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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 24.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25.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26.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마 9: 24.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
‘잔다’는 말씀은 죽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겉모습이 비슷하고 부활의 때에 깨어날 것이다.
1] 이르시되, 물러가라.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
* 막 5: 35 -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 눅 8: 49 -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다.
* 요 11: 11 -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
* 단 12: 2 -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 요 11: 11 -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고전 15: 6, 18 –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잔다’고 표현하신 것은 죽음의 성격을 말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자는 자는 자와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에, 또 자는 자가 깨듯이 죽은 후에는 부활의 때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잔다고 성경에 자주 표현한 것이다. 이제 죽은 그를 깨우실 수 있는 분이 오셨다.
3] 그들이 비웃더라.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 불며 곡하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비웃더라'(*, 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소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치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으면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이루어야 한다.
마 9: 25.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
1] 무리를 내보낸 후에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하는 저속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신다.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다.
그러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
* 막 5: 40 -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2]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소녀의 아비인 이 관리는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아이야 일어나라').
* 막 5: 41 -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 눅 8: 54 -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3] 일어나는지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죽은 소녀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뿐이다.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다. 인간의 능력은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으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 받을 수 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그가 단순히 사람이시라면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요일 5: 20)이시다. 우리에게 이런 신적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또 그를 의지하며 따르자!
마가복음은 그가 “달리다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그러자 그 소녀는 일어났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그의 신적 능력과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셨다.
마 9: 26.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
1]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예수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예수에게서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하겠다.
2] 관리의 딸을 살리심
죽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죽음은 빈부귀천이나 지식 유무 그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우리는 본문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죽게 된 한 소녀를 발견한다. 마태는 그녀를 단순히 관리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로 나와 있고(막 5: 22), 누가복음에는 그 딸이 12살인데 회당장의 외동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눅 8: 41-42)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그것이 딸의 죽음 앞에 아무 도움이 못 됨을 깨닫고 마침내 큰 슬픔을 지닌채 예수께 딸을 살려 달라고 호소하였다.
(1) 신앙의 출발
관리는 예수께 나아와 자기의 딸을 구원해 주시기를 청원하였다. 이것은 그의 신앙이다. 이 신앙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려는 간절한 소원에서 일어난 신앙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사람 편에서 볼 때 그것은 어떠한 선한 욕구를 가짐으로 하여 일어난다. 곧, 인간 편에서 선한 욕구를 이루어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거기에는 신앙이 싹트기 힘들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던 병자에게 신앙심을 주시기 위하여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 6)라는 말씀으로 먼저 그 중심에 간절한 욕구를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의 신앙을 위해 최선을 길을 사모하려는 욕구를 가져야 한다.
(2) 신앙고백
그는 구세주에 대한 비범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회당장은 예수님보다도 연령도 많고 그 지방의 어른이요, 또 관직도 높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능력있는 구세주로 믿은 까닭에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절했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그는 확실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했다. 비록 사정이 절박하고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도 그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손을 얹으시면 그녀가 소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구세주의 능력에 대한 고귀한 믿음의 실례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명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히 11: 1) 깨달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은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주님 앞에 확실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3) 애통해하는 무리를 물리치심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서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23-24절) 유대인 풍속에는 사람이 죽으면 피리 부는 자들과 우는 여자들을(렘 9: 17) 고용해서 떠들게 하였고 집안 식구들도 집안의 물건들을 뒤집어놓고 울었다.
이때 군중도 모두 같이 떠들었는데, 그것은 생활 정도가 높을수록 더했다. 비록 극히 가난한 자의 경우일지라도 피리 부는자 둘, 우는 여자 하나는 고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죽음의 비극을 소요를 통해 잊어버리려는 가련한 심정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소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슬픔에 젖기 쉽고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슬픔을 잊어보려고 애를 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물러가라'고 하셨다. 때때로 세상의 슬픔이 강퍅하게 하는 자들이나 라헬과 같이 위로받기를 거절한 자들은 그들의 불안한 생각에 대해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4) 죽음을 보는 예수님의 눈
24절에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아이가 죽은 것은 분명하다. (막 5: 35. 늑 8: 49) 같은 표현을 나사로에게도 말씀하셨다. (요 11: 11) 그것은 그 소녀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이 일시적인 잠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음은 잠이다.
모든 민족과 언어는 두렵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누그러뜨리려 죽음을 잠으로 부른다. 악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조상과 함께 잠들었다'라고 말한다. 특히 '의인의 죽음'은 잠으로 간주 되었다.
* 사 57: 2 -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잔다.
* 고전 15: 51-52 –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다.
* 마 8: 22 -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낮의 수고와 고통에서 휴식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아침에 다시 기쁨으로 깨어나는 '소망 가운데서 휴식'하는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새 생명에로 깨어날 것이며 '더 이상 잠자지 않기 위해서' 깨어날 것이다.
25절에 예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났다고 했다. 마치 잠자던 아이가 잠에서 깬 것처럼 다시 살아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것이 어머니들이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이와 같이 복잡한 절차 없이도 간단하게 큰 역사를 나타낸다.
3] 온 땅에 퍼져야 할 소문(所聞)
우리 옛말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누가 소문을 전하였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이 여러 마을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처럼 예수님의 병 치료에 대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병들어 고생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치료받기를 소원하였다.
모세의 영도(領導) 아래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들어갔을 때, 라합은 그들을 숨기면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 수 2: 9-13 –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온 땅에 퍼짐같이 복음도 땅끝까지 퍼져야 한다.
* 수 6: 27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 눅 24: 46-48 –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러나 소문이 소문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성령의 역사를 덧입지 않고서는 소문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성령이 함께하면 라합과 같은 증언이 쏟아질 것이다.
*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