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 | 왕명 | 재위기간 | 비고 |
---|---|---|---|
1 | 온조왕 | BC18- 29(46년) | 백제시조, 위례성에 거점을 둠 |
2 | 다루왕 | 28- 77(49 ) | 온조왕의 맏아들 |
3 | 기루왕 | 77-128(51 ) | 다루왕의 맏아들 |
4 | 개루왕 | 128-166(38 ) | 기루왕의 아들 |
5 | 초고왕 | 166-214(48 ) | 개루왕 맏아들,소고왕,속고왕 |
6 | 구수왕 | 214-234(20 ) | 귀수왕 |
7 | 사반왕 | 234 | 수구왕 아들,곧폐위됨 |
8 | 고이왕 | 234-286(52 ) | 초고왕동생,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등극 |
9 | 책계왕 | 286-298(12 ) | 고이왕의 맏아들,청계또는 책계 |
10 | 분서왕 | 298-304(6 ) | 책계왕의 맏아들 |
11 | 비루왕 | 304-344(40 ) |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사반왕의 동생이다. 분서왕(汾西王)이 죽자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비류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하였다. |
12 | 계왕,설왕 | 344-346( 2 ) | 분서왕의 맏아들 |
13 | 근초고왕 | 346-375(29 ) | 비류왕의 아들, 초고왕 |
14 | 근구수왕 | 375-384( 9 ) | 근초고왕의 큰아들 |
15 | 침류왕 | 384-385( 1 ) | 근수구왕의 맏아들 |
16 | 진사왕 | 385-392(7 ) | 근수구왕의 둘째아들 |
17 | 아신왕 | 392-405(13 ) | 침류왕의 맏아들 |
18 | 전지왕 | 405-420(15 ) | 아신왕의 맏아들 |
19 | 구이신왕 | 420-427( 7 ) | 전지왕의 맏아들 |
20 | 비유왕 | 427-454(28) | 구이신왕의 맏아들,전지왕의 서자라는설 |
21 | 개로왕 | 454-475(21 ) | 비유왕의 맏아들,근개루왕 |
22 | 문주왕 | 475-477( 2 ) | 개로왕의 아들,한강유역을 빼았기고 웅진으로 천도 |
23 | 삼근왕 | 477-479( 2 ) | 문주왕의 맏아들 |
24 | 동성왕 | 479-501(22 ) | 문주왕동생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 | 501-523(22 ) | 동성왕의 둘째아들 |
26 | 성왕 | 523-554(31 )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 | 554-598(44 ) | 성왕의 맏아들,신라정벌에 선봉 |
28 | 혜왕 | 598-599( 1 ) | 성왕의 둘째아들 |
29 | 법왕 | 599-600( 1 ) |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혜왕의 아들이다 |
30 | 무왕 | 600-641(41 ) | 법왕의 아들,또는 위덕왕의 4남 |
31 | 의자왕 | 641-660(21 ) | 무왕의 맏아들 , 나당연합군에패배,멸망 |
461년 개로왕 동생 곤지를 왜에 보내다 임신한 왕비와 같이
461년 6월 1일 사마 탄생?
464년 동성왕 탄생
475년 개로왕 사망
475년 문주왕 즉위 (개로왕 아들)
477 문주왕 사망
477 삼근왕 즉위(문주왕 아들)
479 삼근왕 사망
479년 동성왕 즉위(곤지의 아들)
492년 성왕 탄생
501년 동성왕 피살(22년간 재위) 37세 죽음
501년 40세에 무령왕 즉위(22년간 재위) 동성왕 아들? 개로왕 아들? 곤지의 아들?
탄생년도 461년으로 추정 6월 1일생
523년 무령왕 죽음 62세
523년 5월 성왕즉위 무령왕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
554년 신라와의 전쟁에서 성왕 죽음 62세
*가설 하나
성왕의 탄생시기는 언제쯤일까
무령왕이 461년생이고
성왕은 492년 탄생으로 나무 위키에 나옴namu.wiki/w/성왕(백제)
523년 왕위에 즉위할 나이는 대략 31세 전후로 추정
그렇다면 성왕은
왕이 되기 전 왕자로 31년간을 공주에 성장했고
왕이 된 후 15년을 살았으면 46년을 공주에 살고
부여에 천도해 가서 16년을 산 것이 됨.
무령왕 장례를 치렀고 대통사를 창건했으며
인도에 다녀 온 겸익스님을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율장을 정리하였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고
양나라와의 문물 교류를 활발히 하였으며
그 사이 부여에 천도를 대비한
축성이나 왕궁 건축을 지시 했을 것이니
공주에서 46여년를 살았던 성왕의 위업과
부여에서의 16년 위업을 단순비교 한다면
공주에서의 성장과 치세의 삶이 더 다양하고 많았을 터
백제문화제 사왕추모제에 성왕을 추가하여
5왕추모제로 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보여 지는데...
(애초에 공산성서 치러진 백제문화제 추모제는 5왕추모제였음)
가설 2
무령왕에 대해 몇가지 가설을 설정하고 생각해 보자
개로가 자기 부인을 곤지와 같이 왜에 보낸 까닭
1.국정이 대혼란 상황이라 처자가 위험해서?
2.곤지와 간통 사실을 눈치 챔(누군가의 주장임)
3.곤지가 형수를 달라고 한 것은 왜일까
4.동생이 자기 처를 달라 한다고
데리고 가라며 주는 개로는 무엇이며
무령이 만약 곤지와 같이 가다 섬에서 났으면
그는 개로의 아들인가 아니면 곤지의 사생아인가
5.아이를 낳으면 돌려 보내라 한
개로의 말에 비추면 자기 아들이라 생각했을터
나라가 위급한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
개로는 왜 자기 부인을 곤지를 따라 가도록 주었을까
6.무령이 461년 백제로 왔다면
즉위하던 501년까지 문주 삼근 동성왕의 피살을 겪었을 것
격변의 시기에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7.곤지는 자기 아들이라면 백제로 왜 돌려 보냈을까
8.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으니
그러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지나
9,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면
일본에 보내진 왕비의 소생인 무령왕은
문주왕과 형제간?
삼근왕과 동성왕의 숙부뻘?
10.개로가 보낸 여자가 일본에서 죽자
곤지를 왜에 보내 왜왕을 섬기라 하였으면
(이야기 설정 자체가 넌센스)
왜왕과 개로 내지 백제는 무슨 관계일까
11.누구는 무령왕 즉 사마가
낳아서 바로 온게 아니고
일본에서 자라다가
백제로 와서 왕이 되었다고도 하니
동성왕이 죽는 정변이 일어 난 후에
그것을 알고 백제에 왔을텐데
정변의 시기에
순탄하게 왕위에 올랐다 라고 보아야 하나
12.일본서기에 단 한줄 실려 있는
사마의 탄생설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나?
13.왜국의 섬나라 탄생설 진실인가 조작인가?
14.확실치도 않은 가카라시마 탄생설 믿어야 하나?
15가카라시마 섬 주민들도 모르던 이야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가 사마 탄생지라고 해서
알게 되었다는 주민들 말은 진실인가
16.년표에 보듯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라면
곤지는 언제 백제에 왔으며
이복형제? 사마보다 먼저 왕이 되게 된 까닭은
17.개로와 동생 곤지 사이에서
사마를 낳았다는 개로의 부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자기 남편으로부터 만삭의 부인이 버림 받은 것일까
아니면 곤지와의 통정?을 눈치 챈 개로로부터 내쳐진 것일까
여자들의 입장에서 사마의 어머니
개로의 부인 곤지의 형수 처지를 생각해 보자
18.형사취수하던 시절도 아니었을 것인데
엄연히 남편이 있는 형수를 내게 달라 한
곤지의 입장과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19.왜놈들이 한반도 역사를 왜곡시키는데
마음씨 좋고 순박한 우리가 넘어간 것은 아닐까
20.년표에는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라 나오고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 나온다
그러면 곤지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되고
뒤집어서 곤지와 같이 왜에 가다가
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거짓일수 있다
21.사마가 곤지의 아들이 되는 순간
백제는 엉망인 족보가 되는 것이니
공주는 백제의 고도 운운할
염치도 없는 동네가 되어 버린다.
22.그래서 무령의 아들 성왕은
그런 불편한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안전한 공주를 버리고 사비로 천도를 해 가고
국호조차 남부여라 이름을 개칭하였을까
23.개로왕 문주왕 삼근왕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관계로 왕위승계
다음 동성왕대에 가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동성)이 왕이 됨
개로왕의 아들 가운데 한사람이 왕위를 이어야 하나
상황이 그렇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생기고
일본에 갔다던 곤지의 아들 (일본에서 와서?) 동성왕이 즉위함
즉 동성왕은 문주왕과 4촌 형제 항렬
24.동성왕이 포악해서(일본의 기록)
시해당해 죽자 무령왕이 즉위하는데
(무령왕은 태어나서 바로 본국으로 돌려보내졌다는데)
이 무령이 개로와 곤지 사이의 출생의 비밀로 보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는
이복형제거나 4촌간일 가능성이 농후
25.무령이 개로왕의 아들이라면
일단 형제인 동성왕과 그의 아들이 왕이 된 후
다음 왕위를 잇지 못하고 곤지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가
무령에게 다음 차례가 온것으로 볼 수 있으니
무령은 동성왕 22년간 백제에 없었던가.
26.곤지는 임신한 형수를 달라 하였다는데
곤지에게는 후에 동성왕이 된 아들과 5형제가 있었다 하며
굳이 형수가 아이를 낳으면 돌려 보내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수를 달라 하여 데리고 가다가 아이를 낳으니
아이와 엄마를 같이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왜 형수를 달라 하였을까
자기가 일본에 가면서
형수와 조카를 인질(볼모)로 삼기 위해서?
어느 기록에는 6월 1일에 사마가 태어 났다 하니
분명 5월중에 출행하였을 터
그렇게 일본에 도착한 곤지는
가을 7월에 백제로 돌아 왔다 기록이 나오니
이 또한 일본 천황을 모시라는 개로의 부탁을 어긴 것이 된다
의문은 의문을 낳고~~~
이 모든 의문들을 제쳐두고라도
무령왕을 낳은 왕후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남편인 개로왕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곤지를 따라 떠나가야 하는 여자.
그것도 개로왕?의 아이를 수태한 채
떠나야 하는 한이 얼마나 깊었을까
무슨 까닭에 개로는 임신한 자기 부인을
동생 곤지와 같이 왜로 보내야만 했을까
아이를 낳고
배로 고국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면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아이만 보내고 자신은 곤지와 같이
일본에 남겨진 것일까
숱한 의문이 무령왕의 탄생과 함께 한다
우리 웅진 공주가 그렇게 자랑하는
위대한? 백제 무령왕의 탄생과 삶 속에는
이같은 알지 못할 비밀들이 쌓여 있다
다음은 인용문이다
[변평섭 칼럼]武寧王, 왜 日本에서 태어났을까
일본 서기의 무령왕 부분.
1.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장가들여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서 출산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서 어디에 있든지 속히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하여라" 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헤어져 조정에 보냈다. 6월 병술일(1일)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島君)이라 하였다. 그래서 군군은 배 1척을 마련하여 도군(島君)을 그 어머니와 같이 백제에 돌려보냈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인은 이 섬을 국주도(國主島)라 하였다. 가을 7월 군군이 경에서 돌아왔다. 이미 5인의 아들이 있었다.
(의문 :장가들여 라는 말이 되는가
임신한 부인을 동생에게 장가들여? 이 말 하나로도 무언가 냄새가 난다)
가수리군은 개로왕 군군은 곤지 도군은 사마 무령
2.
'일본서기(日本書紀)' 卷14, 雄略紀 5년 秋七月 軍君入京. 旣而有五子. *百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 가을 7월 군군이 경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다.[백제신찬에 말하였다. 신축년,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내 보내어 대왜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하였다. 형왕의 수호를 닦았다.
(이수형왕지호야...왜왕궁에 살면서 형님 개로왕이 좋아하도록 따랐다 라고 번역하면 어떨까)
-> 개로왕 대는 고구려와의 긴장감이 조성되던 시기로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하여 왕제 곤지를 왜국으로 파견하여 왜국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던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또한 무령왕의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설화형식으로 싣고 있어 주목되어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5, 武烈紀 4년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而立嶋王. 是爲武寧王. *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 時至筑紫嶋, 生斯麻王. 自嶋還送, 不至於京, 産於嶋. 故因名焉. 今各羅海中有主嶋. 王所産嶋. 故百濟人號爲主嶋. 今案, 嶋王
이해, 백제의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같이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이다.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복?)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도 각라의 바다속에 주도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라 이름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복?)형 이라 함은 미상이다.
-> 역시 무령왕의 출생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며, 동성왕을 무령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충남 역사문화원장을 지낸 변평섭씨의 글 가운데
다음 부분은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배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왕비가 산기를 느껴
급히 상륙한 섬이 가카라시마다.
그리고 여기서 왕비는 아기를 낳았는데 이 아기가 훗날 무령왕.
아기를 낳았다는 동굴도 있고
아기를 씻겼다는 우물도 있으며
우물 옆에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고야마키'라는 일본의 유명한 금송이 몇 그루 있는데
바로 무령왕릉 발굴 때 나온 관이 이 나무로 판명됐다.
*우물 동백나무 금송 몇그루 가 있다는 것만으로
가카라시마가 무령왕 탄생지라 주장하는 것이 타당한가
2015웅진문화에 실린
일본인들의 자체 조사에서조차
가카라시마가 어떤 섬인지 불분명하다 서술하였거늘
공주 사람들은 매년 무리를 지어 가서 행사를 하고
전설을 정설(정사와 역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정확한 근거와 확증을 가지고 그것이 분명해 졌을 때
주장하는 것이 올바른 학문적 역사적인 시각이 아닐까
아래 한국 정신문화 선양회 홈에서 인용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 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자요 안목이 그림과 같고 인자하고 관후하여 민심이 모두 쏠리었다. 동성왕이 재위 23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점령하고 반역하므로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이르러 한솔 해명을 시켜 토벌케 하니 백가가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백가를 베어 백강에 던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좌평 백가는 바로 동성왕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동성왕을 살해할 정도면 군권이 막강한 실권자였을텐데 이상하게 무령왕에게는 맥도 추지 못하고 항복해버린다. 그리고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기록과 대조하면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삼국사기>에는 21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아들인 22대 문주왕이 뒤를 잇고, 그 다음에는 문주왕의 장남인 23대 삼근왕이 뒤를 잇는다고 되어 있다. 삼근왕이 일찍 죽자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이 24대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왕위계승도>
21대 개로왕 ----> 22대 문주왕 ---------> 23대 삼근왕
----> 곤지(문주의 아우)-----> 24대 동성왕 ----> 25대 무령왕
동성대왕은 501년 37세의 나이로 붕어했으니 464년생이다. 그리고 무령왕은 523년 62세의 나이로 붕어했다고 무령왕릉 지석에 씌어 있으니 461년생이다. <삼국사기>대로라면 오히려 아들인 무령왕의 나이가 아버지인 동성왕보다 3살이나 많다. 형제간이면 맞을 나이인데 부자간이라니 뭐가 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다. 왜 그럴까?
도저히 <삼국사기>로는 이 의문점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통에 대해 설명해줄 다른 사서의 기록은 없을까? 우리의 현실은 근세조선왕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 기록이 유실되고 왜곡 조작되어 역사기록이 많지 않아, 그나마 고대사서로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뿐이니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줄 사서도 사실 없다.
<일본서기>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이기는 하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많은 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연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을 간략히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삼근왕이 죽자 당시 왜에 있던 곤지의 5왕자 중 둘째 왕자인 말다(末多)가 젊고 총명함으로 백제의 왕(동성왕)이 되어 왜로부터 귀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 모대가 동성왕이 된다는 기록뿐이다. 여하튼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나 큰 내용은 같다.
▲ 일본 큐슈 북부 가카라시마(加唐島)에 있는 무령왕의 탄생지(?)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희한한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백제신찬을 인용해 다름 아닌 무령왕의 출생을 기록한 것이다. “25세 무열천황 4년 백제의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인(島人 섬사람)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휘는 사마(斯麻)왕이고,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도읍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의 바다 속에 주도(主島)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라 이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島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복형이라 함은 미상이다.“라는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와 전혀 다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인 <일본서기>의 이 기록이 과연 맞을까? <일본서기>에 기록된 1대 천무왕이 실제로는 15대 응신왕이고, 신공왕후의 기록이 120년이나 올라가 있는 등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서이다. <일본서기>말고 다른 사서의 기록은 없을까?
참고로 일본에서는 무령왕의 모친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오는 중에 각라도(各羅島)에서 무령왕을 낳았다하여, 지금도 후쿠오카 북쪽의 가당도(加唐島)에 무령왕 유적지를 만들어 놓았으나 사실 무령왕과 일본열도의 가카라시마(加唐島)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각라도나 가당도나 다같이 가카라시마로 발음된다.
일본은 가당도를 각라도라 하며 무령왕의 유적지를 허위로 만든 것이다. 그 이유는 백제를 반도사관으로 묶어 한반도에 있다고 해야 왜의 주무대가 일본열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일본의 치밀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의 주산군도 앞바다 어딘가에 각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개로왕 21년(475년) 가을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궁박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구려가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빼앗고 옮기어 남성을 공격하니, 개로왕은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쳐 나갔는데 고구려 장군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고 조금 있다가 왕의 면상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낱낱이 말한 다음 꽁꽁 묶어 아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은 이렇듯 치욕을 당하며 죽어갔다. 이 장면이 왜왕 무(무령왕)가 말한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란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개로왕은 왜 갑자기 치욕의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개로왕은 바둑을 아주 좋아하는 고수였다. 이를 갈파한 고구려는 바둑의 고수인 도림이라는 승려를 간첩으로 파견한다. 개로왕과 바둑을 둠으로서 가까워진 도림은 왕에게 나라를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왕은 국민을 모두 동원시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곧 그 안에다 궁실.누각.대사를 마련하였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또 큰 돌을 옥리하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비의 뼈를 장사하고,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궁곤하여 나라의 위태함이 알(卵)을 포개놓은 것보다 더 하였다.”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도림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해 미리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켜 놓은 것이다.
一年夏五月 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좌장 지충이 고구려를 패수에서 격파하다
二年 양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三年春二月 신라와 서로 예방하다
四年冬十月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우다
七年冬十月 좌평 연모가 고구려와 전투하여 패배하다
十年秋七月 별이 비 오듯 떨어지다
十二年春三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十二年夏四月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다
十六年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十八年秋九月 장군 연회가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十九年 양에서 모시박사 등을 보내주다
二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고구려가 예와 공모하여 독산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지르다
二十七年冬十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장군 달기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신라보다 고구려와 더 많이 싸웠다.
이는 위의 내용을 봐도 유추할 수 있는게,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싸웠던 왕이기 때문. 하지만 한강유역 수복 이후엔 신라에게 뒤통수 맞았고, 이에 복수하려다 실패했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모두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애초에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다"보다는 "우리나라 킹왕짱!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정도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
524년 정월 : 백제 태자 명이 즉위하다.
529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구를 내려달라 요청하다. 안라회의에 사람을 보내다.
530년 9월 : 안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야신을 사로잡다. 5성을 취하다[12]
531년 12월 : 백제군이 안라에 진출해 걸탁성을 쌓았다.
531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541년 4월 : 성명왕이 임라의 한기들에게 덴노의 뜻을 전하다.
541년 7월 : 성명왕이 임라에 신하들을 보내다. 그리고 덴노에 부한과 일마의 정사를 아뢰다.
543년 9월 : 덴노에게 공물을 바치다.
543년 12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544년 정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544년 정월 이달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낮은 이들을 보내왔다.
544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받아오다.
544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544년 11월 :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러 임라 재건을 도모하다.
545년 5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545년 9월 : 덴노에게 장육불을 만들어 바치다.
546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46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를 바치다.
547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다.
548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48년 4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48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48년 윤7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48년 10월 : 득이신에 성을 쌓았다.
549년 6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50년 2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550년 4월 : 일본 사신이 돌아가다. 고구려 노비 7명을 바치다.
551년 12월 : 덴노가 보리 씨앗 1,000곡을 하사하다.
성명왕이 백제, 신라와 임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려를 정벌해 평양을 토벌했다.
552년 5월 :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다.
552년 10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
553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553년 6월 :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553년 8월 : 일본이 사신을 보내다.
553년 10월 : 백제 왕자 여창이 고려군과 싸워 이기다.
554년 정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555년 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555년 3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555년 5월 : 일본 수군이 도착하다.
555년 12월 :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전투에서 패해 목이 베어지다.
이상 인용문임
같은 시기의 기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판이한 기록들입니다.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제가 왜에
바치고 청하고 올리고
왜는 백제에
하사하는 등등
저희가 상등국가인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결코 백제가 왜의 속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가 백제를 지배한 나라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역사왜곡의 산물이요 기록물일 뿐입니다.
일본의 역사조작 기록에
백제의 무령왕은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아주 초라하고 형편없는 가계가 되어 버렸다
라고 보아도 좋을만큼
무령왕의 탄생과 부모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간다.
위의 기록에서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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