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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어당(林語堂.린위탕.1895.10.10∼1976.3.26)
중국의 세계적 작가ㆍ번역가ㆍ교육자ㆍ풍자가. 중국 복건성(福建省) 용계현(龍溪縣) 아모이 근교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 본명 林玉堂. 미국에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1966년 대만의 대북시 교외에 거주하였다. 중화민국 작가회 회장(70) 역임. 생전에 약 40권의 영어 저서를 집필하여 17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홍콩의 ‘퀸 메어리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
중국 현대 문학자. 원명은 옥당(玉堂.위탕). 복건성(福建省) 용계현(龍溪縣) 출생. 상해(上海) 요한(聖約翰)대학 졸업. 하버드대학ㆍ라이프치히대학에 유학하여 언어학을 전공, 북경(北京)대학ㆍ북경여자사범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아모이(厦門)대학으로 옮기고 뒤에 우한(武漢) 정부에 들어갔다.
1927년 이래 상해에 잇으면서 문필을 업으로 하고, 특히 1932년 이래 <논어(論語)> <인간세(人間世)> <우주풍(宇宙風)> 등의 소품문 잡지를 주재, 소위 유묵(幽黙) 문학을 범람시켰다.
산문집으로 <전불집(翦拂集)> <대황집(大荒集)>이 있다. 또 [챠이나 크리틱스] [뉴욕 타임즈]에 기고, 예리한 평론가로서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1936년 도미(渡美), 중국의 문화를 논한 <아 국토 아 국민(我國土 我國民)>(1936), 장편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1939)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에 들었다. 그 밖에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1937), <북경호일>의 속편 <폭풍 속의 나뭇잎>(1941) <눈물과 웃음 사이>(1943), <침과대단(枕戈待旦)>(1945) <미국의 지혜>(1950) 등 영문 저술이 많으며, 언어학 논문집으로는 <어언학 논총(語言學論叢)>이 있다. - <문예대사전>(학원사.1969) -
임어당(林語堂)은 1895년 중국 복건성(福建省) 용계(龍溪)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있는 미션계 상해(上海) 세인트존즈 대학을 마친 뒤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言語學)과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고, 1923년 북경대학(北京大學) 교수를 지냈고, 노신(魯迅)ㆍ주작인(周作人) 등과 함께 어록사(語綠社)에 가입, 무한정부(武漢政府) 외교부 비서가 되어 반봉건 투쟁에 나서는 한편, 급진적인 문필(文筆)을 펴기 위해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영문(英文)으로 저술한 것이 많은데, 중국문화를 서유럽에 소개하는 <나의 조국, 나의 민족>과 <생활의 발견> 등이 특히 유명하다.
임어당(林語堂)의 이러한 폭 넓은 학식과 동서 고전 및 언어의 자유로운 구사 등이 장점이어서 전후에는 유네스코 예술문학부장 일도 했다. 임어당(林語堂)은 세계적인 문명비평가ㆍ작가 등으로 소개되었음은 물론, 세계적인 명작을 수록하는 <모던 라이브러리>에 그의 저작이 <동양의 지혜>라는 제하(題下)에 출판된 것을 보아도 그의 명성이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겸손하게도 자기는 심원(深遠)한 사상가도 아니고, 또 박학다식하지도 않다고 <생활의 발견> 서문에 썼거니와, 그러면서도 중국인 특유의 관능적인 무엇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적인 교양을 조화시키는 저자의 놀라운 통찰과 다식(多識)에 압도된다.
중국의 소설가ㆍ문명비평가. 원이름은 위탕(玉堂). 푸젠성(福建省) 룽치(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 상하이(上海)의 성 요한대학(聖約翰大學)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北京淸華學校) 영어교사가 되었다. 1919년 하버드대학에 유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21) 예나, 라이프치히 두 대학에서 수학했다. 23년 귀국하여 국립 베이징대학 영문학 교수가 되었는데,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는 한편 루쉰(魯迅) 등의 어사사(語絲社)에 가담하여 평론을 썼다.
26년 군벌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아모이(厦門)대학 문과 주임, 이듬해 우한정부(武漢政府)에 가담하여 그 외교부 비서가 되었다. 32년 유머와 풍자를 주장하는 [논어], 34년 소품문지(小品文誌) [인간세(人間世)] 등을 창간, 소품문을 유행시켰으며, 35년 <아국토아국민(我國土我國民)>을 쓰고, 이듬해 영국으로 가서 <생활의 발견>(1938) 등으로 중국문화를 소개하였다. 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37) <폭풍 속의 나뭇잎>(41) 등에서는 근대중국의 고민을 표현하였다. 영문 저작으로는 모국문화의 옹호, 중국문으로는 모국의 속물성(俗物性)을 풍자하였으며, 뛰어난 세계문화 창조에는 상식ㆍ이성(理性)ㆍ생활감정 등을 교묘하게 조화하는 중국정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미래소설 《The Unexpected Island》(5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중국어와 영어로 다양한 작품을 많이 쓴 중국의 작가. 1930년대에 사회 풍자를 주로 다루고, 서구식 저널리즘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어 잡지를 여러 권 창간했다.
중국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린위탕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20대 초반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고 영어교수가 되었다. 1919년에 그는 미국과 유럽으로 가서 하버드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진보된 학문을 공부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계속 교편을 잡으면서 여러 영어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는 한편 중국어 문학잡지에 수필을 기고했다. 중국에서 린위탕의 작가 생활이 절정에 도달한 것은 그가 [논어(論語)](반월간)라는 잡지를 창간한 1932년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중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유형의 서구식 풍자잡지였다. 이 반월간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곧 2개의 출판물을 더 선보였다.
1935년에 린위탕은 수많은 영문저서 가운데 첫 번째인 <나의 조국 나의 국민(My Country and My People)>을 출판했다. 출판 즉시 대성공을 거둔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권위있는 교과서로 간주되었다. 이듬해 대중적 요구에 부응하는 역사 이야기와 소설을 쓰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가, 빠른 속도로 책을 써냈다. 이 시기에 출판된 저서로는 <북경호일(北京好日)>(1937)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1940) <폭풍 속의 나뭇잎(A Leaf in the Strome)>(1941) <중국과 인도의 지혜(The Wisdom of China and India)>(1942) 등이 있다.
린위탕은 1943년과 1954년에 잠시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때마다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논쟁은 문학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공산당의 문학 비평가들은 대부분 순수 선전과 사회 교육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자기 표현으로서의 문학을 지지했다. 2번째 중국 여행이 실패로 끝난 뒤, 그는 미국에 남아서 중국 역사와 철학에 대해 더 많은 책을 썼다. <중국 명작 단편집>(1952)을 비롯하여 그가 영어로 번역한 중국 문학의 걸작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자유주의자로 불리며 세계정부를 제창하였다. 1970년 6월, 제37차 국제 펜클럽 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었다.
【저서】<나의 조국 나의 국민>(1935) <북경호일(北京好日)>(1937) <생활의 발견>(1938) <폭풍 속의 나뭇잎>(1941) <중국과 인도의 지혜>(1942) <눈물과 웃음 사이>(1943) <미국의 지혜>(1950) <임어신중영사전(林語新中英辭典)> <주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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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어당이 본 한국의 저력> - ‘만물상’ : [조선일보](1976. 3. 30)
미국 작가 펄 벅이 한국에 왔을 때 거문고소리를 듣고 ‘사람이 우는 소리 같다’고 말했었다. 중국 작가 임어당이 한국에 왔을 때 역시 거문고소리를 듣고 ‘우는 소리와 절규하는 소리가 같이 난다’고 말했다. ‘감각으로는 우는 소리로 들리고 영감으로는 절규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덧붙인 임어당은 오랜 고통의 누적에서 우러나는 저력의 절규이며, 그것은 앞으로 국제시대에 소중하게 평가될 한국의 희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거문고소리에서 한 민족의 희망을 포착해 내는 통찰력이 비범하기만 하다. 그의 <속생활의 발견>에 보면 그 수다한 풀벌레소리를 듣고도 산동성 여치니, 농서성(隴西省) 매미니, 그 벌레의 고향을 알아내고 그 벌레를 들고 다니면서 울림으로써 향수를 달랜다는 대목이 있다. 풀벌레가 내는 소리에도 인과가 있는데 하물며 한민족이 수천 년 폐부에 간직해온 소리를 인과 없이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68년의 한국 강연에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빈농의 집 근면한 아들’처럼 일하라고 타일렀는데, 그 말은 그렇게 일하라는 당위성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한국 젊은이들은 빈농의 집 근면한 아들일 수 있다는 전통적 여건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누적된 고통 때문에 울며 살아온 역사가 남에게는 없는 저력을 형성해 주었듯이 누적된 가난의 역사가 남에게는 없는 저력을 형성해 주었다고 미래상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의 대표작 <아국토아국민(我國土我國民)>에서 노쇠했다고 보는 중국인은 실은 조화된 개인주의 등 발전 가능성이 왕성한 젊은 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서구문명의 맹점을 찔렀었다. 임어당은 또 이 중국문명의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으면서 중국에는 없는 이 저력이란 보너스를 더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양질이고 강인한 한국문명의 미래를 통찰했던 것이다.
시성 타골이 말한 ‘한국의 빛’도 이 임어당이 통찰한 저력에서 솟구친 빛이었을 것이다. 다만 새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우리는 그 우리의 빛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하략)
<임어당의 ‘해학세계’> - [조선일보](1976. 3. 28)
동양적인 깊은 철학과 기지, 해학, 유머가 넘치는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의 세계적인 석학이며 작가였던 임어당이 26일 밤, 입원하고 있던 홍콩의 퀸 메어리 병원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켜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궁의 복건성 장주(漳州)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상해의 성요한대학을 졸업(1916)했다. 이어 도미, 하버드대학에서 언어학을 연구하고 독일로 건너가(1921) 예나, 라이프찌히 두 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23년에 귀국한 그는 북경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당시 군벌정부의 진보적인 교수들에 대한 탄압으로 아모이(厦門)대학으로 옮겼다. 1926년에는 무한정부에 참가, 외교부 비서가 되기도 했는데, 무한정부(武漢政府)가 붕괴된 후에는 상해에서 [논어] [우주풍(宇宙風)]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주작인(周作仁: 노신의 동생으로 학자이며 수필가) 등과 함께 유묵(幽黙)을 제창, ‘유묵대사’라 불리기까지 했다. 이 무렵의 산문집으로는 <전불집(翦拂集)> <대황집(大荒集)> 등이 있다.
1935년, 다시 도미, <나의 조국과 나의 국민>(1936)을 발표했고 대표작인 장편소설 <북경호일>은 1939년에 내놓은 것이다. 거의 영어로 쓴 40여권의 저서 중 우리나라 독자들을 비롯,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생활의 발견>이다. 1937년에 나온 이 책에는 그의 철학과 사상이 가장 잘 집약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전5권의 <임어당전집>(1968)이 나와 있다.
1948년에는 유네스코 예술문학부장, 1954∼55년에는 싱가포르의 남양대학총장을 역임한 근은 미국에 주거지를 두어 30년 동안 살다가 1966년에야 고국에 돌아와 대북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스페인식 별장에 살면서 저술을 계속해 왔다. 장개석 총통은 생전에 그를 아껴 정부의 요직에 기용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했다. ‘학자로서 인생을 정치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공산주의에 대해 평소 그는 ‘그것이 사람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자기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며, 이견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므로 나는 증오한다’고 말해 왔고 미국에 살면서 영어로 저술한 데 대해서는 ‘오리가 물을 대하듯 나는 영어를 대한다. 학위를 받을 때는 정말 유창했었다. 외국 유학 덕분에 나는 내 조국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 견해를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유저 <임어당 신중ㆍ영사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두 언어그룹 사이의 의사 전달을 용이하게 해 줄 것’으로 구미학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언제나 파이프를 입에 물고 낚시와 시예를 즐기며 만년에는 홍콩에 있는 아파트의 거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즐겼다. 한국에는 1968년(세계대학총장회의)과 1970년(펜대회) 두 차례 다녀갔다. 1968년 6월 19일 조선일보사 주최로 가진 방한특별강연에서 그는 특히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오직 전진, 전진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어록>
▲ 보석상의 진열장 속에 들어 있는 진주를 우러러보기보다는 쓰레기통 속에서 조그만 진주를 주워내는 편이 훨씬 더 유쾌하다.
▲ 인간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만큼 철학자들이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사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망령이나 천사에게 육체가 없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천벌일까 하고 나는 때로 생각할 때가 있다.
▲ 유머의 중요성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웃을 수 없었던 탓으로 제국을 잃었다.
▲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성격은 마음에 온정이 있고, 근심이 없으며 거기다 용기가 있는 성격이다.
▲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억지로 자연에 대해서 반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우아하게 늙어가는 것이 좋다.
▲ 종교란 항상 개인적인 자기만의 것이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의 종교관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지하기만 하다면 결말은 어떻게 되든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 인간의 행복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가 다 생물적인 행복이다. 이 생각은 극히 과학적이다. 오해를 살 위험은 있지만,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칸트의 저서를 읽지 않았다. 한두 페이지 이상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생활의 발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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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번쯤, 어쩌면 한 달에 두 번쯤 가슴 속에 느껴지고, 은은한 그리움으로 떠올려지는, 그런 당신의 모습으로, 정겨웠던 사연들만 기억하며, 우리,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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