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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추억으로살지
투탕카멘 - 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파라오로, 재위기간은 기원전 1333년부터 1323년으로 추정된다.
보통 붙여서 "투탕카멘"이라고 읽지만, 정식으로는 투트-앙크-아멘("아문의 살아 있는 이미지")이었다.
3245년간 봉인되어왔던 투탄카멘의 봉인이 1922년 풀리기 직전의 순간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투탕카멘하면 처음 떠오르는 것으로 사실상 모든 부장품의 상징이다.
세기의 발견으로 이집트의 아이콘이 되었다.
황금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파란색 부분도 여러 색상을 갖는다. 가장 진한 색은 눈 주변과 눈썹 부분으로, 이곳은 청금석으로 되어 있다. 다른 파란 무늬는 파이앙스(faience), 터키석, 아마조나이트 등을 활용하여 제작되어 있다. 이외에도 석영, 흑요석, 칼세도니 등이 사용되어 있다
재위시기는 까마득하게 먼 편인데, 그 유명한 고대의 제왕 알렉산드로스 3세와 진시황이 태어나기 무려 1000년도 더 전의 사람이다. 무덤이 밀폐된 것은 기원전 1323년으로, 지중해 건너편에서는 한창 그리스 신화 찍던 시절이다.
이집트의 전통 종교를 거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추앙했던 아케나톤의 아들이자 사위로 본명은 아톤에서 따온 투탕카톤이었으나, 왕위에 오른 뒤 아문 신앙이 복귀되면서 투탕카멘으로 개명했다.
그의 무덤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내 티이의 이름이 적힌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이 머리카락과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미확인 중년 여성 미이라를 대조한 결과 티이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투탕카멘은 원래 근본 자체가 불확실했으나, 여러 비석이나 기록에서 '투탕카멘은 파라오의 아들이다.' 또는 '아멘호테프 3세는 나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었다.
사실 나이로 보아 아케나톤의 아들이 확실했으며, DNA 검사결과 아케나톤의 아들로 정식 확인된 것이다. 즉 상술한 티이는 투탕카멘의 할머니가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미소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는 고인의 형상을 그대로 본따 만들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들 또한 그가 미소년이었다는 사실을 수긍할 도리밖에 없다.
황금 마스크의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조화가 잘된 애잔한 얼굴이다. 실제로 미이라를 기반으로 두상을 만들었더니 미남이었다. 하지만 정밀 측정을 한 결과 본모습은 미남형이 맞지만 뻐드렁니가 있는 애매한 형상이었다. 이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하술한다.
이복누나이자 왕비 안케세나멘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가졌으나, 공교롭게도 모두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산됐다. 후사가 없어 당시 재상이자 실력자였던 아이가 파라오의 자리를 이었다.
그 뒤를 이어 투탕카멘의 장군이었던 호렘헤브가 즉위했고, 그 뒤에는 호렘헤브의 친구 람세스 1세가 19왕조를 개창하고 즉위한다.
그의 치세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앞서 서술한 대재상인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걸로 전해진다. 10살 때 즉위해서 배다른 누나 안케세나멘과 결혼했다.
그의 개명과 아톤 신앙을 버리게 된 것도 아이가 종용한 탓이라는 설이 있다.
이토록 그의 치세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19왕조를 개창한 람세스 1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아문-라 신앙의 파괴자인 아케나톤의 역사를 없애기 위한 일환으로, 그의 소생인 투탕카멘과 그의 뒤를 이은 아이의 기록을 지워버리고 호렘헤브의 통치 기록만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단순한 기록 소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소실이라고 보기엔 또 무리가 있는 것이, 아비도스 왕명록을 기록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세티 1세는 기원전 1358년에 태어나서 1279년에 사망한 인물로, 투탕카멘이 제위한 1333년에는 이미 25살 정도의 건장한 청년이었고, 아버지인 람세스 1세는 고위사제이자 군사령관 호렘헤브의 친구였다.
따라서 그런 그가 투탕카멘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복잡한 후계 문제
한편 투탕카멘의 요절 후, 아이는 고령의 나이에 투탕카멘의 미망인인 안케세나멘과 결혼해서 제위를 이었으며 고령의 아이가 2년여만에 사망하여 호렘헤브가 그 뒤를 잇고, 아문-라의 사제였던 람세스 1세가 뒤를 이어 19왕조를 열었다.
이렇게 추정되는 것은 1920년대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이름이 같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결혼의 의미다. 물론 안케센나멘이 아이의 외손녀이므로, 외할아버지와 외손녀의 혈연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 영국의 고고학자 Howard Carter가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고 있다.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로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왕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는데, 히타이트 측에서는 좋다! 내친 김에 이집트 먹자.식으로 제난자라는 왕자를 보냈지만, 이집트 국경에서 사망하고 안케세나멘도 아이 사후 호렘헤브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이와 결혼한 이후에 모든 기록이 사라지기 때문에 단순한 가설일 뿐이다.
결국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고, 훗날 19왕조의 3대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도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제난자가 죽은 직후에도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에 이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고 이집트령 아시아를 공격했지만, 해당 지역은 때마침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병으로 사망하고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암살 의혹
발굴 당시 미이라를 X-선 촬영한 결과 머리에 큰 상처로 보이는 자국이 발견되어, 그의 사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 골절, 즉 암살당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실제로 투탕카멘이 죽은 뒤에 왕위 계승이 영 이상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정밀한 CT 촬영에 의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두개골 골절 같은 것은 아예 발견되지 않았고, 두개골에 나있는 갈라진 금은 죽었을 당시에 아직 미성년자여서 두개골이 채 다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X-선 촬영 당시에 나타난 자국 자체가 허상이었다.
이후 CT 촬영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다리에 심각한골절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이걸 사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항생제가 없었던 당시에는 이런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한편으로는 워낙 부친인 아케나톤이 유전적 기형 의혹을 받고 있다 보니, 그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 유전병으로 인해 원래 몸이 허약했고, 그래서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병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위의 다리 골절도 그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 말라리아를 사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미이라를 연구한 연구팀이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인기생충인 열대열원충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실제로 말라리아로 인해 사망할 경우, 독특한 증상 때문에 독살당한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미이라를 조사한 결과, 그는 구개열로 인한 언어 장애자였고 왼쪽 다리의 내반족과 오른쪽 다리의 뼈 질환으로 걷기가 힘든 전형적인 장애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집트 왕조가 대대로 부녀간, 의붓남매간 근친혼을 장려한 결과, 열성 유전자가 계속 내려오면서 이런 비극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여러 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이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서 복합적으로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그 외에 발의 장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닌 전투 중에 입은 상처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투탕카멘이 많은 전투에 참가했으며 무릎의 골절상 주위에 파상풍과 염증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런 상처를 약간 골골한 투탕카멘이 전투 최전방에서 지휘하다 적장에게 당한 것이라기에는 무리가 있고 복잡하게 뒤엉켜 싸우던 상황에서 적 졸병에게 다친 것이라고밖에 추정할 수가 없는데, 청동기로는 파상풍을 일으킬 수 없으므로 철기를 사용하던 히타이트와의 전투에서 다쳤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것이 히타이트 철기 생산량이 극도로 적었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사후
객관적으로 보면, 투탕카멘은 자손도 없었고 너무 어려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탓에 그야말로 무게감 없는 파라오였다.
20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그 대발견이 없었다면, 투탕카멘을 기억하는 것은 이집트의 역사학자들정도밖에 없었을거고, 그들도 18왕조의 후반기의 재위기간이 꽤 되었지만 별 비중이 없는 파라오로 간단히 짚어넘기는 수준에 머물렀을거다.
중국의 역사를 보자면, 어려서 죽은탓에 시호도 받지 못한 소제(小帝)같은 것들과 비슷한 수준의 비중이다.
고고학의 전설
그러나 1922년 11월 4일에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KV62)이 거의 도굴되지 않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거의'라고 한 이유는 투탕카멘의 무덤도 도굴당한 흔적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입구에 봉인을 3개 해놓았는데, 2번째 봉인은 발굴 당시에 이미 뚫려있던 것이다.
투탕카멘 왕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도굴꾼이 침입했는데, 무덤을 지키던 경비대에 걸려 미수로 끝났으며, 마야라는 관리와 사제들이 다시 무덤을 봉인했다는 기록이 전해져온다.
여러 유물에서 도굴의 흔적이 남아있고 방들이 대체로 어지러져 있었지만, 그 정도가 타 파라오들의 무덤과 비교할 수준이 못 된다.
2번의 도굴 시도에서 도굴꾼들은 가벼운 귀금속들과 귀한 연고 정도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무덤에서 발견된 석상에서는 귀금속이 모두 벗겨져 사라진 채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사람들은 영국의 하워드 카터와 그의 재정 후원자, 카나본 경 (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1866~1923)이다.
이 무덤을 발굴하기 전에도 하워드 카터는 카나본경의 후원을 받아 다수의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이미 도굴된 무덤들 뿐이라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카터는 인근 무덤에서 투탕카멘의 장례식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 조각들을 찾아내어, 투탕카멘의 존재와 더불어 그의 무덤이 왕가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전에 발굴을 하던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제 왕가의 계곡에는 무덤이 없다!라고 선언하고 발굴권을 넘겼고, 카터는 이번이 마지막 발굴이라는 부탁을 해 카나본 경에게 간신히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발굴이 세기적인 발굴이 된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투탄카멘의 무덤을 발굴하여 이집트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하워드 카터경에게 감사해야 할것이다.
카터는 람세스 2세와 람세스 6세 무덤 사이에 있던 곳에 주목했는데 이 곳은 수상했지만 그동안 발굴이 없었던 곳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람세스 6세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오두막이 있던 곳이었는데 카터는 이 곳을 파내려 가다가 마침내 무덤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발견한 카터는 도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동시에 내부에 뭐가 있을까 호기심도 들었지만 5년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자신을 믿고 후원해준 후원자인 카나본 경과 같이 봐야한다는 마음으로 꾹 참고 그 날, 카이로로 가서 지병으로 본가에서 요양하고 있던 카나본경에게 전보를 치기 위해 한 걸음에 달려가 전보를 보냈다.
"마침내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을 이루어 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아직까지 봉인이 남아있는 무덤입니다. 카나본 경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재봉인 해 놓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1922년 11월 6일, 하워드 카터가 보낸 전보를 받아든 카나본 경은 서둘러 이집트로 갈 준비를 했다. 비록 카나본 경은 오랫동안 안고 있던 지병으로 인해 오늘 내일 하는 상태였지만, 봉인이 멀쩡한 무덤을 발견했다는 기쁜 소식에,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딸과 함께 이집트로 당시 교통으로 꽤 빠른 3주만에 이집트로 왔다.
당시 카터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짜로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니면 단순한 부장물 창고인지 확신하지 못 하는 상태였는데, 비록 후원자가 있는 상태에서 봉인을 열기 위해 문은 열지 못했지만,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보고 무덤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마침내, 1922년 11월 26일, 영국에서 날아온 카나본 경과 그의 딸, 그리고 발굴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터는 끌을 이용해 통로의 봉인에 작은 구멍을 뚫었고, 그 구멍에 램프를 집어 넣고 수천 년 만에 열리는 무덤의 안을 본 순간...
"뭔가 보이나? (Can you see anything?)"(카나본 경)
"네,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 (Yes, Wonderful things....)" (카터)
과연 하워드 카터가 말한 대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사진에서 보는 화려한 황금 마스크와 투탕카멘의 미이라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덤으로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까지 떠돌았다.
고작 9년을 재위(在位)한 별 볼 일 없는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그 많은 이집트 파라오를 전부 다 제치고,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사실 무덤이 도굴당하면 유명한 왕이라도 후손들이 보기엔 그냥 그 왕일 뿐이다. 그 무덤이 온전하게 후세에 전해지면 그 무덤의 주인은 역사에 대서특필된다.
사실 이 규모가 작고 별 볼일 없는 무덤은 재위기간이 짧고 별 볼일 없는 파라오 투탕카멘에게 걸맞는 것이다. 투탕카멘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무덤은 사실 다른 귀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용한 것이다.
그 때문에 왕에 걸맞지 않게 무덤의 크기가 매우 간소하다. 심지어 19왕조의 재상이었던 라모세의 무덤도 투탕카멘 왕의 것보다 크다.
하지만 투탕카멘은 호렘헤브가 이단자 파라오의 목록에 넣는 바람에 이후에는 존재가 잊혀졌고, 마야라는 관리가 도굴 미수 후에 제대로 봉인을 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무덤 위에는 19왕조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짓기 위한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가 지어지는 바람에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설마하니 집 아래에 무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이걸 찾아낸 카터도 대단한데, 그는 인근 무덤에서 나온 작고 조잡한 유물들을 통해 투탕카멘의 존재를 직감하고 마침내 찾아내게 된다.
사실 시어도어 데이비스라는 자가 왕가의 계곡에서 더 이상 새로운 무덤을 없을 거라고 큰소리치고 발굴권을 카터에게 넘겼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데이비스가 마지막으로 발굴한 무덤에서 고작 2m 떨어진 곳이었다.
그나마 데이비드에겐 다행인 게 카터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데이비스가 죽은 후였다. 어차피 살아있었다고 해도 충격 및 배아파서 급사했겠지만 사실 데이비스가 1914년 이 무덤 발굴을 멈춰야 했던 것도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데이비드에겐 다행인 게 카터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데이비스가 죽은 후였다. 어차피 살아있었다고 해도 충격 및 배아파서 급사했겠지만 사실 데이비스가 1914년 이 무덤 발굴을 멈춰야 했던 것도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15년, 78살로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데이비스의 유족들이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었다.
여담이지만 그의 무덤을 의도치 않게 보호하게 된 람세스 6세의 무덤(KV6)은 정말 화끈하게 털렸다. 사실 이 무덤은 원래 그의 전임자이자 조카였던 람세스 5세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람세스 5세가 요절한 후 람세스 6세가 무덤을 뺏어 확장한 뒤 자신이 사용했는데 이 시기 내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람세스 5세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설도 있다.
람세스 6세의 석관은 도굴꾼들에 의해 박살나고 보물을 찾는다고 뒤집어 놨을 정도로 무덤 내부는 엉망이다. 1898년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에서 발견된 그의 미이라는 얼굴 정면이 도끼로 깊이 찍혀 망가져 있고 몸통은 말 그대로 오체분시되어 없어지거나 훼손된 부위는 다른 미이라들의 부위에서 재활용하여 땜질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참고로 람세스 6세의 박살난 석관 뚜껑에 있던 얼굴 부분은 대영박물관에 있다.
2016년, 투탕카멘의 단검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탈리아 대학(Milan Polytechnic and Pisa University)과 이집트 박물관의 학자들은 이 단검에 대한 성분 조사를 하였는데 운석에서 볼 수 있는 성분이 검출되었다. 이 단검은 운석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집트의 돈줄
만약에 19세기에 이 유물들이 발굴되었더라면, 투탕카멘 유물 상당수는 이집트가 아닌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측은 투탕카멘 유물을 1점도 해외 반출을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정확히는 이집트 당시 카이로 박물관장 이븐 하지 라우드가 결사반대했고, 그는 별별 이유를 대가면서 영국이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감시했는데 지금까지 남은 투탕카멘 왕 발굴 현장 사진이나 미이라를 조사하는 사진을 보면, 반드시 이집트인이 하나씩은 사진에 찍혀있는데, 바로 라우드가 믿고 보낸 감시원들 혹은 조수들이다.
그는 한점 한점마다 죄다 번호를 매기고, 어느 연구현장에서건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이게 모두 남아있는지 세세하게 조사를 한 다음에야, 연구를 끝내고 외국 학자들이 이집트를 나가게 조치를 취했을 정도였다.
그의 활약으로 투탕카멘 유물은 고스란히 이집트에 남아 이집트의 돈줄이 된다. 그렇지만 사재를 털어서 카터를 후원하고 한 푼도 못받은 카나본 경은 안습이다.
1922년 당시 세계적인 화제를 몰고온 투탕카멘 보도로, 영어로 애칭인 투티라는 이름이 유행해, 당시 미국이나 영국에선 갓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투티란 이름을 많이 지어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걸 구경하러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
현존하는 몇 안 되는[29] 고대 이집트 파라오 마스크인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위 사진에 나온)는 해외 전시 대여비용만 해도 400~5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며, 저거 말고도 황금관에서 파라오 마차와 의자에서 온갖 유물들도 각자 대여비용이 세다.
미국에서 열린 투탕카멘 특별 전시회만 해도 대여비용으로 3,000만 달러나 썼다고 한다. 물론 대여한 박물관도 이걸 보고자 찾아온 관람객들과 스폰서들 덕에 그만큼 이득은 건졌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 측의 감시도 엄청났는데, 1996년 하마터면 박물관에서 도난당할뻔하다가 적발된 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