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바른 나는 장준하의 친일행적을 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사범 학교시절 민족주의적 신념을 가졌고,
교사가 되어서는,
학생들에게도 애국가, 태극기, 우리말을 가르치고,
독립군과도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박정희를
친일이라고 매도하고 헐뜯는 자들이
장준하를 독립군이라고 존경하는 행태를 보고,
과연 그들의 역사의식이 옳은 것인지 묻고 싶어
이글을 퍼왔다.아래글을 읽어 보시고 각자 판단
하시길 바랍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박한용, 노무현때 독립기념관
관장이 된 김삼웅,민족문제 연구소 이사 김희선,
김대중의 졸개인 한상범, 임헌영,
사이비 학자 홍윤기, 최상천
노사모 회원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매도하고
장준하씨를 존경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퍼옴
청년 장준하의 친일행적(수정본)
장준하는 일제시대인 191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30년대 초반 평안북도에서
일제의 판임관교원 즉 일본제국의 충복인 황국교원를 한
사람이었다.
욱일의 기세를 보이며 승승장구하던 일본제국은 조선을
강점한데 이어 1932년에는 만주를 점령하는 등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코우공원 폭탄투척이 바로
이때 1932년 발생한 일이다.
장준하의 아버지는 우리민족의 절망기인 이 시기에
일본제국의 황국교원를 다년간 역임한다.우리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장준하는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인지
일본제국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친일의 피가 농후하게
흐르던 젊은 황국신민 장준하...
젊은 장준하는 1938년 신성중학교를 졸업한후
평안북도 정주에서 신안소학교 판임관 교원, 즉
일본제국 황국교원(훈도)을 3년간이나 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는 중등교육에서 조선어학과를
폐지하는 등 내선일체,황국신민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조선의 전통,풍습,언어 등을 말살한다.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수탈을 더욱 강화하였고
이즈음 일본제국의 교원들은 일본 천황폐하의 충복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는 자리였다고 볼수 있다.
일제말기의 훈도는 일본천황 즉 덴노헤이까의
교육칙어를 받들어 식민지조선인을 일제에 동화시키는
첨병이었다고 볼수 있다.
신사참배,조선말 사용금지,일본말 사용권장,곡물
공출 강요,놋그릇 수탈 등은 훈도의 기본업무였으며
일제의 훈도는 대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뛰는
제1선의 자리였던 것이다.
그는 이때 제1급 악질친일 민족반역자 생활을 한
셈이다.이때 장준하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그
자체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후 장준하의 친일행적은 더욱 고도화되기 시작한다.
즉 일본 본토로 유학을 가는 것이다.장준하는 1941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일제시대 말기 즉 우리민족의 절망기에 자기만
살겠다고 일본 본토로 유학까지 간 청년 장준하...
그는 이때 과연 무슨생각을 한 것일까?
일본 본토에서 공부를 더 해서 황국 즉, 대 일본제국의
학부대신이라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 이완용처럼...
우리의 독립투사들이 중국 내륙에서 피흘리며 싸우던
일제말기 그 시절,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일본 본토로
유학까지 갔던 것일까?
그는 1942년에는 다른 일본신학교로 전학까지 한다.
신학은 그에게 불안 도피처였을 것이다.
전쟁이 세계를 흔들던 풍운의 시절에 신변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 방법이 제일 좋았을 것이다.이때의 장준하는
요즈음의 징병기피자들을 연상케 한다.
이후 일본 본토에서 무려 2년간이나 빈둥거리며
일본놈팽이들과 어울리던 장준하는 드디어 일제에
의해 1944년1월 징집을 당한다.
일본제국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말기 2차대전기 전쟁풍운의 시절에
자기 신변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여우같이 굴던
장준하는 드디어 일제에 의해 징집을 당하는 것이다.
1년만 더 버텼으면 조선광복이 되어 조국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장준하는
징집을 당하는 것이다.
일제말기는 전쟁의 막바지시기로 일제는 병력이
계속 모자랐고 따라서 신학대학생인 장준하도
예외가 될수 없었을 것이다.
장준하는 1944년 봄 평양에서 대 일본제국 군인이되는
훈련을 잘받고 중국 중부 지역인 서주 쓰가다부대에
명예로운 대 일본제국 군인으로 배속된다.
난생처음 전쟁터에 끌려간 학삐리 장준하는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부대 탈영을 결심한다.
그곳은 우리의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서 보면,
만주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장준하가
중경으로 탈출하기 좋았을 것이다.
장준하 본인 말에 의하면 일본제국이 미워서
탈출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제말기 그의 친일행적과 여우같은
처신으로 볼때 그 말은 신빙성이 없다.
장준하는 탈출후 운좋게 김준엽을 만나 동행한다.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 소속 한국인 훈련반에
입소한 장준하는 훈련을 받은후 그해 11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된다.
그후 친구들과 함께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가서
1945년 2월 광복군 소위로 임명된다.이것이 광복군이
되기까지의 장준하의 행적이다.
해방전 장준하의 광복군 경력은 6개월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광복군 중위의 명함을 자랑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 알량한 광복군 경력 6개월도 실은 3개월은 OSS훈련
기간이었고 그외 이렇다할 전투경력도 없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독립투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과대포장도 이만저만한 과대포장이 아니다.
실제 그는 해방전 인생 대부분을 일본제국을 위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8년 일본제국 교원으로 시작한 그의 친일 인생은
1944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무려 6년이다.
그의 광복군 경력은 6개월뿐이다.그것도 자발적으로
광복군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징집당하여
운좋게 중국대륙 중남부에 배치되자 거기서 탈영하여
이루어진 우연한 것이었다.
그가 만일 필리핀주둔 일본군에 배치되었더라면 탈출이
가능했을까?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장준하는 일제 강점기 우리의 민족암흑기 시절에
일제의 황국교사로서 일본천황의 충견역할을 하다가
1941년 일본 본토로 유학가서 무려 3년간이나
빈둥거리며 쪽바리 놈팽이들과 어울려 지낸다.
장준하는 1943년에는 결혼까지 하며 희희락락한
태도를 보인다.일제에 의해 징용되기 몇달전 일이다.
그가 독립군이 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때 결혼을 했을까?
신채호 선생이 가정을 버리고 떠나 독립운동을
하신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이때까지 장준하는
민족정신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양아치였다고
볼수 있다.
뒷걸음질 치던 소가 우연히 쥐 잡듯이 장준하는
졸지에 광복군으로 변신한다.즉 그의 광복군 변신은
당시 조선인의 수치스런 뒷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해방은 1945년 이루어졌다.그러나 장준하는
1944년 초까지 전형적인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일 뿐이다.그의 광복군
경력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그가 후에 김구선생의
비서직을 했다는 것은 김구선생 자체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장준하는 인생 대부분을 악질 친일파로 살다가
막판에 우연히 광복군으로 기어들어가 광복군의
명예를 더럽힌 위선자일 뿐이다.
그의 인생 대부분은 민족반역자의 그것이었으니
그를 독립투사로 과대포장하는 자들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