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읽었다. 문제의 시작은 1917년 1차세계대전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며 당시 적국인 오스만제국에 저항하도록 했는데 같은 해에 시온주의자들에게도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하도록 돕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2차세계대전중 많은 유럽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선호하는 영국대신 시온주의자들의 강요와 서방열국의 공모에 의한 것이다. 이를 막기위해 아랍인의 봉기가 발생했고 이민을 제한하기 시작한 영국에 대한 유대인의 테러가 가해지자 영국은 철수한다. 그리고 1947년 유엔은 영토의 55%를 인구 33%의 유대인국가로 분할하자 아랍측이 거부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아랍측이 공격하여 시온주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 수만명을 학살하고 85만명을 추방하여 유엔의 분할안보다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요르단과 이집트도 팔레스타인 영토를 일부 점령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자신뿐인 듯하다. 결국 1959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저항세력 파타가 결성된다.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을 기습하여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그리고 요르단이 점유하던 동예루살렘 등 나머지 팔레스타인 영토을 빼았는다. 결국 팔레스타인인은 오스만에서 이스라엘로 통치자가 변경된 셈이다.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랍국가들간의 합의가 깨졌다. 사실 이집트와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을 돕기보다 영토를 정복했다가 이스라엘에 빼았겼으니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1982년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침공하여 36시간동안 팔레스타인 난민 수천명을 학살했다. 결국 5년후인 1987년 팔레스타인 대중 항쟁이 팔레스타인은 물론 인근 아랍국들에서 지배자들에 대한 불만과 결합되어 발생했고 파타는 지배자들을 두둔하면서 이슬람주의를 따르는 하마스가 결성되어 파타를 대체하게 된다.
1993년 역시 미국이 개입하여 파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자치정부를 구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은 포기해야 했고 영토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2006년 자치정부선거에서 파타를 하마스가 이겼으나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레바논을 침공하여 헤즈볼라를 격퇴하고자 시도한다. 2007년 미국과 이스라엘은 파타의 쿠테타를 사주하지만 실패하고 서안지역은 파타가 가자는 하마스가 지배하게 된다. 2009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했으나 퇴각한다. 2010년 이집트 친미정권이 아랍혁명으로 붕괴한다. 5
유대인은 점령군인 영국에 협력함으로서 군비와 훈련을 획득했고 이에 저항하던 팔레스타인은 처형과 전력약화를 겪었다. 영국은 수에즈운하와 인근에서 발견되고 있는 석유를 위해 친 영국정권이 필요했는데 최소의 비용으로 그 것을 원했다. 29 1차세계대전이후 이집트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준자치를 허용해야 했으며 여전히 불안정했고 인도의 이슬람지도자들의 심기도 거스르고 싶지않았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인들이 독일과 이태리품에 안기는 것은 최악이었는데 실제로 접촉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형식적으로나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의 이주와 토지매입을 제한한다고 명시되있었지만 독립에는 유대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실현불가능한 조건이 있었다. 유대인은 적은 인구수로 피통치상태로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0
영국은 인도에서 거의 통제력을 잃고 있었고 이집트와 중동에서도 그래서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 공백을 채웠던 것이 미국이었는데 당시 사우디에서 발견된 석유가 탐이 났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그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거기에 히틀러의 학살은 미국의 정책변화를 더 빠르게 만들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뉴욕에만 가나안보다 4배인 200만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참여비율은 높지않았지만 효과는 강력했고 추가로 이민제한법이 통과되면서 주로 동구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미국이민이 어려워진 것도 일조했다.
유엔에서 영토분할안이 33대13으로 가결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이해는 같았고 소련은 영국이 철수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철수했고 시온주의자들은 수년간 준비한 민병대를 즉시 군대로 전환하여 유엔이 승인한 지역을 점령하고 도로를 파괴하여 아랍인들을 고립시켰다. 방향을 잘 못잡은 수천 명의 아랍지원병은 잘 무장한 민병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영토를 점령한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으며 미국 트루먼대통령은 10분만에 이를 승인했다. 35
중동의 왕족들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세력으로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을 방어하는 나라로 이스라엘을 동맹국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불모의 땅으로 송금된 전세계 유대인들의 송금도 이스라엘군사력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6일전쟁 등을 통해 보여준 실력은 미국의 경제지원을 급증하게 만들어 중동의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제는 유대인이 아닌 팔레스타인인이 디아스포라에 나서게 된 것이다. 59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일제와 비슷하다. 조선인은 하류계급으로만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국노와 같은 해방기구가 기부를 받아 부패하게 된 것이다.
결국 팔레스타인의 요구를 지지하기위한 하마스가 탄생했다. 중동지역에서는 이스라엘대신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다. 그런데 국가의 3요소인 주권, 영토, 국민중 팔레스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한가지에 불과하다. 그들이 선거에서 선출한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타도되었고 영토와 필수적인 물은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의 차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있을까? 히틀러처럼 강제수용소로 보내서 통제하는 것이 아닌이상 테러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가 어렵고 이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국제여론의 싸늘한 시선을 받게 되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되지 않을까?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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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서방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 역사; 들어가며
1장 인티파다; 철권 통치 | 이스라엘의 '반투스탄' | 점령 세대 | 자유를 위한 파업 | 시험대에 오른 이스라엘 | 인티파다와 '소국가'
2장 제국주의 커넥션; 시온주의와 제국주의 | 바이츠만의 전략 | 식민지화 과정 | 이간질로 각개격파 | 반란 | 이슈브의 강화
3장 이스라엘 국가를 향하여
4장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저항의 정치학 | 총파업 | 계속되는 반란 | 지도력의 문제 | 재앙을 향해
5장 1948년 이후 이스라엘과 미국; 이스라엘과 냉전 | 민족주의에 맞선 방파제 | 끝내 '경비견'이 되다 | 석유와 전쟁 | 테헤란에서 텔아비브로 | 레바논 이후 | 동일한 이해관계
6장 팔레스타인인 디아스포라; 새로운 부르주아지 | 파타 | 아랍의 좌파 | 급진 민족주의자들
7장 파타와 좌파; 민족주의 투쟁 그리고 '불간섭' | '혁명적 폭력' | 급진적 비판자들 | 이중의 모순 | 검은 9월 | 재앙의 교훈
8장 영토 없는 국가; '소국가' | 레바논 전쟁 | 고립
9장 점령지; 노동자 | 새로운 시장
10장 봉기; 돌들의 혁명 | 봉기의 문제 | 이스라엘 노동자와 봉기 | 유령 국가 | 중요한 위치에 선 파타 | 다시 소국가로
11장 인티파다의 영향; 석유 | '팔레스타인인을 본받자'
12장 '사이비 국가'; 소국가 논쟁 | 인티파다와 소국가 | '권력 없는 국가' | 협상을 위한 협상
13장 팔레스타인과 아랍 혁명; 스탈린주의의 유산 | 아랍의 노동계급 | 투쟁의 역사 | 새로운 전통 | 노동자 권력
- 2000년 인티파다; 두 국가 방안 | 오슬로로 가는 길 | "여러분이 심은 모든 나무, 여러분이 지은 모든 집" | 물 전쟁 | 포위당한 팔레스타인 경제 | 인권과 안보 | 이길 때까지 협상한다?
- 고립의 종식? 팔레스타인과 2011년 아랍 혁명; '불간섭' 원칙 | 패배 | 신자유주의 팔레스타인 | '파이야드화' | 하마스 | 팔레스타인을 팝니다 | 혁명
후주; 참고 문헌;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