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둑
조선조 말에 홍기섭(洪耆燮)이라는 이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런데 훔쳐갈 것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먹을 것을 찾아
솥뚜껑을 열어보았으나 밥은 언제 해먹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도둑은 중얼거리기를, 이런 집구석이 다 있나 하고 가지고 있던
엽전 일곱 꾸러미를 솥에 넣고 달아났다.
홍기섭은 본시 집안이나 친척 또는 친구를 찾아보기를 좋아하였다.
도둑이 든 이튿날도 일찍 일어나 계집종에게 세숫물을 놓으라 하였다.
그리하여 부엌으로 나간 계집종이 솥안에 든 돈을 보고 소리쳐
말하기를, 하늘이 도와 돈이 생겼으니 쌀과 나무와 고기를 사서
배불리 먹자고 하였다. 그도 주인을 따라 굶주렸던 까닭이다.
그랬으나 홍기섭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이 도왔을 리 없고,
누군가가 잘못 두고 간 것일 터이니 돌려줘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온종일 들어앉아 돈 임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대문에는 돈을 찾아가라는 방(榜)을 써 붙였다.
해가 저물자 뒷일이 궁금해진 도둑이 슬며시 찾아와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돈을 찾아가라는 방이 붙어있질 않는가. 도둑은 비록
도둑질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고 종을 불러
주인을 물었다. 그리고 안내를 하라고 하였다. 도둑은 홍기섭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어젯밤 돈은 자신이 놓고간 것이니 받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면서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참된
양반을 뵙는다 하고, 홍기섭 밑에 있게 해 달라 하였다.
홍기섭은 후에 관직에 오르고 손녀가 헌종(憲宗) 왕비가 되어 지체가
높아졌다. 도둑의 성은 유(劉)라고만 알려져 세상 사람들은 그를
유군자(劉君子)라 했다고 전한다. 이 일화(逸話)는 대동기문(大東奇聞)에
전해지는 얘기인데, 몇 번을 읽어도 읽고 싶은 얘기이다.
연전에 인물전을 TV드라마로 내보냈을 때, 그 때의 주인공이 한
말이 유행하였다. '민나 도로보'라고 한 말이 그것인데, 이 말은
'모두가 도둑'이라는 일본어이다. 드라마 작가는 이 말을 통해서
오늘의 부도덕한 사회상을 찌르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오랫동안의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정(司正)바람으로 드러나는 지도층 인사들의 모습이 날마다
TV에 비친다. 아닌게 아니라 '민나 도로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자신이 부도덕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출세를
하면서, 그리고 재물을 모으면서도 남은 모두 도둑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오늘에도 그런 상황임을 잘 풍자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고 도둑은 있어 온다.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면서 국민의 관심을
끈 것이, 이른바 지도급 인사들의 재산공개이다. 그 결과가 도둑질한
면을 드러내 보여서,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을 허탈케 한다.
서민들의 평생을 건 소망이 내 집 한 칸을 마련하는 일인데,
그 꿈을 깨뜨린 것이 땅값 집값을 올려놓은 투기꾼들이다.
이런 바람을 일으킨 자들이 바로 지도급 인사로 드러나,
국민들은 제몫을 도둑맞은 것으로 생각한다.
도둑에는 큰 도둑이 있고 작은 도둑이 있다. 나라를 위한다느니
인민을 위한다느니 하면서, 권력으로 민권을 빼앗아 큰 도둑질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질의 도둑은 맞지 않으려 하면서도, 정작 정신을
도둑맞는 일에는 느슨하다. 그런 일들로 사람의 마음에 병이 들어
신음중이다. 존경받아야 할 부자가 떳떳하지 못한 세태, 도둑질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지도층.
홍기섭과 같은 공직자, 유군자와 같은 도둑이 있다면 그런 세상은
그래도 살맛이 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