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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과 아론의 비방
민 12:1-16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이레 동안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15 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16 그 후에 백성이 하세롯을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치니라
민 12:1-16 /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난하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을 비난하면서 2)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을 나누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 하고 투덜거렸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비난을 들으셨다. 3)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4)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셨다. `너희 세 사람은 당장 만남의 장막으로 나오너라.' 그들이 만남의 장막으로 들어서자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모습으로 내려와 장막문 앞에 서시면서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셨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자 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너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면 나 여호와가 환상을 보여 내 뜻을 알리고 꿈속에 나타나 말을 하겠지만 7)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내가 모세에게 내 온 집을 맡겼다. 8) 내가 모세하고는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이야기하며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다 말해 준다. 심지어 모세는 내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가 감히 무서워하지도 않고 함부로 나의 종 모세를 비난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화를 내고 떠나시자 10) 구름이 장막에서 걷혔다. 그러자 갑자기 미리암의 몸에 나병이 번져서 그의 살갗이 눈처럼 희게 되었다. 아론은 그러한 미리암을 보며 놀랐다. 11) 아론은 즉시 모세에게 매달려 간청하였다. `이보게, 우리가 정말 바보같은 짓을 하였네.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게. 12) 우리 누이 미리암의 살이 반이나 썩었네. 꼭 모태에서 죽어서 나온 사람 같으니 제발 그냥 버려 두지 말게.' 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저 불쌍한 미리암을 고쳐 주십시오.' 14)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아버지가 미리암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하면 이레 동안은 수치스러워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미리암을 이레 동안 진영 밖에 머무르게 하여라. 이레가 지난 뒤 진영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너라.' 15) 그래서 미리암은 이레 동안 진영 밖에 머물러 있었다. 백성들은 미리암을 진영 안으로 불러들일 때까지 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16) 이스라엘 백성은 미리암이 돌아온 뒤에야 하세롯을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쳤다.
마당, 뜰들이라는 뜻의 하세롯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화를 당합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1-3) 모세는 구스 여인을 맞이하였습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이자 여선지자였고, 아론은 모세의 형이자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비해 월등한 모세의 지위 및 탁월한 권위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투영되어 모세와 구스 여인과의 결혼을 비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교만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모세가 온유했다는 말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며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도 대항치 않고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방하기보다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는 겸손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를 변호하시는 하나님(4-12)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화하십니다. 이러한 일도 모세의 권위를 시기하거나 비방할 수 없음을 미리암과 아론에게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에 환상과 꿈으로 간접적인 방법으로 말하지만 모세에게는 오랜 친구처럼 가까이서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셨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람은 스스로 자기 권위를 변호하거나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세워주신 권위를 시기하며 거역하는 것은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히 13:17).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앞에 순종하고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13-16)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도 모세는 미리암이 나병에서 고침 받기를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한때는 하나님께 원망하듯 기도하던 모세였습니다(민 11:10-15). 하지만 모세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모세 역시 점점 성숙해 갔던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다른 사람의 비방에도 온유함을 유지하며 용서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게 합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미리암은 진영 밖에서 이레 동안 갇혀 있다가 다시 진영으로 들어왔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차단하지만 교만한 마음을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적용: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요? 충고가 필요하다면 먼저 나의 허물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잠 25:12).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된 사람(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최상의 행복이라 생각하고 많은 물질을 쌓아두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명예와 권력을, 쾌락을 최상의 행복이라 여겨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을 수치로 표현한 것을 행복지수라고 합니다. 행복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행복지수를 100이라 한다면 여러분은 얼마쯤 될까요? 그 정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 설 교 >
미리암과 나병
민 12:1-16 / 김영수 목사
하나님은 애굽의 말발굽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찍이 당신의 일꾼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출2장) 그 일꾼은 다름 아닌 레위 지파 가문의 모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모세의 사역을 돕도록 그의 형제 '아론'과 누이 '미리암'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여선지자'(출15:20-21)로, '아론'은 우림과 둠밈이 부착된 흉패를 입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민2:1; 출28:15, 30)으로서,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이스라엘의 최고 영적 지도자 '모세'를 돕도록 하였습니다.(출3:10).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출애굽하여 광야에 도착하기까지 모세를 중심으로, 아론과 미리암 세 사람의 호흡이 맨 처음에는 너무나도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후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오랜 광야 생활을 방황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다, 고기와 마늘을 달라, 광야에서 목말라 죽느니 차라리 애굽 땅으로 돌아가겠다."하며 민심이반(民心離反) 현상이 일어나자 동역의 관계가 극도로 흔들렸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가족관계이자 동역자인 세 사람이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민심이반(民心離反)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에 힘쓰며 헌신적인 봉사에 앞장서야 하는데 오히려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근거 삼아 누이 미리암 여선지자가 아론과 모세를 비방하며 나타났습니다.
그 내용이 2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내용입니다. 거기다가 1절에서는 모세의 첫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 그가 다시금 아내를 취함에 있어 이방나라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을 문제삼아 모세의 인격적인 면까지 도전해 들어온 것입니다.
이렇듯 미리암이 모세의 지도자적 권위에 도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 같은 미리암의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과 모세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암의 말을 들으시고"(2절) 다음과 같은 특별조처를 취하셨습니다.
4절부터 10절을 보십시오 『 하나님의 세우신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아가 모세보다 앞서고자 했던 아론과 미리암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가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병이 미리암에게 발생한 것입니다.』
나병이 어떤 병입니까? 온 몸과 뼈마디가 썩어 문드러지는 저주의 질병으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조차 싫어하며 무서워했던 전염병이 아닙니까? 더욱이 여성인 미리암이 이 같은 저주의 질병에 걸렸다는 것은 그의 인생여정이 끝났다는 것과 똑같은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사건을 통하여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미리암과 아론이 보여준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서 점검해보고 두 번째는 누이 미리암에게 생겨진 나병을 놓고 모세가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주님과 교회 지도자들을 잘 섬기는 모습인가? 에 대하여 깨달음을 받고자 합니다.
Ⅰ. 아론과 미리암이 보여준 잘못된 행위들
1. 교만 때문에 불행을 당하였습니다.(2절)
2절에 아론과 미리암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느냐?"며 자기들에게도 모세와 같은 능력과 은혜와 권위가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는 지도자에 대한 도전이며 추악한 시기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 인간이 타인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이유는 상대방과 자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상대방과 비교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은사와 직능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묻고 또 물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평가를 통하여 타인과의 비교의식을 극복하고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고유한 인격과 직임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서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실 아론은 우림과 둠밈이 부착된 흉패를 입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으로 또 미리암은 '여선지자'로 이스라엘 여인들의 찬양대를 인도하는 아름다운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권한이자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세가 가진 지도력을 탐낸 나머지 질투의 화신과 교만의 포로가 되어 결국은 모세를 비방하였고 이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어 나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만약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 맡겨진 달란트가 자신들의 은사와는 전혀 다르고 또 모든 권위와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롬13:1)을 인정하기만 했더라도 결코 질투와 교만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 비방(誹謗) 때문에 불행을 당했습니다.(1절)
모세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 '십보라'가 사망한 직후 구스 출신의 여인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놓고 미리암과 아론이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違背)된다고 생각하여, 모세를 극렬히 비난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셨지만 그것은 추악한 우상 문화에 찌든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한 사전 조처였을 뿐입니다. (신7:1)
하지만 저들이 모세를 비방한 실제 속마음은 결혼의 윤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모세에 대한 시기심과 타민족에 대한 히브리 민족의 우월성이나 배타성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특별히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인정함을 받으니까 더욱 시기심이 발동하여 비방(誹謗)한 것입니다. 그 근거가 1절에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론보다 미리암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미리암이 아론을 선동한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구스"는 보통 "이디오피아(Ethiopia)"를 가리키나, 발음에 따라 "미디안(Midian)"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디안으로 보게 된다면.... "십보라" 역시 구스 여인이 됩니다.
그러나, 십보라와의 결혼은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인 미디안 광야 생활 때 있었다고 은폐되어지고 ... 십보라가 죽고 이디오피아 여자와 재혼 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형평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너무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비방이었습니다.
비방(誹謗)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헐뜯고, 비판하고, 폭로하는 일로....우리 성도들은 형제를 비방해서는 안됩니다.(약4:11) 이것은 주님이 금하신 일이기도 합니다(마7:1) 주머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 마태복음 18:15-17절에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여기서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말이.... 형제의 허물을 덮어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의 허물을 내가 알 때.... 남에게 먼저 알리고, 폭로하고, 헐뜯기 전에 먼저 내가 그 형제를 찾아가 권고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그 형제가 나의 권고를 듣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세워서 그 형제의 행한 일이 잘못임을 입증하고 함께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두 세 증인과 함께 권고해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모세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밀약을 통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며 이로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에 마땅한 것입니다.
3. 모세를 동생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하고 비방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원인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자신들의 동생으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역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인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들은 과거 나일강에서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갈 상자에 담겨있던) 모세가 물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크신 지도자가 되어 일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신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과 그런 큰 일을 행한 자신들에 대하여 모세와 백성들이 알아주지 않고 있다는 인본주의 마음이 원망과 비방의 화살이 되어 모세에게 꽂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경험과 아픔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건축한 이후 크게 성장하다가 IMF를 맞고 교인들이 반 이상이 교회를 떠나고 높은 이자로 교회가 휘청할 때 여동생과 가족의 물질적인 도움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물질적인 후원은 지금도 귀한 헌금이 되어 교회재정의 중심역할을 맡고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헌금과 후원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드려지기보다는 인간적인 가족애(家族愛)의 관점에서 물질을 드렸기 때문에 종종 여동생과 의견충돌이 생기고 신앙적인 열심과 믿음이 식어지면 "목사님은 매일매일 예수 잘 믿으라고 하면서 그렇게 잘 믿는 목사님은 무엇하나 제대로 해 낸게 있느냐? 교회가 성장했느냐? 그렇다고 빚을 제대로 갚고 있느냐? 왜 좀더 나아지는 것 없으면서 그렇게 큰 소리만 치느냐?"며 달려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마음속에는 미리암의 나병이 생각나서 가슴이 섬뜻해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고민과 아픔이 있었던지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不和)하게 하려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5-36)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가족이 더욱 하나되어야 하는 것처럼 아무쪼록 저희 가족은 물론 늘찬양 전 식구가 한 가족 한 마음이 되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미리암에게 임한 나병
10절에 보면 "구름이 장막을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이 들었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암을 나병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암에게 나병을 내리신 것은 아론과 미리암이 저지른 죄에 대해 매우 합당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론은 무사하고 미리암만 나병에 걸린 것을 가지고 미리암만 잘못한 것으로 결론짓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누이 미리암이 모세에게 반박하고 비방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론은 무사하고 미리암만 나병이 걸린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숨은 사랑을 그 뒤 배경에 숨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론은 그 당시 제사장의 직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막 안에서 제사를 담당하며 많은 사람을 대하는 아론에게 나병이 걸렸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창피와 놀림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가 맡은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론은 무사했던 것입니다. 사실 나병에 걸린 미리암은 그 즉시 진 밖으로 쫓겨나가 칠 일간 갇혀있었습니다. 사람들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격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론이 누이 미리암만 나병에 걸리고 자신은 무사한 것에 대하여 천만다행으로 여긴다거나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나병에는 무사했지만 그 마음만은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미리암보다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11절에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며 죄를 얻었으니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로 살이 반이나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같이 되게 마소서" 하는 고백을 통하여 아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론과 미리암의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하심에 대한 반역이었으므로 그 잘못한 죄의 값으로 나병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 였습니다.(왕하 5:27 대하 26:19).
현 시대에도 많은 제사장과 성도들이 심각할 정도로 타락하며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한데 나병과 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찾아보기가 드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침묵일 뿐이지 죄에 대한 용서(容恕)나 묵과(默過)가 아닙니다. 어떻게보면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만약 우리도 하나님 앞에 회개가 없이 계속하여 죄를 지을 때는 미리암과 같은 중한 징벌이 임하거나 더 심한 경우 상한 마음 그대로 방치해 두십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 한 가족 된 믿음의 자녀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함께 기도하며 말씀 안에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모세의 중보기도
세 번째로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는 모세의 태도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향하여 거세게 비방하며 힐난(詰難)했지만 모세는 자신의 비난에 개의치 않고 침묵함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며 참고 인내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承)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에 더 높은 차원의 신비로운 말씀의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그 핵심은 기도와 온유함의 비밀입니다.
먼저 온유함의 비밀입니다.
모세는 자신에 대한 비방과 힐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와 사명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비난과 조롱을 받을 때에 혈기와 분노를 발하면서 " 좋아! 내가 안 하면 그만이지 누군 이 짓을 하고싶어 하는지 알아 너희 두 사람이 알아서 해!" 하며 지도자의 위치를 포기하거나 떠날 수 있었건만 모세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도력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모세의 온유함은 출생 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얻어진 후천적인 성품이었습니다. 모세의 자기 절제는 인간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본분에 충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온유함과 사랑함이 지도자의 최고 아름다움임을 기억하고 온유함과 사랑의 능력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고 이를 증진시켜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키워나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둘째로 기도함의 비밀입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하여 그저 온유함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리암의 나병이 깨끗하게 되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원컨대 나의 누이의 나병을 고쳐 주옵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13절)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그의 호소는 애절한 마음이 내포되어 있으며 누이가 고통 당하는 모습이 자신 때문에 오는 듯한 절실한 그의 마음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는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큽니다(약 5:16).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7일 후에 미리암은 깨끗해지고 건강한 몸으로 회막안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미리암이 진중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구름기둥의 인도함으로 하세롯에서 출발하여 바란 광야에다 진을 쳤습니다. 다시금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의 동역관계가 아름답게 시작된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다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는 기적의 과정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큰 영적 교훈은 모세가 보여준 온유함과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모세와 같이 비방을 받고 여러 가지 핍박도 겸하여 받게됩니다.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모세의 온유함과 사랑함을 본받아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암과 아론처럼 '교만'과 '비방' 그리고 '인본적인 생각으로' 나의 욕심을 따라 행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 때문에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가정이 분열되어지며 개인들이 어려움 당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가 조심하며 날마다 말씀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며 돌아보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리암
민 12:1-16 / 이동휘 목사
1. ‘미리암’은 아론과 모세의 누이로 그들의 부모는 아므람과 요게벳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부모로, 애굽 왕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고, 그들의 자녀들이 따를 수 있는 본을 보여주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렇게 미리암은 경건한 부모 아래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는 물론 누이 미리암도 모세가 그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행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는 야곱의 70명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지(창 46:27) 350년째가 되는 때인, B.C.1530년경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4백년 동안 애굽에서 번성한 후에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는 것이었습니다.(출12:40)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 장정만 6십만 명이었습니다.(출 12:37) 여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노년층을 합하면 2,3백만 명은 족히 되는 인구였습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지 4백여년 만에 엄청나게 번성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속도 빠르고, 또한 체력이 매우 강하여 애굽 전역에 걸쳐 막강한 세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에 애굽 왕이 “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수가 너무 많고 강하여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있도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 많아져서 전쟁이 일어날 때, 그들이 우리 적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달아날 것이다.” 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출산 제한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이고 여자 아이는 살려두라는, 소위 남아(男兒) 살해정책입니다. 이러한 험악한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숨겨 오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해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담아 그 상자를 나일 강변의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때 요게벳이 어찌 하나님께 그 어린 아들을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녀는 딸 미리암을 그곳에 남겨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아기 상자가 나일 강을 따라 그냥 떠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요게벳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그때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기 위해 물가로 나왔고, 공주는 때마침 갈대 사이에 있는 그 상자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상자를 열어 보자 곧 바로 아이가 울었습니다. 이에 공주는 측은하게 생각하며 “히브리 사람의 아이구나!” 라고 말합니다. 애굽 공주를 나일 강변으로 인도하신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갈대 상자를 발견하게 하시고, 그 아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신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잠언21:1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공주의 마음이 하나님 손에 있어 이끌려 모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공주는 아기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미리암이 민첩하게 행동합니다. 미리암은 지혜롭게 자신이 어린 아기의 누나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내가 가서 히브리 여자 중에 유모를 불러다가 공주님을 위해 그 아이를 양육하게 할까요?’ 라며 그 아기를 위해 히브리 보모(保姆)를 찾아보겠다고 제안했고, 이미 하나님의 손에 이끌린 공주는 그 제안을 이내 받아들여, 미리암은 그의 친모 요게벳을 공주에게 데려갔습니다. 공주는 그녀에게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해 젖을 먹여라. 내가 그 삯을 주겠다.’ 라며, 요게벳으로 하여금 모세를 양육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애굽 왕의 히브리 남아 살해정책이 시행되던 때라, 애굽의 공주 역시 그 정책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주의 마음을 어린 모세에게 인도하셨고, 때를 놓치지 않고 미리암으로 하여금 민첩하게 공주에게 다가가 ‘내가 가서 히브리 여자 중에 유모를 불러다가 공주님을 위해 그 아이를 양육하게 할까요?’ 라고 말하도록 해서, 친모 요게벳을 보모를 보내 모세를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으로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히브리 여자 중에 유모를 불러다가 공주님을 위해 그 아이를 양육하게 할까요?’ 어린 소녀인 미리암이 공주에게 이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에서 나온 지혜였습니다. 이 말은 요게벳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어린 소녀 미리암의 입에 담아 두신 것이었습니다.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고 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40년 동안 그들의 지도자가 될 모세의 생명을 지키시고 양육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암의 입에 그와 같은 지혜로운 말을 담아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하기 위해, 적절한 때에 우리 입에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운 말을 담아주셔야 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말씀들이 필요에 따라 적절한 때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또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하나님께 헌신된 우리 마음과 입술을 사용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약3:11-12)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마음에 단 물을 담아두면 단 물을 내고, 쓴 물을 담아두면 쓴 물을 내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충만하게 마음에 담아두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하게 담아두면, 지혜로운 언어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자라는 아들이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결혼을 성사시키고 싶어서 “여자를 만나거든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해. 좋은 인상을 심으려면 가장 먼저 사랑 이야기, 다음으로 가족 이야기, 그리고 철학 이야기로 마쳐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결혼 상대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여자를 만난 아들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 말씀을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국수를 사랑하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여자가 “내가 국수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라고 대답하자 “오빠가 있나요?”라며 가족 관계를 물었습니다. “오빠는 없어요.”라고 대답하자 다음은 철학 이야기임을 생각하고 “만일 당신에게 오빠가 있다면 국수를 얼마나 사랑하였을까요?”라고 철학적으로 물었습니다. 여자는 너무도 엉뚱한 질문에 실망하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은 배운 지식으로 살지 말고 그때그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삶이 되도록 하나님 지혜의 보고(寶庫)인 하나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여 마음에 담아 묵상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미리암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선지자로 하나님 말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찬양을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가 덮쳐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홍해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노래했습니다.(출15:1-18) 그리고 이어 미리암이 악기(탬버린)을 손에 잡자 이스라엘 모든 여인들도 그녀를 따라 소고 악기를 잡고 춤을 추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때 미리암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출15:20-21)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모세와 미리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가 갈라지면서 생긴 마른땅 위를 걸어 바다를 건너는, 어느 백성도 겪어보지 못한 경이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다윗도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대상17:20-21)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나가사 크고 두려운 일로 말미암아 이름을 얻으시고 애굽에서 구속하신 자기 백성 앞에서 모든 민족을 쫓아내셨사오며
구원받은 자들로 이스라엘은 마땅히 찬양을 드려야 함을 모세와 미리암이 보여 준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며,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에서 예배당은 극장이 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은 세련된 연기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관중이 되었고, 한때 예배라 불렸던 것이 이제는 천박한 오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장엄한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모인 사람들의 숫자와 그들이 보내는 박수갈채가 성공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억눌렸던 옛 생활과 어린양의 죽음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을 잊고 패배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창세 전에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엡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시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근심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시고 더욱더욱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발에 쇠고랑이 채워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간수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자 “(행16:26)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이 일을 지켜보았던 간수들이 그 온 가족들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았습니다.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시 66:2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하나님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으신 성도 여러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항상 찬송의 예배를 드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를 거두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빌 1:11)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마땅한 것입니다.
(시 147: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3. 마지막으로,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하는 일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미리암은 선지자로서 민첩하고 결단력있는 믿음을 지닌 여성이었지만, 비방하고 시기하는 말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아론도 말을 잘하는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위를 가졌지만 미리암과 더불어 비방과 시기하는 말로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잠언 18:20-21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말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악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말에 따라 행복하게 되기도 하고 불행에 빠지기도 하며, 말에 따라 축복을 받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며, 존경을 받기도 하고 멸시를 받기도 합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말은 그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만큼 중대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 야고보서 3:8에서는,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또 “양식(良食)과 양약(良藥)”과 같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잠12:18)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잠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다윗은 혀의 남용이 초래하는 위험을 잘 알고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141: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다윗은 혀의 남용으로 인한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존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자신을 대항할지라도 비열한 말로 응수(應酬)하거나, 그들을 악평하거나 해서 자신의 입술을 더럽히지 않도록 마음과 입술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또한 위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하려드는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서인 잠언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13:3)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가데스 바네아에 있었습니다. 성경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은 큰일을 앞에 두고 종종 부당한 비난이라는 위협에 직면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가나안 입성이라는 큰일을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지만, 모세는 이미 아프리카 흑인인 구스 여자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누이 미리암은 모세가 선택한 여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문제는 피부나 인종보다 훨씬 깊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모세나 올케의 잘못 때문도 분명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이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렸다면 아마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견해로 아론을 설득시켰고, 결국 그것을 공공연하게 가정의 문제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민수기 12:2에 기록된 그들의 질문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지위와 권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민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를 그렇게 비방하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했다는 것을 빌미로 비방하며 모세가 지닌 특권을 시기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신적 권위가 그들에게는 주어진 것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출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그러므로 결국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과 시기는 모세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 그리고 미리암 셋을 성막으로 부르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그곳에서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민12:4-8)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예언자에게는 내가 환상으로 나를 나타내며 꿈으로 말하지만 내 종 모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느니라. 그는 내 집에 충성스러운 종이므로 내가 그와 말 할 때는 직접 대면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모호한 말로 하지 않느니라. 내 종 모세는 내 모습까지 보는 자인데 너희가 어떻게 두려운 줄 모르고 감히 그를 비난하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노하시고 떠나시자, 구름이 성막 위에서 사라지고 미리암은 갑자기 문둥병에 걸려 온 몸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아론이 이것을 보고 모세에게 ‘우리가 어리석었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게. 제발 누님이 모태에서 살이 반이나 썩어 죽어서 나온 아기처럼 되지 않게 해 다오.’ 라며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께 ‘하나님이시여, 누님을 고쳐 주소서.’ 하고 부르짖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 아버지가 그녀에게 침을 뱉았어도 7일간은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는 그녀를 7일 동안 진영 밖에 가두어 두었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들어오게 하라.”(민12:9-14) 그래서 미리암은 7일 동안 진영 밖에 갇혀 있었으며, 백성들은 그녀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행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철저하게 징계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징계를 보면, 미리암만 징계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미리암이 문제를 야기만 장본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비방하고 시기하는 미리암에게 진노하시자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때, 곧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고, 그 때문에 그는 형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암을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형제의 간청에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다른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진영 밖에 격리시키셨고, 그 때문에 진영 전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지체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의 죄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전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한 주 후 그녀는 다시 정하게 되었다는 판정을 받고 진영 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시기와 질투는 때로 문둥병과 같은 불치병을 겪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비방하거나 시기하는 말은 하나님을 특히 가슴 아프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사역과 영역을 기꺼이 그 분량과 경계를 지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각자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경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한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14:9-12을 보겠습니다.
(롬14:9-12)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는 언급되어서도 안 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과 같은 죄들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29-32을 보겠습니다.
(롬1:29-32)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비방과 시기는 다른 사람들이 성공할 때 비참하게 느끼는 것이고, 악독은 다른 사람들이 실패할 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악독은 둘 다 살인과 분쟁과 사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죄를 인식하고 그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죄를 자백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죄가 유대인의 율법책에 기록되어 모든 세대가 읽게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하나의 본보기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신명기24:9을 보겠습니다.
(신24: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이 말씀은 문둥병에 관한 규정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 시기와 부당한 비난이라는 끔찍한 죄와 연관된 하나의 경고이기도합니다. 비방과 시기가 마음에 꿈틀거리거든 미리암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7:19에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짓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57: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짓다.”는 말은 ‘창조하다.’(히브리어, ‘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듯이 “입술의 열매”, 곧 사람의 말대로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에 상관없이 그 말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사람의 지식 유무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무관하게,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입술의 열매”라는 표현은 사람의 말은 ‘씨’와 같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말이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뜻입니다. 씨앗은 아주 작지만 그 속에는 생명을 잉태시키는 생명의 근원이 숨어 있습니다. 씨앗은 적당한 온도와 수분 등 알맞은 조건만 충족되면 새싹을 피우고 큰 나무가 돼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 터전에 좋은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포도나무를 심으면 포도 열매를 거둡니다. 가시나무 씨를 뿌리면 고통을 안겨주는 가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축복을 심으면 복을 거두고, 저주를 심으면 저주를 거두게 됩니다.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비판을 심으면 비판을 거두고 용서와 사랑을 심으면 기쁨과 생명을 거두게 됩니다. 이처럼 좋은 씨를 뿌리면 좋은 열매를, 나쁜 씨를 뿌리면 나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씨가 좋아야 그 열매가 좋듯이, 좋은 말,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지혜로운 말을 뿌리게 될 때 행복한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됩니다. 참으로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됩니다.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입술에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잠20:15)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언어생활로 더욱 귀한 보배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생활로, 선하고 아름다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가 풍성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유한 자 모세처럼
민 12:1-3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온유한 자 모세처럼”입니다. 여러분!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온유(溫柔)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따뜻하고 부드럽다.”입니다. 저는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온유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 그러면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는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비겁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무조건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작 화를 낼 때에는 화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 진정 온유한 사람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성경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온유를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를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말할 때 구약에서는 모세를, 신약에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온유한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들, 이 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평소에는 행동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부드럽다가도 반드시 화를 내야 할 때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떤 때 화를 내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과 상반된 일이 발생했을 때는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집어 던졌으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하나님 말씀이 판단 기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진정 온유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에도 잘못되었다고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기만 했던 참으로 비겁한 자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민수기 12장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팔십이 넘은 모세가 저주받은 함의 자손인 구스 사람 즉 에디오피아 여인을 자기 아내로 취하자 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에디오피아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어떤 연유에서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의 후예요 흑인인 구스 여인을 모세가 취하였다는 사실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의 위치와 입장을 헤아려 볼 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면서 대항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미리암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고 또 문둥병이 미리암에게만 임한 것을 보면 미리암이 먼저 비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영적 지도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절 내용이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내용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도 모세처럼 하나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 제도적인 면에서 보면 그 당시는 일부다처주의 사회였으며, 노예를 소실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지도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야 할 책임을 진 하나님의 종이요, 팔십이 넘은 노인으로써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이었습니다.
특별히 미리암의 생애를 통해서 모세를 조명해 본다면 미리암은 남동생인 모세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건 모험을 감행했던 사람입니다. 즉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 바로 미리암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리암은 핏덩어리 모세를 역청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서 애굽인의 눈길을 피해 나일강에 띄운 여인입니다.
행여나 그 어린 생명이 죽을 새라 끝까지 갈대숲을 따라가서 살핀 여인이요, 바로의 딸에게 모세가 발견되자 재빨리 달려가서 유모를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던 여인입니다.
공주의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친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하고 어머니를 유모로서 데려다 줌으로써 모세는 진짜 어머니 품에서 기적같이 성장하여 애굽의 궁중에서도 히브리 교육을 어머니에게서 직접 배웠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길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누이 미리암이 동생 모세를 나무라듯이 비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하나님께서 세 사람을 장막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모세에 대해 비방하지 말라고 엄히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 모세가 비난받거나 정죄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세가 비록 실수와 잘못을 통해 그의 성직과 영적 권위가 비방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 당신께서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비방을 당하는 원인이 구스 여인을 취해서 생기게 된 것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모세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구실이었지 이면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지 않느냐?” 뭐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적인 시기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만이 백성들 앞에 돋보이는 것에 대한 시기심을 갖게 되었는데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모세와의 차별성에 대해서 6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모세를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모세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충성된 종이요, 모세에게 대한 비방은 곧 모세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고,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9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이 걸렸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들고 계실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과 동족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이유야 어찌됐든 애굽 사람을 그 자리에서 쳐 죽인 혈기 많은 사람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새겨 주신 십계명 돌비를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분노함이 충천하게 될 때에 그는 그 십계명이 새겨진 비석을 그대로 내려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참으로 다혈질적인 사람이요, 참을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하고,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 모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향하여 지팡이를 한번 내리치라!’고 하셨는데도 홧김에 두 번이나 반석을 내려치는 죄를 범한 실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세는 혈기가 가득 찬 다혈질적인 사람인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그것도 세상 모든 사람들 보다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어떤 점을 보시고 그를 온유하다고 말씀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온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가 무엇입니까? 이 '온유'란 말은 히브리말로는 ‘아나바'라고 하는데요? 그 어원은 ‘안와’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의 뜻은 '굽히다' ‘굴복한다' 혹은 '절을 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습니다. 그냥 구부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낮아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에 굴복해서 굽히는 게 아니고, 스스로 굽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무엇이 무서워서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면서 굽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수단도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자기를 굽히는 마음! 이것이 온유입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의적으로 굽히는 마음이 온유인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겸손하다는 말과 혼용해서 쓰는 데 '온유'는 '겸손'과는 다릅니다.
여러분! 겸손이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쓰여지는 덕목이지만, 온유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도 쓰여지는 덕목! 하나님의 속성을 지칭할 때에도 쓰여지는 소중한 덕목입니다.
사람에게 겸손하다는 말은 하지만 하나님을 가리켜서 겸손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온유라는 말은 사람에게도 쓰여지지만, 하나님에게도 공히 쓰여지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22장 36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을 온유하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사용되어지는 소중한 성품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인간의 성품으로서는 온유한 성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을 배워서 성령의 도우심과 전적인 은혜로 우리는 비로소 온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온유'라는 성품은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기록하고 있는데, 모세는 이러한 온유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비방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오히려 책망하신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든 백성들과 함께 우상을 숭배했던 자입니다. 모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지요. 그러나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을 향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비방을 비방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의 온유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온유는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자처럼 허리를 굽히는 자세! 바로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예수님과 같이 모세와 같이 온유한 자로 든든히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흔히 ‘온유하다’ 그러면 좀 약해 보이고, 나약하게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여유가 있고, 포근하면서도 강합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권투를 할 때에도 어깨에 힘을 빼고 짧게 끊어서 치라고 말합니다. 부드러움이 곧 강함인 겁니다. 골프를 칠 때도 그렇고, 야구를 할 때도 그렇고... 뭐든지 어깨에 힘을 빼야 됩니다. 힘이 잔뜩 들어가면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고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사람을 보십시오. 얼마나 몸이 유연하고 부드러운지 모릅니다. 허리도 유연하고 팔도 유연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또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몸이 부드럽지 않고 단단하게 굳어 있습니다.
소화가 안 되면 틀림없이 배가 단단해져 있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면 그 다리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꼼짝을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단단하게 뭉친 것을 부드럽게 풀어줘야만 됩니다.
단적으로 죽은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온 몸이 뻣뻣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마음, 열린 마음, 성령이 충만한 마음은 부드럽고 여유가 있고 따뜻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죽은 마음은 얼음 덩어리처럼 차갑고 바위와 같이 단단하게 굳어 있습니다. 옆에만 지나가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고,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얼마나 썰렁하고 거북한지... 말도 제대로 못 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유함'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여덟 번째가 바로 온유의 열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가 바로 온유함입니다.
시편 37편 11절이나 마태복음 5장 5절에 보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온유한 자가 땅 부자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온유한 자가 하나님나라 즉 천국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가 천국 백성이 된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모두에 온유함의 기준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말씀!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준행하는 자는 천국 백성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온유함의 극치가 있습니다.
이 무슨 말인가 하면 ‘온유함이란 나는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만, 내 뜻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온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자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애굽에서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사랑만 받고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러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거길 도망쳐 나온 배신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바로의 궁전에 도저히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핑계 삼아 “하나님!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모세는 지금 할 수만 있다면 애굽에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너는 나만 믿고 가지 않겠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때에 모세는 자기 생각, 자기 마음속에 있는 두려운 마음, 인간적인 지식이나 판단을 다 버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수용하고 굽히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드리는 그 모습을 한번 마음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는 진정 온유한 사람임을 우리는 똑똑히 보게 됩니다. 자기 부족함이나 허물을 생각하지 않고, 모세는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굴복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여러분! 이 '온유함'이라는 것이 아주 소중합니다. 온유함이란 하나님 말씀으로 철저히 훈련되어지고 다듬어져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품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교만한 자에게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교만한 자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합니다. 교만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온유해지고, 낮춰지고 나면 거짓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는 정직합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힘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을 다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오면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리고는 그를 치켜세워 줍니다. 그의 뒤에서 그를 적극 후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매사에 하나님 편에 서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철저하게 낮아질 줄 아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실 모세는 충분히 변명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야!’ 이런 자세인 겁니다. 뭐! 나쁜 놈을 보고 나쁘다고 말하는데... 아! 죄인을 보고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모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고, 홍해를 건너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너그럽게 봐달라고 자기의 업적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전혀 미워하지도 않고 조용히 그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용하게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묵묵히 참고 수용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온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정죄를 당할 때 모세는 직무 유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비방하고, 모함하고, 없는 말을 지어서 말하고, 마음을 헷가닥 뒤집어 놓아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만큼은 결코 내려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이 우릴 비난하고 정죄할 때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반응합니다.
“좋아! 그러면 내가 그만두면 될 거 아니야!” “에이!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내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러면서 손을 툭툭 털고 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그 자리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접어두고 사람 말을 따르는 비겁한 모습입니다. 지금 사탄 마귀만 좋아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럴 때 모세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놈이야!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도 죄인이었고, 오늘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쓰셨고, 나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것은 하나님의 의일 따름이지 나 자신의 의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변명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모세의 위대한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런 어려운 비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저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간구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거룩한 사명을 그대로 지켜 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온유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 왕은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온 백성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왕관을 벗어 던지지 않았습니다. 옷을 벗고 초야에 묻히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51편 5절 말씀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무슨 말입니까?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낳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죄인입니다. 사건은 지금 일어났지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입니다!" 뭐 이런 뜻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기서 이상한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의 이런 점을 존경합니다.
죄를 회개하는 다윗도 물론 훌륭하지만, 죄를 회개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길을 끝까지 참고 그대로 지켜나가는 다윗 왕! 이 얼마나 위대한 모습입니까?
(찬양)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그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사는 삶! 이것이 바로 온유한 자의 모습인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한 자 모세는 비판과 냉소 앞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인하고서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 온유했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 그는 비록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의 온유한 마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고 계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모세!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다 된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데 그 누가 정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온유한 자 모세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이 음성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들려져서 진정 온유한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질투심을 극복하라
민 12:!-6 / 피영민 목사
서 론
민수기 1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지 못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자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 떼를 불러서 한 달 동안 고기를 실컷 먹여 주시고, 먹은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끼어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민수기 11장을 요약하면 ‘백성들의 원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민수기 1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모세의 가족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하세롯이라는 곳에서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은 ‘형제들의 원망’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왜 모세를 원망했을까요? 사람의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영어로 pride라고 하는데 사람이 pride를 갖고 있다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학벌이 좋아서, 집안이 좋아서, 혹은 우리 가정이 잘 되어서 pride를 갖게 되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런 자존감도 갖지 못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런 pride를 가지는 것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pride란 자기 자신에 대해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 교만심, 즉 pride가 자기 자신으로 국한될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만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할 때, 거기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에 있을 때 비로소 만족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나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영역에서는 내가 남보다 뛰어나지만 또 다른 영역에서는 남이 나보다 탁월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떤 영역에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뛰어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 문제를 일으킵니다. 질투심과 시기심이 일어나서 결국 상대방을 비판하고 원망하는 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교만은 매우 누르기 어려운 감정이다. 교만을 쳐서 누르고 가능한 한 교만을 죽이라. 그러나 교만을 다 죽였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다시 교만이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이 다 죽어서 내가 겸손한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자신이 겸손하게 됐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또 다른 교만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1. 원망과 비방의 5가지 특징
아론과 미리암의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교만입니다. 이들이 모세와 접촉할 때에,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인해 모세를 시기하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어떤 이유로 모세를 비방했습니까? 1절 말씀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구스 여자라는 말은 아프리카 여자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흑인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미리암은 이를 가지고 모세를 비방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망과 비방의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원망과 비방은 주로 은혜를 베푼 사람이 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은혜를 베풀었는데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할 때, 원망과 비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입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당시에 애굽왕은 히브리인의 모든 남자아기를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의 어미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그 때에 강가에 서서 갈대상자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본 사람이 바로 미리암이었습니다. 후에 애굽의 공주가 그 갈대상자를 취해서 모세를 끄집어 낼 때에 얼른 따라가서 모세를 위해 그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미리암입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무사히 건너고 홍해를 뒤쫓아 온 군대가 모두 빠져죽었을 때, 소고를 치며 부르는 모세의 노래에 화답 한 사람도 바로 미리암입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여선지자요, 모세와 함께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리암은 모세의 생명의 은인이요, 모세의 후견자요, 모세의 누이로써 모세와 늘 함께 하며 그를 도왔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암이 더욱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을 갖기 십상입니다.
두 번째로 원망과 비방은 주로 가까운 사람을 상대로 합니다. 자기와 상관도 없이 멀리 사는 남아메리카나 푸에르토리코 사람을 비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가까이 있는 자신의 아내나 남편, 부모와 자식, 친척, 그리고 목사와 성도들을 비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봐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잘 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나와 상관이 없기에 그들을 비방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지금 원망, 비방, 교만, 질투의 정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가까운 나의 가족, 친구,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가까운 상대를 향하여 원망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세 번째로 이 원망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원망하면 온통 다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을 보면 아론은 미리암에게 이끌려 함께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를 향해 수군거립니다.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도 뒤따라가면서 원망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미리암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원망을 하게 되면 이 원망은 결국 전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원망을 전염시킬 때 앞장섰던 사람은 나중에 벌 받을 때도 앞장서게 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벌을 받을 때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은 미리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것을 전염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비방거리를 찾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들에게서도 결국 비방거리를 찾아내고 맙니다. 잘한 사람에게도 비방하려면 비방거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세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뽑을 수 있는 훌륭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비방 받을 아무런 죄와 허물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대제사장, 서기관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일 등을 트집 잡아 예수님을 비방하고 시기해서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비방하려고 마음먹으면 누구라도 비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애초에 그런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사람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처럼 남을 비방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 과정과 결과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 특징은 다른 사람을 향한 비방은 사실상 자신의 문제를 은폐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목회하던 짐 베이커 목사가 TV에 나와서 전도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함께 TV에 출연해서 재미있게 방송을 진행하고 전도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이 목사가 성추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제가 목회를 하던 루이지애나 주에 있던 한 오순절 교회의 지미 스웨거트 목사가 짐 베이커 목사를 마구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이 지미 스웨거트라고 하는 목사가 짐 베이커 목사보다 더 큰 죄를 지었던 것이 발각되어 더 큰 망신을 당했다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지미 스웨거트 목사는 왜 짐 베이커를 비방했을까요?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더욱 짐 베이커를 비방한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비방했지만 사실 근본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2절이 원인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지위를 질투했습니다. 모세를 시기하고, 모세에 필적할 만한 권력과 명예를 원했던 것입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자기들도 선지자의 대열에 서게 된 것을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모세를 비방하고 자신들도 모세 못지않은 존재임을 과시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근본원인입니다. 이런 질투심의 근원이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해도 안 되지만,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해도 안 됩니다. 자기를 과소평가하면 열등감에 시달리고, 과대평가하면 과대망상에 걸리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는 사람에 대한 교만심을 일으켜서 질투를 유발하고 결국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남을 비방하고 원망하는 죄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질투에 대한 모세의 반응
그렇다면 이런 질투를 당한 모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유함이라는 단어가 영어성경에서는 humble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겸손하다’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겸손하고 어려움을 인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민수기 11장에서 백성들이 원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느라 상당히 지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형제까지 원망하고 대드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제가 모세 같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형님, 그리고 누이! 제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입니까? 내 나이 여든 둘에 저의 결혼문제, 가정문제까지 형님과 누이의 간섭을 받아야 합니까?” 그러나 모세는 오래 참는 인내심과 겸손함, 그리고 온유함으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입니다. 두 사람은 목회의 방법이 같았고 구령의 열정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달랐습니다.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주의자요, 조지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의 신학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조지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휫필드의 대답이 얼마나 온유한 것입니까? 비록 신학이 다르지만 웨슬리 목사의 능력과 영향력을 인정한 휫필드 목사의 태도는 매우 훌륭합니다. 모세의 태도 또한 이와 같이 온유하였습니다.
3. 질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모세의 온유함은 언뜻 보면 연약해 보이는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을 불러왔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미리암과 아론을 회막 앞으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개입하셔서 첫째로 하신 일은 미리암과 아론의 죄를 드러내시고 모세를 변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변호를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왜 너를 천국에 넣어주어야 하느냐? 너는 이런 저런 죄가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하나님! 저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이기에 저 사람의 죄가 나에게 모두 옮겨져서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 되었습니다”라고 우리를 변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호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변호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를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 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도 내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지만, 비록 그들이 선지자라 할지라도 꿈과 이상으로만 계시를 주실 뿐 모세처럼 직접 대면하여 은밀한 말로는 하지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권위와 존귀와 영광이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질투한 것은 그들의 죄이며 모세가 잘못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통해 미리암과 아론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원망과 비방은 우리의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여 결국 죄를 자백하도록 만드십니다. 11절부터 12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로 살이 반이나 썩고 죽어서 모태에서 나온 자 같이 되게 마옵소서.” 아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인 여자를 취한 문제로 모세를 비방했지만, 이제는 모세를 “내 주여”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 용서를 받습니다. 13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을 향하여 그들이 받는 벌이당연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얼마나 온유한 사람입니까?
결국 모세의 기도를 통해 미리암과 아론은 죄 용서함을 받았지만 죄의 흔적은 남게 되었습니다. 나무에 못을 박았다가 빼면 못자국이 남는 것처럼,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는 반드시 아픈 상처와 흔적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려 7일 동안 진 밖에 쫓겨나는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버지가 딸을 부끄러워해서 딸의 얼굴에 침을 뱉은 사건으로 비유십니다. 아버지가 딸을 부끄러워해서 그 얼굴에 침을 뱉어도 그 수치를 씻으려면 일주일은 걸리는 것처럼, 미리암은 일주일 동안 진 밖에 쫓겨나 고생하다가 치료를 받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드러내시고 변호할 사람 변호하시며, 죄를 자백하게 하고, 죄에 대한 적절한 벌을 내리신 후에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남을 비방하는 근원은 시기심과 질투심이며, 그 뿌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입니다. 성경은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교만해서 일단 자신을 높이기 시작하면 결국 고꾸라지기 되지만, 겸손하게 몸을 낮추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올리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한 것을 작은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는 예수님을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입니다. 모세를 비방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해서 비방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죄를 크게 다루신 것이라 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 대제사장,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이적을 마음 속 깊이 시기하고 질투했습인류의 근본 죄는 바로 시기심과 질투심이며, 이 시기심의 근원은 인간의 교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2006년을 새롭게 시작하시는 여러분들은 마음을 낮추고 겸손한 영으로 무장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비방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무서울진저”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비방과 시기를 당해서 억울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모세처럼 온유함과 인내와 겸손으로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겨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윤리적인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방을 그치고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인데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고 선포한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2006년을 바로 살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겸손함을 가지고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2006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슨 권위로? 민주적인 공동체
민 12:1-12 / 이병일 목사
지난 16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습니다. 수험생들 중에는 조금 숨을 돌리는 이들도 있지만, 실기와 논술을 준비하느라 계속해서 긴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논술에서 자기의 논리를 전개할 때에 논거로 자주 인용되는 명언들의 목록이 있는 데,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 하나가 에리히 프롬입니다.
저도 20년 전에 프롬의 책을 구하는 대로 읽으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 사람에게 빠지면 한동안 그 사람의 책만을 구해서 읽었는데, 헤르만 헤세와 에리히 프롬이 그들이었습니다. 프롬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그의 글들이 평소에 제가 관심이 많고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에 대하여 저와 생각이 비슷하면서도 더 깊은 내용으로 저를 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롬은 사회심리학자로서 사람들의 관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많은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로 얽혀 있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서도 예리한 분석을 하였으며, 상황이 많이 바뀐 지금도 그의 생각과 이론은 개인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이 도움을 줍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의 책 중에서 어떤 것이 기억에 남습니까? 그의 가장 유명한 책으로는 ꡔ사랑의 기술ꡕ과 ꡔ소유냐 존재냐ꡕ입니다. ꡔ사랑의 기술ꡕ은 연애의 테크닉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많으나, 테크닉이 아니라 아트(Art)입니다. 제가 더 좋아했던 책은 ꡔ너희도 신처럼 되리라!ꡕ와 ꡔ반항과 자유ꡕ 그리고 ꡔ인간을 위한 인간ꡕ 등이었습니다.
프롬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유형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기도 했고, 특히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인간의 현실이나 집단성을 예리하게 분석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 중에서 ‘권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권위는 사람의 관계설정에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프롬은 권위를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로 나눕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어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의 성장을 돕는다. 비합리적 권위는 ‘힘’에 바탕을 두고 있어 그에 종속된 사람을 착취한다.”<ꡔ소유냐 존재냐ꡕ>
합리적인 권위는 능력에서 유래합니다. 어떤 사람의 권위가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맡긴 일을 잘 처리하는데 있습니다. 그는 남을 위협할 필요도 없고 또 마력으로 그들의 찬양을 받도록 자극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힘을 믿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한 그의 권위는 합리적인 기반 위에 서게 되고 비합리적인 두려움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합리적인 권위는 그것을 따르는 자가 끊임없이 그것을 음미하고 비판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항상 일시적이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이 지닌 효용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비합리적인 권위의 원천은 언제나 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이 힘은 신체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 권위에 따르는 사람들이 불안하고 의지할 곳이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적일 수도 있고 단지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권위를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항상 한쪽에는 힘이, 다른 한쪽에는 공포가 필요합니다. 이 권위에 대한 비판은 요구되지 않을 뿐더러 금지되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권위에는 계급사회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 자리 또는 그 지위 자체에 주어지는 전통적인 권위와 종교적 신탁이나 신비한 능력에 바탕을 둔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합리적인 권위는 권위를 가진 사람과 그것에 종속하는 사람의 평등 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양자는 단지 어떤 특정한 분야에 있어서의 지식이나 기능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권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의 차이까지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많은 문제들 중에는 합리적인 권위와 비합리적인 권위를 혼동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특별한 권위에 익숙해져 있는 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강남향린교회 아홉 가지 신앙고백에는 “민주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교우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가며,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존중되는 공동체를 만든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교회의 모습 속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적인 공동체라는 신앙고백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물론 원론적으로는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지만, 교회의 모든 일을 누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교우들입니다. 저는 평신도라는 말보다는 ‘교우’라는 말이 더 좋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교우들의 자발적인 참여 비율이 높은 편이고, 그것이 하나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전교우 수련회 준비와 실행을 비롯하여 각종 행사를 교우들의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참여합니다. 이러한 것이 각 부서와 신도회의 활동을 통해서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예전<1997년 5월 25일>에 김경호 목사님도 ‘교회의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늘뜻펴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변두리에서 맴돌다가 중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고백을 한 교우도 있습니다. 교회의 일에서 어떤 성과를 만드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우들의 참여와 더불어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모두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은 더디 가더라도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화려한 결과보다는 풍성한 과정 그 자체를 즐기며 옆에 있는 교우들과 지내는 순간순간마다 기쁨이 넘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2년 동안의 일을 돌이켜 보니, 아직 미숙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앞세운 적이 있습니다. 당위성을 강조하면 그만큼 부담도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는 당위보다는 함께 참여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교역자로 있을 때에는 좀더 느긋하면서도 재미있게 일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담임교역자라는 책임과 부담에 제가 잠시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언제나 힘과 성원을 보내주시는 교우들에게서 제가 더 큰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에 교계에서는 ‘평신도에게 설교권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문제로 논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강남향린교회에서는 교우들이 하늘뜻펴기를 합니다. 2년 동안 20여분의 교우들이 삶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생각이나 교회생활에서 느끼는 감흥을 각각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평신도와 안수 받은 사람을 갈라놓고 특권 아닌 특권을 강요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입니다. 교우 하늘뜻펴기를 계속하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막상 자기가 준비하려면 부담되지만, 많은 교우들이 다른 교우들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다른 교우들의 삶과 신앙에 대하여 알고 싶은 교우들의 마음은 서로에 대한 사랑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늘뜻펴기를 한 교우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시간들, 만났던 사람들, 고민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하면서 모든 교우들이 이 자리에 서는 그날까지 교우 하늘뜻펴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여서 내년에도 교우 하늘뜻펴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강남향린교회는 목사 임기제와 장로 임기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임기제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남한의 교회가 처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져서 여러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임기제는 교회의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당회원이 한 번 청빙을 받거나 임직을 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정년퇴임할 때까지 시무하게 되어 특정한 소수에게 많은 권한이 장기적으로 주어지게 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교회운영의 보수성과 비민주적인 가능성을 지양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목사 임기제가 있기에 교우들의 주체적인 참여는 더욱 필요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원주 변두리의 작은 교회에서 지금 전임전도사가 하는 역할을 하면서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거의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회에서 공부하고 잠을 자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다시 학교로 갔습니다. 또 수요일이면 일찍 와서 어린이부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도 했습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전도사로 왔다가 목사안수를 받으면 떠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바뀔 때마다 교회의 세세한 부분은 목회자의 성향이나 뜻에 따라서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교우가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요’ 라고 말하면 ‘그건 그 때의 일이고 나는 나다.’ 하면서 자기의 뜻대로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청빙했는데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바뀌면서 교회의 성향이 바뀌고, 갈등을 겪는 교회를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따라서 목사 임기제는 교우들의 주체적인 신앙과 활동을 더욱 요구합니다.
장로 임기제에서 중요한 것은 장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입니다. 장로(長老)는 어른 장에 늙은 로 자를 쓰는데, 연륜이 오래되어 한 공동체를 이끌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사회 속에서나 군대에서처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는 그 연륜이 지혜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는 의미가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장로는 신분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직책이 아니라, 모든 교우들의 대신하여 잠시 동안 교회의 운영을 맡은 직책입니다.
우리는 아직 장로 임기의 한 순번이 되지 않았지만, 장로 임기제를 시행하고 있는 교회, 특히 임기가 지나서 재선출이나 재신임을 해야 하는 교회에서 겪는 미묘한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선출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계속 그 교회에서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장로의 직분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를 조직하지 않거나 당회를 해체하고, 아예 운영위원회를 만들어서 그 역할을 대신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7년의 임기가 끝난 장로들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시무를 못하겠다고 설레발을 칩니다. 우리교회와 비슷한 성향의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는 일을 참으로 힘듭니다. 예전처럼 떠받드는 분위기도 아니면서 복잡한 교회 일을 도맡아서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뭔 회의는 그렇게 많은지, 교우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도 줄어듭니다. 그래서 일 하라고 장로로 뽑았는데, 장로가 되면 일을 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도 여러분이 뽑아서 여러분의 일을 대신하느라 수고하시는 장로님들께 위로와 용기를 주십시오. 장로님들도 몇 년만 수고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힘을 내셔서 더 많은 교우들을 만나고 의견을 수렴해서 교우들의 생각이 교회운영에 잘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사회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의 이면을 보면, 앞에서 말씀드린 권위가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든가, 주어진 권위를 넘어서 권력처럼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2:1-16에서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은 모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하느님과 교통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권위를 비방합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이 직접 내려와서 아론과 미리암을 야단치고 떠나갔는데,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되어 일주일 동안 격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모세가 미디안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은 잘못인데, 그 잘못을 지적한 미리암과 아론이 왜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야 합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진노를 받았는데, 왜 여자인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려야 합니까? 그 이유야 어떻든 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다고 하는 모세,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모세, 하느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하는 모세의 권위를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하여 세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위해서 꼭 필요한 율법을 전수한 모세의 권위를 세우고 인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이 이야기가 하느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와 협박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권위를 빌려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던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의 논쟁을 보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 대제사장들이 와서 묻습니다. “누가 당신이게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그들에게 반문합니다. 그들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워서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지도 못하고 사람에서 왔다고 하지도 못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이 일화는 “권위는 누구로부터 오는가?” 즉 “권위의 근거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대답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세움 받은 모세의 권위를 차지하고 백성들에게 행사했던 대제사장들의 권위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권위는 해방공동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는 전체 이스라엘에 의해서 세워지고 지켜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권위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 대제사장들이 무서워 한 무리들로부터 나왔고, 지금까지도 그를 따르려고 노력하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반생명적 억압과 어쩔 수없이 죄인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한 무리들로부터 예수님의 권위는 인정받았습니다. 훗날에 그들은 예수님을 “주”, 퀴리오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권위를 받았고,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 여러분이 세운 장로나, 여러분이 청빙한 목사의 권위는 바로 교우 여러분으로부터 나왔으며, 여러분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권위는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함으로써 드러납니다. 우리가 자기의 자리에서 스스로 선택한 직분을 감당함으로써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 되고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주체적인 신앙으로 강남향린의 모든 교우가 강남향린 공동체의 주인이 되기를 빕니다.
분노와 자만과 비방
민12:1-3, 20:2-13 / 김명혁 목사
오늘 “죄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6번 째 설교를 합니다.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최행덕 집사님은 설교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야곱과 같은 자기에 대한 설교라고 느끼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습니다.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시는 집사님 부부가 우리교회에 처음으로 참석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요사이 대부분의 설교가 교인들을 칭찬하고 축복을 강조하는 설교인데 비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구역장 공부시간에도 구역장들이 설교를 통해서 이기적이고 간교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었다고 말하며 깨달은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나누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모세와 미리암의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모세의 죄’란 말을 듣고 여러분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극진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민12:3에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다고 했습니다. 민12:7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했다고 했습니다. 신34:10에 보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사람인데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17:3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람 ‘모세의 죄’란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의아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죄가 있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도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죄가 있었습니다.
첫째 모세는 분노와 자만의 죄를 범했습니다.
모세가 죄를 범한 곳은 신 광야 가데스였습니다. 출애굽한지 거의 40여년이 되어가는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습니다. 모세와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되.” 물론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었고 그래서 모세를 원망했고 모세와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로 반석을 치게 했고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마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번에도 또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세를 공박했습니다. 사실 그런 불평과 원망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거의 40여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떡이 없으면 떡이 없다고 원망했고 고기가 없으면 고기가 없다고 원망했고 부추와 마늘이 없으면 부추와 마늘이 없다고 원망했고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원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불평이 너무 많지요. 그러나 모세는 참고 또 참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저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리라”(출32:9,10).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32:32).
그런데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면서 온유와 충성을 지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던 모세가 가데스에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죄를 범했습니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는 죄를 범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반석을 두 번 지팡이로 쳤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민20:11). 물론 물은 솟아났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와 자만을 보시고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이끌고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12). 신32:51에서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32:51,52).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것이 그렇게 큰 죄 같이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게는 큰 죄로 보였습니다. 모세가 두 가지 죄를 범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에게 분노하고 혈기를 부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여기 모세의 분노와 혈기가 나타났습니다. 한 번 쳐도 되는데 두 번 친 것은 분명히 분노를 발하고 혈기를 부린 것이었습니다. 화를 내는 사람들과 너무 오래 같이 있다가 모세는 그만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김삼환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화내는 사람 옆에 있으면 화나기 쉽습니다. 싸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흥분하기 쉽습니다. 불평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함께 불평하기 쉽습니다.” 모세는 불평하고 화내는 사람들과 너무 오래 함께 있다가 그만 자기도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목사도 불평하고 화내는 사람들과 오래 같이 있으면 화를 내기가 쉽습니다. 목사도 반석을 두 번 치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모세의 분노와 혈기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첫째 분노하고 혈기를 부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자만한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가 화가 났을 때 마치 자기가 물을 낼 수 있을 듯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자신을 들어내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자만함과 방자함과 불신앙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박윤선 목사님은 모세의 이 말을 ‘망령된’ 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목회에 성공했을 때, 설교사역과 부흥사역과 치유사역에 성공했을 때, 자만해질 수도 있고 방자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목회도 설교도 부흥도 치유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를 지르며 자만해지고 방자해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만 마지막 순간에 자만함과 방자함에 빠지는 죄를 범했습니다. 모세의 자만과 방자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은 원망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둘째 자만함과 방자함에 빠지는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심각한 교훈을 줍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제직들도 조심하고 목회자들도 조심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불평과 원망을 너무 많이 하면 목회자들도 분노와 혈기를 부리는 죄를 범할 수 있고 자만함과 방자함에 빠지는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에게서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거두어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의 축복을 제하신 것 뿐입니다. 불평 원망하지 맙시다. 분노와 혈기를 부리는 죄를 범하지 맙시다. 자만함과 방자함을 나타내는 죄를 범하지 맙시다.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양선을 우리에게 옷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미리암은 비방과 자만의 죄를 범했습니다.
미리암은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의 신앙을 이어 받은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었습니다. 모세보다 12살 위인 모세의 누나였는데 어린 동생 아기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운 후부터 어머니와 함께 모세를 양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 미리암은 모세와 함께 중요한 영적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출15장에는 모세의 노래와 함께 미리암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라고 모세가 노래했을 때 미리암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화답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때 미리암은 선지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여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출15:20,21). 미리암은 출애굽 이후에도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해롤드 옥켄가 박사는 미리암의 생애를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과찬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미리암 만큼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No one had a more exalted place in Israel’s history than Miriam.
그런 미리암이 죄를 범했습니다. 미리암의 죄를 기술하면서 옥켄가 박사는 이런 경고를 했습니다. “미리암의 죄는 우리 모든 신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서 있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할 것이다.” 미리암이 범한 죄는 비방과 자만의 죄였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게 된 계기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구스 여자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 구스 여자가 모세가 처음에 아내로 취한 미디안 사람 십보라라는 설과 십보라가 죽은 다음에 아내로 취한 구스 여자라는 설과 십보라가 살아 있을 때 둘째 아내로 취한 구스 여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했을 때 왜 미리암이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모세를 비방했을까요. 자기의 영적 리더십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여자가 십보라이든 십보라가 죽은 후에 나타난 구스 여자이든 그 여자가 모세의 아내로서 즉 First Lady로써 자기 대신 받게 될 관심과 영예를 질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대신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과 사랑과 영예를 받을 때 그 사람을 질투를 합니다. 여자들에게는 그런 질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다른 여자가 나타날 때 그 여자를 질투하게 되고 그 여자를 취한 모세마저 비방하게 됩니다. 자기 혼자만 비방하지 않고 아론까지 설득해서 자기와 함께 모세를 비방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론도 사실 동생 모세가 자기보다 더 큰 지도력을 행사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큰 누나가 동생 모세를 비방하고 나섰을 때 미리암에게 쉽게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미리암은 인간 모세뿐 아니라 모세의 영적 리더십에까지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미리암은 영적 자만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모세의 영정 리더십에 도전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론과도 말씀했고 미리암과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신 것은 특별한 방식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특별하고 독특한 은혜와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그것에 도전을 했습니다. “우리도 다 같은 하나님의 종들이고 우리도 다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인데 왜 모세만 특별한 사람처럼 특별한 리더십을 행사하느냐?” 라고 말하면서 모세에게 대항했습니다. 그것이 미리암에게 치명적인 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를 대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암의 비방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셨습니다. 회막으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세 사람이 회막으로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기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12:6-8). 무서운 책망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진노하시고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미리암은 즉시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아론의 회개와 모세의 중보기도로 미리암이 나중에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기는 했지만 그 사건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미리암의 역할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신 광야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세를 원망하고 공박할 때 미리암은 그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 두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세는 분노와 자만의 죄를 범했고 미리암은 비방과 자만의 죄를 범했습니다. 모세가 죄를 범한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과 공박과 비방이었습니다. 미리암이 죄를 범한 배경은 구스 여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와 미움과 반항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강변교회 성도들과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국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 가운데 불평과 원망과 비방의 소리가 많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질투와 시기와 미움이 많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반석을 두 번 치고 싶은 충동을 받을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강변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 안에 불평과 원망과 비방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질투와 시기와 미움과 비방이 곳곳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두 번 세 번 반석을 내리 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일수록 반석을 두 번 세 번 내리 치고 싶은 충동을 받을 것입니다. 통일은 점점 멀어지고 교파의 갈등과 남남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멀게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했는데 지금 마지막 여정인 신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세의 온유와 겸손과 충성을 우리들에게 옷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론의 회개를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론은 이렇게 회개했습니다.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들을 고쳐 주옵소서.”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에서 범죄한 후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위해서 중보기도와 축복기도를 했는데 그 마지막 기도를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잠깐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곧 회개하며 온유와 겸손을 되 찾았습니다. 사실 모세가 하나님께 대들 수도 있었지만 칼빈이 해석한대로 모세는 “그의 입술에는 불평도 모독도 스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습니다.” No murmurs and no blasphemies passed his lips, but he crucified himself. 모세는 역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신33장에 기록된 모세의 마지막 축복 기도는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여호와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33:29).
우리들의 죄를 죄로 갚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은혜로 갚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을 모두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불순종과 불평과 원망과 비방의 죄를 제하시기 바랍니다. 분노와 자만의 죄를 짓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온유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민수기 12:1-3 / 김삼환 목사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힘이 있어야 성공하고, 배경이 든든하고 강한 자가 되어야 이 세상을 정복하고 능치 못하는 일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권력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런 권력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겠나?'하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실 살아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역사도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온유한 자가 잘 삽니다. 양보하고 겸손하고 순하고 부드럽고 덕(德)이 있고 화평하고 사랑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잘 삽니다. 이 세상의 어떤 분보다 힘이 있는 분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분들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잘 압니다. 어떻게 보면 힘있는 동물들이 천하를 다 다스리고 자기 혼자만 살 것 같지만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호랑이나 사자나 치타나 여우나 이리나 이런 동물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번식이 되지를 않습니다. 점점 수가 줄어들게 되어서 보호해야 합니다. 국가가, 세계의 기구들이 특별히 도와주어도 번식이 잘 안됩니다. 숫자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오히려 보호해주지 않고 되는대로 버려두는 이런 동물들, 이런 곤충들, 이런 물고기들, 이런 새들은 그렇게 번식이 잘됩니다. 누구도 비둘기를 번식시키려고, 참새를 번식시키려고, 기러기를 번식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번져나갑니다. 연어를 번식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번식이 잘됩니다. 왜? 순하고 온유하니까 잘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강한 동물들은 자꾸 깊은 곳을 찾아, 산을 찾아 들어갑니다. 나오지를 못합니다. 사는 영역이 점점 좁아듭니다. 천하의 왕이면 다 다스려야 되는데 겁이나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힘이 있는데 왜 겁이 납니까?
남을 해치는 사람은 본인의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깊은 곳으로 자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밤에 활동하고, 숨어서 활동합니다. 노루나 사슴이 그렇게 부자유스럽게 두려워하면서 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떼들이 숨어서 겁을 내면서 사나요? 풀 뜯어먹을 때 밤에 나와 뜯어먹나요? 소들이 그렇게 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참새들은 사람이 있는데도 마음대로 날아와서 먹고 노래하며 잘도 지냅니다. 그러나 강한 짐승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강한 짐승들은 사랑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강한 동물 중에 둘이 정답게 살아가는 것은 없습니다. 온유하고 사랑하고 겸손해야 사랑하는 호르몬이 많이 만들어집니다. 옆에 있는 부부간에도 "어흥!"하니 그게 무슨 사랑을 하는 법입니까? 그리고 우리 나라 동물원에서 예전에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호랑이가 몇 년만에 잉태를 했습니다. 그런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습니다. 숫놈이나 암놈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한 3년이나 5년만에 기회가 와서 숫놈을 들여보내고 신방을 꾸며주면 좋아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데 서로가 잡아죽이든지 물어죽이든지 합니다. 왜? 사랑 없이 그러니까 서로가 안 되는 거죠. 숫놈도 그냥 막 달려드니까 암놈이 뭐 이런 게 오냐 그러고 받아주지도 않죠. 서로가 그런 거예요. 사랑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 삶 자체가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다. 종달새도, 참새도, 모든 동물들이 그렇게 서로 웃으며 사랑하며 기쁘게 살아가는데 강한 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들이나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수명도 짧아요. 호랑이 수명이 26년, 여우는 15년...... 다 몇 년 못삽니다. 그러나 순한 거북이 봐요. 몇 백 년을 삽니다.
하여튼 순한 동물 치고 오래 안 사는 동물이 없어요. 수명이 길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거예요. 영역도 넓고 수명도 길고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잘된다'라는 거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한 자는 힘있는 자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약한 자는 여성명사로 그냥 어디든지 실패자요 미약한 인생이요 빼앗기는 인생이요 미련한 삶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약한 자가 오히려 승리하는 사람이요 큰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음의 흡족함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람들은 다 온유한 자들, 순한 자들입니다. 사랑을 받습니다.
사람이 원숙한 단계, 성숙한 단계, 정상급에 이르면 온유해지고, 모두 순해집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골프도 힘주는 건 초보자입니다. 힘이 쑥 빠지는 것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골프는 제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3년, 5년까지는 힘이 들어갑니다. 5년, 10년 지나야 그때 힘이 빠지면서 공이 멀리 날아가는 것입니다. 야구나 배구나 다 마찬가입니다. 힘주니까 안 되는 겁니다. 강하니까 안 날아가는 겁니다. 순하면 모두 잘 날아갑니다. 힘주면 다 안돼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약한 자요 실패한 자 같지만 그 사람들이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유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과 인자가 한이 없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은혜를 수천 대에 베푸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인자와 긍휼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예수님, 좋으신 성령님!"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온유한 종교입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온유합니다. 온유한 나라들이 힘이 있습니다. 온유한 나라들이 잘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물질의 문제도 아닙니다. 정치 문제도 아닙니다. 남북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국민들의 성품이 온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품을 바꿔야 됩니다. 우리 나라는 70년대 후반부터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성품이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가장 순한 민족이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세계에서 우리 민족보다 강한 민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강해졌습니다. 살벌해졌습니다. 강퍅해졌습니다. 포악해졌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시나 농촌이나 어느 지역 관계없이, 다 강퍅해졌습니다. 농촌도 옛날 농촌이 아닙니다. 농민들도 얼마나 강해졌는지요. 저희 고향이나 시골에 가서 이야기해보면 어른들도 옛날 어른들이 아니고 옛날 농민들이 아니에요. 작년에도 사과값 떨어지니까 사과를 다 싣고 와서 종합청사에다 막 퍼뜨려 놓고 밟았어요. 돼지값 떨어지면 돼지를 고속도로에다 막 내려놓아요. 고속도로가 돼지판이 되지요. 배추값 떨어지면 그냥 갈아 엎어버려요. '누구 주고' 이런 생각을 안합니다. 안되면, 내 맘에 안들면 휘두릅니다. 지난번엔 고속도로를 농민들 몇만 명이 점령했어요. 못 당해요. 다 띠 두르는 거예요. '결사반대!' 다 그러는 겁니다. 강해졌어요. 너무너무 강해졌어요. 선생님들도 얼마나 강해지는 지 몰라요. 전교조 데모 진압 책임자 되시는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나는 선생님은 선생님으로 알았습니다. 용어도 그냥 하시는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도 어떤 밑바닥의 노조보다도 더 저주의 말, 강하고 악한 말들, 무시무시한 칼을 찌르는 천하에 있는 저주스러운 말 다 합니다"라는 겁니다. 학생들을 저 입으로 어떻게 가르칠 수 있냐는 겁니다. 대학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학생은 학생들대로, 대학노동조합은 노동조합대로, 교수들도 교수대로 교수협의회가 있습니다. 이성과 지성으로 중용을 가르치고 최고의 지성인답게 대화로 풀어야할 교수님들도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들도 일어납니다. 가장 순한 천사와 같은 간호사들도 얼마나 지금 강성한지요. 간호사들을 천사라고 하잖아요? 작년에 보십시오. 의사선생님들 만큼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진짜 칼 들고 나오고 주사기 들고 나오는데 못 이겨요. 정부도 못 당하잖아요. 온 나라가 못 당해요. 모든 분야로 번져나갑니다. 가장 신사적이고 멋있는 젠틀맨인 비행기 조종사, 파일럿도 보십시오. 없는 데가 없어요. 지금은 파출부는 파출부 노조, 청소하는 분은 청소 노조. 하여튼 없는 데가 없어요. 지금 남은 건 딱 하나입니다. 목사 노조 하나 남았어요. 이제 이거 생기면 야단 날거예요. 목사 노조, 이건 진짜 목 내놓고 하는 노조니까 진짜 겁날 거예요. 숫자도 얼마나 많아요? 아마 이게 만들어질지 몰라요. 만들어지면 아마 엄청난 힘이 될 겁니다. 그래서 설교 안하고 전부 다 띠 두르고 나가면 이것도 보통 문제가 아닐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나라가 지금 엄청난 아픔과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발전에 큰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 강해졌어요. 강한 법칙을 알죠. 강하면 수명이 짧고 강하면 부딪히게 되고 강하면 상처를 주고 또 자체는 깨집니다. 유리 강하면 깨뜨려집니다. 쇠는 강하기 때문에 녹이 슬든지 부러지든지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모든 강한 것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입안에 이빨을 주시고 또 혀를 주셨는데 어떻게 보면 이빨은 강하지만 강한 이빨은 벌레도 잘먹고 강한 이빨은 빠진다'는 겁니다. 튼튼한 이빨은 빠지지만 너무너무 부드러운 우리 혀는 벌레먹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죽을 때 혀 빠져 죽은 분이 있냐 말이에요. 혀 빠져 죽는 분은 없다는 겁니다. 이 빠져 죽어도 혀 빠져 죽는 분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이 약한 것은 수명도 길게 하신다는 겁니다. 약한 것이 승리하고 남는 사람은 약한 자가 남는다는 겁니다. 강한 자가 오래가는 것 같지만 강한 자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오늘날까지 수 천 년 동안 온 인류를 다스리는 것은 예수님이 무슨 총이 있어서입니까? 무기가 있어서입니까? 무슨 법이 있어요? 법도 없어요. 온유한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는 그 나라가 가장 어느 곳보다도 힘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온유한 나라입니다.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에요. 십자가 위에 피 흘려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말 한마디 안 하시고 욕 한마디 안 하셨습니다. 온유하십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대로 털 깎는 자 앞의 양과 같으셨습니다. 저는 털을 깎아봤습니다. 양을 먹이면서 털을 몇 마리를 깎아봤습니다. 외국의 양을 많이 먹이는 나라는 기계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기계가 없으니까 가위 가지고 깎는 거예요. 살을 안 찝으려고 하는데도 자꾸 찝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살을 많이 찝는지, 다 깎고 나면 온 몸에 살점이 잘려 있습니다. 내가 자른 겁니다. 그러나 한번도 '왜 그랬냐?'고 달려들지도 않습니다. 다른 짐승 같으면 가만히 있겠어요? 어느 짐승이라도 가만히 안 있어요. 몇 시간을 기다려주지도 못해요. 나는 이 양을 보면서 '주님이 이렇기 때문에 양이라고 그러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양인데 왜 이렇게 잘되는가? 호랑이도 있고 사자도 있는데……. 주님의 나라가 왜 이렇게 잘 될까? 바로 온유한 것 때문입니다. 온유하면 오래갑니다. 온유하면 복을 받습니다. 온유하면 하나님 앞에 하늘과 땅에서 훌륭한 지도자의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크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강하면 안됩니다. 온유해야 됩니다. 강퍅하면 안됩니다. 저항하고 반항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면 여러분 자신이 불행해 집니다. 성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람 '인(人)'자처럼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만져주고 위로해주고 나누고 긍휼을 베풀고 인자함을 베풀어야 합니다. 봄날씨처럼 따뜻한 손길, 따뜻한 마음이 사람에게 있어야 되고 우리 가정에 있어야 되고 우리 교회에 있어야 되고 이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 하나 하나에 같이 할 때에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외국의 기업들이 다 왔다가 간다고 합니다. 신문에 몇 번이나 크게 났습니다. 왜? 강성 노조 때문에 못 견뎌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못 견뎌나는 겁니다. 외국에 있는 근로자들도 여기 와서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하나 때문에 못 참고 한국 사람을 외국에서 만나면 찔러 죽이고 싶다는 겁니다. 외국에서 제가 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너무 욕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때리고 욕을 자꾸 한답니다. 강한 말로 합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까지 전부 말해가면서 욕한다는 겁니다. 돈은 조금 벌어 가긴 갔지만 결국엔 우리 나라에 대해 나쁜 마음만 가슴에 안고 가는 겁니다. 프랜시스가 지은 '평화의 도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 나라를 평화스러운 나라, 온유한 나라, 부드러운 나라로 만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의 도구로 써져야 됩니다. 피스 메이커(Peace Maker)로 나아가야 됩니다.
어떻게 보면 약한 자는 어리고 미숙하고 불안하고 힘도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성숙하고 큰 일 합니다. 잘되고 힘이 있습니다. 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에서는 개막식이나 마지막 폐회식이 클라이막스입니다. 티켓이 제일 비쌉니다. 외국에서는 몇 천 불씩 주고 참여를 합니다. 거기서 중요한 건 선수들이 입장하는 것입니다. 참 멋있습니다. 개막식이 너무너무 좋은데 개막식을 망가뜨리고 개판으로 만드는 게 미국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경례를 '짝!'하고 우측으로 '딱!' 들어오면 너무너무 멋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들어올 때부터 개판입니다. 제멋대로이고, 유니폼도 제 각각이고, 손들고, 사진 다 찍고, '보라' 그래도 안 보고 지나갑니다. '어휴, 저게 무슨 선수인가? 저래가지고 무슨 운동을 하겠는가?' 그렇지 않아요. 게임해 보면 미국사람이 다 1등합니다. 진짜 본 게임에 들어가면 너무너무 잘해요. 힘 빼는 사람이 잘하는 겁니다. 미국 군인들 훈련하는 거 보면 군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군대는 미국 군대입니다. 미국 경제를 보로 '저래가지고 나라가 되겠냐?'고 하지만 미국 경제가 제일 건강하고 세계를 지배합니다. 말이든 생활이든 온유해야 돼요. 부드러워야 돼요. 하나님은 곡식도 부드러운 땅이 좋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사람도 부드러운 땅이, 부드러운 마음이 옥토와 같아서 하늘과 땅의 복을 받는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온유했습니다. 이삭이 온유합니다. 아브라함이 장성한 이삭을 나무에 올려놓고 죽이려고 해도 얼마나 온유합니까? 요셉이 온유합니다. 다윗이 온유합니다. 솔로몬이 온유합니다. 다 온유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큰 일들을 하고 복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온유하고 가정이 온유하고 삶이 온유할 때 만대에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요사이는 부부간에도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서로가 강해요. 온유한 가정이 행복한데……. 부드러워야 되는데……. 바로 지난주에 우리 강동구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남편이 회사에 갔다 오는데 부인이 집에서 채팅을 하는 거예요. 채팅이라는 것은 인터넷으로 다른 남자하고 주고받는 거예요. 저녁인데 남편한테 뭐 잘해줄 생각도 안하고……. 남편이 와있는데도 남편이 그만 하라고 해도 계속 하는 겁니다. {……밤이 깊은데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쪽에서도 [나도 아주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꾸 보내고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겁니다. 요사이 이런 사람이 수 백 만이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만 하라고 해도 말 안 듣고요 말리니까 부엌에 들어가 칼을 들고 와서 여섯 곳을 찔러서 그 자리에서 죽였어요. 강퍅해 졌어요. 부인들도 강퍅해 졌어요. 경찰서에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목사님, 그전만 하더라도 부인이 맞아서 오는데 지금은 남편이 맞아서 오는 일이 저녁마다 많고요 와도 둘이 다 퍼져서 오지 여자만 퍼져 오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라는 겁니다. 그 얘길 듣고 '참 무서워 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존속살인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는지요, 1년에 부모를 죽이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며칠만에 하나씩 그냥 맞아죽는 거예요. 목 졸라 죽입니다. 갖다 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이는 자식에 대한 뉴스가 한 번만 나와도 온 나라가 깜짝 놀라고 그랬는데 이제는 매일 매일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루에도 몇 건씩 일어나는 거예요, 존속살인이. 작년에도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식한테 맞아 죽었어요? 무섭습니다. 모든 계층이 다 그래요. 너무 강해졌어요. 우리 나라가 부드러운 나라가 되도록 우리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돼요. '강해야 된다. 강한 자만이 이길 수 있다. 지면 지는 거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이고 동물세계의 논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는 자가 이기는 겁니다. 약한 자가 강합니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겸손한 자가 은혜 받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양보하고 순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땅에서 축복을 받는 줄로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사이는 시각장애인도 강하대요. 그래서 경찰서나 검찰에 시각장애인이 뭐 잘못해서 붙들려 가면 한시간도 안돼 다 나온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어보니 "목사님, 이 사람들은 보이는 게 없으니까 경찰 앞에서도 오줌을 막 눠버려요." '안보이네!' 그러면서 눠 버린대요. 그러니까 상대가 안 된다는 거예요. 질문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나가라 나가라' 해서 내보낸대요. 그래도 안되면 또 앉아서 큰 거 눈대요. '이거 안보이네!' 그러면서……. 그래서 소방서가 무서운 거예요. 소방서는 물불을 안가리니까…….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시각장애인이래요. 이렇게 강해서 되겠어요? 건축 하나 해도 그냥 짓지를 못해요. 주변이 다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전부 우리가 앞으로 진행하는 데 발목이에요. 잡는 거예요. 순리대로 두지를 않아요. 시편 37편 11절에 보면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게 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땅도 얻고 화평하고 온유한 사람은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즐거움이 없는 인생이 인생입니까? 주님이 주신 가정에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면 대화하고 장난하고 유머하고 즐거워야지요.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이 즐거움으로 이어져야지요. 베드로전서에도 보면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라노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극단(極端)에 안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란 무엇입니까?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아야 돼요. 중용이에요. 오늘 우리는 모든 일에 너무 한쪽으로 가요. 누가 말하면 한쪽으로 가는 거예요. 흑백논리라고 하잖아요? 너무 극과 극으로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안돼요. 우리가 믿는 예수 이외에는, 신앙 이외에는 다 '그거냐,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괜찮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중간에 서야합니다. 이게 온유함이에요. 한쪽으로 가면 온유함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은 한쪽에 가서 강하게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온유함이 아니에요. 온유한 마음은 따뜻한 마음, 순한 마음이에요. 촉촉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에요. 요사이 강원도 산불이 또 일어났다고 하잖아요. 3월부터 5월이 언제나 불이 많이 나는 건 왜 그래요? 건조하니까요. 터치(touch)만 하면 확 붙어서 산을 다 태우는 거예요. 불이 안 나는 건 언제예요? 5월 지나고 비가 와서 촉촉하고 풀이 나서 촉촉할 때입니다. 교회 왜 나와요? 촉촉해지기 위해 나오는 거예요. 말씀으로 회개하고 나면 촉촉하고 은혜 받으면 촉촉합니다. 마음에 강퍅한 마음, 항의하고 반항하고 저항하고 비판하는 마음들이 약해지는 거예요. 살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면,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주의 보혈 앞에 엎드리면 마음이 그냥 단비가 내리는 거예요.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우리를 강퍅하게 하는 것이 뭐냐? 성경은 그게 죄라는 거예요. 죄가 우리를 강퍅하게 하는 거예요. 마귀가 우리를 강퍅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히 강하게 나오는 사람은 자기 마음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로 인해 마귀가 역사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이 온유해지는 것은 내 마음이 아니에요. 성령이에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온유예요. 9가지 열매 가운데 온유가 들어가요. 성령이 함께 가는 마음들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도 온유한 거예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할렐루야! 온유한 성도 되기를 원합니다. 온유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복을 받습니다. 땅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잘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 은혜로 각 분야에 높은 분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렇게 순한 분이 어떻게 저렇게 높이 될까?'하는 것입니다. 검찰의 검찰청장이나 군의 참모총장님들도 보면 똑같은 것이 있어요. 순해요. '저분이 어떻게 저렇게 순할까?' 그런데 간혹 가다가 거기에 강한 분이 들어와요. 막 강하게 발언하면요 오래 못 있고 나가요. 그 말 때문에 다 나가요. 설령 똑똑하고 강한 분들이 들어와도 언제나 오래 못 있어요. 강한 대변인으로 자기 당에 공헌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 당도 그 강한 사람 때문에 피해를 봐요. 나중에는 다 손해예요. 자기도 손해고 다 손해예요. 순한 사람은 나중에 정치가 바뀌어도 다 괜찮은데 강한 사람은 다 다치는 거예요. 내가 보고 '저 사람은 이다음에 붙들리겠구나' 그러면 적중해요. 순한 분은 좋은 일이 와도 강한 분은 나중에도 좋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중용을 잘 지키고 이런 분이 올라가지 강한 분은 선임하사까지 더 못 올라가요. 적이 많은데 어떻게 올라가겠어요? 적을 많이 만들었어요. 이쪽 저쪽 대치를 해놓으니까 그쪽이 발목을 잡는데 올라갈 수 있나요? 항상 형사로 지내지 서장으로 못 올라갑니다. 적을 많이 만들어 놓으니까 그냥 계속 그 사람이 물고 늘어지는 데 올라갈 수 있어요? 못 올라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큰 은혜를 받으려면 온유해야 돼요. 그건 적이 없어요.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온유한 자는 항상 번성하고 잘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알고 보면 다 부족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남의 허물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저것은 죽여야 된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부족한 마음들을 다 갖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다 큰소리 칠 수 없는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해주고 관용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고……. 할렐루야!
조선왕조 건국 때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다 세우고 나라가 안정이 된 다음에 그 개국공신인 이지과 중전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참 이 나라가 태평연월(太平烟月)하니 짐의 기분이 좋소. 오늘은 우리 속에 있는 마음들을 털어놓도록 하세." 그래서 태조께서 먼저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임금이어서 부족함이 없는데도 그래도 그래도 누가 나를 찾아올 때 빈손으로 오면 마음이 섭섭하고 뭐 봉투에 넣어서 오면 마음이 좋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진실된 이야기를 하자, 진실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앞에 있는 뽕나무가 흔들흔들 하고 우리가 진실한 이야기를 안하면 뽕나무가 미동도 안할 것이다." 태조가 그렇게 말하니 뽕나무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지란 차례가 왔어요. "저도 하늘같은 사랑을 받고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가끔, 간혹 마음에 임금님이 한번 되어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니까 뽕나무가 맞다라는 거예요. 사람은 이런 욕심이 다 있어요. 부족함이 없는데도 이런 마음들이 다 있어요. 들여다보면 다 그런 거예요. 그 다음에 중전 차례예요. 중전은 아무래도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나는 마음에 숨은 진실한 말은 못하겠다는 거예요. 임금과 태자가 계속 설득했어요. "괜찮다. 오늘은 기쁜 날, 오늘만큼은 우리 비밀을, 속에 깊이 감추어진 진실을 이야기하자." 중전이 기어이 이야기했어요. 중전이 드디어 입을 여는 거예요. "저는 부끄럽기는 하지만 임금님 한 분으로 인해 이런 영광과 이런 행복을 누리지만 그래도 신하 가운데 잘생긴 신하, 미남을 보면 내 마음이 살랑살랑합니다"라는 거예요. 그럴 때에 앞에 있는 뽕나무가 흔들흔들 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그런 것을 다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서로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관용해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면 이 봄동산처럼 이 나라에 새싹이 돋아나고 이 나라가 다시 한번 경제도 일어나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복된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온유하게 살자
민수기 12:1-3 / 이중표 목사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성질이 있습니다. 그 성질대로 성격이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특별한 은혜를 입으면 그 성질이 자기 인격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 성질이 부드럽기도 하고 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부드럽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강하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 성질대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성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품으로 아름답게 변화해서 그의 인생을 영광스럽고 행복하고 창조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품이 온유하셨고 일생동안 온유하게 사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마 5:5). 예수님은 산상팔복 가운데 우리가 땅에서 받는 유일한 축복을 온유한 삶으로 제시해 주셨습니다. 물론 마음이 가난한 자 천국을 받고, 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고,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은혜가 있지만 땅에서 잘되는 축복의 원리를 온유한 자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온유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이 세상을 성공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온유'는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말하는데 겸손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를 화복하고, 참고, 인내하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친절과 사랑에 관계된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주신 성품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격이요, 그 열매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성품이 온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순한 것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태어날 때 받는 성품이고 온유는 중생함으로 받는 성품입니다. 온순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성품이고 온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성품입니다.
온순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인간성이요, 온유는 내면적인 속사람의 마음입니다. 온순은 외모의 모습이요, 온유는 인격의 모습입니다. 온순은 사람의 뜻을 따르는 마음이요,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대개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온순한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온유한 사람은 누구든지 은혜만 받으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유순하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유순합니다. 그 성질에 대하여 시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유순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온순하다고 착한 것은 아닙니다. 착한 사람은 그 성품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온순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유익만 챙기고 내심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자기를 희생하고 선한 일에 적극적이며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유순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에는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의 궁에서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밖에 나갔다가 자기 동족이 고역함을 보고 마음에 울분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고 그곳에서 40년동안 목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광야를 걸어갈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40일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있는 곳으로 하산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서 더디오니까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 해서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뛰놉니다. 모세가 진 가까이에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 든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그는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방의 구스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의 원부인이었던 십보라가 죽은 후의 일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모세가 그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자 누이 미리암과 형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윤리적으로나 율법적으로 크게 범한 잘못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방 여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섬기는 하나님 없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아닙니다.
이들이 모세를 향하여 거세게 비방했지만 모세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개의치 않고 침묵함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며 참고 인내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저들이 모세를 비방한 것은 결혼의 윤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모세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니까 시기심이 생겨서 비방한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아론보다 미리암의 이름을 앞세운 것을 보아마 미리암이 선동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말을 들으시고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6-8) 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자 아론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모세가 아론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 미리암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의 부르짖음을 듣고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일주일간을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그는 진밖에 칠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말씀하시매 미리암을 7일동안 진 밖에 가두었다가 내놓으니까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출생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얻어진 후천적인 성품이었습니다. 모세의 자기 절제는 인간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첫째,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이요,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어떤 불행이나 슬픔을 당하여도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별세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해서 십자가를 진다' 이 십자가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다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을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 온유한 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그는 잠잠히 말없이 충성합니다. 그는 선하게 살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고 오히려 모함을 받아 감옥으로 갑니다. 그럼에도 그는 잠잠히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 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4-5)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로 알고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는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종살이 할 때는 주인에게 순종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는 간수에게 순종했습니다. 그가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왕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온유함으로 복을 받았고 땅을 넓혔습니다.
다윗 왕이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형을 만나러 갔다가 골리앗을 이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김을 당하여 엔게디 골짜기에 있는 굴속으로 숨어 들어갔을 때 마침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다가 용변이 보고 싶었던지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때 다윗 왕이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는 사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핍박 속에서도 사울을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이 말은 야베스의 복처럼 "복에 복을 더하사 그 지경을 넓혀준다"는 말입니다. 사업의 지경, 인격의 지경, 지성의 지경, 모든 지경을 넓혀준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복종시키는 강한 인격의 성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순종은 온유한 자에게 나타난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부조리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자가 잘되어야 할텐데 선한 자가 고난을 받고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것을 봅니다. 이때 행악자를 보고 불평하거나 불의한 자를 투기하기 쉽습니다. 그때
온유한 사람은 잠잠합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과거를 고치지 못합니다. 악한 자들이 잘되는 것을 고치지 못합니다. 날씨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좋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좋다.' 그래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성품을 고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
모세의 온유함은 천성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목동생활을 하면서 그 온유함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동안 모세를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들의 원망과 불평을 온유함으로 받았습니다. 온유한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에 따라 순종하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원수들이 욕하고, 비웃고, 핍박했으나 잠잠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베드로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3-24)
둘째,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은혜를 받고, 사람들로부터는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평합니다.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인간관계를 바르게 맺으며 살아갑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며 서로 격려하고 허물을 덮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은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무섭게 비판하거나 배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가 깨끗한 것 더러운 것 구별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칭찬을 받아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시와 멸시를 당하여도 화를 내지 아니하며, 모든 일에 겸손함으로 참습니다. 남의 단점이나 들추고 장점을 경시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결혼 대상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것을 보니까 배우자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첫째 조건이 성격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인물이나, 학력이나, 직업을 봤는데 지금은 그런 것 보지 아니하고 성격을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참으로 현명한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서로 용납하는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도 상처를 받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들이 남편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정이 떨어지고 집을 나가게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온유한 사람은 과격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유순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과격해지려고 하면 자꾸 온유한 말로 바꾸어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변화를 봐야 됩니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소경입니다. 그가 어느날 부인과 함께 길을 가는데 한 신사가 가까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부인이 장미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장미는 예쁘기는 한데 가시가 있어서 콕콕 찌릅니다."
노자는 죽으면서 중대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어느날 사랑하는 제자들을 앉혀놓고 입을 벌리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내 입속에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고 물렁물렁한 혀가 있습니다." "그렇지, 젊은 날 내 치아는 아주 좋아서 내 혀를 많이 물어뜯었지 그런데 잠잠히 참았던 혀는 남아있고 강한 치아는 다 빠져버리고 없느니라 부드러운 것은 생명이고 강한 것은 죽음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강팍하면 쉬 죽는다. 온유한 것이 생명이니라."
셋째,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똑똑하고 강한 자는 승리하는 자처럼 보이나 스스로 부러집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망하고 빼앗기고 사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거칠고 사나운 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세상이지만 행복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온유한 자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행복합니다.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출생, 신분, 용모, 성격 등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출생을 원망하고 신분을 부끄러워하며 용모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부모를 존경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현재 자기 환경에서 감사를 드립니다.
온유한 삶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어느 정도 수양과 훈련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온유는 겸손한 인격입니다. 나무도 껍질이 굳어지면 고목이 됩니다. 그래서 여우가 그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지만 부드러운 것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자가 장수하는 것은 부드럽기 때문이고 남자가 쉬 죽는 것은 강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온유하게 살지 못했으면 온유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봄이 오면 날씨가 따뜻하니까 모든 나무가 부드러워지면서 새순이 나오고 꽃이 핍니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날씨가 춥기 때문에 모든 고목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기로 은혜가 충만하고 내 심령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품이 부드러워집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온유한 마음이며,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 귀한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온유함
민 12:1-16 / 박기완 목사
저는 목회를 하면서 가끔 생각하는게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가 다 100% 완전하고 무흠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한 세대 큰 인물로 사용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떤 점을 예쁘게 보셨을까?... 어떤 점을 귀하게 보셔서... 저들을 사랑하시고, 동행하시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분명히...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어여삐 보시는 어떤 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요.... "하나님께서 나의 어떤 점을 귀하게 보시고 예쁘게 보실까?" 하는 점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외향적인 성격이라서... 때로는 실망도 안겨준 인물이지만 실망을 극복하려는 그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사용하신줄 믿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 열심 때문에 그를 사용하셨고, 예레미야는 안타까운 일을 보면 마치 자기일인냥 눈물을 흘리는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그 믿음이 너무도 귀하고 귀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자였지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귀히 여기시고 귀한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다윗은 왕의 위치에서도 하나님 두려운줄 알고 겸손했기 때문이고,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하는 순결한 마음 때문이며, 야곱은 불타는 야망으로 인하여.... 또, 요셉은 불의와 타협치 않는.... 그리고 낙심치 않는 강직함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고.. 그것을 귀히 보시고 어여삐 보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어떤 점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고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온유한 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하면.... 백세가 넘은 모세가 저주받은 함의 자손인 구스(에디오피아) 여인을 자기 아내로 취하자... 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내용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에디오피아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좌우간 어떤 연유에서...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함의 후예요 흑인인 구스 여인을 모세가 취하였다는 사실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의 위치와 입장을 헤아려 볼 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을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에게 노골적으로 표시하며 대항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미리암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고 또 문둥병이 미리암에게만 임한 것을 보면 미리암이 먼저 비방한 것같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영적 지도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본문 2절의 내용이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하고만 이야기하였느냐 우리하고도 이야기 하셨느니라" 하는 내용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들을 가나안으로 영도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회제도 적인 면에서 보면, 일부다처주의 사회였으며 노예를 소실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 지도자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는 책임을 진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요, 백세의 나이가 된 노인으로서...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이었습니다.
특별히 미리암의 생애를 통하여 모세를 조명해 본다면 미리암은 남동생인 모세를 위하여 생명내건 모험을 감행했던 사람입니다. 즉,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 바로 미리암인 것입니다.
미리암은 핏덩어리 모세를 역청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서 애굽인의 눈길을 피해 나일강에 띄운 여인입니다.
행여나 그 어린 생명이 죽을세라 끝까지 갈대 숲을 따라가서 살핀 여인이요, 바로의 딸에게 모세가 발견되자 재빨리 달려가서 유모를 필요로 하느냐고 묻고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친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하고 어머니를 유모로서 데려다 줌으로... 모세는 진짜 어머니의 품에서 기적같이 성장하여.... 애굽의 궁중에서도 히브리 교육을 어머니에게서 직접 배웠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길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리암이 동생 모세를 나무라듯이 비방한다는 것은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판단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가운데로 강림하시며 회막 문에 서셔서.... 모세에 대하여 비방하지 말라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자 마자 그 즉시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 모세가 비난받거나 정죄받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추호도 용납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세가 비록 실수와 잘못을 통해 그의 성직과 영적 권위를 비방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세요.... 모세가 비방을 당하는 원인이 구스 여인을 취해서 생기게된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모세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구실이었지 이면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했습니다. "너나 나나 같지 않느냐?"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적인 시기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만이 백성들 앞에 돋보이는 것에 대한.... 시기심을 갖게 되었는데, 알고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모세와의 차별성에 대해서 오늘 본문 6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하고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실 정도로 충성된 종이요, 모세에게 대한 비방은 곧 모세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고, 이에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본문 9절 이하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드실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혈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애굽사람과 동족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이유야 어쨌든 애굽사람을 그 자리에서 쳐죽이는 그러한 혈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새겨 주신 십계명의 돌비를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분노함이 충천하게 될 때에.... 모세는 그 십계명이 새겨진 비석을 그대로 내려쳐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참으로 다혈질적인 사람이요, 참을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하고, 더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 데모가 일어 날 때에... 모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향하여 지팡이를 한번 내리치라!" 고 하셨는데, 홧김에 두 번이나 반석을 내려치는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이요,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혈기에 찬 사람이요 다혈질적인 사람인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보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의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 보다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어떤 점을 보시고 온유하다고 하셨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온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온유가 무엇입니까?.... 이 '온유' 란 말은 히브리 말로는 '아나바' 라고 하는 말인데, 그 어원은 '안와' 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의 뜻은 '굽히다', '굴복한다', 혹은 '절을 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습니다. 그냥 구부리는게 아닙니다. 그냥 낮아지는게 아니예요... 그것은 무엇에 굴복해서 굽히는게 아니고 스스로 굽히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무서워서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면서 굽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수단도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자기를 굽히는 마음..., 이것이 온유입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의적으로 굽히는 마음이 온유인 것입니다.
흔히 겸손하다는 말을 씁니다만, '온유' 는 '겸손' 과는 다릅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쓰여지는 덕목이지만 그러나 온유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도 쓰여지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칭할 때에도 쓰여지는 소중한 덕목입니다.
사람에게 겸손하다는 말은 하지만.... 하나님을 가르켜서 겸손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말은 사람에게도 쓰여지지만 하나님에게도 쓰여지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22:36절에 보면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유하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사용되어지는 소중한 성품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의 성품으로서는 온유한 성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을 배워서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로 온유해질 수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유' 라는 성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매우 국한된 상태에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만 기록되고 있는데, 모세는 이러한 온유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비방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오히려 책망하신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든 백성들과 함께 우상을 숭배했던 자입니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을 향하여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비방을 비방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의 온유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온유는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렇치 않은 자처럼 허리를 굽히는 자세... 바로 그것이 온유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예수님과 같이.... 모세와 같이... 성령의 열매를 맺으므로... 온유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흔히 "온유하다" 그러면 좀 약해 보이고, 나약하게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여유가 있고, 포근해요... 그런데 강하거든요...
권투를 할 때에도 어깨에 힘을 빼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습니다. 힘이 잔뜩 들어가면 안됩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이예요....
골프를 칠 때도 그렇고, 야구를 할 때도 그렇고... 뭐든지 어깨에 힘을 빼야 됩니다. 힘이 잔뜩 들어가면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고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사람을 보세요... 얼마나 몸이 유연하고 부드러운지 모릅니다. 허리도 유연하고 팔도 유연합니다. 살도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또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몸이 부드럽지 않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소화가 안되면 틀림없이 배가 단단해져 있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면 그 다리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꼼짝을 못해요... 그렇게 단단하게 뭉친 것을 부드럽게 풀어줘야만 됩니다.
단적으로, 죽은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온 몸이 뻣뻣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살아 있는 마음, 열린 마음, 성령이 충만한 마음은 부드럽고 여유가 있고 따뜻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죽은 마음은 얼음 덩어리처럼 차갑고.... 바위와 같이 단단하게 굳어 있습니다.
옆에만 지나가도 찬바람이 부는 것 같고...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얼마나 썰렁하고 거북한지... 말도 제대로 못 붙여요....
여기서 우리는 '온유함' 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에서 여덟번째가 바로 온유의 열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가 바로 온유함 입니다.
시편 37:11절이나 마태복음 5:5절에 보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유한 사람은 참아야 되고 나약한 것 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왕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자가 권력을 얻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강팍한 자, 굽힐줄 모르고 강경한 자가 권력을 얻는 게 아니예요... 성경은 온유한 자가 왕권을 얻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온유함의 극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만.... 내 뜻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온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는 자기의 정체를 잃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속사정을 한번 헤아려 보세요.... 하나님께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모세는 그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저는 애굽에 갈 수가 없는 몸입니다. 또 애굽에서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사랑만 받고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들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저는 바로의 궁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에게는 이런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얘기해야 되겠는데 못합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요, 절대로 갈 수 없는 몸입니다.
그래서 핑계삼아 "하나님...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세는 애굽에 가지 않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잔말 말고 가라면 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모세는 자기의 생각, 마음 속에 있는 두려운 마음, 인간적인 지식이나 판단, 등등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 앞에 모든 것을 수용하고 굽힙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들이는 그 모습을 한번 마음속에 그려 보세요... 그는 참으로 온유한 사람인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부족함이나 허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굴복하므로... 주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이게 온유함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온유함' 이라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철저히 훈련되어지고 다듬어져서 순종하는 품성을 말해요...
온유함은 교만한 자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입을 열면 거짓말만 말합니다. 교만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온유해지고, 낮춰지고 나면.... 거짓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할 수 있는 겁니다. 온유한 자는 정직해요.... 정직하기 때문에 힘이 있고 용기가 있는 겁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오면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리고 그를 치켜 세워 줍니다. 그의 뒤에서 그를 후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편에 서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철저하게 낮아질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세는 충분히 변명할 여지가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변명의 여지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그렇습니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야!" 그런 자세입니다.
뭐, 나쁜 놈을 나쁘다고 하는데 뭐.... 아,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모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고, 홍해를 건너 잘 해 왔으니까... 너그럽게 봐달라고... 자기의 업적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전혀 미워하지도 않고 조용히.... 그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용하게... 모든 것을 수용해요...
묵묵히 참고 수용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온유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정죄를 당할 때... 모세는 직무유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포기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비방하고, 모함을 하고, 없는 말을 지어서 하고, 마음을 뒤집어 놓아도... 그 사명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비판하고 정죄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비난하고 비판할 때....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몰라요....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반응합니다.
"좋아!, 그러면 내가 그만두면 될꺼 아니야!" "에이!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면서 손을 털고 나가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그 자리를 내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하나님 앞에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접어두고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모세는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놈이야!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도 죄인이었고, 오늘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죄인이야! 지금 내가 실수했다고 하지만 그건 별일이 아니지...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셨고, 나를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일 뿐이지...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에게는 분노가 없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한 점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어려운 비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세요!" 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신한... 자기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은 그대로 지켜가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이것을 온유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온 백성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그는 왕관을 벗어 던지지 않았습니다. 옷을 벗고 초야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51:5절 말씀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어머니의 태로부터,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낳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죄인입니다. 사건은 지금 일어났지만... 나는 본래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여기서 이상한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의 이런 점을 존경합니다.
회개하는 다윗도 훌륭하지만.... 회개하고 그 사명의 길을 그대로 지켜갔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게 바로 온유함입니다.
오늘 모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어느 때도 자기 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포악하고 교만하고 강포한 사람은 왕좌에 오를 수 없습니다. 오른다고 해도 언젠가는 쫓겨갈 날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직 온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권력과 능력을 더해주시는 겁니다.
모세는 비판과 냉소 앞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유했기 때문에 정직했습니다. 사실을 시인하고 변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를 도왔습니다. 그는 잘못했지만... 그러나 그는 온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온유한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드시고 미리암을 심판하신 이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얘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한 마음, 온유한 믿음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 하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권속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방받는 모세를 변호하는 하나님
민 12:1-8 / 김윤기 목사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의인이 아닙니다. 또한 선한 사람도 못됩니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실수도 많았습니다.
이런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아론과 미리암이라는 동기간에 비방이 있었어도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위하여 변호해 주시며 그를 쓰시었습니다.
① 모세에 대한 아론과 미리암의 비방이 있습니다.
민1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패역했던 백성들의 죄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본장 12장에서는 단순한 백성들이 아닌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의 죄악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중 본문은 모세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일로 인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율법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비방하는 장면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구스'(1절)는 오늘날의 에디오피아를 말합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모세가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구스 여자인 이 여인에 대한 견해는 여럿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즉, ⓐ 모세의 본처인 미디안 여인 십보라를 가리킨다는 견해, ⓑ 에디오피아의 공주를 가리킨다는 견해, ⓒ 십보라가 죽은 후 출애굽 시 동행한 잡족 중에서 모세가 재취(再娶)로 맞이한 에디오피아 여인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물론 율법이 이방인과 이스라엘 자손이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출34:16 ; 신7:3,4). 하지만 그 율법이 모든 이방 사람과의 혼인을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족속과의 결합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결혼은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것은 그 결혼에 하자가 있어서 라기 보다는 모세의 통치권에 대한 시기와 질투 및 명예욕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질책함으로써 자신들도 모세와 같은 신적 권위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② 모세에 대한 비방의 원인이 단순히 이방인과의 혼인 때문이 아닙니다. 즉, 미리암과 아론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 한게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지휘권을 공유하자는 말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결혼 문제를 들먹인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들의 원론적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사실상 미리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여선지자이기도 했으며 (출 15. 20, 21)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도 하였습니다(2:1), 그러므로 그들도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영도자(領導者)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지는 않으셨습니다(출4:16). 그러기에 그들의 주장은 월권(越權) 행위에 해당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제재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어려운 중에서도 더욱 빛이 나는 인격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를 향해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인정하셨던(민12:7) 그의 인격입니다. 여기서 모세를 하나님이 변호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본문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온유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 온유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1)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우' 는 실상 '핍박을 받음', '가난함', '낮고 비천함'을 뜻하는 낱말 (신 15 : 11)입니다. 이는 곧 ① 모세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順服)하는 삶을 살고 있었음을 칭찬하는 말이며(시 37 : 11 ), ② 모세가 결혼 문제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도 분노하지 않고 잘 참아냈다는 말이 기도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도덕성과 인내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성령의 감화를 받은 자만이 취할 수 있습니다.
2) 모세가 이 사건에 온유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①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모세는 지금 비방하고 있는 대적의 목소리에 칼같이 맞서서 그들을 잘라내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은 한결 수월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관심은 일에 있지 않고 사람 자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온유함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교회에서 일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가 있을 때에는 그 일에서 벗어나 사람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서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강건하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보다는 먼저 사람에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사람에 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②모세는 문제를 두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의 또 하나의 비결은 기도함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향하여 간구하는 것이므로 성난 파도와 같은 마음도 잔잔케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 화가 나려하면 그 일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문제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도를 합니까? 아니면 맞서서 싸웁니까? 우리는 이런 일을 만났을 때 성내지 말고 조용히 기도하는 온유함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비난하던 그 대적의 마음도 잔잔하게 녹습니다.
온유한 자의 복은 땅을 차지합니다(시 37 : 11). 따라서 가나안 곧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인격은 바로 '온유'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주장과 과시의 시대에 하나님을 인정하고(잠 3:6),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빌 2:3) 성도의 온유함은 장차 받을 기업을 확증하는 인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에 대한 아론과 미리암의 비방이 있어도 모세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사람을 아끼는 하나님의 종이기에 온유함으로 대한 것처럼 우리도 어떤 우리들의 비방 앞에 모세처럼 온유함으로 인내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일을 은혜롭게 해결해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되기 때문입니다.
'충성하다'(아만)는 말은 '견고히 하다'(대상17:24), '굳게 하다'(대하1:9), '신뢰하다'(대하20:20), '믿다'(창15:6)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견고한 바위(사 33: 16)와 같고,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다고 하였습니다(사8:2). 그러므로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견고한 신뢰를 뜻합니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같이 활동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세와 같지 못했습니다. 즉 이들은 자기들 대로는 잘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했습니다.
(히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충성심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1) 모세는 자기의 일에 충실했습니다. 즉 모세는 자기의 신앙과 영력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와 영교 함으로써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과 영교하기 위하여 40일간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출 24:15-18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모세는 하나님께 진실하고 충실하였습니다. 모세 오경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전심전력을 했고 하나님 제일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 및 백성에게 명한대로 행했다는 기록이 13회가 나옵니다. 민수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대로 행했다는 기록이 6회(1:19 3:39,42 8:3,5 27:22)나옵니다.
3)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했습니다. 모세의 일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과 불평 탐욕과 반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희생헌신하는 생애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집에 충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 (민11:1-3)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이렇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죽음을 당할 때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② (민11:13-15)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원망이나 불평이 없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견고하게 신뢰하지 못하였다면 애굽에서의 열악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즉 하나님만을 견고히 신뢰할 때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어떤 사건 앞에 나의 일에 충실하고 하나님 앞에 충실하고 사람 앞에 충실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했습니다.
'대면하다'(파님)는 '향하게 하다'(파나)에서 파생되었는데 전치사와 결합하여 '∼앞에' (출23:17),'∼의 면전에서'(창19:13), '∼의 인정을 받으며'(창10 : 9)등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는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는 관계였습니다(민12:8). 즉, 모세는 모든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의논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에레미야 호세아 등 이러한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음성이나 환상 등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며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도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을 의식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전인격적인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족함이 있어도 모세처럼 어떤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이 변호 해줄 수 있는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시고, 그리고 또 온유와 충성됨으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같은 온유한 마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민 12:1-8 / 고일성 목사
이솝의 우화중에 태양과 북풍이 서로의 힘을 겨루어 보는 것이 있습니다. 북풍은 “네가 더 힘이 세지, 저곳에 오바를 입은 노인이 있지, 나는 너보다 빨리 저 노인의 오바를 벗겨 보이고 말테야”하고 뽐을 내었습니다. 태양은 한참 동안 구름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북풍이 힘차게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북풍이 불면 불수록 노인은 더욱더 단단히 오바깃을 잡아 몸을 감싸는 것이였습니다. 결국 북풍은 힘이 지쳐불기를 그치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태양이 구름 사이에서 올굴을 내놓고 그 노인에게 다정하게 웃음지었습니다, 그러자 한참만에 노인은 이마의 땀을 닦더니 입고 있던 오바를 벗었습니다. 태양은 온건하고 친절한 태도가 어떠한 경우에도 우격다짐이나 과격한 방법보다 더 효과적임을 북풍에게 타일러주었다고 합니다.
옛말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도 바로 그런 말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모세라는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절대로 의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한 사람도 못됩니다, 그는 사람을 쳐 죽인 살인자요, 윤리 규범으로 볼때 보통 사람도 못됩니다. 그의 생애는 실수도 많았습니다. 실수가 많은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를 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부족한 중에 허물 많은 사람을 들어 써 주신다는 사실은 모든 죄인들에게 복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시는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서 꼭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 어느 한 부분이 있으면 나머지 다른 부분은 부족해도 채워 주시고 덮어 주신 것을 열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조금은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봐 주셨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매력이 아닙니까?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을 봅니다. 단점이 보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장접이 보이고 그 장점이 크게 보임으로써 그 장점에 가리워져 모든 단점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똑같은 사람인데도 왜 오늘에 와서는 단점만으로 꽉 차 있고 아무리 찾아도 장점은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면 이것은 아주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때는 그 중심에 귀한 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크게 사랑하시고 다른 것은 부족해도 용납하시고 덮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부라함의 믿음 하나 보시고 성경에 증거하시기를“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는 모든 부족한 것을 다 채워주셨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살인죄와 간음죄를 짓고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구제불능한 어려운 죄를 지었습니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겸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그 겸손한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다윗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온유와 충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많은 실수를 저질렀던 모세였습니다. 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의 모세의 나이로서도 무려 백 세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무슨 소실이며 그것도 이방 여자입니다.
구스는 곧 에디오피아를 말합니다. 에디오피아 여자, 피부색도 검은 종을 소실로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형님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이 일에 대하여 비방하게 됩니다. 사실 비난받을 만한 일이요 비방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물론 당시의 제도로는 일부다처주의였습니다. -3-
더구나 당시 노예에 대해서는 주인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써 지도자가 이 무슨 만행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저들이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는 이야기가“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비방의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를 비방한 아론은 그의 형님이요, 미리암은 누나입니다. 가까운 골육친척들의 비난은 모세에게 더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모세의 편을 드시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미리암을 쳐서 병을 얻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셨습니다. 3절에“이 사람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온유란 무엇입니까?
‘노자’는 상창이란 스승에게 도를 배웠습니다. 상창이 죽을 때가 임박해서 노자가 최후의 가르침을 청하자 상창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이가 빠지면 혀가 남는다, 알겠느냐?”그 뜻은 이빨처럼 강한 정치, 권력, 무력, 돈 등 사람을 물어서 피를 내는 강하고 굳고 날카로은 것은 빠져 사라지만 혀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오래 남는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이를 깨닫고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온유”란 ‘굽힌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을 굽힌다. 굴복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빈천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라고 하는 말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것이요, 높으면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며, 알면서도 아주 능력이 없는 자로 허리를 굽히고 뜻을 굽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으로 온전한 강함이 있으며 지도력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며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37편11절에도“온유한 자가 땅을 찾이할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셔서 예수님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포악한 자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지만 온유한 자는 기업으로 땅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가다가 중간에서 끊겨지는 것이 아니라 길이 길이 이어지는 축복이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가는 영원한 축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기업이 있는 삶은 바로 온유한 삶입니다.
(복음성가-“심령이 가난한 자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온유한 동물들이 살아 남아 온 지면을 덮고 있습니다. 강한 동물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결국 강한 동물을 모두가 멸종되거나 쇠퇴하지만 양같이 온유한 동물은 그대로 지구상에 남아 번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이빨을 보십시요.
딱딱한 치아가 더 강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고 허물허물한 혓바닥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유능제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게 됩니다. 그러나 유하면 휘어지기는 하지만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진정 강한 사람입니다.
1.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온유는 무엇일까?
1). 자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모세는 자기됨을 잘 지켜 나갔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나친 칭찬을 들을 때요, 또 하나는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사람됨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칭찬을 해 보면 쉽게 그 사람의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했을 때 교만하거나 우쭐대면 그는 별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에 억울한 말을 듣고 분한 말을 들었다고 하여 발끈 화를 낸다면 이 또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는 억울한 말을 들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이나 실패, 영광이나 굴욕, 그 어느 때든지 그는 자기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이탈리아에서 스트라스버그로 가는 길에 그의 친구‘월리암스 페넬’을 만나기 위해‘제네바’에서 잠시 머물게 됩니다. 이때 그의 친구 ‘페넬’은 칼빈에게 종교개혁 운동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본래 칼빈은 학자가 되려고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끈질긴 권유를 받고는 제네바에 머물면서 종교개혁 운동에 힘쓰게 됩니다. 하지만 칼빈은 너무나도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3년후에 제네바시 의회의 결의에 따라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아무런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고 제네바를 떠났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3년 후, 아무래도 칼빈이 있어야 종교개혁의 일이 바로 되겠다고 행각하여 다시 초청하게 됩니다. 이 때에도 칼빈은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돌아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오라고 할 때는 언제이냐며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아무말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가운데 제네바에서 큰 역사를 이루며 종교개혁을 성공시켰고 나아가 오늘의 제네바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도 제네바에 가면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우뚝서 있습니다. 이것이 온유한 마음인 것입니다.
2)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고 그로 인해 얼굴에는 광채가 났으며 그 빛난 광채를 두려워하는 백성들 앞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는 권응의 사람이요, 기적의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큰 소리칠 만도 했으며 많은 사람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자기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난은 매우 참기 어려운 비반입니다. 이토록 어려운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는 온유했습니다. 결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게 침묵하면서 잘 참았습니다. 마치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만큼 ,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해 주실만큼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참기 힘든 비난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비난을 듣게 되면 자기 변명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맨 먼저 들추어 나오는 변명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모세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피난을 갑니다. 외롭게 혼자 쫓기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오릅니다. 그러는 중에 미디안에서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십보라’라고 하는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하여 함께 살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할 당시의 모세의 형편이란 참으로 보잘것 없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처가 살이를 하게 됩니다. 옛말에 보리껴가 서말만 있어도 처가 살이는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 동안 처가 살이를 했으니 누가 그를 존경했겠습니까? 아마 온 이스라엘이 다 모세를 존경하여도 그의 아내 ‘십보’라는 예외였을 것입니다.“저 남자는 처음부터 시원치 않은 난자였어”이렇게 억센 아내 때문에 평소에도 이렇다할 위로를 얻지 못햇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백세가 넘은 피곤한 인생 여정 속에서 그는 따뜻한 인간의 정과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한 구스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말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나약함까지 덧붙여 변명하려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변명 끝에 이제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자를 공격하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그래 내가 실수했다고 하자 너는 실수가 없는냐”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모세 또한 할 말이 많습니다.
아론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잇을 때에 금붙이를 모아다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괴수입니다. 저를 향해“너는 그때 어떠했느냐”고 충분히 말할 수 있었으나 모세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참았는지 하나님께서 오히려 모세의 편을 들어 위로해주셨습니다.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만 깨끗하게 참는 자세와 온유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비난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온유한 마음입니다.
3). 모세는 사명과 소명 앞에 온유했습니다.
모세는 큰 은혜를 받았으나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과 자기자신과를 혼돈시키지 않았습니다. 큰 일을 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커진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9-
지위가 높아졌다고 자기 자신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었다고해서 인격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위와 자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은 일이요, 지위는 지위이며, 나는 나입니다. 모세는 엄창난 지위를 얻었고 엄창난 명예를 얻었으며 엄청나게 높임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 중에 보면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하였지만 하나님의 종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특별히 뽑아 세웠고, 특별한 일을 맡겼으며, 특별하게 취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특별한 사람으로 소명받아, 특별한 일을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도 특별한 대우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번도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온유입니다. 결코 자기됨을 잃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2. 온유란 무슨 뜻입니까?
‘로이드 존슨(M.L. Loyd Jones)는 그의 유명한“산상설교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 온유는 본래의 성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온유는 타고난 성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2) 온유는 게으름이나 무능과는 전혀 다릅니다.
온유는 개성과 인격에서 유약을 가리키지 않으며 역시 타협하는 정신도 아닙니다.
(3) 온유는 힘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온유는 권세와 능력과 양립하였습니다. 온유한 성 도들은 필요하다면 진리를 위해서 생명를 바쳤습니 다. 순교자들은 오히려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4) 온유는 외적인 일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일이다.
온유는 자제력이요 입술과 입을 지킴이요, 하고 싶 은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이웃에 대한 겸손입니다. 이웃에 대한 선의와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모세는 엄청난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기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셨으나 왕이 된 후 교만해지므로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마침내 멸망케 하셧습니다.
사랑사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고 그 크신 은혜로 자기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겸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배움의 첫걸음은 먼저 자신의 부족함과 무지를 인정하는 견허한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석도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11-
모세는 온유하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협력해서 선을 이룰 것으로 믿으며 매우 온유하게 참았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나 강팍합니다. 마음도 행위도 포악해만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기도하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운대로 하옵소서”라며 주님의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켰던 그 온유함! 바로 그 온유를 모두가 배워야 하겠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 그가 주인이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3. 온유한 자의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온유한 자는 자신의 온갖 손해와 상처를 견딥니다.
온유한 심정은 쉽게 꾸짖지 않습니다. ‘왓손’은 말하기를“온유한 심령은 젖은 부싯돌과 같아서 쉽게 불이 붙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온유는 ‘노의 굴레’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정욕은 격렬하고 완고하며 고집이 세나 온유는 그것들을 저지시키고 억제합니다. 온유는 입에 굴레를 씌우며 혀로 그 선한 행위로 묶습니다. 온유의 좌우명은 참고 견딤입니다. 그러므로
(1) 온유한 자는 조급하지 않습니다.
전도서7장9절에“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정욕으로 마음이 끓고 노가 눈에서 불티를 내는 것은 온유한 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노는 어리석은 자의 품에서 쉽니다. 역시 노는 화약과도 같아서 그것에 닿자마자 불에 타고 맙니다.
유명한 대 ‘바실’은 “노를 술치함이라고 불렀고”, ‘세네카’는 “미친 것”에 비유하였으며,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교훈했습니다.
(2)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악의는 마귀의 모형입니다(요8:44). 악의는 마음 속으로의 살인입니다(요일3:15). 악의를 품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습니다. 적어도 악의를 품은 사람은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3) 복수하지 않습니다.
악의는 노의 덩어리요, 원수 갚는 것은 악의가 끓어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의는 피로서 살고 있는 기생충과 같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영적인 원수는 갚아야 하지만 육적인 원수를 복수하는 일은 성도가 할 일이 아닙니다.
(4) 온유한 자는 악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에베소서4:3절에“떠드는 것과 훼방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성도의 입에서는 시내가 흐르듯 시원하고 부드럽게 온순하고 상냥한 말을 해야 합니다. 노가 띤 악담은 마귀가 기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담을 지옥불에 비교하였습니다.“미련한 놈이라 한ㄴ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고 경고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를 여러분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어린 조카 롯을 대접하여“네가 먼저 좋은 곳을 택하라”고 한 아브라함은 온유한 심령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추적하던 사울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왕으로 언제나 존대하며 그에게 손을 대어 원수 같기를 두려워마지 않았던 온유한 자였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비겁하지도 않습니다. 허약하지도 않습니다. 실패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유업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안전은 세상에서 강한 사람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임하는 온유한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성낼 때 성내고 성내지 않을 때 성내지 않습니다. 이 말의 뜻은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 때는 의분을 발하지만 자기가 피해를 보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는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분노는 되지만 남을 위한 본노는 의분입니다. 힘이 없어 원수를 갚고 싶지만 못갚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원수를 갚을 수 있으나 원수를 갚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 온유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는 모든 성도의 온유의 표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나의 표본으로 삼고, 그에게서 배우고, 그를 본받아 그와 같이 삽시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온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늘 밑에서 보호하심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장차 다스릴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만이 땅을 차지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모두는 온유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온유하게 나서고, 사람들 앞에 온유하며, 온유하게 죽어가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셧던 주님을 따라 온유한 제자들이 되어서 이 땅과 저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리시는 축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충성된 자와 교통하시는 하나님
민 12:7 / 김남준 목사
들어가는 말
성경 본문은 모세가 구스 여인, 즉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취한 사건에 대한 미리암과 아론의 반발과 항의의 답변입니다. 구스 여인과의 혼인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 두 가지는 모세가 이런 사건 속에서 자신의 신령한 인격을 보여 주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사람과 교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변호
7절의 문맥은 이런 것입니다. 모세는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편적인 감정과 민족적인 정서는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아론과 미리암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와만 말하셨느냐 하나님은 우리와도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모세가 우리의 지도자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모세만 사랑하시느냐 모세와만 교통하시냐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고 놀라운 역사도 보여주신다.' 라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셔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뒷부분입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기이한 세계를 알게 하고, 또 너희와 더불어 의사소통을 했다고 해서 너희가 모세와 똑같은 선지자인 줄 아느냐. 모세는 너희와 틀리다."
모세가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영적인 교제의 깊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그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깊은 것이었다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교제를 주도하신 분으로서 친히 명백하게 말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소문난 사람이 되었고, 엘리야가 능력으로 소문난 사람이 되었다면 모세는 하나님과 나누었던 친밀한 교제로 소문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선지자들의 비조였고 조상이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과 나누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교회를 인도하면서 보여 주었던 그 불굴의 지도력과 강인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좌시하지 않는 불붙는 열정,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영적인 변화의 목표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노력한다고 할 때, 그 수고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영적인 변화를 위해서 애쓴다고 하는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어떤 지식들을 한없이 쌓아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를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온갖 죄와 불결한 것들, 그리고 무지와 더러운 탐욕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주의 진리를 듣고 깨달을 때마다 그 전에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용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자신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진리가 그의 인격을 지배하고 그의 삶을 주장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놀라운 일들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여졌던 사람들은 능력 갖기를 사모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권능을 부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그 하나님, 창조주이시며, 자기를 죄 가운데 건져주신 그 분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교통하기 원했습니다. 주님과 교통할 수 있고 아버지의 얼굴을 뵈올 수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모세에게만?
그런데 왜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유독 모세에게는 그런 특별한 친밀함의 특권을 주셨을까요?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집에 충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가 충성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에 임재하셨을때, 그는 가시나무 떨기를 태우지 아니한 채 불꽃이 계속 불붙고 있음을 보고,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타오르는 불빛 앞에 무릎을 끓고 거기에 엎드리며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대체 이게 무슨 불인가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불이 어떻게 해서 타지를 않는가 들여다보기를 원했습니다. 영적인 것들을 육적으로 보기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의 신을 벗어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올 때까지 그는 실로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자신이 임재해 계시는 그곳을 바라보면서 기이한 느낌만을 받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육적이던 사람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말씀을 해 주시고 그와 대면하여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상태로까지 영적인 깊이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은 그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일치된 기도와 삶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또 다양한 기도의 제목들을 위해 호소합니다. 오늘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런 기도가 그의 삶과 일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변화는 우리가 삶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날 시간이 되어서 교회당 드나드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와서 적당한 주어진 직분을 따라서 교회의 한 부속품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은 단지 부르짖어서 통성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기도가 허공에 흩어지는 것과 같은 힘없는 기도로 끝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소리를 지르며 기도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기도가 하나님께로 이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 기도하면서야 비로소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고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일주일간의 삶 속에서 기도하여야 할 기도제목이 초점이 되고 있을 때에 그 기도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 충성이란 바로 이처럼 삶의 전방위적 충성입니다.
단지 교회에 와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이 충성이 아닙니다. 충성은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기에 두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야 말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로 충만해 지기를 기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들이 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다가 세상에서 받는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고난을 받아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불의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거룩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 어찌하든지 이 세상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중심을 바쳐서 살고자 하는, 인생의 푯대가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변화를 주십니다.
직분 맡은 자에게 구할 것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맡은 것이 없다하더라도 생존해 있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소명입니다. 생존해서 어디에선가 존재하고 있게 하신 그 자체가 불붙은 소명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분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일들이 성공을 거두어야겠다 라는 거룩한 결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직분을 얼마나 고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그 직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내가 불순종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태만하고 게으르고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하는 긴장감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까?
충성자의 모범이신 예수님
그리스도인의 삶은 피로 쓴 삶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편지를 받고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을 알았습니다. 성경책의 모서리가 왜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건 순교의 붉은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진리를 따라서 죽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참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는 순간에 인생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박동하는 하나님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편지는 냉담한 편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죄 가운데 소망이 없이 죽어 있는 이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지 관심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사랑, 그 분의 마음속에서 주인들을 향해서 타오르고 있는 진노와 그들을 죄와 진노 가운데서 건져내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불붙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충성과 복종을 불렀고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지금도 자기의 뒤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말이 많은 사람들보다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기도의 초점과 삶의 초점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그 삶이, 바로 예수님이 살아 오셨던 삶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시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갖게 하시고 남이 누리지 못한 부요한 것들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이런 삶도 살 수 있고 저런 삶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그런 삶이 아니면 그들에게 허락된 삶이 아닙니다.
맺는 말
모세는 이런 삶을 견지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걸고 동족을 위해 기도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오히려 자기를 향한 심판을 아버지 앞에 구했습니다. 이런 충성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교통을 모세가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다짐하십시오. 주님 나로 충성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며 그 사랑에 감격하는 가운데 생명을 주고라도 이룰 수 있는 그런 거룩한 헌신을 따라서 사는 생애가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더 큰 교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민수기 12:11-16 / 이한규 목사
< 배려하는 언행을 훈련하라 >
성숙이란 말이 너무 앞서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비판적인 댓글을 쉽게 단다. 그 비판이 타당해도 “이러다가 비판이 몸에 배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비판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교만이 방지되고 조금 더 사람답게 되고 조금 더 성도답게 된다. 어떤 글을 보면 키보드를 마구 치며 댓글을 달고 싶지만 그때 한번이라도 자제하면 그 한 번의 자제도 하나님은 한 번의 선행에 못지않게 기억해주시고 신비하게 보상해주실 것이다.
남을 위해주는 말도 의와 순리를 따라 하라. 불의와 역리가 섞이면 남을 생각해주는 말이 오히려 남의 체면을 깎을 수 있고 잘못된 비인격적인 사람이 위해주는 말은 오히려 위해(危害)를 줄 때도 많다. 부모는 자녀에게 “얘야, 물질이나 외모와 상관없이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고 당부한다. 하나님도 그런 당부를 하신다. 나를 위해준다고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의 사람됨을 보고 좋아하라.
때로는 남을 위해준다면서 불명확한 말로 논란과 싸움을 일으킬 수 있기에 남에 대한 말은 가급적이면 힘써 절제하라. 거짓으로 위해주는 말을 해도 안 된다. 사람은 수시로 거짓말을 한다. 시간 약속을 어기면 그것도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그런 인간의 연약성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십계명의 9계명을 주실 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단순한 거짓말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인 거짓 증거를 훨씬 큰 죄로 여기셨다. 남에게 이익을 주는 거짓 증거도 결국은 해가 되는 죄다.
만약 누가 “우린 친구잖아. 친구가 이럴 때 도와야지.”라고 하면서 의와 도리와 정상이 아닌 길을 은근히 요구하면 그는 진짜 친구가 아니다. 진실한 친구는 “우린 친구잖아.”는 말을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다. 친구는 바른 길을 가도록 잠잠히 곁에 서서 성원해주고 기도해주는 대상이지 청탁이나 이용이나 파당 대상이 아니다. 진짜 친구는 인생의 천군만마가 되지만 친구를 사칭하는 친구는 인생의 올가미가 된다.
남과 관련된 말은 위해주는 말도 절제하고 수군거림은 더 절제하라. 비판은 신중히 하라. 비판보다 더 안 좋은 것은 남이 이룬 것을 허물고 남의 명예를 불의하게 깎아내리는 불의한 비판인 비방이다. 왜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는가? 모세가 피부가 검은 구스 여인을 취했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다. 처자가 있는 모세의 그 행동은 분명히 잘못이다. 그래도 그것을 정당하게 비판하지 않고 불의하게 비방했기에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다. 비방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다.
<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
본문에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에 대해 모세를 비방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나병에 걸린 미리암이 다시 회복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으로서 회복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회개하라
아론은 미리암의 나병이 모세를 비방한 죄 때문임을 금방 깨닫고 모세의 산적인 권위를 인정해 3살 아래인 동생 모세에게 “내 주여!”라고 지칭했다(11절). 아론이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세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2절). 회복은 회개에서 시작된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다. 죄 사함 받아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도 회개에서 시작된다.
가끔 매스컴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양심선언을 한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지 양심선언을 빙자해 자기만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는 모습은 오히려 비양심적일 수 있다. 회개와 양심선언은 다르다. 양심은 왜곡될 때도 많고 온전할 수 없기에 회개가 중요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회개하고 돌아와 위대한 인물이 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까지 했지만 회개하지 않아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되었다. 양심의 가책에 의한 행동에서 끝나지 말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를 통해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역전 인생의 서막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생각이 복된 사람을 쓰신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라. 예수 믿고 건강과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욱 큰 축복은 깨닫는 축복이다. 하나님 안에서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라.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달라진다. 자신을 바로 보면서 소망을 크게 보고 문제를 작게 보라. 그런 마음과 생각과 시각의 변화가 참된 회개를 통해 나타난다.
2. 용서하라
아론의 회개의 고백을 받고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소서(13절).” 모세가 자신을 비방한 미리암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털고 간절히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것은 그녀를 진심으로 용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용서가 가능했겠는가? 자신도 부족한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부족한 죄인임을 알 때 남에 대한 용서도 쉬워진다. 그래서 회개를 잘하는 사람이 용서도 잘한다.
상처를 잘 잊고 용서를 잘하라. 교육적인 목적으로 누군가를 멀리해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용서하면서 앞날의 축복을 빌어주라. 하나님은 용서하는 사람을 용서해주신다. 모세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용서 때문이다. 용서하는 사람이 승리한다. 사람은 마음이 건강해야 불행과 고통이 줄어들고 가정도 평안해진다. 어떻게 마음이 건강해지는가? 회개와 더불어 용서에 탁월해야 한다.
예수님은 예배드릴 때 남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한 후 예배드리라고 했다. 미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기 때문이다. 원수도 사랑하고 미운 자도 용서하고 축복해야 어떤 시련도 이겨내는 건강한 마음을 얻는다. 용서하기 힘들 때 용서하는 마음처럼 소중한 인생 자산은 없다. 남을 욕하고 비판하면 행복 가능성은 낮아지지만 용서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훈련해 가지면 영혼도 회복되고 공동체도 회복되고 복된 미래도 펼쳐진다.
3. 침묵하라
히브리인들은 사형죄나 추방죄 외에 일반적인 중죄를 범하면 그 아버지나 형제가 범죄자에게 침을 뱉어 큰 모욕을 주었고 동시에 7일간 진영 밖에 가두어 참회 기간을 가지게 했다. 그처럼 비록 미리암의 죄를 용서했지만 하나님은 그냥 용서하지 않고 관례를 따라 7일간의 진역 밖에 가두어 참회 기간을 가지게 했다(14절). 그 기간은 자기 성찰과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사랑에는 격리와 침묵 시간을 가지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시각을 가질 때 사람은 성숙해진다. 침묵과 격리를 통해 영혼의 가벼움을 극복해야 쓰임 받는 인생이 된다.
하나님은 큰일을 맡기실 때 무게가 있고 진지하며 배울 자세가 되어 있고 배운 것을 온 몸을 다해 실천하려는 성도에게 맡기신다. 그런 성도가 되려면 침묵과 격리를 통해 자기를 성찰할 줄 알아야 한다. 공동체 생활에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가급적 만남과 전화통화의 횟수를 줄이라. 침묵의 힘은 의외로 크다. 침묵을 배경으로 한 말은 성음이 되지만 침묵의 배경이 없는 한 말은 소음이 된다. 침묵하라고 해서 전혀 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말을 조금이라도 줄이라는 뜻이다. 일정 기간의 격리도 침묵을 위한 것이다.
사람으로부터의 격리를 두려워하지 말라. 환경이 자신을 격리시키는 상황으로 펼쳐지면 그 기간을 교훈 기간으로 삼으라. 너무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가끔 여백도 만들고 떨어져 있으라. 배우자가 가끔 조용히 기도도 하고 독서도 하고 혼자 차도 마시는 상황을 즐기도록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지혜롭게 마련해주라. 너무 채워지면 생각이 복잡해지고 더 신경 쓰이고 짜증 지수가 높아진다. 왜 기도할 때 눈을 감는가? 그것은 가장 쉬운 침묵과 격리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가치들을 영혼에 채우는 데 가장 중요한 훈련 중 하나가 침묵 훈련이다.
4. 잠시 서라
미리암을 격리시킨 7일 동안 모세와 이스라엘은 행군하지 않았다(15절). 한 사람 때문에 전진이 멈춰졌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감수했다. 가끔 전진을 잠시 멈추라. 말을 그치는 침묵도 필요하지만 행동을 그치는 멈춤도 필요하다. 쉼이 없이 달리는 것은 일종의 집착이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고 집착하면 ‘망가지는 것’이다.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집착이다. 누군가 나를 꼭 떠나겠다고 축복하며 보내주라. 사람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만 떠나지 않으면 된다.
여백이 있는 삶이 복된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밤도 주셨다. 밤은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창조적인 역사가 준비되고 이뤄지는 시간이다. 저에게는 밤 9시부터 아침 7시까지가 주된 말씀 묵상 시간이다. 그 밤의 창조적인 묵상이 없었다면 성경 전체 강해의 비전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밤을 창조적인 시간으로 만들라고 주셨다. 목회자는 주일이 가장 바쁘듯이 밤도 가장 바쁘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만들 줄 알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밤에 고요한 묵상 중에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사람에게 침묵과 멈춤도 필요하듯이 밤과 잠을 통한 안식도 필요하다. 가끔 의견 갈등이 생기면 침묵하라. 침묵은 말의 안식이다. 싸움이 있을 때 침묵을 통해 그 싸움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어떤 부부는 다툰 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신기하게 잠을 푹 주심으로 상처 회복의 기간을 단기간에 끝내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지만 고난당하는 자에게도 잠을 주신다. 결국 밤, 잠, 침묵, 멈춤, 안식, 주일성수는 크게 보면 다 유사한 개념으로서 승리와 행복의 주요 원천들이다.
< 실패를 쉼으로 승화시키라 >
삶은 낮과 밤으로 이뤄졌다. 삶에서 밤의 안식이 없다면 인생과 세상은 무섭게 망가진다. 안식의 밤이 없으면 문제의 밤이라도 필요하다. 진짜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문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의 순간을 안식의 기회로 삼으라. 그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체험하라. 능동적으로 쉼을 가지되 수동적으로 쉬게 된 상황도 두려워하지 말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잠시 서면 뒤처질 것 같지만 그때 잠시 앉아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출발하면 된다.
지난주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집필을 하는데 컴퓨터 키를 잘못 눌러 갑자기 쓰던 글이 사라졌다. 몇 시간의 작업이 날아갔다. 원고 마감을 앞둔 바쁜 기간에 그런 일이 생겨서 너무 속상했다. <월새기>를 집필할 때는 마지막 순간에 심혈을 기울인 문장들을 새롭게 묵상해서 곳곳에 첨부해 넣는다. 그런 문장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몇몇 문장들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전에는 몇 시간 정도라도 그 속상함의 여파가 지속되었지만 지난주에는 그 속상한 기분을 10분 정도만 가졌다가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때 “잊어버린 말씀은 하나님이 들려지지 않기를 원하는 말씀인가보다.”라고 툴툴 털고 하루 분 말씀을 탈고했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1년도 손해 보는 사람이 있는데 몇 시간 손해 본 것에 너무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금방 툴툴 털고 일어서자 저 자신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처럼 “하나님이 그 상황을 만드셨다. 무슨 선한 뜻이 있겠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쉽고 속상한 일을 금방 잊고 툴툴 털고 일어서면 곧 기분이 좋아진다. 믿음으로 그런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라. 잠시 늦어짐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면 사실상 늦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