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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막8:27-38절) 가이사랴 빌립보의 질문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붙잡고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대개 대통령(大統領)이 된다든지, 장군(將軍)이 되고 싶다든지, 아니면 위대한 학자(學者)가 되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 아이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는 커서 거지가 되고 싶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맞아 비참하게 죽고 싶다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을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 생활하는 군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급(階級)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계급까지 올라가느냐? 는 것이 군대에서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성계급에 승진하게 되면, 벌써 대우가 엄청나게 달라지고, 그 사람은 적어도 군대 안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능력이 인정받을 때, 세상을 살아갈 재미를 느끼고, 자기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또 자신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밑바닥의 자리에 떨어지게 되면, 도대체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해 주지 않고, 그 사람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거기서는 아무도 그 죄수를 사랑해 주거나, 존경해 주지 않습니다.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정신적 여유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살아갈 재미를 느낄 수 없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려고 애를 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높아지는 또 다른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높아지거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는 그 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길이 너무나도 달라서 처음에는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속으로는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데, 예수님은 자꾸만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시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정말 이 세상의 쓸데없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너무나 정력을 낭비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은 그야말로 일시적인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치 여인들이 잠깐 화장을 해서 아름다워졌다가 금방 그 화장을 지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는 것은 영원히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Ⅰ.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질문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능력의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증거 하시면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마치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능력을 퍼붓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부터 완전히 달라지 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시며, 이때부터 십자가를 향하여 낮아지는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8:27절)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기서 가이사랴 빌립보가 어디인가 하면, 이스라엘 가장 북쪽 끝에 있는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습니다. 즉 갈릴리 호수 북쪽에 보면, 메롬 호수라고 하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 더 위에 있는 헤르몬 산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가 곧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시다가 안식일 문제로 유대인 지도층과 크게 충돌하게 되자, 이방인 지방까지 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지만, 이번에는 더 북쪽 끝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씨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시간을 버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이 뿌린 복음의 씨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한 것은 지금까지 기다려 오시다가 이제부터 본격적인 고난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어 보셨습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생각이나, 동향을 물어보신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8:28절)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보고서도 예수님에 가지고 있는 인식은 너무나도 부정확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예수님의 능력은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라고 한다든지, 엘리야라고 한다든지, 혹은 옛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즉 죽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들의 영(靈)이 임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 예수님 자신의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반인들은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누구든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전에 죽었던 선지자들의 영(靈)이 임해서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즉 신(神)들림에 의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예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기적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못했을까? 우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외적 조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즉 가문과, 학벌과, 출신 지역이나, 돈이나, 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조건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을 보고서도 예수님 자신의 능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신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군중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것이지, 신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부흥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잘 몰랐습니다.
일반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고, 오히려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즉 오래전에 죽었던 선지자의 혼(魂)이 씌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일반인들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죽은 귀신이 쒼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8:29절)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동안 제자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을 총결산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이 누구신가?*하는 질문으로 결론을 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표해서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주는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야(messiah)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약속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지도자를 세우실 때는 반드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즉 선지자도 기름을 붓고, 제사장도 기름을 붓고, 왕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망한 후에 메시아는 장차 오실 한 분의 구원자로 집중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 세우신 구원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主)*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 쓰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온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너무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입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아들이 있을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위대한 연합(聯合)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좌와 허물은 하나님께 넘어가고, 하나님의 모든 구원과 능력은 우리에게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의 열쇠이십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이상 절대로 하나님의 세계 안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일체 받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지켜본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16:16-17절)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도 분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듣고. 너무나도 기뻐하시면서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깨달음을 줄 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누구든지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6:19절)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의 열쇠가 무엇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이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도 천국의 엄청난 보물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우리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모든 은혜와 축복과 성품과 능력과 지혜가 다 부어지게 됩니다. 그중에서 진수 중의 진수가 곧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죄가 끼친 모든 상처나 흉터를 완전히 치료하고. 우리에게 샘솟는 것 같은 새 능력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을 똑바로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의 거의 대부분의 이단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실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머리로 이해되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말할 수 없는 축복의 진수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이런 신앙의 세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자기 머리로 억지로 만들어서 믿으려고 합니다.(헛 똑똑한 바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엄청난 기적과 능력을 보고 들으면서도 전혀 그 세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수성찬의 잔치자리에서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8:30절)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더 많이 알리라고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일반인들에게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의 정체를 감추시는 것을 신학자들은 *메시아 은닉*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렇게 기다려 왔던 메시아인데도 불구하고 왜 정체를 감추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은 소경이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 주면서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그 당시 *메시아가 너무나도 정치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는 분명히 모세나 여호수아 같이 군중을 일으켜 나라들 되찾아 주는 정치적인 영웅으로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명은 결코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생각하는 메사아의 사명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사명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불필요한 갈등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 하우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인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인데, 유대인들은 자꾸만 자기 나라의 독립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아 능력 있게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같은 이방인들이 포함된 큰 이스라엘을 위해, 유대인들의 작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다.
원래 아파트를 지을 때, 모델 하우스를 멋있게 짓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짜 아파트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즉 진짜 아파트를 다 지은 후에는 모델 하우스는 아까워도 부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셀(cell)공동체에게 큰 이스라엘의 축복을 주기 위해 작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셨습니다.
Ⅱ.예수님의 수난 예고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부터 가장 분명하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8:31-32절)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예수님의 가이사랴 빌립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그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까지 오직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능력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말씀의 은혜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과 기적은 천국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비로소 이 천국의 가장 핵심적인 비밀을 드러내 놓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 이 천국의 축복과 능력이 오게 되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가장 핵심적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천국의 가장 중심 되는 곳에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고, 천국의 축복이 임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복을 주신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에게 천국 축복이 오게 하려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저지른 그 죄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앞에서 교만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를 범했을 때, 인간만 불행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하심에 엄청난 상처를 끼쳤던 것입니다.
바로 인간이 손상시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우심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축복이나 은혜가 주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을 해서 결정하셨습니다. 즉인간의 힘으로는 백만 번 죽었다 살아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책임지기로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오직 하나님의 의(義)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을 때,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과 능력은 곧 이 죽음을 전제(前提)로 하고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즉 외상이요, 가불(假拂)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천국의 축복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겨 지고. 불행했던 과거도 다 지워지고.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와 능력과 축복의 풍성함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의 핵심을 파고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비참한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 모든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비참한 죽은 위에서 피어난 꽃이요,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8:31절)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칭찬과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야말로 유대사회를 대표하는 모든 대표자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이 예수님을 버려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예수님을 감싸거나,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유대 지도자로부터 철저하게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와*비로소*입니다.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에 모든 유대 지도자가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들도 모릅니다. 그냥 예수님이 미울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종들이었습니다.
마귀의 종들이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니까 시기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무엇인가 도도한 것 같았고, 건방진 것 같았고, 가장 싫었던 것이 자기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던 기적과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이 감동받는 이것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죽은 능력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시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붙잡아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결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려면, 과감하게 소속을 옮겨야 합니다. 이 세상 젖은 끊어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젖,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돌 감람나무에서 끊어지고,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진액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살아날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죽는 것이 처음이고, 다시 살아나는 것도 처음입니다.
혹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살아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구원이 실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공을 믿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붙잡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붙잡고 나가면, 아무리 많은 변수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부활뿐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하여졌고,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고 가시는 것입니다.
즉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합법적으로 모든 축복과 은혜와 능력을 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은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아주 강하게 말린 것입니다.
8:32-33절)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도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인간의 생각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말씀하시니까 무엇인가 예수님이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아니, 도대체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이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일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죽으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 옆에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예수님,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인다고 합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죽일 순 없습니다. 예수님, 제발 마음을 강하게 잡수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면, 누구나 다 사람의 마음이 약(弱)해서 저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약해져서 저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옆에 있으니까 제발 약한 마음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아빠들이 직장을 잃으니까 아이들이 하는 말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일이 뜻대로 잘 안 되니까 홧김에 예루살렘에 가서 죽으시려는 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입에서 벼락같은 책망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16:23)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물론 베드로가 사탄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는 말에서 사탄의 유혹을 느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가장 강한 유혹이 무엇입니까? 고통을 받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은근슬쩍 십자가를 넘어가는 이것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강하게 말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마음이 약해질 때가 사랑하는 사람이 말릴 그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베드로에게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는 지금 감히 내 앞에 서서 얼쩡거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막으려고 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수 제자라 하더라도 십자가를 방해하는 자는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가실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Ⅲ.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예수님은 결심을 굳히신 후에 이제 제자들이 과연 어떤 자세로 자신을 따라와야 하는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8:34절)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방법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사형 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목걸이로 십자가를 매는 사람도 있고, 또 조그만 십자가를 손에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처형하는 사형 틀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맨 앞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모든 제자들과 무리들이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다음에는 다른 제자들과 무리들이 한 사람씩 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장면입니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할 때, 목에 올가미를 쒸워서 죽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오는데, 모두 목에 올가미를 걸고 온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마치 알카에다 같은 테러집단에 입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누구든지 알카에다가 되려면, 언제든지 배에 폭탄 띠를 두르고, 터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길이 결코 출세나 호강하는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고 처형하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비참한 길을 가야만 하고, 무엇 때문에 비참한 종교를 믿어야 합니까?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나를 거기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어 없어집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거기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자랑과 야망과 비참했던 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부인(否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없습니다. 즉 우리의 과거나 자랑이나 비참함도 없고. 우리의 모든 불행했던 과거도 없습니다. 왜냐면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과거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즉 내 인생 경력이나 야망이 살아나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죽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십자가 위에 못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놀리고 조롱하니까 *예수님, 잠깐 계십시오*라고 하면서 손과 발에서 못을 빼고 내려와 한바탕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난 후에 다시 십자가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편리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나의 혈기나. 학벌이나. 가문이나. 능력이나. 야망이나.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알몸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해 죽어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세상 자랑이나 세상 야망이나 세상 혈기에 대해서 죽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잘난 체 할 수도 없고, 성질을 부릴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외는 아무것도 붙들지 말아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을 가지고 와서 자랑을 해도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면 죽은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8:35절)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의 자랑이나 혈기나 경력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 세상에서는 손해 보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이 세상의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 둘 다 가지니까 훨씬 더 똑똑하고, 유능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의 것을 붙들고 있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참 만만하게 여겨서 자기의 머리로나 노력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이 세상의 죄는 너무나 강하고, 마귀는 너무나도 교활하므로.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죽지 못한 인생은 마귀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죽은 자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비참하고.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때도 있고, 무능한 바보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죄를 이기는 힘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고, 기도하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으로 죄를 이기고 원수 마귀를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 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돈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권력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기 목숨일 것이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 영혼을 살리는 이것입니다.
8:36-37절)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가끔 보면 돈(보험금)을 타기 위해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자기 생명의 가치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목숨을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될까? 10억을 주면 죽어 주겠습니까? 가끔 사람이 죽고 난 후에 보상금을 주는데,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딱 한번 이 세상에 사는데, 사람들은 이 삶의 가치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십자가의 위대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수조원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살아 있는 자체가 보배요, 우리가 기도하면, 무한정의 축복을 이 세상에 임하게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보배들입니다.
8:38절)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은 우리 눈앞에 두 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그 본질은 음란하고 죄를 많이 짓는 이것입니다.
또 다른 세계는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이 함께 있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무가치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생명의 말씀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즉 나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죽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붙들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놀라운 것은 *우리가 죽으면, 죽을수록 더욱 강하고,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악으로 썩은 세상마저도 아름답게 변하게 할 것입니다. 아-멘
복음성가 905장 *죄악에 썻을 내 육신을*
site/Kakao 선교회 안내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운 가정과 영생을 위하여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대상 : ▷불신자 ▷개종자 ▷코로나시대 바빠서 교회출석 못하는 자 자발적인 전화 신청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 ▷영생 받고 사망 후 천국 가길 원하는 자. 즉▷허무에서 가치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권태에서 행복으로, ▷염려에서 기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저주에서 풍요로, ▷종교인에서 주님의 제자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불 땔감에서 천국 맨션(mansion)을 원하는자.
물론 각자 의지와 기질과 순종여부에 따라 차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21:8절)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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