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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 5 얘들아 - 요 21: 10 지금 잡은 생선
요 21: 5 얘들아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
얘들이라고 부르신 예수께서는 친근감을 더해주는 애칭으로 불렀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물고기가 없는 것을 아시고서도 물었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갈린다.
혹자는 '어! 여보게들!'의 뜻으로 보거나(Robertson) 또 어떤 학자는 '젊은이들!'의 의미로 본다. (Lenski).
현대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Barrett).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애들아'(Children, RSV)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애정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9절).
2]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18: 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라기온'(*)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와 '....와 함께'를 뜻하는 '프로스'(*)가 결합 된 것으로 '떡과 함께 먹는 양념'(특히 생선과 함께 요리함)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Robertson).
그러므로 본문의 '고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3] 대답하되, 없나이다.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은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요 21: 6 오른편에 던지라 -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이 장면에서는 갈릴리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을 테스트하려고 했다거나 그들의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배 오른편) 고기가 가는 길을 아시고 가르쳐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밤새도록 던진 그물을 그저 한 번 더 던져보라는 것이었다. 실망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네 말대로 오른편에 한 번 더 던져보아라. 너희는 할 수 있다'는 위로와 힘을 주시는 말씀이었다.
아마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순간 힘이 솟아오르며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1]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때 바닷가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그물을 던졌다.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 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
Ⓑ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그러한 추측은 본 절에 접근하지 못하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 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오른쪽(*, 뎌시오스)이라는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가 '행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2]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주님의 명령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3]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 여퀴에인)는 말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6: 44; 12: 32),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 요 6: 44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요 12: 32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 때 제자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대응했을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을 때 그들은 놀라우리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 수 있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그들의 능력의 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그것은 수년 전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처음 부르실 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때 그는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하며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
오늘 디베랴 바닷가의 사건은 수년 전 그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나타낸 사건들이었다.
요 21: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1]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사도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했고,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은 하나의 이적이었다.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 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2]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의 행동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20: 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 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옷을 벗고 있었던 것은 고기를 잡기 위해 편안한 복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러 그는 헤엄치고자 했다. 배가 서서히 육지에 다다르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3]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수영을 하려면 옷을 벗고 있는 상태가 편안한 것인데도 그는 옷을 다시 입었다. 이것은 예수를 만나기 위한 그의 예의로 옷을 입은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5절 주석 참조).
요 21: 8 작은 배를 타고 -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
다른 제자들은 짧은 거리이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어 고기를 옮겼다.
1]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오십 칸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공동 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2]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베드로를 제외한 제자 중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 절에서(6절) 밝힌 바대로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 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로이아리온'(*)은 '플로이온'(*)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에 밑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6: 17, 19, 21, 22, 24),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리킨다고 본다. (Barrett, Robertson).
요 21: 9 숯불이 있는데 -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왔다. 그들이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있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 두셨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 지칠 대로 지쳐있는 제자들을 위해 마련한 예수님의 이 아침 준비는 제자들이 감동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1]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느라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配廬)를 보여주신다.
2]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15절 주석 참조), 소명을 부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15-19절).
요 21: 10 지금 잡은 생선 -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시키신 것은 예수께서 마련하신 고기가 부족해서라고 보기 어렵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신 분이(요 6: 1-13) 부족하게 준비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잡은 고기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에 대한 축복과 교훈을 주고자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 생선의 부족 때문이다.
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L. Morris).
Ⓑ 잡은 생선을 처리하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6: 1-13),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