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마트폰
애인도 아닌 것이 친구도 아닌 것이 늘 내 곁을 따라 다닌다. 내가 데스크톱
앞에 앉아 온 정신을 컴퓨터 화면에 쏟아붓고 있을 때 테이블 귀퉁이에 착한
강아지처럼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내가 하는 일을 시종일관 보고
있다. 이따금 나에게 말이 걸고 싶은 것일까? 요란한 연속음을 질러댄다. 그
러나 이는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짧지 않은 몇 해를 나와 지
내며 그 는 지금은 내게 훼방을 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사이가 된 것이다.그의
기특한 속내를 진작알면서도 즉각 그에게 응답하는 것은 내가 외출할 때마다
겪는 그의 외로움에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천지가 깜깜한 내 옷 주머니 속
에 갇혀 지내야 하는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말함이다. 너무 갑갑하고 답답해
서일까 가끔 소리를 내지르곤 한다. 무딘 내 신경은 이를 감지하거나 알아채
지 못할 때가 많다.최근에는 이런일이 점점 더 많아져 혹시 그가 내 청력 감
퇴를 알아채고 청력 검사를 귀띔하는 것이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한다.
하긴 보행 중이나,운전할 때나, 심지어는 잠자리에서까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요즘 젊은 세대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에게 너무 소홀한 것
같아 미안한 감이 들기도 한다.내가 그와 접촉하는 시간이나, 앱을 가동해서
그의 방대한 정보와 데이터 처리 기능을 이용하는 일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컴맹세대인 나 자신을 탓할 일이다.특히 밖으로 나들이할 때는 기
껏해야 필요한 음성통화나 간단한 문자 보내기가 고작이다. 이메일이 들어와
도 긴급사항이 아니면 집에 돌아가서 컴퓨터로 한다고 미룬다. 스마트폰의 노
예가 되다시피 한 요즘 세대,그리고 스마트폰 중독이나 그 폐해 이야기를 들
을 때마다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아전인수 (我田引水)격인 해석도 한다. 그와
나와의 인연은 몇 년 전 크리스마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스마트폰이라는 새
로운 기기를 거부하던 나에게 아들 녀석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를 떠안겨 주
면서 시작되었다. 내 폴더형 피처폰으로 음성 통화에 아무 지장이 없다며 자족
하던 때다.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구닥다리에 목을 매고 있느냐는 아들의 말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그로부터 그와 나는 항상
가까이서 자주 눈 맞춤을 하며 지내왔다. 내가 은퇴하기 전 학교에서 뒤늦게나
마 습득한 컴퓨터 지식이 도움이 됐다.나 때문에 그는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내 부실한 손이 그를 땅이나 마룻바닥에 떨군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물에 빠져 익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아직은 뇌진탕이나 호흡 곤란의 증세는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를 잃어버려 집안을 이 잡듯 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보통 마누라의 스마트폰의 도움으로 찾아내지만, 한번은 그를 냉장고
안에 가두어두고 온종일 곤욕을 치르게 한 일도 있었다. 그로서리를 냉장고에
넣을 때 끼어 들어갔을 거라는 게 마누라의 추측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없
는 미스터리다. 건망증이나 내 나이 탓으로 돌리기에는 아직은 내 자존심이 걸
린 문제다.그가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장된 음악 파일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음악을 들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물론 잘못은 나에게
있다.나는 재즈를 위시해서 클래식,솔(soul) 등 여러 장르를 좋아한다.한국에
서 듣고 자란 트로트 가요는 가슴 설레는 향수를 자아낸다.단지 내가 옛 LP 플
레이어나 다른 음악 기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에게 기회를 준 적이 없다는 것
뿐이다.그렇다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일은 그나마 부실한 내 청력을 망
칠까봐 아예 포기한 지 오래다.에라,오늘은 추석이란다. 그와 나는 한 고향 아
니더냐.아무도 없는 텅빈 방에서 그와 단둘이 고향노래 한곡조 크게 들어보자.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