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진 가수 차중락,
그렇지만 그 여운의 꼬리가 긴 가수.
그룹생활까지 합쳐도 고작 5년,
27살이란 젊은 나이로 요절한 가수이다.
생전에 불 같은 인기로
당대 최고의 가수 배호를 능가하는
화려한 시절도 있었지만
기간이 길지 않고
그가 남긴 노래가 많지 않아
여운만 깊이 남았다.
차중락의 인기에 정점을 찍었던 노래는
가을을 상징하는 노래처럼 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을 번안한여 부른
이 곡이 그를 가을 남자로 만들었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가수는 그가 부른 노래처럼 된다는
전설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강찬호 작사 정민섭 편곡(외국곡) 차중락 노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1968)
https://www.youtube.com/watch?v=3d7TvISBCZ4
차중락 노래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 따라 가버렸으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 따라 가버렸으니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차중락 버전 외에
차중광, 차도균 버전이 있어
혼동할 수 있다.
멋진 목소리가 집안 내력으로
차중락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사촌형이 대신해서
목소리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친동생 차중광의 목소리는
매우 유사해서 구별하기 힘든 정도였다.
차중광은 1977년 앨범을 내고
이후 재즈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차중락은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장충국민학교, 경복중고등학교를 나와
영화에 관심을 두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무렵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일본에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밀항을 시도하다 적발되어
실망하던 차에
사촌형인 차도균의 권유로
'키보이스'에 합류 하게된 것이
1963년인 22살 때이다.
사촌형 차도균은 1962년
'거리를 떠나'(1958년 손시향이 발표한 곡)를
취입하며 데뷔한 신인가수였고
키보이스 결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키보이스는 1963년
앨범을 내며
대중적인 활동을 하지만
주 무대는 미8군 무대였고,
처음 무대에 오른 날부터
차중락은 인기를 끌었다고,
시민회관 무대에 오를 때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올랐는데
승마화를 신은
엘비스프레슬리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한국의 프레슬리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차중락이 사랑하던 여인은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으로
키보이스 멤버였던
윤항기의 기억에 의하면
에바가드너를 연상시킬 정도의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을 이루지 못 하고
여인은 1966년 가을
미국으로 떠났고
그해 11월 키보이스 멤버로 발표한
이 노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사연과 함께 뭇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1967년 솔로가수로 독립하게 된다.
꼭 2년 후인 1968년 11월
무대에서 공연 중이던 차중락은
뇌막염으로 쓰러져 숨진다.
절정의 시기에
그를 떠나 보낸 사람들이
그를 못 잊자 그의 동생인
차중광과 그의 사촌형인 차도균이
그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며 위안했다.
차중락이 낙엽따라 떠난 것이
1968년 11월.
그로부터 꼭 3년 후인
1971년 11월
동갑내기 배호가
안개 속으로 떠났다.
가을 냄새가 물씬나는
중저음의 떨리는 듯하는
빠른 비브라토가 매력적인
목소리 차중락을 만나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EOpJKEJHFyM
손태진(부: 손금찬, 모: 진숙) 부자 노래
'낙엽 따가 가버린 사랑'의 원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Elvis Presley(엘비스 프레슬리)
https://www.youtube.com/watch?v=9oA3UZVwI3w&t=8s
I memorize the note you sent
당신이 보냈던 그 편지를 기억해요
Go all the places that we went
우리가 함께 거닐던 곳을 다시 거닐며
I seem to search the whole day through
하루 종일 찾고 있었나 봐요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자취를...
I kept a ribbon from your hair
당신 머리에 꽂던 리본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A breath of perfume lingers there
아직도 거기엔 당신의 향기가 숨쉬고 있죠
It helps to cheer me when I’m blue
내가 우울할 때 큰 힘이 되요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의 자취들이...
Oh, how it hurts to miss you so
아, 당신을 그리워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When I know you don't love me anymore
당신이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To go on needing you
당신을 계속 원하게 되네요.
Knowing you don't need me
당신이 날 원치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No reason left for me to live
이젠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요
What can I take, what can I give
당신 아닌 누군가와 무엇을 주고 받을 수 있을까요?
When I’d give all of someone new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모든 걸 다 준다해도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그건 다 당신의 자취들 뿐일 뿐...
엘비스 에런 프레슬리
(영어: Elvis Aaron Presley,
1935년 1월 8일 ~ 1977년 8월 16일)는
미국의 가수 겸 배우이다.
'로큰롤의 제왕'으로 별칭되는 프레슬리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인종간 관계의 변혁기의 와중에
열정 넘치는 노래 소화능력과
성적으로 도발적인 공연 스타일,
인종장벽을 넘나드는 그 영향으로 인하여
엄청난 성공을 이룩하였으나
처음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시시피주 투펄로 출신이며
13살 때 가족과 함께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주하였다.
1954년 선 레코드에서 녹음을 함으로써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곳의 프로듀서 샘 필립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을
보다 넓은 청중에게 소개하고 싶어했다.
프레슬리는 리듬 통기타를 들고
스코티 무어가 리드 기타리스트,
빌 블랙이 베이시스트를 맡은 구성으로서
이들은 업템포, 백비트 주도의
컨트리 음악과 리듬 앤드 블루스의 혼합인
로커빌리를 추구했다.
1955년 D. J. 폰타나가 합류하여
프레슬리의 클래식 4중주가 성립되었고
RCA 빅터와
톰 파커 대령의 주선을 통해 계약하였다.
이후 대령은 20년이 넘게
엘비스의 매니저를 맡게 된다.
프레슬리의 첫 RCA 싱글
'Heartbreak Hotel'이
1956년 1월 발표되었고
미국에서 1위 히트곡이 되었다.
그해 RCA는 프레슬리의 싱글만
1,000만장을 팔아치운다.
일련의 성공적인 전국방송 출연과
차트 정상을 차지한 여러 레코드의 덕으로
프레슬리의 신흥대중음악
로큰롤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한다.
Don Robertson 작사, 작곡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
'Anything That's Part of You(1962)'
https://youtu.be/hnApOwJEgKc
대사9회 재구 동기 관암 류덕환 교수가
카톡으로 보내준 손태진 부자 노래 동영상에
옮겨온 글 편집
청산 노승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