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스를 먹다가 순간 울컥하며 그것을 도로 토해냈다. 한동안 심하
게 기침소릴 내다가 똘망똘망한 내 눈빛을 피하려고 애쓰며 수염하나 없
는 보송보송한 턱을 긁어댔다.
-흠.흠.-
그리고 어색한듯 두어번 헛기침을 하더니 여전히 내가 미동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움찔했다.
(이런 무서븐넘...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짜식-. 조숙해졌구만."
아버진 자신의 민망함을 내 머리를 마구 헤집어 흐트려트리는 것으로 대
신하고는 옆에 반쯤 담겨 있던 레모네이드를 또 한 모금 들이켰다. 그모습
에 나는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아버지의 능청스러운 성격을 봐서는 아무
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말것 같아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건데.
...아버진 의외로 그러면에서는 쑥맥인 걸까?
쿡. 나는 슬그머니 장난기가 들어 더 놀려주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대단히 진지했다.
물론 나는 하려고 했던 말을 꿀꺽 삼키고 아버지의 입이 열리기 만을 기
다릴수 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그런 나에게 힐끗 눈을 돌리더니 그럴줄 알았다는 듯 씁쓸히 웃었다.
"드래곤이란게... 그 위대하고 전지전능한 존재께서는 그런 감정 자체를
모르신다나. 훗. 근데 이상하게도 호기심이 아주 자~알 있고 말이지. 한
인간에 대해서 호기심은 품어도 사랑은 못 품는다는게, 너는 말이 된다
고 생각하니,키옌?"
그는 내게 질문을 했으면서도 그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나 역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창 너머의 환혼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눈을
감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만 나가봐라. 이젠 혼자있고 싶구나."
나는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듣다가 사랑쪽으로
넘어가 버린 화제가 이렇듯 아버지의 기분을 상하게 할줄을 몰랐다. 나역
시 속상하기는 마찬가지 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의 실체를 어
느 정도는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고 있었다.
에베리아 제국 제 2대 황제, 키예프 드 카스토르 에베리아의 회고록 中에서 발췌-
동이 텄다. 새 아침이 밝았다.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빛무리 사이로 하얀 햇살이 들어와 주변의 공터를
희미하게 비추었다. 너무 격렬히 몸을 움직인 탓인지 눈에 들어오는 주위
의 나무 하나가 유난히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휴~~~"
세레스트 성산의 산꼭대기는 완전히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더 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또한...쓸쓸했다. 그래,쓸쓸해. 너무 쓸쓸해.
인간이 아닌 존재와 단둘이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크고 적막한 곳.
해마다 날이 가고 달은 저무는데, 이렇게 바람이 쌀쌀해져 가도 매일 새
로운 태양이 뜨는데, 내가 서 있는 이 높다란 육지의 섬은 왜 이렇게 변
함이 없는 것인지.
주위에 널려있는 전나무들은 너무나도 높고 곧아 이중, 삼중으로 빼곡이
들어서 꽉 찬듯한 느낌을 주는데도..... 그런데도 가끔 나는 어디선가 스
산히 불어오는 남모를 공허함을 온몸으로 느끼곤 했다.
다만... 기분탓일까.
허전한 하늘은 어제와 다를 것 없이 거무튀튀하기만 한데 검을 쥔 두손
에 왠지 힘이 더 들어가는 것 같았다.
수년동안 습관처럼 매일 이렇게 검술 연습을 하면서도 오늘처럼 열성적으
로 한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문득 에르가 생각이 났다. 말도 안되는 이
유를 붙여가며 독하게 검을 휘드르곤 했던 나의 당찬 친구가. 지금의 나
역시 그에 못지 않겠지.
아니, 보통사람의 안력으로는 도저히 분간할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이런 잡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 아직도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건가.
즐거운 추억에... 나는... 나는 그냥 픽 웃어버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
게 황급히 웃음을 거두었다. 몇년 만에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어색해져
버릴만큼 나는 메마른 삶을 살아 왔던 것일까.
-짝짝짝짝짝짝짝-
뜬금없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별로 큰소리도 아닌데다가 왠지 힘차고
경쾌해서 귀에 그다지 거슬리진 않았다.
다만 갑작스런 낯선소리에 나는 하던 짓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카이야님이 격려차 친 박수라고 생각할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자신보다 한
참 아래의 솜씨를 매일 질리도록 보고서도 새삼스레 박수를 칠만한 분이
아니었다.
"........"
그럼 누구란 말인가?
나뭇가지가 바람에 스끼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멀리까지 숨소리가 들릴만
큼 조용한 곳이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나의 의아함은 얼마 안있어 너무 간단하게 풀려버렸다.
"이야~~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그동안의 발전이 너무 눈부신걸? 옛날에
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너 못 쫓아갈것 같아. 그동안 카이가 특별지도
를 해줬나 보지? 그치만 젤 친한 친구의 기척도 못 알아내서야 쓸모가 있
겠어?"
고개가 저절로 꺾어져 돌아갔다.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매일 꿈속에서 듣던,
그러나 십수년전 내손으로 직접 거두어 버렸던 그 목소리.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었던,
그러나 딱 한곳을 제외하고 그 어느 곳에서도 들을수 없었던 바로 그 목소리.
머리가... 머리가 마비되 버린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순간 내눈에 들어온 것은 눈을 가볍게 찡긋거리며 높은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한 소년이었다. 맑은 물망초빛 망토를 펄럭이면
서 어깨까지 닿는 곱슬곱슬한 은회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아이. 그리고
깔끔히 갈무리된 듯한 뽀얀 빛에 감싸여 그 누구보다 순수한 얼굴로 생글
거리는...
아, 숨이 턱 막혔다.
"에이~~~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내 얼굴 닳겠다,닮겠어. 네겐 그
런 얼빠진 표정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 칫- 우리가 뭐 오늘 처음 만났
어? 너 내 얼굴 첨 봐? 아... 그러고 보니까 좀 오래간만이긴 하다. 그지?"
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멋쩍게 씩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잔뜩 굳어진 나의 태도따윈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커다란 잿빛 눈망울에 살짝 장난기를 머금고 나의 위아래를 쓱 훑었다.
"킥- 완전히 아저씨가 됬잖아? 난 설마 그 미끈했던 네 이마에 이렇게 주
름살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 쯔쯧. 그러길래 나처럼 좀 미용관
리를 좀 하지 그랬어. 그동안 무식하게 검만 휘두르며 살아온거야? 그렇
게 재미없게? 카이가 바로 옆에 있었을 테데 이런 덥수룩한 턱수염을 보
고 아무말도 않든. 에그~~~ 내가 끝내 인물하나 버렸구만. 네 나이가 몇
이길래 흰머리가 벌써부터 보이는 거야,응?"
그는 혀를 끌끌 차며 호들갑을 떨었다. 겉으론 무척 자연스러운듯 행동했
지만 내심 곤혹스러운듯 내가 무슨 말이든 꺼내 놓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에 어긋나게 나는 좀처럼 입을 열수가 없었다. 뭔가가
꽉 막힌듯 목소리가 걸려서 입밖으로 튀어 나오질 않았다.
얼마나 이순간을 고대해 왔는데.
매일밤 꿈속을 헤메며 너한테 해줄말을 얼마나 많이 가슴에 차곡차곡 쟁
여놓고 있었는데.
그러나 머리가 텅 비어버린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 얼굴을 보고, 또 보고, 다시 또 보고...
그리고 복받치는 감정에 짓눌려 새파랗게 질려버렸을뿐.
".........."
".........."
그 작은 아이 역시 아까의 유들유들한 짖궂음을 어디에다가 집어던졌는
지 뻣뻣하게 서서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큼지막한 흐린하늘
빛 눈동자는 한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서 서서히 투명한 그 무언가
에 젖어 가고 있었다. 점점 내 가슴이 요동을 쳤다.
".....딜티....."
아... 달랐다. 만나서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잔뜩 목이 메여 발음도 정확하지 않는 그 목소리에, 내 뺨에는 그동안 알
게 모르게 참고 있었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마구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는 내 목덜미를 와락 끌러 안으며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도
록 힘껏, 정말 힘껏 껴안았다.
".....카류....."
나의 친우. 나의 주군. 너는 나의 삶의 의지의 원천.
내가... 내가 어떻게 너를 못 알아 볼수가 있을까.
수도없이 껴안아 봤던 이 여린 몸을 부둥껴 안고도,가끔가다 몰래 훔쳐
보았던 너의 뜨거운 눈물이 지금 내옷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데도
어떻게 지금 네가 아님을 부정할수 있을까.
"으흐흑--"
틀림없었다. 정말 틀림없었다.
오랜세월 그토록 그리던 나의 친구는 지금 내품 안에서 울고 있는 이 소
년이 틀림없었다.
모든것을 다 알고,또 이해하기에 서로를 확인하는 말 따윈 입밖에 거론
될 가치조차 없었다.
백만번의 설명보다 단 한번의 포옹이 내게 있어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
쳐주었다.
"...보고...싶었어... 정말...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딜티..."
카류는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헐떡였다. 금방이라도 숨
이 넘어갈것처럼 흐느꼈다. 카류의 떨림이... 내 가슴까지 느껴졌다.
아까의 그 껄렁껄렁한 말투따윈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한 울음였다.
"알아... 다 알아,카류.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돼."
나는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더욱 세게 카류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나도... 정말 많이 보고싶었어..."
우리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눠주었다.
그동안 못 껴안아 봤던 것을 한꺼번에 원없이 푸는것 처럼.
그후로 오랫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더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그래, 겉으로는 간간히 흐느낌만이 들려올 뿐이었지만 우리
는 그 어느때보다 많은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입밖에 나오는 말로서는 십수년간의 엉킨 회포를 풀어내기엔 너무 역부족
이었으니까.
날이 가고 달은 저물고... 오늘도 새로운 태양이 떴다. 나의 모든 것을
변화 시켜줄 거라는 확신을 가득 담아서, 그 어느때보다 이글이글 타오르
는 나의 태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