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산책>
나는 조선의 왕이다
“누가 뭐라든 과인은 나라 위한 길만 갈 것이오”
영조, 국익보다 당파 앞세운 정치 몸소 체험
위기와 격동의 세월 속 당쟁 완화·인재 등용 힘써
리더는 주어진 사명 자각, 비전·목표 실천이 중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ookbang.dema.mil.kr%2Fnewspaper%2Ftmplat%2Fupload%2F20170131%2Fthumb1%2FYA_PG_20170131_01000119200004342.jpg) 영조 어진. 보물 제932호. 회화, 비단에 채색, 61.8×110.5㎝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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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18세기 후반 영조와 정조의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조선의 르네상스는 결코 쉽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는 왕이 되기에는 심각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왕이 되기도 전에 죽을 뻔했다. 이번 시간부터 영조와 정조가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일단 영조가 즉위할 무렵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어느 시기나 정치판은 험하기 마련이지만, 이때는 정말 심각했다. 정치적 대립의 선을 넘어, 당파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숙청이 반복됐고, 마침내 서로를 역적으로 지목하면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선 너희들이 말살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 영조의 선왕인 경종은 영조의 이복형이다. 경종은 유명한 장희빈의 아들이다. 영조의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 출신 궁녀였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지닌 경종과 영조는 소년 시절에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라는 괴물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노론은 영조를 지지했다.
다수당이었던 노론은 경종이 즉위했을 때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선에서 후퇴하고 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라고까지 요구했다. 참다 못한 경종은 기습적으로 대숙청을 단행했다. 노론은 큰 타격을 입었고, 경종과 소론의 공세가 계속되면서 마침내 숙청의 칼날이 영조에게까지 닥쳤다. 보다 못해 대비까지 나서서 경종과 영조를 함께 앉혀놓고, “두 사람은 숙종의 유일한 혈육이다. 피를 나눈 형제이니 서로를 보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을 한다.
영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텐데 경종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비의 중재 덕분에 영조의 수명은 약간은 연장되지만,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결국은 영조도 체포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별다른 일’이 일어난다. 경종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덕분에 영조가 왕으로 즉위한다. 이 몇 달간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영조는 왕으로 즉위하고서도 손발이 떨리고 마비되는 증세가 한동안 계속돼 매일 침을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손발 아니 심장까지 요동쳤을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소론들이다. 노론이 피의 복수를 벌일 게 당연했다. 정말로 노론은 기세등등했고, 영조에게 가서 ‘당신이 왕이 된 건 우리 덕분이다. 그러니 우리의 원한을 풀어다오’라는 식의 요청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조가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나는 노론의 왕도, 소론의 왕도 아니다.” 즉 조선과 만백성의 왕으로, 내가 할 일은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병들고 위험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노론과 소론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동안 조선은 커다란 위기와 격동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군함과 상선이 조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은 이제 막 자유상업을 허용하느냐 마느냐로 격론을 벌이는 단계였다. 수공업·어업·광업도 국가의 통제 아래 최소한도만 운영되는 수준이었다. 영국의 광산에서는 증기기관이 돌아가고 있는데, 조선은 ‘잠채’라고 해서 몇몇 광부가 관원의 눈을 피해 몰래 곡괭이를 들고 구덩이를 파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기업으로 치면 혁신기술이 등장해 세계 경제와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시기에, 그런 건 알지도 못하고 수백 년 된 전통과 규제를 푸는 것도 망설이며, CEO가 신제품을 개발하자고 하면 짜증 내고 피곤해하는 격이었다.
영조는 난감했다. 나는 당파의 왕이 아니라 조선과 국민의 왕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해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영조는 거대한 비전을 던졌다. 당쟁과 편협함,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구성원의 생각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국가의 운명을 바꾸겠다고 말이다.
여기서, 리더에게 제일 중요한 건 무엇일까?
첫째, 자신의 위치,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 그것에 기초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할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영조의 출발이 이랬다.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것이 영조와 정조를 중흥의 군주로 만든 첫 번째 비결이다.
<노혜경 교수 / 호서대학교 창의교양학부>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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