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그리며
허영옥
모처럼 딸과 함께 외출을 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내어 딸과 마주앉아 본지도 꽤 오래 전 일인 듯 싶 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갈곳 안 갈곳 가리지 않고 따라나서서 나를 힘들게 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딸과 함께 외출을 한번 하려고 하면 내가 부탁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 그런지 말없이 식사하는 모습만 바라보아도 흐뭇하다. 차를 마시며 서로의 눈만 바라보아도 딸과 나는 무수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뿌듯했다.
성년이 된 딸과 함께 찻집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파란 들판을 보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친정어머니께서는 동백기름을 발라 곱게 빗어 쪽을 지었고, 얼굴은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형에 도톰한 입술을 가지신 분이었다. 유년시절 나의 기억으로 어머니는 말씀이 적으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어리광 한번 부리지 못 하고 떼 한번 써 보지 않고 자란 것 같다.
결혼 후 몇 해가 지났을 무렵부터 나는 사월 초파일이 되면,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보살사를 갔다. 절에 가는 길 은 시내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어머니와 단 둘이라는 것이 좋았다. 차창을 열어 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들바람이 들어오면 어린애처럼 좋아하시고,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는 밭둑을 지날 때면 차를 세워 그 꽃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예뻐하시던 어머니. 그때도 나는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함께 있음을 행복해 했었는데......
내가 딸과 함께 있음을 기뻐할 때나 어머니께서 나와 함께 했을 때의 느낌이 같았을까? 내가 어려서 어머니의 정이 그리웠을 때엔 아마도 그분은 생활하기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지금처럼 한 아이 키우는 정성을 다 쏟았다면 그 많은 자식을 어떻게 키웠을까. 나는 내 위로 다섯 형제에 눌리고 밑으로는 막내가 있어 내 목소리 한번 크 게 내지 못하고 살았다. 어머니는 맏아들인 큰오빠에게 온 정성을 쏟고 희망 을 걸었다. 나는 무언의 반항도 해보았다. 그러나 여섯 명중의 어느 누구도 감히 큰오빠의 사랑을 뺏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그러한 생활을 하다보니 오히 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길들여지며 성장한 것 같다. 초등학교 소풍 때 일이다. 어머니께서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돈을 꺼내 나 에게 10환을 주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백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비과 7개를 살수 있다는 것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이스 케키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나는 그 돈을 쓸 수가 없었다. 행여 그 돈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꼭 쥐고 다녔다. 그리고는 소풍을 다녀와서 어머니께 도로 그 돈을 드렸다. 한 나절 만져 본 것으로 나는 만족했었다. 부유하지 않은 집 아이들은 철이 일찍 든다고 하였던가. 그래도 나는 서럽지 않게 생각하였으니 말이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음이 행복했다.
유별난 성품의 아버지와 사시면서도 그 성격을 이해하며, 그 비위 다 맞혀 드리며 없는 살림에 여러 자식을 키우시면서도 자식들에게 심한 말씀 한번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살아가기도 바쁜 틈에 그분은 날마다 뒤꼍 장독대 위에 깨끗한 정한 수를 떠놓고, 자식들 잘 되기만을 밤마다 기원하시곤 했다.
친정오빠가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였다. 이 억 만리 떨어진 전쟁터에 아들을 보내놓고 마음 편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머니께서는 하루에 한번 드리던 정성을 아침저녁으로 드렸다. 그분이 매달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들을 군에 보내게 되었을 때 내 어머니께서 정성을 들여 물을 떠놓으 시던 마음을 더 진하게 뼈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추운 겨울날, 정한 수 그릇이 사발높이 보다 더 높은 얼음이 언채 금이 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사발을 가슴에 안고 아무런 말도 없이 사발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 물 을 떠놓아도 그릇이 깨지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라며 안타까워 하셨다. 얼마 후 우리 집에 날아든 소식은 청천병력이었다. 오빠의 부대가 폭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물 떠놓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정성이 헛되지 않았던지 몇 개월 입원 후 귀국한 오빠는 커다란 부상에도 치료가 잘 되어 건강한 몸으로 입국을 했다.
나는 많지 않은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얼마나 버거워 했었나.
딸이 고3이 되었을 때도 그 아이를 위해 정성은 들여 본적이 있는가. 새벽기도 한번 간 적이 없고, 절에 가서 간절한 불공 한번 드린 적이 없지 않은가.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그때 그 시절 딸에게 닥달은 하지 않았는지,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든다.
어머니는 부족한 살림에 점심 도시락이 남에게 뒤지지는 않을까 집에서 먹 는 밥보다 보리를 적게 넣어 싸 주셨다. 그러나 도시락 반찬 국물이 밥에 번졌다고 먹지도 않고, 도로 들고 와 짜증 섞인 투정을 했을 때도, 혼내기보다는 나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하시던 어머니였다.
내가 임신을 하여 친정어머니를 시도 때도 없이 찾았을 때도 얼굴 한번 찡그리시지 않고 반갑게 나를 맞 이하며 입에 닿는 음식을 무엇이든 해 먹이시던 사랑하는 어머니.
나도 어머니의 삶을 닮고 싶었지만 십분의 일도 닮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식에게도 부모의 희생과 사랑 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들과 딸에게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 고 있다. 남은 인생은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닮은 길을 가고싶다.
친정아버지께서 떠나신 후 어머니께서 커다란 아파트에 홀로 외로이 계실 때, 그 분은 혼자라는 것을 무척이도 싫어하시며 무서워했다. 그때 나는 “무섭긴 뭐가 무서우냐"며 어머니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남편이 하루만 집을 비워도 무서워서 잠이 안 온다고 혼자서 자고 있는 딸을 깨워 함께 잠을 자며, 혼자이길 그리도 싫어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왜 일 찍 어머니의 마음을 읽지 못했을까......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생기면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효도를 못 한다는 옛 말이 있듯이 나도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그리고 보고싶습니다.
내일은 당신께서 그리도 좋아하시던 하얀 장미를 들고 손녀딸과 함께 당신 을 찾아 뵙겠습니다”.
2000년의 봄
첫댓글 나도 어머니의 삶을 닮고 싶었지만 십분의 일도 닮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식에게도 부모의 희생과 사랑 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들과 딸에게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 고 있다. 남은 인생은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닮은 길을 가고싶다.
어머니의 삶을 닮고 싶었지만 십분의 일도 닮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식에게도 부모의 희생과 사랑 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들과 딸에게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 고 있다. 남은 인생은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닮은 길을 가고싶다.
나도 어머니의 삶을 닮고 싶었지만 십분의 일도 닮지 못하며 살고 있다.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식에게도 부모의 희생과 사랑 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아들과 딸에게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 고 있다. 남은 인생은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닮은 길을 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