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토회는 왜 국제지부와 해외지부로 나뉘어져 있나요?
정토회는 여자 회원의 비율이 훨씬 높습니다. 왜 정토회에는 남자 회원이 적을까요?
해외에서 일요일 법회가 없어지고 수요일 저녁 법회만 하니까 직장 다니면서 법회를 듣기가 부담스럽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중도와 도교에서 이야기하는 도가 헷갈립니다.
중국어 번역팀에서 스님을 대사라고 번역했는데요. 중국 사람들은 ‘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요?
중국 사람들을 위해 불교대학 한국어 버전을 바로 번역하면 좋겠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어떻게 전법을 해야 할까요?
팬데믹 이후 온라인 법당으로 바뀌고 나서 정토회의 전체 분위기가 어떤가요?
1시간 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기념사진을 찍고 간담회를 마쳤습니다.
간담회를 마치고 스님은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휴식도 조금 한 후 일찍 저녁 식사를 하고 오후 5시 2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Fairview mall 단지 내에 있는 Library Theater입니다.
강연장에 도착하자 곳곳에서 봉사자들이 참석자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객석은 빈자리 없이 가득 찼습니다. 극장의 보안 요원이 출입자 수를 엄격하게 제한해서 스무 명 정도가 결국 강연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330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이 무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스님이 먼저 인사말을 했습니다.
“즉문즉설이란 친구가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사전에 아무 준비 없이 그냥 고민이 있으면 고민을 얘기하고, 의문이 있으면 의문을 물어보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 얘기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교 수업 같으면 미리 내용을 준비해서 강의를 해야 하는데 즉문즉설은 말 그대로 자기 인생의 문제를 준비 없이 즉석에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지식적인 얘기는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인터넷에 검색해도 웬만한 것은 다 나오잖아요. 불교 용어인 삼보에 관한 것도 검색만 해도 자세히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불교 용어에 관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남편이 술을 먹어서 고민입니다’ 하는 질문은 검색해도 안 나와요. 그런 얘기를 우리가 나누고자 합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강연장 입구에서 사전에 열한 명이 질문을 신청을 했습니다. 현장에서도 질문을 더 받아 두 시간 동안 14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열 살 아이가 왕처럼 행동해서 고민이라며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질문했습니다.
신발끈을 묶어달라, 아이가 왕처럼 행동합니다
“저는 10살짜리 아들을 두었는데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며 행동해요. 어른들한테도 존댓말을 안 쓰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저를 붙잡고 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화를 예로 말씀드릴게요. 아들이 하키를 합니다. 연습하러 가기 전에 아들이 하키 스틱과 물을 챙기고, 저는 아들을 훈련장으로 데려다줍니다. 그런데 이날 차에서 내려서야 스틱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스틱 어디있어?’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준비를 할 테니 저보고 집에 가서 스틱을 가져 달라고 해요. 조금 화가 났지만 집으로 스틱을 가지러 갔습니다. 막상 돌아와 보니 아들은 신발끈조차 안 묶고 저만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에게 신발끈을 묶어 달라는 거죠. 왕은 저리 갈 정도입니다. 그리고는 ‘요구르트가 왜 이렇게 끈적끈적해?’라고 말하는 거예요. 화가 확 올라왔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찾아보면 스무 살까지는 엄마가 끼고 키워야 된다고 하셨는데, 제가 아들을 이렇게 키우는 게 맞는 건지 고민입니다. 남편은 아이를 보딩스쿨에 보내서 자립심을 키우자고 하는데, 그건 아이를 요양원에 갖다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듭니다. 어느 선택이 아들을 위해서 좋은 걸까요?”
“그 아이를 누가 낳았어요?”
“제가 낳았어요.”
“누가 키웠어요?”
“제가 키웠습니다.”
“그럼 누구를 닮았을까요?”
“저를 닮았습니다.”
“아들의 버릇이 없다면 그건 질문자가 뭔가 잘못해서 생긴 거지 다른 곳에서 생겨날 수가 없어요. 질문자의 설명 속엔 이미 아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어요. 아이와 학교에 가다가 뭘 잊어버리고 왔는데 아이는 당당하잖아요. ‘안 가져와서 어떡해’ 하며 울지도 않고요. ‘나는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까 엄마가 좀 갖다 줄래?’라고 하면 ‘엄마도 바쁘니까 오늘은 그냥 학교 가라’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아니면 ‘그래 엄마가 갖다 줄게. 먼저 가 있어’라고 하면 되지 뭐가 어렵습니까? 갔다 왔는데 아이가 신발끈을 안 묶고 있다가 ‘신발끈 좀 묶어줘’라고 하면 ‘엄마는 바빠서 가야 하니까 신발끈은 네가 묶어라’ 하고 가면 되죠. 안 그러면 ‘오케이 알았어. 내가 묶어 줄게’ 하면 되는 겁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지금 질문자가 하는 행동은 아이의 버릇도 나쁘게 만들고,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도 주는 거예요. ‘왜 신발끈을 아직도 안 묶었니? 앞으로는 네가 묶어라’ 하고 아이를 야단치고는 결국에는 신발끈을 묶어주기 때문입니다. ‘왜 스틱을 안 가져왔니?’ 하고 야단을 치고는 또 스틱을 갖다 주는 겁니다. 야단을 치면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이 생기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질문자는 지금 아이에게 나쁜 영향만 주는 행동을 하고 있어요. 이건 질문자로부터 빚어진 문제이지 다른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제가 ‘아이는 스무 살까지 엄마가 키워야 한다’ 이렇게 말한 적이 전혀 없는데, 자기가 자기의 아이를 애완용 동물로 키우고 싶으니까 스님이 스무 살까지 키우라고 했다고 연결시키고 있는 겁니다. 저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저는 ‘아이가 세 살 때까지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좋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 말은 네 살부터는 반드시 엄마가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보호자로서 보살펴야 되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완전히 독립시켜야 된다는 것이 늘 제가 강조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의 행동에는 가능하면 관여하지 말고 냉정하게 지켜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릴 때는 따뜻하게 감싸주는 게 사랑이고, 사춘기 때는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이고,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 정을 끊어주는 게 진정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지 스무 살까지 엄마가 끼고 키우며 보살펴야 한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어요. 질문자는 있지도 않은 얘기를 만들어서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어요.
질문자는 지금 아이에게 잘못 대응하고 있어요. 아이를 자꾸 나쁘다고 하는 건 올바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나빠질 수가 있겠어요? 조그마한 아이가 경어를 안 쓴다는 건 질문자가 남편에게 경어를 안 쓴다는 걸 말합니다. 아이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질문자의 행동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남편이 질문자에게 '구두도 네가 신겨라 ‘, ’ 옷도 네가 입혀라' 이렇게 뭐든지 요구를 했든, 아니면 질문자가 남편에게 작은 일까지 ‘여보, 이거 해주세요’ 하고 요구를 했든, 어쨌든 둘 중에 하나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 아이가 자랐기 때문에 아이도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이는 자기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마치 컴퓨터에 입력시키지 않은 자료가 컴퓨터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꾸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고 질문자가 반성하고 행위를 고쳐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신발끈을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신발끈은 엄마가 매 주기 싫다. 네가 매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울든, 죽는다고 하든, 악을 쓰든 '엄마는 바쁘다. 오늘은 네가 신발끈을 맸으면 좋겠다' 하고 가버리면 됩니다. 아이가 학교를 가든 안 가든 너무 신경 쓰면 안 됩니다. 밥을 차려 주었는데 밥을 안 먹으면 '안 먹으면 치운다' 하고 화를 내면서 밥을 치워버리면 안 됩니다. '엄마는 회사에 출근해야 되니까 밥을 치울게. 나중에 네가 시간 되면 찾아 먹어라' 이렇게 부드럽게 얘기하고, 아이가 나중에 밥을 차려 달라고 하면 '엄마는 일이 있으니까 네가 차려 먹어라' 하고 말하면 됩니다. 만약 아이가 울면 가만 놔두세요. 여러분은 '이게 어디서 울어? 먹으라고 할 때는 안 먹더니!' 이러면서 또 밥상을 차려줍니다. 이렇게 하면 야단을 맞은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이 생기고 아이의 버릇도 나빠집니다. '배가 고프니? 네가 차려 먹어라. 엄마는 지금 일이 바쁘단다' 이렇게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아이가 굶는다고 할 때도 벌칙으로 '너는 굶어라' 하고 말하면 안 돼요. '엄마는 오늘 아파서 밥을 할 수가 없단다' 하면서 질문자도 같이 굶어야 합니다. 애가 뭐라고 해도 '네가 찾아 먹어라. 엄마는 아파서 밥을 할 수가 없단다'라고 말해야 해요.
자녀가 문제가 있을 때 자녀를 직접 때리는 어머니도 있지만, 현명한 어머니는 매를 아이에게 가져오라 하고 아이한테 매를 주면서 엄마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합니다. '엄마가 너에게 모범이 못 됐기 때문에 너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엄마의 잘못이다. 그러니 네가 엄마의 종아리를 때려라' 이렇게 말할 때 아이가 감동을 해서 변화가 오는 거예요. '이놈, 누가 그리 가르쳤니?' 하면서 매를 갖고 아이의 종아리를 때리면 아이가 일시적으로는 안 하는 것 같지만 엄마가 안 볼 때 또 합니다.
그러니 전적으로 질문자의 잘못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아이를 그냥 이대로 두든지, 아니면 아이를 변화시키려면 질문자의 생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한테 '존댓말 해라' 하지 말고, 앞으로 질문자가 모든 용어를 존댓말로 써야 합니다. 아이는 나에게 반말을 쓰더라도 나는 아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 아이도 존댓말을 쓰게 돼요.”
“제가 아이한테도 존댓말을 써야 합니까?”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면 질문자도 영어를 써야 되잖아요. 나는 한국말을 하면서 아이한테만 '너는 영어로 말해라' 이러면 안 되잖아요.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를 원하면 내가 영어를 써야 되듯이 아이가 존댓말을 쓰기 원하면 나도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 존댓말이라는 게 특별히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냥 말일뿐입니다. 내가 존댓말을 써야 아이가 존댓말을 배웁니다. 아이에게 존댓말을 쓰라고 명령할 게 아니라 내가 모든 용어를 존댓말로 쓰면 됩니다. 집안에서 부부끼리도 존댓말만 쓰면 아이는 존댓말 빼고 다른 언어를 모릅니다. 집에서부터 부부지간에 반말을 막 하고 사니까 아이도 그대로 배우는 겁니다.
보딩스쿨에 보내는 것도 당분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보딩스쿨에 보내보고 좋아지면 계속 놔두고, 안 좋아지면 또 데려와서 다른 방법을 쓰면 됩니다. 질문자는 일단 못 보낼 겁니다. 보냈다가도 아이가 힘들다고 하면 바로 데려올 사람이에요. 아이를 하나의 사람으로 대하는 게 아니고 애완용 동물처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행동하면 아이는 절대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엄마가 항상 갖다 주니까 '엄마, 가져와' 하는 겁니다.”
“저는 보딩스쿨에 너무 보내고 싶었는데 제가 스님의 법문을 잘못 이해해서 여태 못 보냈거든요. 당장 보내겠습니다.”
“내 말을 안 듣는다고 갖다 버리듯이 보내면 안 된다니까요. 아이의 문제를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남의 손에 맡겨서 고치겠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단 한번 보내보고, 돌아와서도 집에서 아이가 계속 반말을 하면 그냥 반말을 쓰도록 두면 돼요.
제가 시카고에 어느 교민이 살고 있는 집에 갔는데요. 엄마가 가게를 하니까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서 친정어머니를 모셔와서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얘들아, 밥 먹어라' 해도 아이들이 밥을 안 먹고 노니까 시골 할머니가 '너 밥 안 처먹을래? 밥 처먹어' 자꾸 이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스님이 그 집에 갔는데, 아이들이 스님한테 '스님, 밥 처먹어' 이렇게 말했어요. (웃음)
아이들이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겠어요? 누가 집에서 그 말을 쓰니까 배운 겁니다. 아이는 그 말이 나쁜 말인지 좋은 말인지 개념이 없고, 할머니가 쓰니까 따라서 쓰는 거예요. 질문자의 아이도 질문자가 그 말을 썼기 때문에 따라서 쓰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꾸 아이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아이가 왜 이러지?' 하면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바꿔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변화가 없다면, 두 가지 원인이 있어요. 첫째, 아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면 잘못된 버릇 때문입니다. 둘째, 아이에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아동심리를 전공한 의사에게 전체적인 평가를 받아야 해요. 보딩스쿨에 보내는 게 핵심이 아니고 치료를 먼저 해야 됩니다. 만약 아이가 정신적으로는 이상이 없고 버릇이 잘못 든 문제라면, 다른 교육을 받게 하는 게 우선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항상 아이의 입장에서 무엇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느냐를 살펴야 해요. 내 입장에서 내가 보고 싶으니까 데려오고, 내가 귀찮으니까 보내는 것은 부모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있지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보살피는 게 좋다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보살펴야 됩니다. 아이가 보딩스쿨에 가서 배우는 게 좋다면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이를 위해서 내 아픔을 참아내야 됩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자기감정을 우선합니다. 어떤 여성은 이혼을 했는데 아이를 5일 동안이나 못 봐서 죽겠다고 하면서 울어요. 그건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있는 거예요. 부모가 아이를 보고 싶으면 아이가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부모의 권리라고 생각해요. 물론 법적으로 엄마의 권리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고 자기 욕심입니다. 나와 떨어져 있는 게 자식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도 자식을 위해서 내가 인내를 해야 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머니를 피해 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있는 어머니와 대화가 잘 되지 않는 동생을 곧 한국에 가서 만나야 합니다.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불교는 공한 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하지 않는 세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외국에 있다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나를 빼고 노는 모습을 SNS에서 볼 때마다 질투가 납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죠?
종교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알고 싶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일상생활을 하느라 바쁘다 보니 내가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해 스트레스가 심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잘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요?
17살 때부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작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님은 어떤 깨달음을 가지셨나요?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떤 마음을 가지고 명상을 하는 게 불편한 마음이 덜할까요?
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첫째 아이는 공부를 안 해서 한국으로 보내고 싶고, 둘째 아이는 공부를 잘해서 여기서 공부시키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스무 살 이후에 독립적인 삶을 살려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대화를 다 마치고 나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부모는 잘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식을 망치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를 애완용 동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키워야 해요. 자아가 형성되는 세 살 때까지는 아주 극진히 돌봐주되, 자아가 형성된 네 살 이후로는 모범을 보여주고, 여덟 살이 되면 일을 나눠서 함께 하도록 해야 합니다. 설거지할 때 같이 하고, 방 청소할 때 같이 하다 보면 아이가 자연스럽게 따라서 배우는 거예요.
부모도 편안하고 자식도 건강하게 키우는 법
제가 가난한 나라에 가서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사람들이 저보고 ‘스님은 모르는 게 없다’ 하고 말합니다. 이게 다 조기 교육을 잘 받은 덕택이에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온갖 경험을 하다 보니 특정 분야의 전문가 이상으로 다방면으로 많이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조기 교육의 기회를 다 없애버렸어요. 공부 이외에는 손도 못 대게 막고 ‘공부나 해라’ 하고 닦달합니다. 그러니 아이가 스무 살이 됐지만 밥 할 줄도 모르고, 설거지도 할 줄 모르고, 방 청소도 할 줄 모르고, 빨래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런 두 남녀를 결혼시켜 놓았으니 제대로 살겠어요? 이것은 다 부모가 어리석어서 만든 결과입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자녀를 다섯 명 낳아 키워도 부모가 힘들지 않아야 합니다. 과잉으로 돌보니까 아이 키우기가 힘든 겁니다. 처음 세 살 때까지만 힘들지, 조금 키워놓으면 갈수록 편해집니다. 큰 애는 설거지를 하고, 작은 애는 밥을 하게 하면, 아이가 많을수록 일꾼이 많이 생겨서 엄마에게는 좋아요. 이렇게 엄마가 힘이 안 들어야 엄마도 편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랍니다. 아이를 과잉보호하는 현상은 인류 문명사적으로 큰 위기를 가져옵니다. 기후 위기만 위기가 아니라 이런 잘못된 삶의 방식이 앞으로 큰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스무 살까지 키웠으면 여러분들이 할 일은 다 했어요. 더 이상은 자식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죽든지 살든지, 중이 되든지 신부가 되든지, 혼자 살든지 결혼하든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겁니다. 그래야 나도 내 인생을 살 수 있어요. 여성들은 남의 남자가 될 아들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내 남자에게 더욱 신경을 쓰는 게 중요해요. 내 남자는 팽개치고 자꾸 남의 남자를 챙기면 어느덧 나이가 들었을 때 다른 여자가 챙겨가 버려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이제 그만하세요.
그리고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적으로 10년을 더 살거든요. 만약 아내가 죽고 남자 혼자 살게 되면 재벌 부자가 아닌 이상은 인생이 초라하기를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처럼 자신을 돌봐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효자라도 자식은 부모를 배우자처럼 돌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기 부인이 귀한 줄 알고 잘 챙겨야 해요. 재산을 자식한테 주려고 하는 태도는 여러분들의 노후 인생에 불행을 자처하는 거예요. 이런 이치를 알아서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곧바로 무대 위에서 책 사인회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참가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습니다.
강연이 무사히 끝나자 봉사자들의 얼굴도 환하게 밝아져 있었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스님이 봉사자들을 다시 한번 격려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저는 내일 새벽에 생방송도 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먼저 들어갈게요. 묘덕, 법해법사님과 나누기 잘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스님.”
강연장을 나와 숙소로 향했습니다.
밤 10시 30분에 숙소에 도착하여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기도를 마치고 6시 30분에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한 후,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 달라스로 이동하여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 통역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