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을 받으면
김 상 립
문인들에게 제일 많은 게 책일성싶다. 월간이든, 계간이든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문학전문지 이외에도, 지인들이 새로 책을 발간하게 되면 인사치레로 한 권씩 보내주니 쌓이는 양이 꽤 많을 터이다. 그래서 이사를 가게 되거나 대청소를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읽지 않는 책을 버리게 된단다. 한치 앞도 모른 채 험한 길을 떠나야 하는 이런 책들이 주인 손에서 제대로 읽히기라도 했다면 다행일 텐데,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고 한 쪽 구석에 잠자고 있다가 불시에 버림을 받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간혹 원로수필가들을 만나면‘이젠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건강도 여의치가 않은 데, 후배들이 보내주는 책이 너무 많아서 난감하다’는 얘기를 더러 하신다. 함부로 버리자니 미안하고, 다 읽어보자니 불가능하여, 그냥 한 쪽에 쌓아두게 되니 하시는 말씀일 터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 수필가들 중에서 책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책이 잘 팔리지 않고 읽히지 않는 세상이 된지도 수 십 년이 되었다. 더욱이 지금은 손 전화 하나로 온갖 정보를 다 읽을 수 있으니, 젊은이들일수록 굳이 종이 책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걸 잘 알면서도 수필가들은 열심히 책을 발간하고,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며 지인들에게 책을 나누어 준다.
작가라면 나름대로는 온갖 정성을 기우려 좋은 글들만 뽑아서 정성껏 손보아 작품집을 발간할 것이다. 또 책을 지인들에게 보내주는 작업도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그와 같은 노고를 생각하면 보내주는 신간서적 한 권의 무게가 어찌 가볍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수필집을 받으면 무조건 고맙고 기분이 좋다. 내가 이 나이에도 아직 잊히지 않은 작가라는 사실이 더 행복하다. 그래서 일단 책상 앞에 앉아 나중을 생각해 겉봉에 적힌 주소를 따로 메모해두고는, 가위로 봉투를 자르고 조심스레 책을 꺼낸다. 제일 먼저 책의 겉모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자세히 살핀 다음 집중하여 서문을 읽는다.
서문 속에는 작가의 정신과 혼이 배어있다. 또 책을 내게 된 배경이라든지 글을 쓴 목적도 들어있고, 책을 통한 희망사항도 엿보인다. 서문이 책으로 들어가는 현관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흥미가 떨어진다. 서문을 읽고 그 사람이 떠오르고, 그의 삶이 보이면 책 읽기가 성공할 예감을 받는다. 그래서 짧은 시처럼 쓴 것이나 차별화를 노리고 지나치게 멋을 부려 적어놓은 서문은 썩 당기지 않는다. 다음으로 목차를 보며 읽고 싶은 감이 오는 제목 옆에 연필로 체크를 한다. 완성된 책을 펼쳐 한 눈으로 보게 되면, 글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다행이 시간 여유가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읽는다.
나는 문장의 표현기법이나 글 전체가 가진 문학성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하며 읽지 않는 편이다. 그가 창작수필을 썼던지 서정수필을 썼던, 또는 에세이처럼 작품을 만들었던 간에 나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다. 다만, 얼마나 진솔하게 쓰여졌는지, 얼마나 마음 깊은 곳을 울려서 기록했는지를 집중하여 살핀다. 다행하게도 작품에서 그 사람의 품격이 느껴지고, 독자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찡한 감동이 있으면 나는 만족한다. 그러나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여러 수필집 속의 글들과 차별화된 작품이 잘 보이지 않거나, 작가만의 특징이 없어서 개성을 느낄 수 없으면 그만 맥이 빠진다.
만일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이 나오면 아예 책장을 반으로 접어둔다. 특히 첫 수필집을 발간하는 작가에게는 무조건 선배로서 각별한 용기를 주고 앞날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여하튼 책을 다 읽었던, 반쯤만 보았던 간에, 내 마음속에서 읽기가 끝난 책은 서가에 가서 꼽히고, 그렇지 않은 책은 내 책상왼쪽에 놓인 탁자 위에 둔다. 거기에는 문인협회를 비롯한 문학단체에서 보내주는 책과 구독하는 수필전문지, 동료 수필가들이 보내주는 책들이 정돈되어 읽혀질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급속한 시대적 변화를 고려하면, 글의 길이나 소재의 자유스러움, 체험의 현실성이나 다양성 등에서 수필이 미래문학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본다. 이런 사정인데도 문인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다른 작가가 일부러 보내준 수필집인데도 제대로 읽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만일 여러 작가들이 타인의 작품집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면, 자기가 책을 내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하여 책이 더욱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수필은 물기 없는 토양 위에 뿌려진 씨앗처럼 제대로 자랄 수가 없을 것이다. 암만 좋은 작품들이 실린 우수한 수필전문지들이 수두룩하다 해도 구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책을 널리 읽힐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기회가 닿으면 기꺼이 구독도하고, 하다못해 글 쓰는 사람끼리라도 서로 책을 사주는 풍토가 마련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매일 수필을 쓰는 일도 그렇지만, 남의 수필집을 열심히 읽는 것도, 내 수필집에 마음을 담아 보내주는 일도, 또 수필가를 아끼고 존중하는 행위도 모두 수필사랑이라 생각한다. 주변에는 수생수사(隨生隨死)를 외치는 분들도 적지 않고, 실제 수필사랑이란 문학단체를 만들어 열심히 운영하기도 하니 고맙고 힘이 나는 일이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수필을 사랑한다고 자부하지만, 수필은 단 한 번도 내게 와서 찰싹 안겨본 적도 없이 늘 일정한 거리를 둔다. 손이라도 한번 잡으려 다가서면 저만치 물러나고, 섭섭하여 토라져 있으면 어느새 슬쩍 다가와 있다. 이렇게 밑지는 밀당을 계속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수필의 허락도 없이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시작한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싶어서이다. 오늘도 나는 지인이 보내준 신간 수필집을 받고 환한 미소를 짓는다. 진정 수필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2022년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