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족연맹체 제1왕조 시대
탐라왕국의 변천과정을 보면 크게 제1왕조기·제2왕조기·제3왕조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각각은 상당히 다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제1왕조기는 국조(國祖) 양을나 성왕 때부터 62세 해풍왕까지 서기전 2369년부터 서기전 446년까지 1924년간입니다.
이 시기는 부족 연맹체의 시대로 곽지·고내·단주(제주시)·상양·김녕의 크게 5개의 촌락에서 여러 부족들이 각각 경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며, 단주(檀州)를 도읍지로 하였습니다.
양을나 37년에 서기전 2333년에 고조선의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정하니, 태자(太子)를 단군왕검의 조선에 보내 개국을 축하하였고 처음으로 국교를 열었습니다.
양을나 53년 서기전 2317년에는 태자를 중국 당(唐)의 요(堯)임금에 보내 공물을 전달하였습니다. 우(虞)나라 순(舜)임금은 그 때 섭정으로 있었습니다. 양을나 76년에야 우(虞)나라 순(舜)임금이 재위를 받으니 탐라왕국 시조왕이 태자를 우(虞)나라에 보내 하례하였습니다. 국조 86년에는 대홍수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탐라사람들은 여름에는 풀로 만든 집에서 거처하고, 겨울에는 땅에 약간의 굴을 파서 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오곡을 심어 생산하는 농경생활을 하였습니다. 탐라사람들은 당시 토기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습니다. 직접 사육한 가축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수렵과 어로 농경생활을 하던 부족 연합 형태의 소국으로 고구려나 신라 백제처럼 강력한 왕권을 가진 고대국가 체제는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고대국가가 아니라는 점은 백성에 대한 군역이나 세금에 대한 통제가 느슨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탐라왕국을 천년 해상왕국으로 만드는 장점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고대의 민주적 협동 공동체로서 삼천년 이상 영속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탐라왕국의 경우는 각자의 경제적 부문에서 탐라왕국 외의 어떤 국가와도 자율적인 국제무역을 통해서 경제력을 확충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바탕이 탐라왕국을 성장 발달하게 하였습니다.
고대 탐라왕국은 왕성(王城)이나 궁궐(宮闕)은 없었고 다섯 개의 큰 집단촌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집주위에는 둥글게 돌담이 있으며 가구 수는 8천호이며, 활과 칼 방패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배계급 계층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탐라왕국의 서로 영토를 뺏고 빼앗는 싸움이 없었기에 방어를 위한 성곽을 구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탐라의 부족들은 자연환경이 너무나 척박하기에 서로 싸우기 보다는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 남기위하여 서로 협동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경에 이용할 수 있는 농지는 매우 빈약하고 비바람이 세차게 자주 불어오는 땅은 돌들이 많아 물을 가둘 수 없어 논농사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탐라왕은 자연을 이겨내며 살기 위하여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국왕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다만 경제적으로 물품을 생산하여 판매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동 구매하는 등 생활을 함께 하는 경제공동체 대표로서 모든 백성들의 활동 중심역할을 하는 민주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탐라문화는 태초 파미르 마고 문명에 시작하여 홍산문명을 거처 탐라문화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고대 20,000년 전 파미르 고원의 마고문명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파미르 지역에서는 가까이 옥이 대량으로 산출되는 산지가 있어서 옥의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고문명은 옥을 가지고 장신구를 만들고 화려하게 옥 장신구를 많이 지닌 자가 권력의 상징이었던 옥의 문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고문명은 옥을 쓰는 문명으로 상징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옥이 생산되지 않아서 감람석이 옥을 대신하였습니다.
이런 마고문명이 꽃피웠던 파미르에서 살던 사람 일부가 동쪽으로 흘러나와 요령성·내몽고·만주벌판·요동반도·요서지방까지 펼쳐지는 동이족 문명을 이루고 이들은 파미르로부터 가져온 옥의 장식이 많은 자가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이것이 홍산문명으로 꽃피웠습니다.
이런 홍산문명은 삼을나의 고향이었으므로 탐라국까지 자연스럽게 전래되었습니다.
탐라국왕은 장자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극성 숭배가 바탕이었던 홍산문명을 이어받은 탐라는 바다 가운데 있기에 태양보다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냈고, 생활 속에 별자리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북극성 중심의 샤머니즘 정치관에서 왕은 북극성으로부터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왕의 기운을 받은 사람이 왕권을 승계하여야 정당성을 있다고 믿었습니다.
북극성 숭배에는 사주명리학이 고대 샤머니즘 철학 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은 각각 생년월일별로 그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타고난다고 믿었습니다. 왕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7월25일에 태어나고, 종교지도자는 12월25일에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7월25일에 태어난 아이들을 모아 키워서 가장 능력 있는 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탐라에서는 북국성이 중심이 되는 제천행사를 열어서 가장 능력 있는 7월25일생을 선발하여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권력이 샤머니즘이 아니라 무력으로 힘이 강한 자가 왕권을 찬탈하면서 자신이 어렵게 얻은 왕권을 나와 다른 남에게 왕권을 넘기는 것은 불안을 느끼고 자식에게 세습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북극성을 기준으로 하였던 샤머니즘 사상은 세습을 원하는 왕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거부감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북극성 신앙을 배척하고 새로운 태양 숭배 신앙이 등장하였습니다. 태양신 숭배 사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북극성 중심 신앙은 악마·사탄으로 변천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왕권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신앙으로부터 세습왕권제가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세습된 왕권을 가진 자는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능력이 미약한 자가 왕위에 오르므로 왕국이 오래 동안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로 고조선은 태양숭배 신앙으로 변천하여 마고문명이 퇴색하였고 옥 장신구 대신 금을 이용한 장신구를 쓰게 되었습니다. 차츰 파미르 마고문명은 사라졌습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은 강화도 첨성단과 같은 태양신 제단을 쌓아 천제를 올리므로 태양신 숭배신앙을 바탕으로 세습 왕권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탐라왕국은 바다 가운데 있었던 탓에 북극성 숭배 신앙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옥 장신구를 사용하는 옥문화가 지속되었으므로 옥이 생산되지 않은 탐라에 옥 장신구 유물이 발굴되는 이유는 바로 북극성 중심신앙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탐라왕국은 전 세계에서 보기 힘든 3000년 이상 왕권이 이어가는 왕국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