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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법(不二法)>
불이법(不二法)이란 상대적인 것을 초월해 차별이나 분별, 대립이 없는 진리의 경지를 말한다. 불교에서 ‘이(二, 둘)’는 분별과 대립의 세계, 즉 가짜, 거짓을 뜻한다. 따라서 불이법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모두 초월해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를 나타내는 가르침을 말한다.
그리고 불이법이란 불일불이(不一不二), 즉 너와 내가 하나가 아니고 그렇다고 둘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라는 말[일(一)]은 벌써 상대가 있다는 ‘하나’를 의미한다. ‘분별의 일’이라는 말이다.
즉, 불일(不一)에서 일(一)은 상대가 있는 분별의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불일불이(不一不二)에서 ‘불일(不一)’은 상대적인 개념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이(不二)와 같은 개념으로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일원(一圓) 혹은 일원상(一圓相)에서 ‘일(一)’처럼 절대의 일, 진리의 일을 지향하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경지가 불이법이다. 따라서 여기서 불일(不一)은 상대적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불이(不二)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줄인 말로서 “다르지 않다”라고 말할 때에는 “같지 않다”라는 말이 전제돼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무명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당연히 그 중생과 부처가 다르며, 무명과 깨달음이 엄격히 구별돼야 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부처와 구별되는 나의 ‘중생성=불일(不一)’이 철저히 인식될 때,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이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이(不二)와 불일(不一)을 혼돈 착각하면 안 된다.
선(禪)에서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마음을 나타내는 방편의 말로서 ‘단계가 없다’는 말을 한다. 마음은 불이법으로서 둘이 아니니 원래 단계가 없다. 그러므로 수행한다고 해서 마음이 단계적으로 점차 달라져가는 일은 없다. 만약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점차 달라져가는 단계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마음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니 본래 불이법인 마음은 아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경험하는 마음의 모습을 분별함으로써, 흔히 이런 잘못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단계가 없다는 방편의 말은 바로 이런 잘못에 떨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마음은 수행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여여(如如)하다. 이 여여한 마음을, 모습으로 분별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본래 마음은 언제나 여여하다. 그러므로 무심(無心)이 곧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이는 깨달음의 경지요, 부처의 경지, 절대 진리의 경지이다. 이 경지를 중생의 경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착각의 근저에는 정신적 나태함과 방종을 수행의 경지로 호도하는 자기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불이법에서 ‘번뇌 즉 보리’라고 한 것도 깨달음을 어떤 초월적인데서 찾지 말고, 구원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세간적, 생물학적 욕망과 혼돈해서 불이의 가르침을 세간적 실천이라 믿는 것은 착각을 넘어 자기기만이다. 흔히 오늘날 불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출가자들의 비윤리적 파계행위도 이러한 착각 혹은 의식적 호도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불교 전통에서는 7세기 원효(元曉) 대사와 근대 한국불교의 경허(鏡虛) 선사 등이 보여준 파계행위를 불교적 깨달음과 세간적 윤리 간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기보다 파계가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라는 치졸한 오류가 있다.
불일(不一)은 다(多)의 세계로서 구별의 세계요, 언어의 세계이며 현실의 세계이다. 한편 불이(不二)의 세계는 절대의 일(一) - 절대 진리의 세계로서 차별과 언어 이전의 세계요, 이성 너머의 세계이다. 따라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 이전, 이성과 이성 너머를 다 긍정하며 포괄하고자 하는 불교적 가르침이 담겨 있다. 불교가 종교이면서 철학이요, 철학이면서 종교일 수 있는 그 근거가 바로 불일(不一)과 불이(不二)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현대사회에 더 적절한 가르침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어와 현실 세계인 불일(不一)을 전제한 불이(不二)의 세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절대 일’을 추구하는 불이(不二)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운동권 논리는 위험한 발상이다. 현실의 세계인 불일(不一)이 전제되지 않는 불이(不二)의 세계는 일종의 폭력일 수 있고, 정신적 전체주의ㆍ공산주의일 수 있다. 무조건 불이(不二)를 밀어붙이는 것은 이성(理性)과 언어의 사용을 부정하고,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각박한 획일주의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폭력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라고 하는 것은 서양 중세 역사가 보여준 바 있다. 불교의 경우 불이(不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수행의 엄격성이 소홀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구별해야 할 것은 구별하지 못하고, 구별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별하는, 즉 불일(不一)의 현실을 못 보고, 불이의 오용과 남용의 폐해로 인해 진짜와 가짜, 불교적인 것과 비불교적인 것,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과 무당집의 귀신이 구별이 되지 않고, 만행(萬行)이 만행(漫行)과 구별되지 않고, 멍청함(昏沈)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착각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불교가 여타 종교와 다르고, 부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른 것은 부처님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감 놓고 배 놓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속과 인간의 일이 움직이고 있는 이치가 어떤 절대자의 권능과 도움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이 불교의 출발점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선가(禪家)의 말은 자신 외에 어떠한 절대적, 초월적 권위도 부정하는 철저한 선불교(禪佛敎)의 인간주의 선언이다.
그런데 입시철이 되면 모든 절에서 합격기도를 하고 수험 당일에는 대규모 기도회를 열어 시루떡을 갖다 놓고 내 아들 내 딸을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를 한다. 오늘날 불교인들이 절대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절대자의 처분과 권능을 기다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흔히 비판하지만, 그러면서 이와 같이 닮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만, 내 자식만 잘 되면 된다는 정신은 불일(不一)을 무시하고 오로지 왜곡된 불이(不二)만을 추구하는 잘못된 행위이다.
“색즉시공”의 진정한 의미는 다음에 잇따르는 “공즉시색”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왜냐하면 현실의 삶이 무의미한 것으로 무화(無化)되지 않는 것은, 현실적 삶이 공(空)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색즉시공), 공(空) 또한 구체적 삶을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것(공즉시색)이 바로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불일(不一)이 전제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불이(不二)의 진정한 의미는 불일(不一)이라는 현실태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개념을 만들고, 그러한 개념이 우리 행위를 만든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한 경험으로 본래개념은 더욱 강해진다. 그 강해진 개념이 특정 생각을 강화시키고 또다시 행위를 만든다. 이러한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 확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존재들의 개념들과 충돌은 피할 수 없고, 그것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고통을 낳는다. 고통은 다시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집착을 강화하게 되는데,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이자 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려는 것이 불이사상이고, 따라서 불이사상은 따로 떼어낸 독립사상이라기보다 무아, 윤회, 업, 사상(四相) 등 모든 불교경전 내용에 연결돼 있다. 이는 불교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이사상의 핵심은 양극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에 있다. 불이(不二)와 원융(圓融)으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갈등을 빚고 있는 모든 조직이나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계층 간, 지역 간, 그리고 남북 간 갈등,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끊임없는 분쟁의 불씨를 떨쳐내어 상생(相生)과 평화의 시대가 열리기를 부처님은 바라고 계실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통해 대립과 갈등의 어둠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하겠다. - 조성택
숨어살다 나타난 육조 혜능(慧能) 선사를 처음 만난 사람이 인종(印宗, 627~713)이라는 법성사 주지였다. 인종(印宗)이 혜능(慧能) 선사를 만나, 오조 홍인(弘忍) 선사께서는 어떤 법을 가르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혜능 선사의 답이,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에 인종이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느냐고 묻자, 혜능은 “(선정과 해탈을 말하면)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했다.
다시 인종이 ‘불이법(不二法)이 무엇이냐고 묻자, 혜능 선사가 말했다.
“변함없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상(常)이라는 견해와 모든 것이 결국은 덧없이 사라진다는 무상(無常)이라는 견해가 두 가지로 대립한다. 불성은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편으로도 단정할 수 없다. 아울러 선(善)과 불선(不善) 중 어느 편도 아닌 도리가 불성이다. 즉,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했다.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불이법인 자성을 깨닫는 것이 돈교(頓敎)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법의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세계의 온갖 법을 볼 때 불이법으로 보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다만 언제나 어디서나 불이법을 보는 견성이 바로 돈교인 것이다. 불이이므로 당연히 선정을 닦아 해탈을 이룬다고 하지 않으며, 유루니 무루니 하고 나누지도 않고, 유위니 무위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하고 나누지도 않고,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하고 나누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혜능 선사가 말하는 요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다만 견성(見性), 즉 불이법(不二法)인 불성(佛性)을 보는 깨달음을 말할 뿐이다.
둘째, 불법(佛法)은 불이법이고, 이법(二法)은 불법이 아니다. <육조단경> 전체 내용이 단지 이 두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
혜능 선사는 오직 견성(見性)을 말했을 뿐이다.
“불성(佛性), 자성(自性), 본성(本性)은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다른 이름이고, 선(禪)은 불이중도를 깨달아 언제나 불이중도의 눈을 가지고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선정(禪定), 해탈(解脫), 열반(涅槃), 반야(般若), 보리(菩提) 등 불교의 모든 용어들은 단지 불이중도인 견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말하는 것일 뿐, 제각각 차별되는 이름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불이중도인 견성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름이나 어떤 일이라고 하더라도 분별되는 상(相)을 따라 다르게 본다면 이법(二法)으로서 견성이 아니고 불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지법(不二之法)이고, 불성은 무이지성(無二之性)이다. 선(禪)은 언제나 어디서나 단지 불이법인 불성을 보는 견성을 말할 뿐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듯이 견성은 곧 깨달음이다. 언제나 모든 경우에 다만 둘로 분별됨이 없을 뿐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불이법이므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할 수 없고, 취하거나 버릴 수 없고,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고 나눌 수 없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고 이름 붙일 수 없고, 알거나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얻거나 잃을 수 없고,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고,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어리석다거나 깨달았다고 할 수 없고, 머물 곳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든 선한 생각 악한 생각을 응당 모두 없애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ㆍ인과ㆍ계급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허망한 생각을 해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려 한다.”고 하면서, “만약 상근기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려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황벽 희운(黃蘗希運, ?~850) 선사는, “도(道)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해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한 번 마침에 모두를 마치는 것이며, 한 번 깨달음에 모두를 깨닫는 것이며, 한 번 증득(證得)함에 모두를 증득하는 것이다.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끊음에 한 번 끊으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처럼, 가없는 법문을 증득함에도 단계란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옛 선사들은 ‘마음은 불이법으로서 둘이 아니니 원래 단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음은 불이법에 관해 <유마힐경(維摩詰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부처님께서 유마거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에게 문병을 다녀오라고 일렀는데, 모두들 전에 그분에게 직접 들은 일화를 얘기하며 고매하신 그 분을 문병할 능력이 안 된다고 사절을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지혜 제일의 문수보살을 보내니, 제자들이 두 분의 법담을 들고자 모두 따라 나섰다.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병의 원인과 그 차도에 대해 문안하니, 이에 대해 유마거사는,
“문수보살이시어!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한 제 아픔은 계속 될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의 아픔이 남아있는 한 제 아픔도 남아있을 것입니다. 혹 모든 사람들이 병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제 병도 씻은 듯 낫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는 그 유명한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
문수보살은 여러 가지 법담(法談)을 나누다가 “진리는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유마거사께서 불이법에 대해 말씀해 보세요.”라고 권장했다. 이에 유마거사는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으로 답하니 대중들은 “유마거사가 불이법(不二法)을 가장 훌륭하게 잘 해 주셨다”고 찬탄했다. 즉, “무엇이 불이의 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까?”라고 문수보살이 묻자, 유마거사는 말이 없었다(默然無言). 이에 문수보살이 찬탄해 말했다.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잘하셨습니다.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둘 아닌 법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에 훗날 사람들은 “유마거사가 취한 침묵이 우뢰와 같다.”고 평했다. ‘불이(不二)’란 언어표현을 초월한 세계라는 것을, 유마거사는 언어표현을 초월한 침묵으로써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양구(침묵) 자체가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내용을 문수보살은 언설(言說)로써 표현한 반면, 유마거사는 실천으로 응답한 것이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빌린다면 입 벌리기 전에 이미 틀린다[개구즉착(開口卽錯), 언전불급(言詮不及)]. 그래서 침묵이 우뢰와 같다는 말은 틀리지 않은 확실한 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답이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문자로도 언어로 설할 수 없는 분별심을 타파한 유마힐거사의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계이다. 또한 경전 내용 중에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말 또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를 비판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어리석은 중생이 가지는 분별심은 천국과 지옥, 선민과 천민, 상층과 하층, 남과 여, 내 편과 네 편, 이와 같이 세상을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눠 분별하려고 한다. 이러한 잘못된 착각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이 바로 불이법, 불이사상이다.
내 민족과 다른 민족, 인간과 짐승, 흑과 백, 선과 악, 좌와 우, 남과 북은 물론이고, 모든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행 ‧ 불행, 만족과 불만족, 좋은 것과 싫은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와 너를 구분하고 분별하는 이분법(이진법)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이 세상에 갈등을 부추기는 번뇌의 출발점이다.
불교의 불이사상은 이렇게 나누어진 개념들의 허구성에 대해서 말하고, 이러한 허구를 마음이 만들어내서 그 결과 스스로 고통 속에 뛰어드는 인간들의 무지함에 대해서 말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키워드 중 하나가 ‘불이사상’이다. 불이란 ‘둘이 아니며’ 따라서 ‘다르지 않다’, 즉 불이(不異)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깨달음과 무명이 다르지 않고, 성(聖)과 속(俗)이 다르지 않고, 나와 네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바로 불이의 세계관이다. 초월적 열반관(涅槃觀)을 부정하고, 저 너머의 구원이 아닌 지금 여기 서 있는 자리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대승불교 정신이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진리를 찾으려면 확고부동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명제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철학사에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불교는 데카르트에게 묻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한다면, 고로 ‘나’라는 존재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려는 것이 불이사상이다. 존재를 만듦으로써 비존재를 만들고,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너’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만들어 내는 생각과 마음의 허상을 지적한 불이사상의 출발점이 곧 무아사상(無我思想)이다.
무아(無我)가 단순한 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고 자비(慈悲)라는 실천윤리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관이 있어 비로소 가능해진다. 대승의 정신이란 바로 불이적 세계관의 실천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원효(元曉) 대사는 원융회통(圓融會通)과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주장했고,
의상(義湘) 대사는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이라는 원융무이상(圓融無二想)의 불이사상(不二思想)을 천명했으며,
고려의 균여(均如)와 지눌(知訥)ㆍ보우(普愚) 그리고 조선의 서산(西山) 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 1600년을 면면히 관통해온 불이사상은 선(禪)과 교(敎)를 하나의 이치로 보는 서산대사 휴정(休淨)의 융화회통(融化會通)사상을 성립시켰다.
우리 불교는 신라 불교 이래로 끊이지 않고 이어온 불이사상이 큰 흐름이 돼, 우리 불교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첫댓글 감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