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登山)의 행복
이준섭
우리의 삶은 등산길과 같다. 오르내림이 우리 인생길이다. 산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섭리를 가장 먼저 느끼게 해 준다. 나무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푸른 꿈을 늘 심어주는 것 같다.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오묘(奧妙)함이 있듯 설명할 수 없는 산의 오묘한 변화와 조화가 등산길 속에 있다.
봄산은 찔레꽃 향기로 터져나고 있다. 찔레꽃 향은 산골 마을 수줍은 색시의 냄새와 같다. 수줍어 부끄러워하는 마음 속에 간직된 가장 곱고 깨끗한 순정(純情). 순수해서 더 아름다운 산골 색시의 마음속엔 사나이의 마음속을 녹여버릴 뜨거운 정열도 숨겨 두었으리라.
가을산이 빨갛게 잘 익은 열매들로 터져난다면 봄산은 봄풀꽃향으로 터져난다. 꽃향은 터져서 꽃잎이 되어 골짝물로 흘러온다. 새소리 물소리와 함께 흘러온다. 산골 색시같은 외로움과 순수한 정열도 함께 싣고 온다. 꽃송이들의 타오르는 정열과 나무들의 푸르른 꿈이 흩날리는 계곡이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겠는가!
눈을 들어 조금만 더 자세히 나뭇잎을 살펴보라. 때는 바야흐로 어린 신록에서 녹음으로 옮겨가고 있다. 신록이 티없는 어린이의 웃음이라면 녹음은 청춘의 밝은 웃음이다. 얕은 초록에서 짙은 초록으로 변해가는 요즈음의 잎이 가장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색깔이다. 이렇게도 맑고 깨끗한 산의 정기(精氣)를 온 몸에 칭칭 감으며 올라가는 행복감을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아니랴.
유명한 등산길이 아닌 탓인지 혈리산 산길은 태고(太古)의 숲길 그대로다. 넝쿨들이 우거진 잡목림이 빽빽하다. 나무들도 산골마을 아씨처럼 밝고 순수해서 정말 좋다. 오를수록 산길은 아늑하고 포근하다.
지난 해 떨어진 낙엽들이 아직도 썩지 않고 그대로 울긋불긋 누워 있다. 어제 온 비로 아직 젖어 있는데 쏟아지는 햇살이 더욱 찬란하다. 얼만큼 올라온 능선위의 낙엽은 바삭바삭 밟힌다. 확 트인 바람결에 마른 탓일까? 포근함과 폭신폭신함이 자연의 침대라고나 할까? 바람이 자연의 손길처럼 목덜미를 간지럽혀 준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낙엽 침대 위에 잠시 누워본다. 낙엽 속에선 아직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는 냄새가 나고 있다. 익는 냄새 속에 이 세상의 평화스러움과 행복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다. 이 능선에는 봄풀꽃 속에 가을 꽃도 피어 있었구나. 뜨겁게 타오르던 가을의 사랑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낙엽이 오염된 빗물 때문에 썩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이 낙엽들은 그렇다기보다는 지난 가을 남기고 떠난 너무도 뜨겁고도 슬픈 사랑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그대신 나무숲에 살아 있던 뜨겁고도 슬픈 사랑으로 신록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등산은 미래의 앞길을 자기 혼자 개척해나가는 일과 같다. 능선을 하나 넘으면 조금은 평탄한 길이 나오다가 다시 오름길이다. 올라오면 올라온 만큼 마음이 넓어진다. 하늘은 더욱 가까이 푸르러져 있고, 멀리 새소리랑 메아리소리가 깊고 오묘하다. 메아리소리도 제 각각 빛깔이 있는 걸까. 소리의 깊이가 산의 높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양이다. 산의 높이와 소리의 신비스러움의 깊이는 비례하는 걸까 ?
산을 오르는 일은 인내심을 배우는 일이다. 산등성이를 오를 때마다 다리가 팍팍하고 고통이 따른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참고 견디면서 오르노라면 숨결은 거칠어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색색거리는 숨결은 푸른 잎을 마시는 것 같다.
푸른 잎을 마시다 보면 어느덧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안으로 안으로만 나무 속에 깊숙히 고인 수액(樹液)을 마시고 있는 것 같다. 대도시에서 오염된 공기만 마시다가 나무 수액을 속 깊이 들여마신노라면 이렇게도 맑고 깨끗함을 느낄 수 있는 행복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폐부 깊숙히 느껴진다. 신록의 숨결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이 세상에서 맑고 순수한 것들이 더러 있지만 등산길에서 씩씩거리면서 들여마시는 공기는 이 세상의 가장 맑고 순수한 것들만 모아 놓은 것 같다. 나의 세포마다는 물론 가슴 속 깊이깊이 맑은 산소로 아직 남은 더러운 세포들을 깨끗하고 곱게 씻어주는 것 같다.
오염되고 더러워진 몸을 공기로 씻어내는 행복감! 사람은 가끔 목욕을 하면서 더럽혀진 몸을 씻어내는 행복감에 젖곤 한다. 그러나 등산길에서의 나뭇잎 바람이 몸 속까지 씻어주는 행복감에 비할 수 있으랴! 보이지 않는 몸속의 세포를 빠짐없이 씻어주는 자연의 품안에 안기는 일은 등산이다. 몸속의 살결을 깨끗하게 헹궈내다 보면 영혼(靈魂)까지도 정화시켜 주고 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맑고 곱게 헹궈주는 일처럼 가치있고 보람된 일이 있겠는가.
고통을 참고 이겨내며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랐을 때의 기쁨 ! 높은 곳에서 외쳐대는 메아리 소리. 메아리로 산골짝을 뒤흔드는 행복감 ! 흰구름꽃은 어느덧 내 머리에서 몽그레몽그레 피어난다.
산을 오르면
올라온 만큼
문득 더 커진 나의 키
저 멀리 고층아파트들도
발밑으로 쌓인 성냥갑처럼
내려다 보이고
산봉우리에서
두 팔을 활짝 펴면
나뭇잎처럼 피어나는 흰구름꽃 !
산을 오르면
산봉우리보다 더 높아진
나의 마음
그 높고 깊은 마음 속에서도
몽그레몽그레 피어나는
꽃구름송이들.
저 멀리 아득한 마을. 고층아파트들도 성냥갑처럼 내 발 아래에 쌓여 있다. 마을길의 사람들이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 나라 사람들 같다. 문득 거인(巨人)이 된 기고만장(氣高萬丈)함 ! 이런 통쾌함은 등산이 아니면 맛보기 힘드리라. 내려다보는 행복감에 젖어 있노라면 “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라고 말한 공자(孔子)님의 높은 정신적 경지도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은 행복감에 또 한번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려오는 길은 떨림의 길이다. 날아갈 듯 가벼워진 몸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씻겨진 몸속 하늘보다 높아진 정신적 경지. 가장 가볍고 눈부신 햇살처럼 내려오는 길은 사랑과 경건함과 떨림의 길이다. 올라가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 등산에도 해당이 되나 보다. 올라가는 사람은 박수와 칭찬이 자자하지만 내려오는 사람은 누구 하나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길이기 마련이다. 누군가와 슬픔을 같이 나누기는 쉬워도 기쁨을 같이 나누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올라가는 사람을 축복해주기는 쉬워도 내려오는 사람의 고독과 허무를 나누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싶다. 발을 잘못 딛었다가는 삘 염려가 있듯 잘못 걸은 발길이 있는가 점검하고 깨끗하게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올라갈 때의 기쁨과 행복을 고루 나눠주는 덕(德)을 나무처럼 베풀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려오는 길은 빠르다. 정신없이 발을 움직이다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맨주먹으로 서 있게 마련이다. 내려올 땐 약숫물 한초롱 받아올 일이다. 내려온 뒤의 나머지 삶도 산처럼 하늘 잘 받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할 정화수를 위해서다. 또한 오염된 이 시대에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물을 마시며 물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산에서 우리의 삶을 배워야 한다. 등산길은 우리의 인생길이다. 맑고 고운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가장 깨끗하게 헹궈줄 산길이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산림문학 여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