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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웰즐리섬의 웨스트민스터공원과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k자 아래
2개의 섬 중 앞 섬이 하트섬이고 뒤쪽에 볼트요트하우스가 있는 섬이다.
조지 볼트(George C. Boldt)의 아내 루이스(Louise)의 죽음으로 볼트성의
모든 공사가 중단되어 방치되어 있던 하트 섬은 1920년대에 새로운 주인
노블재단(E.J. Noble Foundation)이 섬을 운영하였지만, 어떤 형태로도 손
을 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73년동안 이 섬의 성(城)과 여러 다양한 석재
건축물은 바람과 비, 눈이나 얼음 및 기물 파괴자들에 의하여 많이 훼손되
었지만, 그들이 베푼 눈곱만한 자비로 그나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 볼트성(Boldt Castle)이 있는 하트섬(Heart Island)과 근처 섬 그리고 유람선
▲ 볼트성(Boldt Castle)출입문
▲ 볼트성의 정원에 들어서면 하트라는 섬 이름처럼 하트가든이 형성되어 있다
▲ 볼트 성 안의 넓은 초지 위에 커다란 하트가든을 만들어 두었다.
1977년 미국의 공익법인인 천섬대교공사(TIBA/千島大橋公社)가 하트섬
(Heart Island)의 볼트성과 볼트요트하우스를 1,500만 달러에 모든 재산을
유입하면서, 이 성(城)의 운영에서 얻어지는 순수익을 볼트의 후손들이 그
과실로 즐거운 인생을 맛보면서 살 수 있게 하고, 이 성은 계속 보존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1977년 이후 하트 섬의 모든 건축물을 계속 복원하고,
개량하면서 다시 활용할 수 있게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 볼트성(Boldt Castle) 표지간판은 앞쪽에는 노랗게 보이고, 뒤쪽은 검게 보인다.
▲ 볼트성(Boldt Castle) 앞면 표지간판은 노랗게 보인다.
▲ 볼트성 간판이 있는 곳에서 비둘기장 가는 길(Dovecote & Garden)
▲ 하트 섬 최대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곳곳에 보이는 하트가든이다.
▲ 하트섬 곳곳에 보이는 하트가든 - 나이든 서양여자가 꽃냄새를 맡다가 돌아서간다
볼트는 호텔사업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아내 루이스(Louise)도 호텔 비
지니스에 정력을 쏟는 남편을 좋아했다. 그녀는 볼트와 함께 호텔을 가능
한 호화롭고, 고객 친화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일했다.
그녀는 장식파트에 손을 써서, 고객의 객실마다 신선한 꽃을 잘라서 꽂아
두어 객실방 안에 화사한 기운이 돌게 하였으며, 호텔내의 식당에 있는 리
넨(linen)이 깨끗이 세탁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했다. 볼트는 이렇게 루
이스와 함께 부부가 세계의 호텔에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표준을 요구하여,
오늘날의 대부분의 호텔에서는 여전히 이를 준수하고 있다.
▲ 볼트성을 쌓을 때 모델로 삼은 독일의 라인란트팔츠성( Burg Rheinland Pfalz)
▲ 라인란트팔츠성( Burg Rheinland Pfalz)의 다른 사진 - 독일야후에서 가져옴
▲ 볼트성의 전체구도를 보면 독일의 라인란트팔츠성과 많이 닮아 있다.
- 실제에서는 라인란트성보다도 크면서 섬세하고 성안은 훨씬 넓다고 한다-
▲ 볼트성 전체를 동측에서 잡은 사진이다.
▲ 볼트성 전체를 안내판이 있는 방향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조지 볼트에게는 약간의 비밀이 있었다. 그는 고객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어디서든 비교할 수없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호텔이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볼트는 고객이 원했던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그의
고급호텔에 들여오기를 기다리는 벨벳로프 (Velvet Rope)를 소개했으며,
남성 직원 모두가 반드시 면도를 하여 수염을 깨끗이 깎아 존경받을 만한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 모두에게 "고객은
항상 옳다"라는 믿음을 가르쳤다. 그가 호텔에 넣은 표준목록 중 상당수는
현재 전세계 호텔에서 여전히 일반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 볼트성의 외관을 이렇게 돌아가면서 촬영하여 우리 카페에 싣는다.
▲ 볼트성의 안내표지판이 있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 볼트성 전체의 사진을 이쪽 방향에서 촬영하면 또 다른 모습이다.
▲ 볼트성을 정면에서 디자인과 축성을 가까이 보면서 촬영한 사진
▲ 볼트성의 안내표지판이 있는 지점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간 곳에서 촬영
조지 볼트는 비즈니스에서는 매우 빨리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식기
세척기에서 벨뷔 호텔 (Bellevue Hotel : 후에 Stratford-Bellevue가 되었고
Park Hyatt 가 됨)의 소유주에게 찾아가서 자기가 고안한 물품을 사용하도
록 설득하였고, 필라델피아 클럽의 저명한 회원으로부터도 이에 관한 도
움을 받았다. 그는 그 뒤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 (Waldorf Astoria Hotel)
의 소유주가 되면서 호텔업계의 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 조명등에 빛을 발휘하는 밤의 볼트성 모습 <볼트성홈페이지>
▲ 안개에 가려진 로맨틱한 분위기의 볼트성 모습 <볼트성홈페이지>
▲ 볼트성 전체를 맑은 날 한꺼번에 렌즈에 넣어서 촬영
▲ 볼트성 안내서가 있는 반대쪽에서 잔디밭 가운데 보도블록으로 접근하는 길
▲ 성을 쌓아올리는데, 잔디밭과 높이 및 구도에 세밀한 계산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볼트성을 바라보는 위치나 각도가 조금만 달라도 그 맛이 다르다.
▲ 볼트성 안내서가 있는 언덕받이쪽에서 쳐다보는 성의 모습
볼트(George C. Boldt)에게 찾아온 운명은 1912년 타이타닉 참사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여 너무나 유명한 존 제이컵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Ⅳ :
1864 ~1912)가 언젠가 벨뷔 호텔 (Bellevue hotel)의 경영내역을 조사하여,
볼트의 기술과 비즈니스에 관한 통찰력을 직접 배웠었다. 그러던 애스터가
(家)에서 볼트의 사업성공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애스터(Astor)는 당시 세계
에서 가장 큰 호텔인 월돌프 애스토리아(Waldorf Astoria)에 자금을 지원하였
는데, 볼트와의 관계를 맺은 후 애스터는 볼트를 그 호텔의 소유 관리자로 임
명하였고, 이 비즈니스가 성공하여 수백만 달러를 벌어 들였으며, 얼마 후에
는 볼트는 이 호텔의 명실상부한 소유주가 되었다.
▲ 볼트성을 성 바깥으로 한바퀴 돌면서 성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촬영
▲ 볼트성을 성 바깥으로 돌면서 성 측면에서 잔디밭을 넣어서 촬영
▲ 볼트성의 성 측면으로 돌아서 가까이 가는 길
▲ 볼트성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섬세하면서도 디자인에 심혈을 기우렸다.
▲ 볼트성을 돌아보면서 주위의 디자인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 볼트성의 앞면과 옆면의 모서리 측면을 주안점으로 촬영한 사진
우리가 흔히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세계의 부호들은 어떻게 돈을 모아
서, 부(富)의 축적에 성공하였는지를 알아보게 된다. 미국에서 최초의
억만장자는 독일계(獨逸係) 이민자로 비지니스맨, 상인, 투자자로 성
공하고, 미국에서 첫 신탁의 창립자였던 존 제이컵 애스터(John Jacob
Astor : 1763~1848)였다. 그가 바로 미국 애스터가문의 창시자로, 그의
독일이름은 요한 야코브 아스토르(Johann Jakob Astor)이었다. 신성로
마제국의 발도르프(Walldorf : 현재 독일연방의 바덴뷔르템베르크 Baden-
Württemberg주에 속함)에서 태어나 미국독립전쟁 이후 미국으로 건너
가 오대호를 중심한 모피 무역에 성공하고, 점차 캐나다와 미국 서부와
태평양연안까지 그 영역을 넓혀 돈을 모은 후 뉴욕 부동산을 사들여 대
부자가 되었다.
▲ 미국의 클레이턴 섬 투어 안내지 - 그린스톤섬、웰즐리섬、힐섬이 보이고
알렉산드리아베이 및 클레이턴의 항구도 표시되어 있고, 볼트성도 표시해 두었다.
▲ 볼트성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을 돌면서 멀리서 가까이서 촬영
▲ 볼트성의 외곽을 완전히 한바퀴 돌고 섬 가운데로 난 숲길과 하트가든을 촬영
애스터가(家)의 부(富)를 이어받아 뉴욕의 최대부호로 꼽히던 제이컵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Ⅳ : 1864~1912)는 아바 로울 윌링(Ava
Lowle Willing : 결혼생활 1891~1910/생애 1868~1958)부인과의 사이
가 좋지 못하여 결국 이혼하고 만다. 그런데 재혼한 여인은 겨우 18살
의 매들랜 애스터 (Madeleine Talmage Force Fiermonte : 결혼생활
1911~1912/생애 : 1893~1940)였다. 그녀는 당시 애스터 4세의 외아
들인 빈센트 애스터(Vincent Astor :1891~ 1959)보다 한 살이 어렸다.
뉴욕 사교계의 구설에 오른 애스터 4세는 아름다운 새 신부와 유럽 장
기여행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부인 마들랜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는 미국에서 낳고 싶다' 는 부인의 희망에 따라 미국으로 귀국하
면서 부부가 함께 타이타닉호에 승선한다.
▲ 볼트성의 내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이다.
▲ 볼트성의 1층 테라스에는 돌로 만든 큰 의자가 놓여있다.
▲ 볼트성 안으로 들어간 1층 입구 홀 로비 모습
▲ 볼트성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홀 로비 계단 <1>
▲ 볼트성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홀 로비 계단 <2>
▲ 볼트성 안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홀 로비 계단 <3>
▲ 조지 볼트와 루이스 볼트 부부 사진
▲ 루이스 볼트가 두 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두었다.
▲ 볼트성 안에 들어서면 실제로 관광객이 몹시 붐비는 계단이 로비에 있다.
결국 타이타닉호의 승객 중 가장 부자였던 애스터 4세는 배가 침몰하자,
여자와 아이만 구명보트에 탈 수 있다는 규칙에 따라 임신한 마들랜과 간
병인들만 구명보트에 먼저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보트에 타기위하여 2등
항해사 라이톨러(Charles Herbert Lightoller : 1874~1952)를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원리원칙을 지켜 거절하자 무리수를 두지 않고 타이타닉
과 함께 바다 속에 잠겼다. 서른 살이 넘는 나이 차이로 눈총을 받았었지
만 마들랜은 남편 애스터가 남긴 유산을 물려받는다. 물론 전처와의 사이
에 태어난 빈센트 애스터가 최대 상속자였지만, 그 유산의 일부라고 해도
엄청난 재산이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남편을 기리면서, 그 당시
건립하고 있던 뉴욕 맨해튼의 최대 성공회 성당에 어마어마한 건립자금을
기부하였다.
▲ 볼트성 안의 위층에서 내려다 본 1층 로비 모습
▲ 1층 로비 중앙의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볼트 아내 루이스의 사진
▲ 아내 루이스와 딸 클로버를 위한 방: The Room for Mrs.Boldt & Miss Boldt.
▲ 루이스 볼트와 딸 클로버 볼트를 위한 모녀를 위한 방
▲ 아늑한 1층 침대방 모습
볼트(George C. Boldt Sr.)는 루이스와 26년간 결혼생활을 하였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아들인 조지 볼트 주니어(George Charles Boldt Jr :
1879~1958)와 딸 루이스 클로버 볼트(Louise Clover Boldt : 1883~1963)
가 있었다. 아내 루이스(Louise)가 죽고 나서, 볼트(Boldt)는 뉴욕으로 돌
아와 호텔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허전한 가슴
으로 마음의 안식처가 없이 지내면서 1916년 12월 5일 죽을 때까지 그의
아내 루이스(Louise)를 한 번도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던 그 자신도 끝내는 슬프게도 자신이 소유 경영하는 월도
프·애스토리아 호텔(Waldorf-Astoria Hotel)의 자기 방에서 홀로 쓸쓸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그때 조지 볼트의 나이는 65세였다.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1>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2>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3>
▲ 볼트성 안의 서재 및 도서실 <4>
▲ 볼트성 안에 있는 당구장
▲ 볼트성 안에 있는 무도실(舞蹈室 : Ballroom)이다.
이 무도실 바깥으로 이태리정원이 보이고, 앞 사진에 있는 터널 윗쪽과 같은 높이다.
▲ 무도실(舞蹈室 : Ballroom)이 사진 한장 안에 다 들어가지 않아 이렇게도 촬영.
- 무도실이라면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함께 춤을 추는 어릴적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 중앙복도(Grand hallway) 층계 아래의 모습 - 여러 소품과 고급 가구 피아노
▲ 중앙복도 층계 아래에 있는 피아노 - 특수하게 고안한 고급 피아노(?)인 듯
▲ 피아노의 현을 클로즈업시켜 보았는데, 특수하게 주문된 대단한 고급품이라 한다
▲ 볼트성의 로비에 놓인 가구와 소품
1916년 조지 볼트(George Charles Boldt Sr)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
들 조지 주니어(George C. Boldt Jr)는 그의 여동생으로 알프레드 그레
이엄 마일스 (Alfred Graham Miles : 1875~1947) 선장의 아내인 루이스
클로버(Louise Clover Boldt Miles)와 함께 아버지의 사업체 유산을 공동
지분으로 상속받아 조지 주니어의 이름을 붙인 법인체의 회장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2년 후에 조지 주니어는 법인체에 속한 모든 회사의 지분을
팔아,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 전액을 자신의 모교인 코넬대학교 (Cornell
University)에 기부하였다.
▲ 볼트성의 응접실 reception room <1>
▲ 볼트성의 응접실 reception room <2>
▲ 볼트성의 응접실 reception room <3>
▲ 볼트성의 응접실 reception room <4>
▲ 볼트성의 다이닝 룸 Dining Room <1> 18좌석
▲ 볼트성의 다이닝 룸 Dining Room <2>
▲ 볼트성의 다이닝 룸 Dining Room <3>
▲ 볼트성의 다이닝 룸 Dining Room <4> ; 손님들과 함께 식사하는 방
앞에서 미국의 공익법인인 TIBA는 볼트성(城)을 인수하여 운영하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수익금을 볼트성(Boldt Castle)에 재투자하고, 일부는
후손들에게 생활비를 보태주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볼트와
루이스의 후손들의 실태는 어떠한가? 볼트에게는 조지 볼트 주니어와
루이스 클로버 볼트(Louise Clover Boldt)의 2명의 자녀가 있었다.
▲ 볼트성의 베드 룸
▲ 볼트의 아내 루이스(Louise) 사진 - 죽음. 묘지
Louise Boldt died at her home in New York City at the age of 42.
She was buried in the Boldt Mausoleum in Woodlawn Cemetery.
- 루이스 볼트는 42세의 나이로 뉴욕시의 그녀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뉴욕 우드론묘지 가운데 남편과 함께 볼트가(家)묘지에 묻혔다.
▲ 볼트성 방안 천장 모습
▲ 볼트성의 볼트 가족 식당 식탁
▲ 볼트성 안의 볼트 스위트 룸
▲ 볼트성의 스위트 롬 천장
아들인 조지 주니어(George C. Boldt Jr)는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
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태어나서, 뉴저지(New Jersey)주의 로렌
스빌(Lawrenceville)에서 학교를 다니고, 퀼&대거 소사어티의 멤버로 있던
곳인 뉴욕(New York)주의 이사카(Ithaca)에 있는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ty)
를 졸업하였다. 자유 분방하면서도 소극적인 성격으로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업에도 흥미가 없었고, 결혼같은 것에 얽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이력에는 결혼도 배우자도 자녀도 나타나지 않고, 1958년 뉴
욕 맨해튼(Manhattan)에서 78세를 일기로 죽었다. 다만 그의 흔적은 미국 코
네티컷(Connecticut)주의 페어필드 카운티(Fairfield County)에 있는 뉴 가나
안 레이크 뷰(New Cannan Lake View)묘지에 표지석을 대신하여 묘지를 덮
어둔 바닥에 눕혀져 있는 대리석에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 조지 C. 볼트 주니어 (위키백과)
- 월도프 애스토리아 호텔 회장시절 1916년 사진
GEORGE C. BOLDT JR.
BORN IN PHILADELPHIA
FEBRUARY 5, 1879
DIED IN NEW YORK CITY
JANUARY 27, 1958
▲ 레이크 뷰 묘지의 바닥에 붙어있는 조지 볼트 주니어의 묘지 표지석
▲ 레이크 뷰 묘지의 바닥에 붙어있는 볼트 주니어의 묘지 표지석을 넓게 촬영
▲ 볼트성에 걸려있는 조지 볼트와 그의 아내 루이스 볼트의 사진
▲ 볼트성의 볼트 부부 방의 조명
▲ 볼트성의 볼트와 아내 루이스(Louise)의 스위트 룸
▲ 볼트성에 붙어있는 볼트와 루이스의 결혼증명서(Marriage Certificate)
▲ 볼트성의 볼트 부부의 침대방 - 스위트룸
볼트의 딸 이름은 루이스 클로버 볼트(Louise Clover Boldt)인데, 딸의 퍼
스트 네임(first name)인 루이스(Louise)는 아내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그
리고 중간이름(middle name)인 클로버(Clover)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 루이스를 처음 만난 유명한 필라델피아의 클로버클럽(Clover Club)
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볼트는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를 끔찍이 아꼈
던 흔적이 딸의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그 딸 루이스 클로버는 알프레드 그
레이엄 마일스(Alfred Graham Miles : 1875~1947)선장과 1907년에 결혼하
지만, 1910년 딸 클로버 워더스푼 볼트 마일스(Clover Wotherspoon Boldt
Miles : 1910~1993)를 낳고 1920년대에 이혼한다. 그래서 클로버 워더스푼
은 볼트의 손자 항렬로는 유일한 외손녀이다. 그후의 볼트의 딸이름이 클로
버 볼트 조해네슨(Mrs. Clover Boldt Johannesson)으로 표시되지만, 정식으
로 재혼흔적은 없고, 아마도 같이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것같다.
▲ 볼트성의 볼트 딸인 루이스 클로버의 응접실 <1>
▲ 볼트성의 볼트 딸인 루이스 클로버의 응접실 <2>
▲ 볼트성의 볼트 딸인 루이스 클로버의 응접실 천장 <3>
▲ 볼트성의 볼트 딸인 루이스 클로버의 응접실 <4>
▲ 볼트성의 볼트 딸인 루이스 클로버의 응접실 <5>
▲ 볼트성의 볼트 딸인 루이스 클로버의 응접실 <6>
볼트의 유일한 외손녀인 클로버 워더스푼의 처녀명은 클로버 워더스푼 볼
트 마일스 (Miss Clover Wotherspoon Boldt Miles)이다. 1910년 2월 21일
뉴욕에서 태어났는데, 두뇌가 명석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성격이라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33년 의사인 레슬리 에머슨 모리세트 (Dr. Leslie
Emerson Morrissett)와 결혼하였으나, 1939년 의학적으로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 확인되어 척수성 소아마비환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1962년 모리세트
와 이혼하고, 1963년 웰즐리섬에서 알렉산더 데이비드 고든 베어드(Alexander
David Gordon Baird)와 재혼한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책도 쓰고, 볼트재단
의 대변인 노릇도 하였다. 1993년1월12일 83세를 못채우고, 외할머니처럼
1월에 영면하여 천섬지역인 알렉산드리아의 리버사이드 묘지 (Riverside
Cemetery)에 묻혀있다.
▲ 볼트성의 부엌 조리실 <1>
▲ 볼트성의 부엌 조리실 <2>
▲ 볼트성의 부엌 조리실 <3>
▲ 볼트성의 부엌 조리실 <4>
▲ 볼트성의 부엌 조리실 <5>
조지 볼트(George C. Boldt)는 프로이센(Preußen)의 한 섬에서 태어나 미
국으로 이주하여 그의 원대한 꿈을 이룬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기업가로
서 성공하였고, 재산가로서 그의 명성을 드러낸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보
다 11살이나 어린 백만장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짧긴 하여도 사랑에
도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성실함으
로 이룬 재산은 아들이 다 처분하였으니, 불과 2대를 지키지 못하였다. 후
계자로서 훌륭한 자식이 대를 잇지 못하였고, 거기다가 후손까지 끊어졌
다. 그의 생전의 업적은 이 하트 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코넬대학
과 몇몇 지역에 그의 기념관이 있을 뿐이다. 그들 부부가 잠들어 있는 뉴
욕의 브롱크스(Bronx) 우드론묘지에는 기념비로 세운 조지 볼트 탑이 서
있다.
▲ 볼트의 아들인 조지 볼트 주니어가 아버지가 이룬 전재산을 코넬대학에 기부하여,
코넬대학교는 학교내의 건물증축을 비롯한 운영이 튼튼해졌다 - 조지 볼트 건물들
▲ 조지 볼트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Boldt Hall Residence
▲ 조지 볼트 부부가 잠들어 있는 뉴욕 브롱크스의 우드론묘지에 있는 볼트탑
만약 조지 볼트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명심보감(明心寶鑑)》만 제대로 공부
했더라면, 이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司馬溫公(사마온공)이 曰積金以遺子孫(왈적금이유자손)이라도
未必子孫(미필자손)이 能盡守(능진수)요、
積書以遺子孫(적서이유자손)이라도 未必子孫(미필자손)이
能盡讀(능진독)이니、不如積陰德於冥冥之中(불여적음덕어
명명지중)하야 以爲子孫之計也(이위자손지계야)니라。
《明心寶鑑》 <繼善篇> 제6구(第六句)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 "돈을 모아서 자손에게 물려준다 하더라도 자손이 반드시
그 재산을 다 지킨다고 볼 수 없으며,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겨준다 하더라
도 자손이 반드시 그 책을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남이 모르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덕을 쌓아서 자손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 조지 볼트 부부의 업적과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하트섬 <볼트성홈페이지>
▶하트섬을 비롯한 천섬 돌아보기(아래글씨를 클릭)
첫댓글 누구말대로 글자가 너무 작소이다.
글자가 크다 작다라고 말하는 걸 보니 너무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시군요.
만약 글씨가 너무 작으면, 컴퓨터 자판의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Ctrl을 누르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를 누르고, 반대로 글씨가 자기에게 너무 크게 보이면
왼손으로 Ctrl을 누르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를 누르면 되죠.
미안.잘알았소이다.
두류봉은 볼트성에 3번이나 갔다와서 여러 번의 많은 사진을 적당히 배열하느라 고생하고,
글쓰는 재주도 없는데다가 어울리는 글을 쓰느라 고생하면서 사진배열을 맞추자면 힘들죠?
그리고 여행 중 너무 귀찮게 사진기를 몇개나 갖고 적절히 사진을 빨리 찍기가 쉽지 않아요.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 반은 버릴 정도로 다시 다 살펴보아야 하거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