매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와 장로 집사를 고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가, 믿지 않는 일가친척이 비난을 합니다. "예수 믿는 누가 사기치고, 누가 이혼했고, 누가 사업에 부도났고, 누가 행실이 더럽고, 누가 첩이 있고, 어느 목사님이, 어느 교회가 어떻고" 얼마나 비난을 합니까? 질병 걸리면 예수 믿으면 잘 되다면서 그게 뭐냐고 조롱합니다. 이런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로마서 8: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도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은 누구에게나 필수과목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생로병사의 고난의 강을 건거가야 합니다. 어느 날 원치 않는 질병에 걸립니다.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사고를 당합니다. 때로는 끝없이 번창될 것 같은 사업이 갑자기 부도를 당합니다. 실패하고, 이별해야만 하고, 시간문제이지 모든 사람들은 사랑했던 사람들과 사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과정을 거치게 합니까? 신명기 8장에 보면 광야 훈련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은 명쾌하게 해답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광야 훈련을 시키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데 구태여 광야 훈련을 시킨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어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 무수한 고난의 강을 건넜던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야 우리 인생은 정금처럼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훈련을 기록한 욥기에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불에서 죄와 미움과 탐욕과 시기와 분쟁과 교만의 불순물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훈련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이 복 주시는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파도가 몰아친다고 해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참기름은 참깨를 잘 볶아서 짓이겨야 나옵니다. 좋은 숯은 자신을 태우는 고통을 감내함으로 탄생합니다. 좋은 나무는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리는 고통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365일 내내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만 계속된다면 대지는 사막으로 변해 버립니다.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와야 자연이 유지되듯이 고통이 있어야 행복도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핍박을 받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언적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나 믿음의 자녀들이 결국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말씀합니다. 90세에도 아이를 갖지 못한 사라에게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좁게는 자손이지만 넓게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앞으로 돌아올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기뻐하면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는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두 운명의 차이
갈 4:21-31 / 서정호 목사
어린 생명 구한 아름다운 회항
3일 전 8월 25일 오후 3시20분쯤 인천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비행 중에 네 살 난 여자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공유 73 톤을 쏟아버리고 회항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10여분 전 이륙한 비행기가 강원도 원주 상공을 지날 때 어머니와 함께 탄 이 어린이가 39도의 고열과 호흡곤란, 발작 등의 증상을 보이며 의식이 혼미해졌습니다. 기내 상황은 즉시 기장에게 보고됐고 승무원들은 기내방송을 통해 탑승객 가운데 의사를 찾았고 다행히 의사가 나타나서 “기압 차이 때문에 감기가 악화된 것 같지만 나이가 어려 비행을 지속하는 것보다 치료를 받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을 냈고, 기장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기수를 돌리기로 하고, 운항센터에 통보했습니다. 기장은 회항 시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가해지는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착륙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점을 감안, 72.6t(4000 여만 원어치)의 항공유를 공중에서 버린 뒤 인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이 어린이는 기장의 연락을 받고 공항에 대기 중이던 의료진으로부터 응급조치를 받고 정상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항공기에는 두 모녀를 제외하고 361명의 승객이 있었지만 아무도 운항 지연에 항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한항공은 “이번 회항으로 유류비, 이착륙 료, 연결승객 관련 경비 등 5,000만원 가량의 추가비용이 발생했지만 인명을 중시한 기장의 결정은 회사의 경영방침과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어린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재수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생명을 향한 사랑과 희생을 361명의 승객들 모두가 감당했고 기장을 비롯한 항공사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므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살아가고 있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은, 그 위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간섭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아직도 자신이 운수를 잘못 타고 나서, 재수가 없어서, 팔자가 더러워서 그렇다고 한탄하면서 오늘 이 거룩한 예배자리에 나와 계신 성도님들은 안 계시겠지요? 또한“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내 운명아!” 이처럼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팔자 타령하면서 낙담하고 절망하면서 살아오신 분은 안 계신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도 잘들 된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걸까? 나는 무엇인가 해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해도 왜 이토록 안 풀리는 것일까? 아무개는 잘 되는 데, 누구의 가정은 행복하다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우환질고가 그렇게 많은가?”오늘도 이런 복잡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오셨습니까?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운명과 천리를 개척하는 것을 뜻하며, 운명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이 스스로 개발하여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레의 설교 가운데 "Almost Christian" 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는데 그 뜻은 "거의 기독교인"입니다. 이 '거의'라는 단어가 참 좋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 Sony 회사의 회장이 늘 걱정하며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기술 개발해서 전자제품을 마련하고 1년 후면 한국에서 거의 비슷한 제품이 나온다. 그러더니 그 기간이 점점 단축되어서 6개월 후, 3개월 후면 나오고, 이제는 거의 다음 달이면 거의 유사한 제품이 나온다."
사실은 한국 경제가 이만큼 발전하는데 그것이 대단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자동차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제 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별 볼일 없는 차였는데 그들이 참 열심히 기술 개발하고 만들어서 미국 차보다 고장 없는 차로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그 이미지를 깊이 심어놓았는데, 지금은 한국이 일본 자동차 하고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서 팔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국 차가 세계 시장에서 좋은 가격 경쟁력을 갖고 얼마나 많이 팔리는지 모릅니다. 거의 비슷한 것, 이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거의'라는 말이 치명적일 때가 있습니다. 한 학생이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내신 성적이 참 좋았습니다. 수능 시험을 봤는데 최고 점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점수를 받아서 흐뭇했습니다. 원서를 냈습니다. '거의 합격했습니다.' 그러면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여러분, '거의'가 괜찮을 때도 있지만 치명적일 때도 있습니다. '거의'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선의 가장 무서운 적은 차선'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차선이 없었으면 최선으로 살 사람들이 차선으로 만족해버리고 만단 말입니다. 더 발전해서 더 아름다운 진짜 생애를 살 수 있는데 차선 때문에 가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고 감동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복음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한 채 과거에 의지하고 살았던 율법을 놓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에 영향을 미치자 갈라디아 교회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들이 그처럼 잘 지킨다며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율법을 자세히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비슷해서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13살 차이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이스마엘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그 둘이 같은 것이 있는데 아버지가 같습니다. 그 아버지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인데 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사귀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통로로 삼은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그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같은 것이 많았습니다. 아마 외모가 많이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그 둘은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풍습도 같았을 것이고 그 가정만이 가졌던 가풍이나 삶의 스타일도 동일하게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분이 다릅니다. 어머니 달랐습니다. 한 여인은 종이었고 한 여인은 자유자였습니다. 당시의 법에 따라서 종의 자식은 종이었습니다. 그 신분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온전한 상속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종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은 종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고, 본처의 몸에서 난 동생 이삭은 주인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아들 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두 아들 사이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벽이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방법에 따라 상속자를 얻으려고 했었던 결과로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사라는 더 이상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을 것을 포기한 사라는, 아브라함과 의논하여, 사라라는 몸종을 통해서 아들을 생산할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즉, 자신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하니 자식을 생산할 능력이 있는 몸종을 통해서, 자식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개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인간의 자연스런 능력으로 태어난 존재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때라 태어난 자였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나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어머니인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에,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였으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의 열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이삭이란 아들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낳았다고 해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고 아버지가 같아도, 종인 아들이 있고, 상속자인 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세계에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도 우리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는 것처럼, 신을 섬긴다고 해서, 또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인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로 이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육체를 따라 종교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약속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느냐? 입니다. 육체를 따라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재능과 실력으로 자신의 의를 쌓아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목표를 세워두고, 인간적인 열심으로 자신의 경건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는 종교생활입니다. 이런 것은 경건하기는 해도, 겉모습은 그럴 듯해도,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적이며, 종과 같은 생활입니다.
약속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생활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하여 애쓰지 않습니다.
나는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실패자요, 죄인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의 미래, 나의 운명, 내가 살아야 할 모든 길들을 맡깁니다.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그런데, 내 힘과 내 지혜와 내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는 율법의 자식이고, 종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자는 참된 자유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면, 기쁨이 있고 성취감도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맛도 있고, 또 멋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받을 것이고, 우러러 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가끔 수도사들처럼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가서 몇 달이고 기도와 묵상만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영성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을 멋으로 하고, 사람들이 보아줄 것을 바라고 할 때에,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내적인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할 때에, 이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과 봉사와 영성도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율법적인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 되고,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구가 되길 원하고, 그리하여, 성령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맺어진 열매는 종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가운데, 오직 신적인 능력과 약속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은총으로 맺어진 열매는 참된 상속자요, 참된 아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생활이 종의 생활이 아니라, 상속자로서 아들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두 언약
바울은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제 두 언약에 관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시내산이 나오고, 예루살렘이 나오며, 또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비유입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시내산이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율법을 의미하며, 또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유대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인을 하고 서명을 하여 확정한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지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옛 언약이란 그 내용이 '너희는 ... 하라','너희는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선, 지켜야 할 법칙과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사실상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법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달랐습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희를 용서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리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고, 보호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이런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기다렸던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능력이나,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능력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과 내 땀과 수고와 희생으로 나타난 열매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로 여기서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내 의의 열매가 아닙니다. 내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능력으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세계와 복음의 세계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살아가는가?, 내 의지와 내 힘과 내 결단력으로 살아가는가? 입니다.
두 아들의 운명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이 두 아들들의 운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운명은 그가 쫓겨남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씨였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하신 축복이 있어서, 그도 큰 민족의 아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복인 영적인 복,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 영원하고 신령한 복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의 열매, 의지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어느 정도의 죄성과 타락과 인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열매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우리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생각 대신에, 성령께서 우리 자신을 다스리도록 하는 겸손함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인 경건인 것입니다.
이삭의 운명은 어떠합니까? 그가 핍박을 받았지만 그는 진정한 하늘의 복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은, 진정한 하나님의 상속자라면, 우리들은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을 의아하게 여겨선 안됩니다. 이삭이 그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고 있어야 할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약속과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녀란 사실입니다. 이 축복은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이며,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로 이루어진 말할 수 없이 큰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해선 안됩니다.
폴 뚜르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선과 악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정신 속에 있는데 하나님을 위한 또 친구를 위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것은 선이고 이기심과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욕망에서 행해지는 것은 악이다"
그렇습니다.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일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사랑의 헌신을 하는데, 한 편에선 선이 되고, 또 다른 편의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복음과 율법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은 우리가 행하는 일에 있어선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속에 있고 영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행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빛 아래서 행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 의와 능력과 의지와 경건에 의지하여 행할 때에 우리는 율법의 아들이 되고, 종의 아들이 되고, 쫓겨날 운명의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늘의 상속자입니다. 그러니,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즉, 내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실력, 심지어 내 경건의 능력까지라도 의지하고, 자랑하고, 으시대고, 뽐내려는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분명한 두 운명의 차이에서 선택받은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시는 긍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율법이냐 은혜냐
갈 4:22-31 / 스테반황목사
아브라함이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난 첫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창세기 16장 15절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창 16:15).
이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으로써 하갈이 하나님께 직접 받은 이름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 16:10-11).
그 후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는 동방의 땅이 주어졌고 그들은 동방 사람들이라고 불리더니 오늘날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무함마드는 그의 족보가 이스마엘의 후손임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참조, 창 25:6; 창 25:12-18).
따라서 성경에는 비록 “이슬람”이라는 낱말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스마엘은 아랍 종교인 이슬람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아이러니 한 것은, 유대교와 이슬람은 서로 가장 큰 원수지만 그들의 믿음의 시스템은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에 뿌리를 둔 율법주의이고,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받은 코란에 뿌리를 둔 율법주의라는 점에서 서로 같으면서도 뿌리가 다르니 서로 다릅니다. 혈통으로는 유대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반면,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느바욧으로 이어짐으로써 같은 조상 아브라함을 그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슬람 종교와 복음적인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지 말해줍니다. 복음적인 기독교는 이삭과 관련됩니다. 반면, 이스마엘은 모든 세상 종교를 대표하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의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스마엘은 율법주의를 뜻하는 점에서 유대주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이라는 첩에게서 태어났습니다. 한편, 이삭은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났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늙어서 아이를 낳지 못하자 인간적 방법을 사용하여 사라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삼아서 자신의 대를 이를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이가 이스마엘입니다. 한편,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아들로서 결코 인간의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자녀입니다. 그는 경수가 끊어진 늙은 사라에게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즉, 이삭은 사라가 낳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리적인 관계를 통해 나온 자식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에 대해 하갈과 사라는 각각 두 언약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하갈은 시내산 언약이며 지금 이 땅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고, 사라는 하나님이 이루실 자유의 언약, 즉 하늘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의해 구원 받은 너희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고, 반면 시내산 언약에 속한 자들은 이스마엘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삭에게 속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이스마엘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삭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난 자들이고, 이스마엘를 따라 난 자들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서 난 자들로서 성령으로 난 자들을 박해하며 원수로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성령으로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내용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도 정확하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니그데모에게 말씀하시길, 이삭처럼 약속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3-7).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복음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 3:2-7).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내 죄를 위해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라는 사실을 들은 후 믿으면 거듭나게 됩니다. 이에 바울은 거듭난 상태를 이렇게 말합니다.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3-7)
그러므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새언약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며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세상 종교를 대표하는 이슬람 종교와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복음을 택하여 거듭나는 자의 반열에 서기를 원하여 말씀을 선포합니다.
먼저 이슬람은 종교이고, 이슬람 종교를 믿는 신자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이슬람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인류 중에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슬람입니다. 미국에서도 무슬림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이슬람 사원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이슬람 신도들이 급증하는 이유는 그들의 경전 내용이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 잘 맞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종교의 경전은 무슬림들이 믿기에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무함마드가 알라 신에게서 받아 적은 코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코란’이 아니라 원어 바름대로 “꾸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코란을 믿고 그대로 행합니다. 코란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깊은 잠에 듭니다. 언젠가 알라 신이 심판하는 날이 올 것인데 그 때 사람들은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알라 신은 각각의 사람들을 심판하여 천국이나 지옥에 가도록 결정합니다.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갈지는 그때 가봐야 압니다. 이때 알라 신이 각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할 때 그 기준은 저울입니다. 그 심판 저울의 한편은 각 사람의 선행을 매달고, 다른 한편은 악행을 매답니다. 그래서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서 저울이 선행 쪽으로 기울면 천국, 즉 파라다이스로 판결이 납니다. 그러나 악행 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보통 사람들의 종교 개념과 잘 어울리는 내용입니다.
무슬림들이 말하는 선행에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 고백입니다. “샤하다"라는 신앙 고백을 합니다. 쉬지 않고 계속 “샤하다”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 신의 마지막 예언자요 가장 큰 예언자라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매일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합니다.
셋째는 이슬람 달력으로 9월 한달 동안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일 음식 및 음료 섭취와 성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자신들이 버는 돈의 일부를 자선의 이름으로 알라 신에게 드리는 행위입니다.
다섯째는 메카 순례입니다. 이슬람 달력 12월에 있는 행사로서 모든 무슬림은 일생에 적어도 한번 이상 메카를 방문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분명하게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면 알라 신을 위해 순교를 하면 보장을 받습니다. 기타 각 사람이 처한 여러 상황에서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기 위해 코란을 읽어야 하고 그리고 무함마드에 관련한 이슬람 전통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만일 알라 신의 심판 때에 구원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싶으면 추가 선행을 하면 됩니다. 즉, 더 많은 개인 기도를 하거나, 더 많은 금식, 더 많은 구제, “샤하다”라는 신앙 고백 외에 알라의 99개 이름 암송, 이슬람의 메카 방문을 더욱 자주할 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무슬림 장소들을 방문하기, 이슬람과 알라 신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사회에서 인정 받는 좋은 일들 많이 하기 등등이 있습니다.
한편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악행은 일반적으로 양심에 걸리는 행위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양심에 걸리는 행위들은 악행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종교적 위선자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겉으로는 무슬림처럼 행동했지만, 실제 진정한 마음으로 알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종교 위선자들로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집니다. 지옥은 영원한 육체적 고통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한편 이슬람의 천국 개념은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실컷 먹으며 향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시원한 음료수와 고기 잔치로 가득한 곳입니다. 파라다이스는 젊은 남자들과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최대 72명까지 젊은 미녀들과 맘껏 향연을 하며 즐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최고 좋은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제일 좋은 음악을 들으며 최고의 술을 맘껏 마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셔도 건강을 잃거나 두통 등이 없습니다. 그들은 감각적으로 최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 주어지는 신나는 파라다이스를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인간은 날 때 선하게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또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악행을 하는 이유는 무지하기 때문이며 망각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코란과 전통을 기억나게 하며 지키게 하면 악행을 행하지 않고 늘 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았다는 복음에 대해 코웃음을 칩니다. 이는 그들은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악행보다 선행이 많게만 하면 파라다이스에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 힘으로 내가 천국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마지막 때에 알라 신이 각 사람을 어떻게 심판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때 가 봐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핵심 교리입니다. 여러분의 신앙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다.
먼저 복음은 인간은 날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마음이 본질적으로 죄에 물들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 자체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거듭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고 그분과 언약을 맺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면서 거듭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들어가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이삭으로 상징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나야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리어 인간들 앞에서 스스로 쌓은 자신의 의는 참된 구원을 얻는데 방해가 되었고, 이에 거듭난 후에 돌아보니 과거 인간의 의는 배설물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4-9).
종교 개혁의 선구자였던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수도승이었습니다. 모든 수도승 중에 가장 금욕을 많이 하면서 모든 선행에 힘쓰며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노력해 보았자, 죄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면 죄가 없는 생명을 받고, 그 생명으로 사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그는 바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의 길을 보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길은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하나는 이스마엘의 길로서 이슬람 종교와 같은 길입니다. 내가 어떤 율법이라는 기준에 따라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길입니다. 이러한 길은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카톨릭 경우도 반 정도 섞어서 그렇지 궁극적으로는 율법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길은 우리 인간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구원 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의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대속의 길입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은혜의 길입니다. 그래서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이 영원히 멸망할 것을 아시기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하나님은 인간들 스스로가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자들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넣어 주시기로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약속이며 이삭에게 속하는 길입니다. 이에 이삭에게 속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토록 쉬운 길이기에 복음입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 17).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고 배척하거나 무관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죗값을 자신이 치러야 하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18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 (요 3:18-20).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길은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종교는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노력들입니다. 그러나 다 허망하며 결국 구원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에 떨어집니다. .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가장 중요한 계기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성령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계시게 되셨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내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즉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보려는 헛수고를 내려 놓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삶은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와 닮은 거룩하고 선한 삶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이스마엘과 같은 옛사람을 교육 시켜서 착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교양을 지키면서 전통과 종교에 열심을 내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향하는 옛생명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삶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완전하고 의로운 존재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즉, 영생을 얻어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음을 통과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 함께 하는 삶이며 훗날 부활의 육체를 얻어 영원히 새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이는 완전한 은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을 모르는 모든 종교들과 인간들은 도를 닦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착한 일을 통해 구원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길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려면 마음과 행위에 있어서 죄가 전혀 없어야 하는데, 이는 벼룩이 달나라로 가겠다고 점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기 바랍니다. 이미 주님의 생명이 있는 분들은 내가 살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시도록 주님을 주인으로 인식하기 바랍니다. 그분은 나의 왕이며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떤 환경에서나 주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알아내고 그분의 뜻에 힘써 순종하기 바랍니다.
거듭난 생명은 이제 지옥이 없습니다. 이는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 품 안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상 음성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세상 종교의 음성을 거부하기 바랍니다. 내 생각대로 양심바르게 살면 된다는 상대주의에 속지 않기 바랍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오직 그분의 이름을 믿을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지금부터라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바랍니다. 아내가 남편을 영접하듯이,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맘에 영접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죄 값을 치르셨음을 깨닫고 한없이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의 생명이 내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천국으로 안전하게 이르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히 감사할 것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 때문에 내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이슬람처럼 알라 신으로부터 구원을 보장 받기 위해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를 사랑하시되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다 바치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만분지 일이라도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맘을 보여드리고자 우리도 생명까지 다 드리고 싶고, 또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개와 같은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의 길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천국을 누리며 살다가 죽음을 지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오늘 이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지은 모든 죄악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그 죄악의 문제들을 해결한 상태입니까? 만일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한 은혜의 길을 감사함으로 받기 바랍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보며, 나를 위해 죄 값을 치루셨음을 인정하고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하기 바랍니다.
다시 오늘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주를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생활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죄를 예수님 때문에 용서해 주시니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
갈 4:26 / 이창근 목사
오늘 말씀의 본문은 어머니를 신앙의 세계에 유비해서 "성도된 우리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즉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율법과 복음,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로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하는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 2절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가 살 영원한 새 예루살렘 즉 천국의 상징이요,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에 교회야말로 오직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죄와 율법에서 자유하듯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관들 중에 오직 교회만이 죄와 율법에서 자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왜 교회가 성도들의 어머니인가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한 우리 온 성도의 영적 어머니인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교회가 우리 성도의 어머니가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신앙의 잉태됨과 영혼의 중생이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태어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기까지 온갖 수고를 다하게 됩니다. 입덧도 하고, 몸매도 망가지고, 스타일도 구겨집니다. 또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어머니는 까빡 죽는 경험까지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이 잉태되고 새롭게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교회가 사랑이 넘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평화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것 외에도 교회는 시끄럽고 괴로운 곳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대한 진리의 신생아가 태어나기 위해서 교회는 괴로운 것입니다. 아플 때가 있습니다. 입덧이 심할 때도 있습니다. 구역질 날 때도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는 시끄럽습니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병원비와 육아비로 경제적 부담도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과 수고가 있어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도 한 영혼, 한 영혼을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몸살을 앓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 어떻게 이 복된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는가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마치 어머니의 희생과 같은 위대한 사랑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날 위해서 드린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휘청거리고 쓰러질 때 붙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준 손길이 있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캄캄한 인생길을 방황할 때 진리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준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성이 이어지고 쌓이고 쌓여서 우리가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자유자가 되어 예루살렘 복된 집, 이 영생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던들, 우리는 영원히 죽게 되어버릴 진노의 자리에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진통하는 말로 표현하면 "아이고 나죽네!"입니다. 마치 산모가 양수가 터져 아이가 탄생하듯,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십자가에 모든 해산의 진통을 다 겪으시고 죽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시켰습니다.
사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의 시작이 마태복음으로 시작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때문입니다. 우리를 복음의 족보, 영생의 족보인 천국의 생명책에 올리고 복음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족보에 내 이름이, 우리 모두의 이름이 올라가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 가문의 족보에 올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태어난 우리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장 복음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 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그런데 실제로 대수를 세어보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사이에 한대가 빠져 있습니다. 성경이 잘못기록하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도록 해놓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의 배려입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 다음에다 이렇게 기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나 아무게를 낳으니라"
이러한 엄청난 천국족보에 올리는 은총을 받은 우리들은 또한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영적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영적 산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장 19절의 사도 바울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노니"
하나 낳고 끝나는게 아닙니다. "다시" 거듭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출산율이 최하위라고 걱정을 합니다. 이젠 국가가 나서서 출산과 양육에 따른 비용과 시설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싫어서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출산과 육아에 따른 비용과 시설이 부족하여 아이를 낳으면, 곧 바로 직장을 잃게 되고, 지금까지의 재능과 경험을 사장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라가 나서서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듯이 교회도 영적 신생아를 만들고 키우는데 교회가 전적으로 나서서 도와야 합니다.
첫 아이를 낳을 때 겪는 아픔과 해산의 수고가 둘째 아이 셋째 아이 낳을 때는 반절로 줄어들고, 삼분의 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배부르고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희생하는 해산의 수고가 있는 것처럼, 사도바울을 그런 어머니의 심정으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첫 아이 출산할 때 합심해서 정성을 쏟아 도와주는 것과 같이 둘째, 셋째, 넷째로 이어지는 영적 신생아를 위해서도 꼭같은 관심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에 처음에는 열심을 낼 수 있지만 갈수록 시들해지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열심히 많은 영혼들을 탄생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천국의 생명의 족보에 많이 올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버이 되신 주님의 마지막 남기신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지상에 있는 새 예루살렘(천국),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교회가 왜 우리의 어머니입니까? 그것은 영양분을 먹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젖을 먹여줍니다. 시시때때로 좋은 음식을 갖다가 때를 따라 잘 먹여줍니다. 어린 아이 때는 젖을 먹이고, 조금 크면 이유식을 먹이고, 조금 더 크면 딱딱한 음식을 먹여서 점점점점 살과 뼈가 자라서 튼튼해지고 훌륭하게 장성한 몸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신령한 젖과 신령한 양식을 먹여주고 자라도록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 성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교회는 부드러운 우유나 음식만을 먹이지 않고 때때로 딱딱한 음식을 공급할 때가 있습니다.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지 못하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신사임당을 여러분 잘 아실 겁니다.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가 대단한 어머니입니다. 신사임당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시대에는 양반이 본부인 외에 첩을 얻어서 살아도 괜챦은 때인데 자기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보세요 영감, 내가 죽더라도 재혼하지 마세요. 혹시 내가 병이 나서 당신보다 일찍 죽는 경우가 온다해도 절대 작은 부인 얻지 마세요. 이것은 내가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 칠남매 자식들이 잘못될까봐 그러니 절대로 재혼하지 말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고 사세요" 여러분! 바로 이 분이 신사임당입니다. 이 어머니에게서 율곡 선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용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엄격성입니다. 사랑이 있지만 잘못된 길로 갈 때는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엄격성이 어머니에게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잘못가고 있으면 바로 가르쳐 줘야하고, 해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엄격하게 막고 살찐 꼴을 먹여야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는 교회는 사랑의 품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위로가 있고, 자녀된 신분이 보장이 되어야 교회를 성도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항상 잘못된 것만 지적하고, 실수하면 때리고 꾸짖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참된 어머니의 품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고달파 지쳤을 때 우리는 어머니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공해보겠다고 몸부림치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셨을 때에도 우리는 어머니의 이름을 부릅니다. 때때로 힘든 세상에서 낙심될 때, 객지에서 오고 갈곳 없을 때, 배가 고파 지쳐 쓰러졌을 때, 병들어 병상에 누워 있을 그때에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가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은 어머니는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나이 많아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병상에 누워 끙끙 앓으시는데, 고통의 신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그 나이 많으신 장로님도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기쁠 대나 슬플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부르는 그 영원한 이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하고 부르면 아픈 것이 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어머니!"하고 부르면 지친 심령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어머니가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고달파 지치고 쓰러졌을 때에도, 죽음이 목전에 있는 위험을 당할 때에도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는 마지막 고향과 같은 어머니의 품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품인 교회에 와서 고달파 지친 세상에 모든 짐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어머니 품속에 들어 온 것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와도 자신이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받아 안아 주시고, 범죄한 심령이 와도 용서가 되고, 자녀로서의 신분이 보장되고 자녀로서 대우받으며, 모두가 하나 되는 어머니 품인 천국과 같은 새 예루살렘!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품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인 것처럼 교회는 모든 것이 은혜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우리 새문안 교회가 어머니 품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차고 넘치는 교회가 더욱 되어야 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합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고 먼저 앞서 하늘나라에 가신 분들은 하늘을 향해서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다 갚사오리.
어버이 살아실제 섬길일일랑 다하여라.
지나고 나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천하에 고쳐못할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의 송강가사의 전번부의 내용처럼 우리의 정서로 하면, 오늘 말씀의 제목을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송강가사의 후반부의 내용과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효도할 만하여 효도하고 싶을 때가 되면, 이미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 곁을 떠나가십니다. 세월이 야속하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우리가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효도의 길을 제시해 주시면서, 위에 있는 새 예루살렘, 천국에 이미 앞서가신 사랑하는 분들과 이 지상에 있는 우리 어머니의 품속, 새 예루살렘인 교회에서 서로 교감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효도가 바로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효도를 다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성도들과 이 땅의 성도들을 잇대는 영생의 축제, 기쁨의 산제사가 바로 예배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새 예루살렘, 천국의 상징인 우리 어버이인 교회에서 예배를 통하여 위에 있는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에 우리보다 앞서 가신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는 분들과 영적 교감의 환희를 나누며,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과 우리의 영적 어머니인 교회를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 주시는 말씀을 깊이 마음 판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아멘
미국의 새 전쟁
갈라디아서 4:28-31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석원태 목사
‘미국의 새 전쟁(America's New War)’이라는 말은 지난 9월 11일,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서 미국이 공격을 받은 참사를 당한 이후,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는 보복행위를 알리는 CNN뉴스의 새로운 슬로건입니다. 이 방송국은 ‘미국이 공격을 받다(America Under Attack)’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테러의 참사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CNN 방송국이 내걸은 ‘미국의 새 전쟁’을 가리켜 부시 대통령이 21세기의 처음 전쟁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은, 또한 이번 테러행위를 미국을 향한 전쟁 즉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이에 상응하는 보복을 할 것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이 됩니다. 물론 ‘미국의 새 전쟁’이란 개념은 국경간의 분쟁이나, 아니면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냉전 대결이나, 경제적 이유가 따르는 걸프 전쟁과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주로 중동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만연해 가는 새로운 사회악이고, 국가와 국제악이 되는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한다는 개념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새 전쟁은 ‘무한의 정의’ 작전으로 장기전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상 이 문제는 중동아시아와 관계되는 정치, 종교, 경제, 민족 문제 등 복잡한 관계가 얽혀서 터지고 만 한 표출적 행위가 테러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식견자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결코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충돌이란 사실상 중동 이슬람 문화와 서구 기독교 문화와의 충돌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 충돌이 일어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CNN 방송국이 내걸은 ‘미국의 새 전쟁’이란 슬로건은 사실상 미국과 중동과의 관계입니다. 얼핏보면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하여 방대한 힘을 동원하는 것을 보면, 꼭 사막의 바위 밑에 기어다니는 쥐새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하여 부질없는 소비를 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가 버릴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사실상 이 문제는 미국과 중동의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삼각관계로 얽힌 21세기의 커다란 종말 징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미국이 내걸은 ‘새 전쟁’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함이, 종말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Ⅰ. 이스라엘과 아랍인의 민족적 관계입니다.
1. 유대민족의 성경적 탁월성
보통 ‘유대인’이란 말은 인종학적 견지에서 사용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명칭입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국제적 견지에서 사용되는 국가 명칭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얻은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창 32:28). 또한 유대인 혹은 이스라엘인을 히브리인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말의 시작은 롯이 잡혀갔을 때,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창 14:13)라고 하는 데서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창 40:15)라고 한 사실에서, 그가 히브리인임을 알리고 있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먼 세월이 지난 다음에 애굽의 바로 왕은 애굽 고센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여자들을 가리켜 ‘히브리 여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을 보게 됩니다(출 1:16).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세 전에 선택했다고 하였습니다(엡 1:4). 아담을 구원하기로 하시고, 가인을 버리고 아벨을 택하셨습니다. 그 후 에녹, 노아를 택하셨고, 때가 올 때 택자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선민역사의 계보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 후손을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애굽으로 보내어 400년 간의 체류 속에서 번성시킨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출 6:7-8, 신 7:6-8, 10:15, 겔 20:5, 암 3:2). 그 백성을 지상 만민 중에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이 되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신 14:2). 그 선택받은 자손과 다윗의 왕가에서 인류의 메시야가 출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 11:1)라고 하였습니다(사 11:10). 나중에 바울은, 진정한 이스라엘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영통적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롬 2:28-29). 그럼에도 바울은 유대인, 곧 이스라엘인인 히브리인을 참 감람나무로 표현하며 선민의 우수성을 말했습니다. 로마서 11장에는 결국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합쳐서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롬 11:26), 곧 구원인의 총수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계 7:4, 9, 14:1). 이러한 성경은 세계 인류 중 유대민족의 특이성, 우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며 성민(聖民)이요, 열국의 아비요 장자로서 인류의 메시야를 약속받은 특수한 민족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2. 유대인과 아랍인과의 관계
유대인과 아랍인은 모두 인종학적 분류에서 볼 때 셈족에 속합니다. 셈족이란 명칭은 창세기 9장 18절에 나오는 노아의 큰아들 셈에서 유래됩니다. 현대의 셈족이라고 하면 역시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로서 셈족 방언을 사용하는 민족인데, 주로 중동아시아에 산재하고 있습니다. 셈족 방언 중에는 고대어로서 죽은 방언이 많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언은 유대인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와 아랍민족이 사용하는 아라비아어입니다. 이 두 민족이 상극의 원수로 나누어져 수천 년을 이어오는 것은 정치적인 면보다 종교적인 면 때문입니다. 한층 더 올라가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 계획이 표면화 된 것은 홍수 후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의 자손들이 분포되어 살기 시작한 후였습니다. 함의 자손들은 점차 남쪽으로 옮겨 아프리카 대륙으로, 야벳 자손들은 북방 팔레스타인 지중해 연안과 콕카사스 산맥에서 점차 서방으로 옮겨 구라파를 개척하였고, 셈족은 시날 평지 곧 중동아시아의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지,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사막, 시내산 반도, 아프리카 북부 등지에 산재하면서 그 지역들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셈족 거주지의 요람인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킨 때부터, 그와 그 자손들은 특수한 신정국민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나타난 시날(메소포타미아 평지) 왕 아므라벨 등이 소돔과 고모라를 치고 롯을 사로잡은 것을, 아브람이 추격하여 도로 찾아온 것도 일종의 이스라엘과 아랍 전쟁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의 소생 이삭 사이에서부터였습니다. 이스마엘과 그 후손은 비록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자손이지만 이방 여자 하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약속의 유업에서 제외되어 아라비아 사막과 시내산 반도를 중심으로 거하는 유목민으로 살게 되고, 이스마엘이 그 추장이 된 것입니다(창 25:13-18). 그도 12방백을 이루어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이삭의 피를 받고 나온 에서와 야곱을 봅니다. 여기에서 에서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서 유기(버림)됩니다.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 에서가 이방인 에돔(에서의 별명)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36:9, 43). 이들도 아랍 민족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성경은 에돔, 암몬 족속 등이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역사의 방대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 대 앗수르, 이스라엘 대 바벨론 전쟁 또한 포로생활 등이 모두 아랍과 이스라엘의 충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40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Ⅱ. 이스라엘과 아랍인의 종교관계
사실상 이 두 계열의 문제는 정치문제보다, 경제나 사회나 문화문제보다 더 큰 본질적인 문제가 종교문제입니다. 극동과 세계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불교나 힌두교, 유교 등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정치나 경제나 문화생활에 강한 반영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저들이 믿는다고 하는 종교를 찾고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유대교나 아랍인들의 이슬람교는 저들의 삶과 역사 전체에서 저들이 믿는 종교와 직결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혈관에는 아예 여호와신과 알라신의 사상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저들의 조국 팔레스타인을, 하나님께서 저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불러 그 후손들에게 약속한 기업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땅은 신성불가침의 성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래, 다윗 왕 때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시온산에 도읍하여 시온을 찬양하는 태평가를 불렀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포로생활의 비운을 거치고,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로 이어지는 세기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는 거룩한 땅 시온과 시온 성전에서의 예배라고 하는 신앙이 민족의 핏줄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가슴 속에 조국을 향한 뽑아낼 수 없는 사랑과 애착심을 심었고, 자기 조국 팔레스타인을 위하는 일이라면 아무 미련도 없이 즐겨 자기 목숨을 바치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아랍인들도 그러합니다. 저들이야말로 팔레스타인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사람들의 마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 두 곳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저들 교주의 출생지인 메카요 또 다른 한 곳은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예루살렘을 신성시하는 이유는 저들의 교주 모하메드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승천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후 70년 로마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시온산 성전 터에다 ‘바위의 전당(Dome of Rock)’이란 모슬렘 사원을 지어놓고 팔레스타인 사수의 중심지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절대신앙의 유대인과 알라 절대 신앙의 아랍인들은 메우려고 해야 메울 수 없는 종교적 갈등으로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저들의 종교에 대한 신앙이 저들의 삶이요 역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 이전의 문제요, 사상이나 문화 이전의 문제입니다.
Ⅲ. 두 세계의 정치, 경제 문제입니다.
사울 왕이 등극함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왕통은 유다국 마지막 임금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가면서 끝나고 말았습니다(B.C. 586). 그 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에 걸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살았습니다. 주후 70년 로마군대로 말미암아 다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성전은 무너지고, 유대인은 2000년 세월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 후 20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성지는 극소수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랍인이 점령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1,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유대인들의 고토 복귀운동이 양성화되고, 그것이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성사를 보자,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토 복귀는 성경 예언의 성취요, 또 종말의 징조와도 직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고토를 찾아 독립국가로 등장하자 2000년이나 그곳에 살던 아랍인들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랍인들은 유대인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스라엘 말살 운동에 힘을 모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일컬어 중동전쟁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중동전쟁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이것이 국제 문제로 등장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의 큰 중동전쟁이 바로 1967에 있었던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습니다.
지금 작은 이스라엘은 12억의 아랍과 대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국을 위시한 서방 선진국과 특별히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이 언제나 친 이스라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옛 조상의 고토를 찾고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선진 자유 우방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금번에 미국이 ‘미국의 새 전쟁’, ‘21세기 첫 전쟁’이라고 부르고 일어난 것은 결코 아랍권 전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저 테러리스트들은 아랍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과격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과격분자들의 제1목표가 아랍의 통일이요, 또 팔레스타인의 독립입니다. 반(反) 이스라엘입니다. 결정적인 원수가 이스라엘인데, 이 이스라엘을 돕고 있는 결정적인 세력이 미국이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테러도 자행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이스라엘이 일어나서 함께 전쟁에 가담할 경우, 전혀 문제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모든 아랍계는 이스라엘 타도에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중동전쟁은 복중(腹中)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잉태하였을 때 사래를 멸시하였고, 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창 16:9). 그리고 이복 형제간의 전쟁입니다(창 21:9, 10). 이삭과 이스마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후손끼리의 전쟁이었습니다(창 25:13-15).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간의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 구약 성경의 전쟁사가 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종교전쟁이었습니다. 기독교 대 이슬람교, 성경 대 코란의 전쟁이었습니다. 알라신 대 하나님 전쟁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세계 종말 전쟁이 종교전쟁과 연관하고 나타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하나님께로부터 21세기의 새 전쟁을 부여받은 셈이 됩니다. 고되고 지루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승산이 보장되지 않는 전쟁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자유 우방국가들과 특별히 기독교를 잠깨우는 경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21세기의 새 전쟁으로 불리는 테러 소탕 전쟁이 마지막 세계 전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는지 모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하갈의 자녀가 아니라 사라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시내산과 율법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 믿음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하였습니다. 종이 아니라 자유하는 여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