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읽은 자료들 가운데 나름대로 비교검토가 될 만하다 싶은 부분들을 추려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는 그 비교자료 중 첫 번째 것을 요약한 부분입니다.
읽으면서 70년식 문장에 조금 애를 먹었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제가 많이 배운 것은 광개토왕의 대백제 정벌전의 규모를 상당부분 축소시켰다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명확한 근거자료 제시와 같은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시대적인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의견제시의 내용 자체는 세련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천한 수준의 제가 내린 성급한 감상일 뿐입니다...^^
2. 백제방면의 정토
고구려와 백제 두 왕실은 본시 조종을 같이한 동족으로 처음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다가, 낙랑 ․ 대방의 지역이 고구려의 손아귀에 들어가 지경이 접경함에 미처 비로소 충돌이 일어났다. 더욱이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로는 양국 관계가 점점 험악하여 원수와 같이 되었다.
그래서 광개토왕은 즉위한 이듬해부터 백제에 대한 보복적인 침략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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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쳐들어가 일팔성(壹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등 58성을 공파하였는데, 백제의 도성은 항복하지 않고 군사를 내어 거전(拒戰)하였다. 왕은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도성을 박진(迫進)하니, 백제왕은 남녀 1천구와 세포 천필을 바치고 노객이 되겠다고 했다. 이에 함락된 백제의 성읍이 58, 촌락이 700이었다.
이때 광개토왕이 특히 수군으로써 침입한 것은 아마 측면작전을 벌리어 불의에 경기만으로 상륙하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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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광개토왕의 정복한 백제의 58성은 대개 한강 밑 임진강유역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그 중의 대부분은 다시 백제에 돌려주고, 아마 방위상 필요로 임진강이북의 성읍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요컨대, 광개토왕의 백제대정벌은 영토의 야욕보다도 응징적인, 보복적 의미가 더 많았다고 고찰된다.
- 이병도, 「광개토왕의 웅략」中, 『한국고대사연구』, 1976
다만 의심스러운 점이라면, 광개토왕이 보복전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백제 정벌을 감행했다고 하더라도 큰 댓가를 치루고 얻은 영토를 과연 쉽게 돌려주고 돌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고구려를 쳐들어왔던 당태종이 안시성주에게 큰 상을 내리고 돌아갔다는 중국측의 기록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면, 제 오버액션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궁금증은 사실 두 번째 자료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끼워 맞춰지긴 했습니다만, 역시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읽은 자료의 범위가 보잘 것 없는 수준인지라...^^;
첫댓글 역시 이병도. 왕으로 폄하해 부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