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외 2편
정수자
야밤에 칼을 샀네, 비색에 홀려 들어
오늘의 운세 삼아 입술이나 대볼까
꿉꿉한 묵언 끌탕이나 채로 진탕 쳐볼까
직입은 똑 놓치면서 푸념만 후 늘어져도
대낮에 칼을 품고 나갈 일은 없을지니
쪼잔히 노염이나 썰어 바람길에 뿌려볼까
가을의 밑줄
저녁을 일찍 하니 저녁이 길어졌다
외등도 조곤조곤 곁을 더 내주고
접어둔 갈피를 헤듯
책등들이 술렁였다
등불과 친해지면 말의 절도 잘 짓는지
하품 같은 농 끝에도 코가 쑥 빠지지만
저녁에 길게 들수록
행간은 더 붐비리
가을의 질문 같은 동네 책방 창문들도
길어진 모서리를 모과 모양 밝히고
누군가 밑줄을 긋다
별로 솟곤 하리라
멍한 날
촐촐히 속이 비면 말개지는 느낌이야
제삿날 올리던 놋접시의 무나물이
슴슴히 둘레를 괴며 달무리를 흉내 내듯
말 많은 모임에선 뭇국조차 못 사귀고
그냥 마냥 걸으며 홀로나 더 맑히듯
촐촐히 멍한 날이면 뭔가 이룬 기분이야
― 정수자 시집, 『인칭이 점점 두려워질 무렵』 (문학의전당 / 가희 시인선 / 2024)
정수자
경기 용인 출생.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84년 세종숭모제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 시집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녘 길을 떠나다』 『비의 후문』 『그을린 입술』 『파도의 일과』 등. 중앙시조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
첫댓글 서늘하고 맑습니다. 귀한 시를 만났습니다. 고맙습니다^^
실감 나는 시편을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