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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 21. 고난과 죽음
4.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이르시다 ( 16: 21-28. 막 8: 31- 9: 1 눅 9: 22-27 )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 21. 고난과 죽음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로 본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1] 이 때로부터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고,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부터라는 말씀이다.
이 표현은 학자들(Lohmeyer, Stonehouse, kingsberry)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서 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두 부분(4: 17)가운데 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力說) 하심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그 때'를 준비하게 하셨다.
* 마 17: 12, 22-23 –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 마 20: 19 -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 마 26: 12 -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구약 율법 교육과 각종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곳이 당신의 수난의 현장이 될 것임을 언급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이 준비되고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 마 26: 54 -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 눅 24: 26, 46 –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예수께서는 준비된 고난의 잔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요 소망이 되실 것이었다.
* 막 10: 45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요 1: 29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고후 5: 21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3]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
마태가 특별히 이들을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 마 2: 4 -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장로들'이란 유대의 열두지파들 가운데에서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다.
'대제사장들'이란 일반적으로 구약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으로서 나오는 '사독'의 후예들로서 사두개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어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이었다.
* 왕상 2: 35 - 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사령관으로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서기관들'이란 '율법사' 또는 '교법사'로 불리는 자들로서 율법 보존과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 마 22: 35 -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눅 5: 17 -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 눅 7: 30 -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눅 10: 25 -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눅 11: 45-46, 52 –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 행 5: 34 –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이 세 부류의 공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를 배격했음을 시사한다(Nosgen).
4]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1)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핵심적인 사역의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백성 대신 죽음의 형벌을 맛보셔야만 했다. 그러나 죽으심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복음이 예수의 대속 희생에서 그쳤다면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못되었을 것이다.
(2)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삼일에'란 '사흘 만에'란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서 반드시 72시간(24×3) 꽉찬 때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하루 중 일부를 하루로 계산하여(Hendriksen) 이뤄지는 사흘째 되는 날로 보아야 한다.
* 막 8: 31 -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는 '시작하다'는 뜻의 '아르코'(*)의 부정과거로 예수 생애가 새로운 국면(局面)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5]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 마 16: 21 )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이다. 최종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내용을 수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33년이라는 생애를 보내셨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겠다.
(1) 기독교는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패배하는 보잘것 없는 종교로 보일 수 있다.
①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다.
기독교의 메시지를 '복음'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그저 복을 빌고 또 복을 받는 종교로 생각하기 쉽다. 그리하여 예수를 믿으면 고통이 없고 기쁜 일만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이란 물질적이며 쾌락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물질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것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풍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우리만이 풍요를 누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며, 고난을 자취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이처럼 성도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울어야 하고 아파야 하며, 고난을 당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난을 자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고난과 허물을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오히려 고난과 친숙한 종교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② 기독교는 고난을 극복하는 종교다.
기독교가 고난과 친숙한 종교라고 해서 이것이 곧 기독교는 늘 슬픔과 괴로움만 간직한 종교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회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고난에 정면으로 맞부딪쳐서 그것을 극복하는 종교다. 고난을 슬퍼하고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평안을 얻고 더 나아가 기뻐하는 종교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 되고 죽어야 될 것을 예고하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고난을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극복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난을 극복하고 그럼으로 평안을 누리며 기쁨을 누리는 성숙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2) 예수님은 고난에 대하여 제자들이 미리 알고 준비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준비'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준비하는 자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수가 있다고 하셨으며 준비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 마 24: 37, 44 –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 마 25: 1-13 – 열처녀 비유 –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미리 고난을 극복하는데 있어서도 준비가 필요하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미리 고난을 알리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고난과 죽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급작스럽게 닥친 고난에 의하여 지지 멸렬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에 준비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고 기도하시며, 준비하심으로써 승리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본이다.
* 벧전 5: 8-9 –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깨어 준비하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3) 기독교에 항상 고난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또한 반드시 소망이 있다.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확실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과 죽음은 완전하고도 철저한 것이다. 적당히 고난을 받고 어설프게 죽는 것은 결코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밀알이 썩어져야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말씀과 소금이 완전히 녹아버려야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다는 비유로 그것을 명백히 밝히신 적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과 죽음이 이처럼 완전하고도 철저한 것이라고 해도 결코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고 동시에 그 생명과 함께 영광을 얻게 하는 전제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받을 때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환란 중에도 부활의 산 소망과 그에 따른 영광을 바라볼 줄 아는 깊은 신앙을 가져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