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자료는 첫 번째 것에 비해 비교적 근래의 것이지만, 그래도 거의 10년 전의 자료이니 만큼 이제는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자료를 읽으며 색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고구려의 백제정벌전을 고구려의 입장에서 서술하면서도 백제의 입지를 강화시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일정부분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저는 광개토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대등한 전력으로 보였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광개토왕이라는 이름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가 시작과 동시에 줄곧 백제를 몰아세웠다고만 이해했습니다. 백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을 것이란 무의식적인 사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자료는 그런 제 인식을 보기좋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제겐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3. 신래한예(新來韓穢)와 관련된 신점령지역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영락2년 7월에 광개토왕은 몸소 병사 4만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석현 등 10여성을 빼앗았다. 이때 백제 진사왕은 광개토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여 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이 함락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빼앗았다.
관미성은 백제의 북변 요충지였기 때문에 백제는 관미성을 빼앗긴 것을 애통해 하여 석현 등 5성을 탈환하기 위해 아신왕2년 8월에 병사 1만으로 관미성을 먼저 포위공격했으나 고구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백제는 좌절하지 않고 영락4년 7월에 수곡성까지 북상하여 고구려군과 싸웠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이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군을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곧바로 8월에 고구려가 국남에 7성을 쌓았던 사실을 보면 고구려도 백제의 북침을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고구려가 영락2년에 석현 등 패수 주변의 10여성을 점령한 이후, 백제가 이 지역을 재탈환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재기했음을 알 수 있다. 394년에 백제군이 수곡성 방면까지 북상하여 고구려군과 싸웠던 사실은 매우 주목되는 사건이다. 영락5년 당시에도 고구려군이 패수선을 크게 넘지 못했음은 고구려군이 패수에 진을 치고 백제군을 맞아싸웠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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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5년까지 예성강 선을 크게 넘지 못했던 고구려군은 광개토왕비문을 통해서 보면 영락6년 수군을 이끌고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단행했다. 비문에 따르면, 고구려군은 이어 50여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아리수를 건너 국성을 포위하였다. 전세가 불리함을 절감한 아신왕은 남녀생구 1천인과 세포1천필을 바치고 노객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고구려군은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 그리고 출전했던 군사를 이끌고 환도했다. 이처럼 고구려군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비록 일시적으로 백제의 58성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백제의 저항을 받으면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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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이 점령한 58성의 명칭 가운데 모루성(牟婁城), 고모루성(古牟婁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閣模盧城)이 있음이 주목되는데, 여기서 ‘모루’, ‘모로’는 『양서(梁書)』 신라전에 보이는 ‘健牟羅’, 울진봉평비에서 보이는 ‘居伐牟羅’에 ‘모라’와 같은 것으로 오늘날 우리말의 ‘마을’, 일본말의 ‘무라(村)’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광개토왕이 점령한 58성 가운데는 규모가 큰 성 뿐 아니라 마을 단위의 조그만 성들도 포함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광개토왕이 점령한 58성, 혹은 64성은 소규모 토성을 포함한 점령지역의 크고 작은 성을 모두 계산해 넣은 숫자라는 것이다.
광개토왕군대가 수곡성에서부터 출발하여 백제의 크고 작은 성을 차례로 점령해 내려왔다고 하면 그 점령지역은 넓게 잡아도 연천, 포천, 파주, 인천을 잇는 선 남쪽까지 내려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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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백제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쫓겨 내려갔다거나 혹은 쫓겨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등의 기록이 없다. 이는 광개토왕비문의 기록과는 달리 396년에 있었던 고구려군의 공격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며 한강이북을 점령한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고구려군이 한강이북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제의 궁성이 적군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상황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이인철, 「광개토대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의 남방경영-수묘인연호조와 그 관련기사를 중심으로」, 『광개토대왕비연구100년』, 1996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광개토왕이 공취한 58개성에 마을 단위의 보잘 것 없는 성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면
굳이 58개성과 700여 촌락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58성에 마을 정도 규모의 읍락들이 포함되었다면...700여 촌락은 얼마나 작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 점은 아무래도 고견을 갖추신 다른 분들의 가르침을 얻어야 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