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장터
며칠 전 수도권 특정 지역은 물 폭탄에 해당할 만큼 집중호우가 쏟아져 심각한 물난리를 겪었다. 반면 우리 지역을 포함 남녘 곳곳은 부족했던 장마철 강수량에 이어 비다운 비가 내리질 않는다. 그리하여 낙동강 중하류는 녹조류가 발생해 정수 과정을 거치는 수돗물마저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태풍급에 해당할 넉넉한 비가 와주어 계곡이나 하천을 청소하다시피 하면 좋을 듯하다.
광복절 연휴가 지난 팔월 셋째 화요일은 아침나절부터 강수가 예보되어 이른 시간 나서는 자연 생태학교 등교를 미적댔다. 한밤중 잠 깨어 읽어오던 리츠드 로킨스의 역작 ‘이기적 유전자’를 마저 읽었다. 근래 자연과학에서 보기 드문 중량감 나가는 교양서 한 권을 독파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 적령기의 우리 청춘 남녀들이 이 책을 먼저 읽고 난 뒤 배우자를 선택했으면 싶다.
학교는 방학 중이지만 관공서나 회사에서는 업무가 개시될 시각부터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면 텃밭으로 나가 몇 가지 찬거리를 마련해 오든지 근교 숲으로 들어 막바지 영지 채집 산행을 다녀올까 했는데 후일로 미루었다. 바람이 심하지 않고 비가 얌전히 내려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을 나섰다. 우산을 받쳐 쓰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퇴촌삼거리로 향해 갔다.
자투리 공원 정자에는 한 젊은이가 걸터앉아 휴대폰 검색에 열중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여러 가지 운동 기구에는 몸을 단련하는 이들을 볼 수 있는데 우중이라 텅 비어 있었다. 반송공원 북사면 수변 산책로에서 창원천 천변으로 내려섰더니 산책로는 수크령이 이삭을 내밀고 나왔다. 하천 바닥은 작년에 이어 올여름 큰물이 휩쓸려 흐르지 않아 여러 습지 식물이 엉켜 무성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산책 나온 사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오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와도 성근 빗방울이라 옷이 젖을 정도가 아니라 펼쳐 쓴 우산을 접어 손에 들고 걸었다. 반지동 아파트단지를 앞둔 징검다리에 이르니 고인 냇물에 자라는 노랑어리연이 피운 꽃이 저물지 않고 아직 몇 송이 꽃잎을 달고 있었다. 늦은 봄날부터 피기 시작했던 귀여운 연꽃은 거의 끝물이었다.
여름 끝자락에 피어난 노랑어리연꽃을 살펴보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내가 십여 년 전 봉림동 주택지 학교 근무할 적에 내리 오 년을 집에서부터 걸어 다녔던 천변이었다. 그 당시 아침저녁 출퇴근으로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 천변을 걸었으니 도심에서도 계절감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천변 생태계에서 피고 지는 꽃들과 날아와 먹이활동을 하는 새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톡톡했다.
반지동 아파트단지를 지나면서 창이대로 보도를 따라 걸으니 지귀상가가 가까워졌다. 반지동에서 건너오는 다리 위에는 형형색색 파라솔이 펼쳐져 있었다. 1일과 6일은 지귀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그곳은 장이 서는 날이면 파라솔을 펼친 과일 노점상 자리였다. 집을 나서면서 산책 반환점으로 공단 이면도로를 걸어 남천이 합류하는 봉암갯벌까지 진출하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비가 오는 날의 장터 구경도 운치가 있을 듯해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채소와 생선을 비롯해 과일 노점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막 점심나절을 맞았고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어 물건을 사려고 찾아온 장꾼들을 적어 장터는 한산했다. 나는 물건을 팔아줄 구매 의사가 없으면서 낡은 상가 건물을 에워싼 시장 골목을 빙글 둘러보고 지난날 몇 차례 들린 허름한 주점을 찾아 들어갔다.
중년 부부가 부추전이나 생선을 술안주로 구워내는데 내가 첫 손님이었다. 나는 명태전을 시켜 놓고 맑은 술에다 맥주를 섞어 비웠다. 잠시 뒤 두 사내가 문을 밀고 들어와 옆 테이블에 앉아 고등어구이를 안주로 막걸리를 들었다. 그들은 낚시광인지 어느 출조지에서 낚았다는 물고기와 미끼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점을 나서 장터 골목에서 조생종 햇사과 아오리를 한 봉지 샀다. 2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