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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종려주일설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장 45-5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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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 주일이고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수 많은 군중들 사이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시고 십자가 고난과 희생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종려 주일과 고난 주간은 예수님의 마지막 가신 길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붙잡고 한 주간 고난 당하신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시고 구원의 은혜 앞에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 주일 이후에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행적에 대해 한 번 설교한 기억이 있어서 찾아 보니 2021년 종려주일에 말씀 드린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종려 주일 이후 일 주일 간의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 보면,
월요일에는, 성전 청결과 무화과 나무를 저주(행함은 없고 형식만 가득)하셨고,
화요일에는, 유대지도자들과 논쟁(5대논쟁-권세,납세,부활,계명,다윗)하셨고,
수요일에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향유 부은 사건이 있었고,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 제자 세족식,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있었고,
금요일에는, 새벽에 잡히시고, 심문과 매질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고,
토요일에는, 무덤에서 안식하셨고, 부활 주일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종려 주일에서 부활절 아침 까지 7일 동안, 군중들의 열렬한 환호와 영광을 받으시고,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기는 배신 가운데서도 나머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고,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기 까지 기도하시고, 처절하게 죽임 당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극적인 장면이 연속 됩니다.
엄청난 반전의 이 극적인 드라마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최대의, 최고의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통곡이 넘쳐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장면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피 한 방울 까지 다 쏟아 내신 주님의 고귀하신 희생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함께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언덕의 이름은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골고다’라는 언덕이었는데, 이 이름은 ‘굴굴타’라는 아람어를 헬라어(그리스어)로 음역한 단어입니다. 골고다가 히브리어로는 ‘굴골레트’이며, 라틴어로는 ‘칼바리아’이고, 영어로는 ‘갈보리’로 불립니다. 골고다는 신약성경 원어인 그리스어 이고, 갈보리는 영어라는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양쪽 옆에는 강도 둘이 함께 매달렸습니다. 44절에 보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요한과 여인들을 제외 하고는 모든 지켜 보던 사람들, 그리고 함께 매달린 죄수들 조차 욕하고, 조롱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서서히 고통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제 3시로, 지금 시간으로는 오전 9시 였습니다. 본문 45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세 시간이 지난 제 육시(정오)부터 제 구시(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흑암 재앙이 3일 동안 나타났던 것처럼 이 어둠은 초자연적인 현상, 즉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현장에 임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어둠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 당하는 현장을 똑똑히 지켜 보며 침묵으로 임재하고 계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죄는 철저하게 외면 하셨지만, 아들의 일하심에는 최후의 순간 까지 함께 해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하심과, 인간이 지닌 죄에 대한 진노하심과,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승리하심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위대한 권능으로 일하시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구경꾼들이 조롱하고 비웃는 가운데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을 향하여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른바 가상 칠언입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것은 용서의 기도입니다.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7). 이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이것은 비탄의 절규입니다.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이것은 고통의 호소입니다.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이것은 승리의 선언입니다.
제 7언의 말씀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제 3시(오전 9시)부터 제 6시(정오)까지 3시간 동안에 1언~3언까지를 말씀 하셨고, 그리고 신음소리만 들릴 뿐 긴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그후 제 6시(정오)부터 제 9시까지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제 9시(오후 3시)가 되자 드디어 예수님이 반응을 하십니다.
46절을 읽어 드립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아멘.
예수님은 정오부터 오후 3시 까지 3시간 동안 단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다가 이 말씀을 포함하여 가상칠언 중 제 4언~7언 까지의 네 마디를 연속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크게 소리질러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비탄의 절규를 쏟아 내셨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뜻하는 ‘엘’ 이라는 단어에, 1인칭 소유격인 ‘나의“라는 접미어가 결합되어,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엘리라고 하지 않고 아람어인 ‘엘로이, 엘로이’ 라고 하셨을 겁니다.
이것을 기록한 마태는 굳이 히브리어인 ‘엘로이’를 굳이 히브리어인 ‘엘리’로 바꾸어서 기록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서가 유대인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피부로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절규하는 예수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어떠한 죄도 없으신 분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하신 전능자 이십니다. 그런데 왜 전능자인 그 분이 이토록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비탄에 젖은 피 맺힌 절규를 쏟아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되지도 않는 상황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으며,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가 깨달아지고, 믿겨지며,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단 하나의 구절을 꼽으라면 저는 이 구절을 말하겠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토록 처절한 외침이, 나의 죄 때문에, 나의 멸망 당할 형벌 때문에 부르짖는 처절함 이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느껴지십니까?
「이방인」 이라는 소설을 썼으며 1957년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 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처절한 고통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은, 매일이 고난이요, 낙심이요, 절망이 넘쳐나는 처절환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뭇 인간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내 고통이 아닌 남을 위해서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신 주님을 기억 한다면, 내 고통, 내 고난, 내 낙심은 충분히 견디고 이겨낼 만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으로 역사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요 은혜의 역사입니다.
부활절을 앞둔 고난 주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을 붙들고 찬양하시고, 깊은 묵상과, 부르짖으며 비탄의 심정으로 절규하는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나의 하나님 이시오, 나의 주인이시오, 나의 왕이시오, 나의 구원자라는 믿음과 은혜가 성령의 감동으로 강력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그로 인하여 내가 지닌 고난과 눈물과 상처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 삶의 능력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 충만의 감동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재난 사고가 일어 나거나 인간애가 상실될 정도의 비정한 사건 들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나? 하나님은 도대체 왜 가만히 계시나?“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일하심을 불신하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내 기도에 응답하셔야 내 하나님 이시고 나에게 무관심 하는 것처럼 무 응답이시면 불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내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필요한 것들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가 ”짠“ 하고 무언를 내주어야만 진짜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물건이나 내어주는 자판기처럼 상대하려는 태도로는 결코 하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나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고 원망하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부르짖고 계실 때 나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에 우리는(나라는) 잘난 인간은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으며 허랑 방탕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넒은 문을 지나서 탐욕과 정욕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내 잘난 맛에 살면서 온갖 자랑과 자존심을 내세우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내 모습이 점점 과물처럼 변해 가는데도 전혀 나를 살피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이런 처참한 지경일 때에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부르짖고 계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부르짖는 아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에 침묵 하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뭐가 더 필요 합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네가 그렇게 안 줬다고, 없다고, 도와주지 않는 다고, 침묵한다고, 나를 원망 한다면, 그토록 잘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게 해 줄까? 네가 가지고 누리며 사는 것들을 다 거두어 갈까?” 라고 하실까 두렵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비탄의 부르짖음은 나를 살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나에게 내려 주신 최상의 은혜요 최고의 선물이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처절한 고통의 부르짖음을 기억하고, 십자가 앞에서 참회와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으며 돌아가신 우리 주님의 고귀하신 희생 앞에, 온전한 감사로 영광 돌리시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 까지 3시간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어둠이 예수님이 갑자기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내시자 주변에서 반응이 일어 납니다. 47~49절을 읽어 드립니다.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엘리 엘리 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엘리야 엘리야’라고 하는 부르짖는 소리로 들었나 봅니다. 그런 중에 거기에 섰던자(아마도 군인) 중 한 사람이 해면(물기를 흡수하는 천)에 신포도주를 적셔서 갈대에 꿰어마시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셨다는 내용이 없지만 병행본문이 기록된 요한 복음 에서는 신포도주를 받으셨다고(요 19:30) 했습니다.
앞서 34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는 쓸개탄 포도주(일종의 마취제)를 마시게 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것은 받아드시고, 어떤 것은 마시지 않았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입에 대신 것은, 시편에 기록 되기를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 69:21)라는 구절을 이루기 위함 이셨습니다.
군인들이 신포도주를 주려고 할 때에 옆에서 다른 사람들(다른 군인이나 혹은 구경하던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라고 했습니다. 신포도주를 주려던 군인처럼 그나마 극히 일부는 일말의 자비가 있었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끝까지 조롱하고 비웃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십자가 최후의 상황속에서도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55,56절) 이들은 그저 참혹한 현장을 지켜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겁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은 큰 소리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던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합창 하듯이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예수님을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분명히 그렇게 합창 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이 광경을 다 지켜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이 신포도주를 주려던 군인, 비웃는 무리들, 그리고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는 여인들 중에 누구에게 가 계실지는 충분히 답이 나와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극한의 고통을 끝내시고 운명하시는 장면입니다. 50절을 읽어 드립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아멘.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을 살펴 보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막 15:37),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비탄의 절규를 하실 때에도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는데, 마지막 영혼이 떠나가실 때에도 크게 소리 지르셨다고 했습니다. 크게 소리 지르신 이 소리는 단발마의 비명 소리가 아닙니다. 가상칠언의 제 6언인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과, 제 7언의 말씀인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하셨습니다. 이 죽음 앞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가슴을 찢고 비통한 심정으로 울던 여인들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지켜 서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정말 입을 열어 말하고 싶다면, “주님! 내 영혼을 오직 주님 손에 부탁하나이다, 주님! 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말만 무한 반복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겸비(겸손하게 낮추다)하며 긍휼(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을 참으로 진실되게 고백한다면 이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신 최후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에게 온전히 의탁하는 진실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기도만이 구원의 은혜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참회와 감사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외침을 언제나 잊지 마시고, 이 말씀과 함께 고난 주간에 진실한 참회와 부활의 소망 가운데 영혼이 소성케 되는 은혜 가운데 지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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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고귀하신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참회와 소망으로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영혼을 책임져 주시는 예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부활의 소망을 품고 인내와 절제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참으신,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