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자료는 앞의 두 자료에 비해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공격적인 논지를 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어느 정도 감내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을 여타의 자료들에 비해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폈다는 점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자료와 대립양상을 보이는 내용은 한강상류 지역을 고구려가 과연 차지했을 것인가 하는 점인 듯 합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이 자료의 내용이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자료에서는 고구려의 신라구원이 동해안 방면을 통로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첫 번째 자료의 전제와도 맞지 않는 부분인 것 같아 제 입장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2. 고구려의 신라경영
4세기 후반경에 고구려는 대방고지를 놓고 백제와 날카로운 각축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한편 고구려는 멀리 소백산맥 이넘에 소재한 신라를 그 영향권 내에 묶어두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는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남진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보다 확고해져 392년에는 인질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능비문 영락5년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바 종주, 속민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관계 설정을 계기로 고구려는 대 신라 관계의 차원을 더욱 심화시켜 그 직접적인 경영을 구상했다. 그것은 영락6년에 광개토왕이 수군작전으로 백제의 왕성 공략에 성공한 즉시 여세를 몰아 ‘신래한예’의 거주 지역인 남한강 상류지역의 城, 村을 공취한 목적이 소백산맥 이남의 신라 지역 진출에 필요한 광활한 보급, 수송로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로부터 4년 뒤인 경자년에 보기 5만이라는 고구려의 대군이 신라지역에 출병할 수 있었던 요인도, 앞서 영락6년의 내륙 교통로의 확보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능비문에 의하면 경자년출병이 영락9년에 왜군의 침공을 받은 신라의 구원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한낱 출병의 명분에 불과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신라출병에 앞서 그에 필요한 광활한 보급 수송로를 고구려가 미리 확보해 놓았던 사실을 상기할 때 그 출병이 결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용의주도한 계획의 결과임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 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과 신라 가야경영」, 『국학연구』2, 1988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용의주도한 고구려의 계획에 대해서는 치밀하게 고려하고 있으면서도 주변국들의 대응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허술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타의 자료들을 읽으며 스스로 보충해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