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의 삶에 겁겁하여 뒤를 돌아보고 걱정할 여유가 없다 !!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 운동 단체인 하마스(Hamas)와 충돌이
생겼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갈등은 기독교 성경이 원인이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5절 내용을 요약하면
여호와께서 유대인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명령하기를 네 고향인
갈데아 우르(Ur of the Chaldees)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Canaan)팔레스타인)으로 가라
그곳이 내가 너희에가 주는 땅이다”에서 오늘날 중동의 비극은 시작된다.
※가나안(Canaan)은 지금의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옛 이름이다.
생물학 용어에 파이토케미컬(Phytochemical)이 있다.
쉽게 말해서 식물의 먹이사슬이란 학명(學名)이다.
꽃과 나비등 곤충과의 관계에서 꽃의 향기는 곤충을 유인하는 수단이
파이토케미컬(Phytochemical)이다.
여기에서 파이토케미컬은 먹이로 제공되고 이것을 먹은 곤충은 씨를 전파하여
식물을 퍼지게 한다.
이것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존현상이다.
먹고 먹히고 하는 과정에서 지구상의 생명체의 연속성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랑박선(螳螂搏蟬)”이란 고사가 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엿본다는 말이다.
위의 말을 보충하는 뜻으로 “당랑재후(螳螂在後)”가 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엿본다는 말인데,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꼭 문재인 정권의 민주당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장자(莊子)는 노자(老子)와 함께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바탕에 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철학자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莊子)하면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유유자적(悠悠自適)-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자연을 상대로 자기 삶을
꾸리는 생활.
세상이 참새처럼 눈앞의 이익을 쫓고 있다면 장자(莊子)는 대붕(大鵬)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진 큰 인물이다.
언젠가 장자(莊子)가 자기답지 않게 몹시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자(弟子)가 의아하여 무슨 일이 있는가 물었다.
선생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장자가 말기를
사실은 내가 숲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까치 한 마리가 내 이마를 스치듯 날아가 숲속 큰 나무에 앉았다.
날개가 2m는 될 것 같고 눈알 지름이 3cm는 될 정도였다.
원래 중국인들은 뻥이 세다 장자(莊子)도 중국인 아닌가!
하기야 뻥 하면 인도사람을 이길 자가 없다.
장자가 자기 이마를 스쳐간 까치로 기분이 상해서 그 까치를 잡기 위해
까치가 날아 앉은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활시위를 당기려했다.
그때 까치를 자세히 보니 까치는 나뭇가지에 있는 사마귀를 잡아먹기 위해
정신없이 날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시원한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잡으려고 일격을 준비
중이었다.
장자→까치→사마귀→매미
장자(莊子)는 깨닳기를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눈에 불을 쓰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까치를 쏘려는 활을 거두었다.
숲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장자(莊子)가 발길을 돌릴 때 산지기가 쫓아와 장자를 심하게 꾸짖었다.
장자(莊子)를 밤나무 밤도둑으로 오해하고 야단을 친 것이다.
밤도둑으로 몰렸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기분이 나빴다면 자연인 장자(莊子)답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장자(莊子)가 기분이 나쁜 이유는 따로 있었다.
吾守形而忘身 觀於濁水而迷於清淵
나는 밖의 형체(形體)에 정신을 빼앗겨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탁한 물만 보다가 맑은 연못을 잃어버렸다.
까치에 혼(魂)이 팔려 밤나무 속으로 들어가다가 나를 잃어버렸다(忘身)
밤나무 숲지기가 나를 꾸짖어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깨끗한 물에 노는 몸이다.
그런데 외부의 현상에 정신이 팔려 먹이연쇄로 이루어진 세상(濁水)에 발이
빠지는 바람에 산직이 에게 망신(忘身)당하여 기분이 나쁜 것이다.
入其俗,從其俗
세상이 더러 워도 그 안에 들어가 같이 더러워지지 않으면 허물이 될 일이 없다
그 안에 먹이연쇄 고리의 하나로 포함되어 휩쓸리면 더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사마귀가 매미를 노릴 때(螳螂搏蟬)
까치가 사마귀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다른 걸 노린다는 것은 다른 것이 나를 먹기 위해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다.
또 삶이 깨끗할 수가 없다.
장자(莊子)는 먹이연쇄의 고리로 이루어진 세상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거기에 매몰돼 스스로를 잃어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장자에게 물어 본다.
탁한 세상에서 탁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매미→사마귀→까치→장자로 얽힌 먹이연쇄 고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초연하게 살 수 있을까?
세속에 들어가 세속에 따르며 살되 청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적게 먹는다고 해도 먹는 건 먹는 거다.
먹기 위해서는 다른 걸 죽여야 한다.
동물이던 식물이던 생명체를--
이런 생존 현상에서 장자(莊子)도 예외일 수 없다.
이것이 지구에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생명체의 딜레마(Dilemma)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도
남북한 전쟁도 살기위한 싸움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