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윈의 왕성은 요 근래 들어 부쩍 시끌벅적해졌다. 국왕의 기품에 어울리는 차분한
정갈함과 우아한 화려함에 어울리는 조용함이 필수 조건인 왕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류였다. 당연히 그 기류의 중심에는 이 나라의 재상과 이국의 왕자가 버티고 있었다.
"스승님, 대체 저런 자와 어떻게 알게 된 거에요?"
"후후. 가르쳐달라고 애걸해도 안 가르쳐줄 거란다, 꼬마야."
"꼬마라고 부르다니 너무 예의가 없군요. 그리고 물어봐달라고 애원해도 저 역시
묻고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잔뜩 신경줄을 돋운 채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며 서로를 노려보는 카이와 블런트의
말다툼에 카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들어서만 벌써 몇 번째 내쉬는
한숨인지 모르겠다. 카이와 블런트의 말다툼은 오늘도 역시나였다. 하루도 조용히
넘어갈 날 없는 이 두 사람의 신경전으로 인해서 왕성 안의 분위기는 몰라보게
시끄러워졌다.
주변인들이 몸을 사릴 정도로 불꽃 튀기는 신경전의 원인은 당연히 카류였다. 이젠
국왕인 루브조차도 두 손 들고 포기한 상태라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운데 낀 카류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양 팔에 각기 매달려 오는 것만으로도
무거워서 버티기 힘든데다, 말다툼이 한 번 일어날라 치면 그 따끔거리는 스파크를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거냐구우∼'
묘한 데서 둔감한 카류는 아직까지도 왜 카이와 블런트가 다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가 형도 그래. 내가 왜 그러냐고 물을 때마다 보이는 그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은 뭐냔 말야. 딜티까지.'
입을 삐죽이 내민 카류는 그냥 포기해버리기로 했다. 집착할수록 더욱 괴로운 법.
아예 그러려니, 하고 신경 끄는 편이 앞으로 지내는 데에도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
되었다. 그래도 지금의 상황이 마냥 행복한 카류였다.
'오늘도 여전하군.'
열매 맺힌 가지마냥 주렁주렁 양 옆에 한 명씩 나란히 꿰차고 들어오는 카류를
보며 루브는 속으로 웃었다. 요즘 들어서 마냥 활기가 도는 카이의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예전의 침울했던 분위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카이 뿐만이 아니었다. 미르도 키옌도 세라도, 더불어 루브 자신까지도 모두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진짜 행복을 이제서야 되찾은 듯한 느낌이다. 비록 그 때
카류를 죽이려 했던 소녀의 일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그 일과 행복은 별개였다.
어쩐지 귀족들도 요즘 들어선 카류에 대한 불만이 수그러든 듯해 이래저래 루브
에게는 좋은 일들뿐이었다.
루브는 흐뭇한 시선으로 카이와 블런트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열정을 띤
카이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곤 기대조차 안 했었다. 그러나 둘의 신경전을
지켜보던 사이 어느새 루브는 침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상대는 확실한 카르틴의 제2왕자였다. 카르틴 왕국과 아르윈 왕국의 사이는 아직
까지도 매끄럽지 못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루브를 침울하게 만드는 요인은 다른
데 있었다.
"미안하지만 블런트 왕자께선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겠소? 카류에게만 말해야 하는
사안이 있소."
불만이었는지 블런트가 입을 삐죽이 내밀며 싫다고 의사를 표명하려 했으나, 카류의
손짓 한 번에 금방 마음을 바꿔먹고 알현실을 나가주었다. 이제 알현실 안에는 과거의
형제들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루브 형?"
꼬옥 매달린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카류가 밝게 물어왔다. 그의 밝은 목소리를
듣는 루브의 가슴이 쓰라렸다. 저렇게 웃고는 있어도…….
"카르틴에는 언제쯤 돌아가야 하니? 카류."
웃고 있던 카류가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카류뿐만이 아니었다. 품에 안긴 채 웃던
카이도, 근처에 선 키옌과 미르와 세라도 굳어버렸다. 루브가 쓰게 웃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침울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의 카류는 카르틴의 요직에 앉은 인물이었다. 태어나기도 카르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언젠가는 다시 카르틴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간다면 좋겠지만, 카르틴에서 블런트가 와버린 이상 그것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아. 맞아. 그걸 잊고 있었구나."
얼버무리는 카류의 대답이 루브를 슬프게 만들었다. 카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미르가 시무룩해져서는 루브에게 물었다.
"그냥 카류를 여기서 살게 하면 안 될까, 루브 오빠?"
"안 된다는 건 미르 너도 잘 알잖니."
"하지만……."
뭔가를 더 덧붙이려는 듯했지만 결국 미르는 그대로 말문을 닫아버렸다. 반박할
여지를 찾을 수 없었다. 카류가 카르틴의 사람인 건 분명했으니까.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카르틴의 국왕도 카류의 일을 전부 알고 있다고
카류가 그랬었잖아! 우리가 나서서 부탁하면 될 거야!"
흥분한 키옌이 냅다 루브의 말을 반박했다. 미르가 금세 다시 환해졌지만 루브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키옌의 말을 부정했다.
"불가능해. 카류는 지금 두 왕자의 가정교사니까. 게다가 궁정마법사이기도 하지.
우리 모두가 나서서 그에게 부탁한다는 건 더더욱 안될 말이야. 그건 우리 아르윈의
위신을 카르틴 앞에서 접어버린다는 뜻이니까. 귀족은 물론 백성들도 모두 나서서
반대할게 뻔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루브 오빠? 이제 겨우 카류랑 같이 행복하게 살게 되었는데
카류가 돌아가야 한다니……."
세라의 큰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눈물을 흘리려는 그녀의 눈을 본 카류가 당황해서
세라에게 다가갔다.
"세라 누나, 울지 마."
"흑, 카류……. 가지 마, 카류."
"다시는 널 의심하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 곁을 떠나지 마. 카류야."
마음약한 세라와 미르가 이내 울음을 터뜨려버렸고 당황한 카류는 그녀들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카이 또한 울먹거리는 게 울음을 터뜨리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키옌도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카류의 곁으로 모두가 모여 있었다. 미르와 세라는 여전히 카류의 품에 안긴
채 울어대고 있었고, 카이와 키옌, 루브는 곁에 서서 카류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품에 안긴 미르와 세라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류가 멋쩍게
웃었다.
"꼭 옛날로 돌아간 거 같다. 내가 옛날에 동화 많이 들려줬었잖아. 그 때랑 똑같아."
"치잇, 그게 언제적 얘긴데……."
우는 와중에도 미르는 곱게 눈을 흘기는 걸 잊지 않았다.
"울지 마. 이젠 환생이라는 걸 믿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 카류는 콧잔등이 시큰
해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자신마저 운다면 걷잡을 수 없는 눈물바다가 만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죽어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뭐, 지금도 그렇지. 카르틴으로 돌아가더라도
정기적으로 여길 찾아오면 되잖아? 형들이랑 누나들은 여기에 계속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보고 싶어진다면 내 이름을 불러. 당장 달려올 테니까.
날 보고 싶을 때 내 이름을 부른다면, 내가 그 곳에서 형들과 누나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야."
"카류……."
"알았지? 자꾸 울면 누나들 얼굴 보기 흉해진다? 하나도 안 예쁠걸."
"난 울어도 예쁠 거라고 어느 시인이 그랬단 말야."
세라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 말에 키옌이 토할 것 같다는 시늉을 했고 카류는 그냥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이 행복으로 가득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만큼 행복
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일라트는 새로이 낀 얼굴 하나를 묘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스케인이
데리고 온 청년은 그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세미르였다. 학교에 다녔던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카류의 곁에 언제나 함께 있던 패거리의 한 명이었다.
'폐왕자의 사형 이후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저택 안에 틀어박혀 있던 저
사람까지 가담할 줄이야.'
이상하게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당시 폐왕자와 유독 친했던 인물들은 내전 당시
모두 그의 편에 가담했었다. 내전이 종식된 후에도 그 사실은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강제로 국왕의 왕비가 된 히노 혼 리아는 '절대 웃지 않는 왕비님'으로 백성들에게
통했고, 에스문드 백작과 트로이 후작가의 '비운의 장남'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물론 일라트는 세스케인으로부터 그 둘이 카르틴으로 건너가 요직을 꿰찼다는 귀띔을
들었지만 그 사실은 어디까지나 타 귀족들에게는 비밀사항이었다. 거대 상단들도
아르윈과 하등의 관계없는 남남이 되어버렸고 생명의 궁에 소속되었던 대부분의 마법사
들까지 모조리 잃어버렸다.
안타까워해야 정상이겠건만 일라트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만약
그들 중 누군가 한 명이 폐왕자에게서 다시 등을 돌렸다면 일라트는 평생 그 사람을
경멸했을 터였다. 아직도 동경의 대상이 주는 영향력은 유효한 듯했다.
비록 저택으로 돌아왔다지만 일체의 행동 없이 죽은 듯 저택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세미르 또한 변하지 않을 폐왕자 편에 속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회의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폐왕자와 똑같은 카르틴의 사절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에.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나 보군. 나는 당신 또한 변하지 않을 그의 편으로 보았었는데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건가?'
그러나 일라트는 이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에 일라트는 사무적인
말투로 보고를 시작했다.
"어떻게 귀족 연합을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마쳤습니다. 군사적인 기반은 후르
부크 백작과 함께 상의하여 결정했습니다. 일단 이 귀족 연합의 정치 책임자는
트로이 후작으로, 군사 책임자는 세스케인 백작으로, 경제 책임자는 저로 정했
습니다."
트로이 후작은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군사는 진작부터 세스케인에게
일임하기로 생각했었고 경제 분야는 별로 관심없는 사안이었다. 권력과 직결되는
정치 부분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귀족들을 경악시키
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우리 귀족 연합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르윈 왕국의 안전과 발전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왕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인 카르틴의 사절 카류리드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국왕 폐하를 비롯하신 왕족분들께서 그를 감싸고 있으므로 암살은 불가능
합니다. 따라서 - ."
기대와 긴장에 찬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일라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나서, 엄숙하게 선언했다.
"우리 귀족 연합은 군사를 모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합니다."
"뭐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이시스 백작!"
당황한 귀족들이 웅성거리며 일라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반면 트로이 후작은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고 세스케인 또한 당연하다는 듯 작게 수긍한다는 동작을
보였다. 세미르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그 말은 곧 반역을 하겠다는 뜻 아니오!"
"반역이 아닙니다!"
갑작스런 일라트의 고함에, 그에게 대들었던 귀족이 찔끔 놀라며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던 일라트의 고함에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일라트가
매섭게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반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국왕 폐하께 우리들의 뜻을 좀 더 강력하고 분명하게 전달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모두 입을 모아 권고함으로써 우리의 요구를 전달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국왕 폐하의 뜻은 완강합니다. 여기 계시는 트로이 후작과
세스케인 백작께서 여러 차례 간언을 드려도 소용없던 일입니다.
게다가 세스케인 백작은 사사롭게는 국왕 폐하의 처남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 폐하는 세스케인 백작의 간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드리기엔 세스케인 백작께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블라디미르 왕녀님께서도 마찬
가지의 태도를 보이고 계십니다.
더 이상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군사를 모아서라도 우리들의 뜻을 강력히
전달해야 합니다."
귀족들이 잠잠하게 수그러들었다. 일라트가 진정된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작위와 재산에 따라 자금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들과 백성들을 설득하는 일은
저와 세스케인 백작, 그리고 몇몇 분께 맡기겠습니다. 제가 지목하는 분들께서는
은밀히 지시하는 소문을 퍼뜨려주십시오. 물론 이 소문이 아르윈의 전역을 돌아도
국왕 폐하나 다른 왕족분들의 귀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해야 합니다."
그 뒤로도 계속된 회의는 두세 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끝났다. 회의가 끝나 자택으로
돌아가는 귀족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단순히 긴장만 하는 귀족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귀족, 의심어린 얼굴로 트로이 후작을 힐끗힐끗
주시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안 돌아가십니까?"
세스케인이 돌아간 뒤에도 남아있는 세미르를 본 일라트가 나가려다 말고 의아한 듯
물었다. 트로이 후작조차 머리를 식히겠다며 나간 뒤라 더 의아했다. 세미르는 일라트의
질문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서서 세미르의 대답을 기다리던 일라트가 결국 포기한 채 곁을 지나치려는
참이었다. 세미르가 희미하게 물었다.
"카르틴의 사절은 결국 어떻게 처리하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 "
세미르의 표정을 살피던 일라트가 답했다.
"죽이게 되겠지요. 제2왕자만 인질로 잡으면 되니까, 선전포고의 뜻이면 충분합니다."
"그를 죽이는 일……내가 해도 되겠습니까."
"?"
뜻밖의 말에 놀란 일라트가 홱 돌아섰다. 어느새 세미르는 꼿꼿이 서서 일라트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에게서 알 수 없는 광기가 느껴지는 듯해 일라트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