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무는 즈음
신축년 한 해가 저무는 십이월 끝자락 수요일이다. 내일이면 연초 연사에 둥지를 틀어 지낸 와실에서 철수하게 된다. 엊그제 한파가 매서웠으나 오늘 아침은 추위가 제법 누그러져 출근길에 두르는 연사 들녘으로 나가봤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들녘이지만 희미하게 드러난 농로가 식별되어 보행에 어려움 없었다. 이제 연사 들녘과 연초천 천변 산책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교정에는 내가 제 일착으로 들어섰다. 이태 동안 지내는 문화보건부실로 들어 실내등과 난방기를 켰다. 사실 이번 수요일은 내가 학교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우리 학생들이 축제 공연을 비대면 영상으로 시청하고 하교한다. 오후에는 생활기록부 작성 연수와 교과 협의를 하는 일정이 잡혀 있는데 퇴직을 앞둔 나와는 모두 무관한 내용들이다.
하루 연가를 내고 학교 밖으로 나가 시간을 보내도 되겠으나 마음을 접고 교내에 머물 예정이다. 코로나 와중에 대중교통으로 어디로 나다니기가 께름칙했고 거제의 웬만한 곳은 다 둘러 더 찾아갈 데도 없었다. 내일 오후 한 시간 조퇴할 생각이고 모레 방학식 날은 하루 연가를 신청해 놓았다. 이웃 학교 카풀 지기는 내일 방학식을 해서 오후에 같이 창원으로 복귀하기로 되어 있다.
동료들이 출근하기 이른 시각에 엊저녁 퇴직 선배와 만난 소회를 몇 줄 글로 남기며 여유를 가졌다. 같은 공간을 쓰는 기획 여교사는 평소보다 이르게 출근했다. 오늘이 축제일이니 전체 업무를 총괄한 담당이라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내가 축제 진행에서 도와줄 일이 없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교실에서는 정한 시각이 되지 방송실에서 송출되는 영상으로 축제가 개회되어 막을 올렸다.
내가 머무는 문화보건부실엔 영상이 보이질 않아도 마이크 성량이 고음이라 소란해 복도로 나가 교실로 들어 학생들의 동태를 살펴봤다. 아이들은 실내등을 끈 채 빔으로 송출되는 전면 칠판의 영상 시청에 몰입했다. 사전에 시청각실에서 보컬 연주 장면을 녹화한 영상이 나오고 복면 가왕은 방송실 실제 상황이 화면으로 나왔다. 투표와 퀴즈는 즉석에서 휴대폰으로 실시간 진행했다.
나는 하는 일도 없이 어물쩍 시간을 보내다가 교정으로 내려가 뜰을 서성였다. 어제 그제보다 바깥 기온이 높아져 그리 추운 줄 몰랐다. 초등 친구를 비롯해 몇몇 지기들에게 안부 전화를 넣어 거제 생활을 청산하고 뭍으로 복귀하는 심정을 털어놓았다. 겨울 방학에 들면서 두 달 뒤 교단에서 내려섬이 아쉽다기보다 홀가분하다고 했다. 이제 새로운 인생 이모작 출발선에 선 셈이다.
비대면 화상으로 진행한 학생들의 축제는 오전에 끝났다. 나는 밥값도 못한 주제에 급식소로 가 점심을 들었다. 차림표가 추억의 옛날 도시락 비빔밥인데 햄과 핫도그를 건너뛰고 계란프라이는 두 개 집었다. 식후 내가 지도를 맡은 청소구역을 둘러보고 실내로 들어 양치를 하고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아이들은 점심 먹고 통학버스를 타고 하교하니 교정은 절간처럼 조용했다.
오후는 전체 교사들이 시청각실에 모여 학교생활기록부 작성 연수를 하는 시간이었다. 교사들의 업무 가운데 정기고사 문항 출제와 성적 처리 사무만큼 중요한 일이 학교생활기록부 작성이다. 정년을 앞둔 나와 무관한 연수라 그 자리에 가질 않았다. 내가 올해 가르쳤던 문학과 독서 교과에서 세부 능력 특기사항은 기재해주어야 하나 담임을 맡은 동료들이 칸을 채워주어 고마웠다.
시청각실에서 전체 교사들의 연수 이후엔 교과별로 전문적 학습 공동체 연수를 가졌다. 한 달 한 차례 갖는 교과협의회였는데 나는 빠진 경우가 많았다. 국어과 동료들이 한 자리 모이는 날인데 얼굴을 드러내기가 머뭇거려졌다. 코로나가 아니라면 학교 바깥에서 한 끼 식사라도 나눔직한데도 그러질 못해 아쉬웠다. 대신 국어과 대표에게 약소하나마 다과 경비 지원으로 갈음했다. 21.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