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논증
자유의지가 있다면 운회는 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선화륜(旋火倫)과 같이 '뇌 속의 이곳저곳을
훑는 한 점 식(識)의 흐름'이다. 마음이 '거울'과 같다거나 '등불'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하지만, 이는 '명멸하는 한 점의 식'이 세상을 그려낸 이후의 거친
〔麤〕 조망이다. 정밀〔細〕하게 분석하면 우리의 마음은 한 순간에 한 곳에만
머물면서 계속 흘러간다. 그리고 그 순간을 불교 용어로 '찰나'라고 부른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렇게 매 순간 명멸하는 한점의 식의 흐름을 좇아가는 '
수동적 집중'이다. 식에 대한 수동적 집중을 통해서 "우리의 주의력이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체득하고, "불변의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허구였다."는 무아(貿我)의 진리를 체득한다.
그때 세상에 대한 집착과 이기심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涅槃寂靜〕.
위빠사나는 수동적 집중이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많은 행위는 능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경과학에서는 우리의 능동적 행위 역시 신경자극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요컨대 감각이든 행위든 반사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의 설명을 그대로 신붕한다면 우리는 그저
'단백질 기계'일 뿐이다. 태엽을 감으면 걷다가 태엽이 모두 풀리면
멈추는 로봇과 다름없다. 신경과학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고대 인도의 순세파의 주장과 같은 지독한
유물론이다. 신경과학 이론에는 마음이나 자유의지를 개입시킬 여지가 없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논증하듯이 우리의 모든 행동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이성으로 따져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보자. 우리는 누구나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극과 그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을 넘어서 무언가를 션택할 수 있다고 느낀다.
물론 우리의 일구수일투족 모두에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행동들은 기계적으로 일어난다. 혹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간헐천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일련의 기계적 행동을
촉발한 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간혹 어떤 순간에
"무엇을 감각할지", "어떻게 행동할지" 능동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면,
그 순간은 우리의 식(識)이 신경망의 물리화학적 반응의 사슬을 넘어서
뇌세포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비약하는 순간일 것이다.
주관적으로 보면 이 순간은 '능동적으로 주의력을 이동하는 순간'이다.
이상의 논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언명제를 작성할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런 자유의지가 발휘될 때 우리의
식(識)은 뇌 속의 한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 비약할 것이다."
이를 죽음과 탄생의 순간에 적용해 보자.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식이 뇌 속의 신경세포 사이를 비약할 수 있다면,
죽는 순간 뇌 속의 마지막 신경세포에 머물던 식이 그 세포를 떠나서, 다른
모태의 자궁에 형성된 새로운 수정란 세포로 비약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환생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회가 가능할 것이다.
'비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어떤 실체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불전에서는 '마치 신 과일을 보고서 입에 침이 고이듯이, 거울에 영상이
비치듯이, 한 등불의 불꽃이 다른 심지에 옮겨 붙듯이, 소리를 지를 때
메아리가 생기듯이······' 환생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불전의 가르침과
위빠사나 수행과 뇌과학 이론을 종합하여 가언명제로 윤회를 논증해 보았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