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글은 사단(四端)·칠정(七情)과 이(理)·기(氣)의 문제에 대해 변론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편지에 퇴계(退溪) 이황(1501~1570)이 답한 글에 있는 구절입니다. 고봉이 자신의 논의를 굽히지 않자 퇴계는 주자(朱子)의 용기를 예로 들었습니다.
“주자는 조금이라도 자기 의견에 잘못이 있거나 자기 말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음을 깨달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여 즉시 고쳤으니, 비록 말년에 도(道)가 높아지고 덕(德)이 성대해진 뒤에도 변함없었습니다.”
하물며 성현의 도를 배우는 길에 갓 들어섰을 때에는 어떠했겠느냐고 고봉에게 반문하며, 퇴계는 20여 년 아래의 젊은 후배에게 위와 같이 타일렀던 것입니다.
|
첫댓글 ㅎㅎ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현인께서도 저리 고치셨는데 오늘 귀감될 수 있는 좋을 글 ^^
진정한 용기는 혼란한 시대에 전세계 질서의 혼란을 틈타, '남북한'을 이간질 하여 서로 싸우게 만든 후, '고려인들의 연합'을 깨어버린 후, '중화'의 질서로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거대한 음모에 대항하여 진정한 역사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가 모든 고려인들이 단결해야 할 '진정한 때'인 것 같습니다...
<""""""재 야 사 학"""""">이 건전한 토론을 유도하기를 원하신다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대중에 호소하는 오류',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더이상 범하시지 말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증거와 문헌들을 '많이 많이'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토론이 이어집니다...
위의 의미는 "고쳐야겠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바로 "理"가 나를 끌고 가더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각성해서 따르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게 없는 것입니다. "氣"에 주도권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주체가 "리"에 있지 기에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내가 할수 있다는 열정이란 어찌보면 나라를 죽음에 이르게까지도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이 해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을 목격하는 증인으로 서있으면 하늘의 일이 얼마나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를 섬기는 우리 조선백성의 사상의 근간이라 생각합니다.
"용기"와 "허세"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란 비굴해 보이까지 할수 있는 자세라 할수 있기때문입니다. 결국 허세를 부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용기없음을 일컫는 말이 됩니다. 멜라민사태가 그러하며, 오래동안 교묘하게 그러한 방식으로 부를 축척하는 모습이 또한 그러하며, 범죄를 저지르고도 웃음으로 자신을 가리는 모습이 또한 그러합니다. 이원론이 만들어낸 인간군상들입니다. 결코 조선의 천사상과 상관없는 유대에 종속된 유대식 인간형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인 "나"가 주체가 되어 해석되어지는 모든 것을 가리켜 이원론이라 부르는 것이며, 천,신이 주체가 되어 저절로 되어버리는 것을 관망하는듯한 태도가 바로 일원론적인 태도와 사상이라 말합니다. 이원론의 발상은 바로 오늘날 유대인의 사고체계와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