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보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말씀 끝에 ‘주어라.’ 라는 동사를 대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그것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겁니다.
예전에 동기 신부 모임을 제가 보좌로 있던 본당에서 했던 적이 있습니다.
열 댓 명의 동기들이 모였는데,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했습니다.
티비를 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캐취볼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도 있었는데요.
한 친구가 제 책장 앞으로 가서 이 책 저 책 구경하더니,
‘오~ 책이 많아졌는데~’ 라며 칭찬을 합니다.
그러더니 책 한 권을 꺼내며 ‘나 이거 줘~’ 라고 했습니다.
생생 심리학이라는 책이었는데, 이미 다 봤고 소장할 필요가 없는 책이기에 줬습니다.
또 둘러보더니 오숙희 씨의 책을 꺼내서 ‘이것도 줘~’ 하길래 가지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이미 다 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들은 다 줄 수 있는데요.
아직 다 보지 못했거나 그 안의 계속 참고할 내용들이 있는 책은 갖고 있게 되는 거 같습니다.
책만이 아니라, 제가 가진 옷이나 물건들 중에는 내 삶에 꼭 필요한 것들도 있고,
여분을 갖고 있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요.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누군가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 쓸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야 해... 남 주기는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물건들을 움켜쥐고 있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어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생각을 해 봐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물건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 걸까?
나보다 상대방에게 더 절실하게 필요한 물건이 아닐까?
나는 혹시 나의 이기심이나 욕심 때문에 줄 수 없고 베풀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들입니다.
그러한 고민을 하고 나서도, 줄 수 없는 물건이고 옷이고 돈이라면 가지고 있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줄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바자회 수준이 아니라 자선의 수준을 생각해 보는 건데요.
자선을 한다고 하면서 남는 것을 주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거랑 비슷한 거 같습니다.
저희 본당에서 일 년에 두 번, 사순 제3주일과 대림 제3주일에 양로원 할머님들을 생각하면서
드리고 싶은 무언가를 직접 사서 봉헌하는데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안 입는 내복이 두 벌이나 있으니 하나 봉헌하자..
선물 받은 양말이 남아도네, 그 중에 손에 집히는 거 하나 드리지 뭐..’ 한다면 어떨까요?
자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겠지만, 자선이라고 한다면 그 양이 너무 적다고 느껴집니다.
아마도 자선이라고 말하기에 안전한 기준은 루이스가 말한 대로
‘여유 있게 줄 수 있는 정도 보다 조금 더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선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나랑 수입이 비슷한 누군가와 똑같이 먹고 쓰고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너무 적게 주는 거겠죠.
자선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자선의 실천으로 무언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되어야 정상일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내가 지금 실천하고 있는 자선이 내 생활을 조금이라도 어렵고 힘들게 하는지..
또 그 자선으로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지를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남아도는 것을
건네주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희생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때는
녹지 않는 소금으로 남아 있을 때나 타지 않는 촛불로 남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녹아 없어지고, 타 없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면 누군가 나에게 달라하고 꾸려할 때,
한 번 더 고민해 봐야 합니다.
왜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겠습니까?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거절하지만,
예수님만은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때로 바보 같아 보이고 미련해 보일지도 모르는 그 모습이
절박하고 간절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빛이 되어준 것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예스’ 하는 삶은 나를 상처받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사셨고, 마지막에 그 희생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에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그분과 같이 내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가끔 놀러 오신 분들이나 아는 분들이 성당에 어떤 동물 기르냐고
물어볼 때가 있는데,
처음 대답할 때 단어 조합이 좋지 않았다.
“개, 새... 닭, 돼지, 토끼요...”
첫댓글 감사 합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